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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총론, 연기가 곧 공이다. 그러므로 무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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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517회 작성일 21-07-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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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01


 부처님의 법은 많은 사람을 거쳐 전달됩니다. 그 가운데 이 중론의 저자 용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석가모니-마하가섭-아난다-상나화수-우바국다-제다가-미차가-바수밀-불타난제-복타밀다-협존자-부나야사-마명대사-가비마라-용수-가나제바-라후라다-승가난제-가야사다-구마라다-사야다-바수반두(세친)-마나라-학록나-사자존자-바사사다-불여밀다-반야다라-보리달마


 이 가운데 보면 구사론, 유식을 완성한 세친도 보이고 그 유명한 달마 대사, 보리달마도 보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중관파, 유가행파로 나뉘어집니다. 중관파를 대표하는 것이 이 중론의 저자 용수이고, 유가행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세친입니다.

 중론의 저자 용수에 대해 알아봅시다. 용수의 현지 이름은 나가르주나로, 산스크리트어 나가르주나의 의미가 한자로 한역되면서 용수(龍樹)가 되었습니다. 150년경에 태어나서 250년 경까지 살았다고 추정됩니다. 용수는 인도에서 중관(Madhyamaka) 사상을 주창한 승려입니다. 용수는 남인도의 바라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했습니다. 젖을 먹고 있었을 때 주위의 바라문들이 네 종류의 베다 성전을 낭송하는 것을 듣고 모두 외웠습니다. 이 정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커서 천문, 지리, 예언, 점술 등 모든 분야에서 통달했습니다. 용수에게는 불법에 귀의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용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환술을 써서 몸을 안 보이게 한 후 궁전에 침입했습니다. 이들은 궁전에 침입하여 궁녀들과 놀았는데 궁녀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왕은 술사에게 범인을 잡을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술사는 만약 범인이 사람이라면 발자국을 남길 것이니 밀가루를 궁전에 뿌려두자고 말합니다. 마침 그 날도 용수와 친구들이 술법을 써서 궁전에 있었는데 세 친구는 들켜 죽임을 당했지만 용수는 왕좌 밑에 숨어있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용수는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 후 용궁을 방문하기도 했고 바라문과 주술을 겨루기도 했고 남 인도의 왕들을 교화시켰습니다.

 이 중론은 원래 근본중송으로 27장(품) 445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근본중송에는 여러 가지 주석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외론은 저자 미상으로 아마 용수 본인이 저술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 다음 청목주가 있습니다. 청목이란 사람이 지은 주석어로 이를 구마라집이 한역하여 중론이 되었고, 이가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론을 가리킵니다. 그 외에 무착의 순중론, 불호의 불호주, 청변의 반야등론, 안혜의 대승준관석론, 월칭의 쁘라산나빠다 등의 주석서가 있습니다.

 27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1장은 네 가지 조건의 고찰을 다루고 있고, 2장은 걷는(가는) 행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은 12처의 고찰을 다루고 있고 4장은 오온의 고찰을 다루고 있으며 5장은 6계의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은 욕망과 욕망을 갖는 자의 고찰을 다루고 있고 7장은 유위법의 생기상, 지속상, 소멸상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8장은 행위자와 행위대상의 고찰을 다루고 있고 9장은 집착의 대상과 집착하는 자의 전후 관계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10장은 불과 연료에 대한 고찰이고 11장은 윤회의 시작에 대한 고찰이며 12장은 괴로움에 대한 고찰입니다. 13장은 모든 행의 진실에 대한 고찰입니다. 14장은 행위, 행위대상, 행위자의 결합에 대한 고찰이고, 15장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고찰입니다. 16장은 번뇌로 인한 속박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에 대한 고찰이며 17장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고찰입니다. 18장은 자기와 법의 고찰이고 19장은 시간의 고찰이며 20장은 인과의 고찰입니다. 21장은 생성과 소멸의 고찰이고 22장은 여래의 고찰이며 23장은 잘못된 견해의 고찰입니다. 24장은 사성제에 대한 고찰이고 25장은 열반의 고찰이며 26장은 12연기에 대한 고찰입니다. 마지막 27장은 나쁜 견해에 대한 고찰입니다. 

 용수는 그 밖에도 여러 저술을 남겼습니다. 육십송여리론, 공칠십론, 회쟁론, 바이달야론, 보행왕정론, 권계왕송, 대승이십송론, 인연심론송 등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정확히 용수가 저술한 것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용수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것들입니다.

 이 중론에 대해서 여러 가지 호칭들이 있습니다. 공의 논리학, 해탈의 논리학, 열반의 논리학, 연기의 논리학, 반 논리학(Counter Logic), 중도의 논리학, 해체의 논리학, 탈이분법의 논리학 등이 있습니다. 이는 중론의 내용을 표현한 것들입니다. 기존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깨트리기 때문에 반 논리학, 해체의 논리학이라고도 합니다. 공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공 사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체는 모두 가짜다.’, ‘무자성이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탈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생각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고정관념에서 해방되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반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번뇌의 불을 꺼 마음과 머릿속이 시원하고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연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연기란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 있다는 것으로, 조건적 발생이나 의존적 발생을 말합니다. 전제된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인을 알면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나’라고 할 수 있는 자성이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들에게서 원인과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연기는 공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론이 반 논리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든 논리를 깨트리기 때문입니다. 중도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론이 흑백 논리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공간을 봅시다.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간이 좁을 것이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간이 넓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기준은 주관적이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다 작다, 나아가 맞고 틀리다도 결국은 완벽한 객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 극단을 부정하게 됩니다. 중론을 해체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해체시키기 때문입니다. 중도를 통해 양 극단을 해체하고 나아가 ‘나’를 해체하여 ‘공’으로 무한한 자비로 나아가는 것이 이 중론입니다. 탈이분법의 논리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중론이 흑백 논리의 이분법을 타파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앞선 중도의 논리학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중론에서 말하는 내용은 바로 “말에 의해서 말을 버리고, 말을 통해서 말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가짜라는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이며 무자성입니다. 여기로 오면 선과 악의 개념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중론을 처음에 배우지 않습니다. 자비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중론이 절대적으로 좋지만,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에게는 중론이 악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논리학에서는 개념->판단->추론의 과정을 거칩니다. 예를 들어보면 사람과 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죽는다.’, ‘비가 내린다.’가 이런 예입니다. 이런 판단을 통해 우리는 추리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우리 머릿속의 생각이 모두 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반 논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중론에서는 이들을 모두 깨트리고 있습니다. 개념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이든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개념이든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실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판단에 대해서는 “4구 판단 각각은 증익, 손갑, 상위, 회론의 오류에 빠지다.”라고 말합니다. 추론에 대하여는 “어떤 추론이든 상반된 추론이 있다.”고 말합니다. 


 중론은 한 단락 한 단락이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어짐으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연기가 공이 됩니다. 대승불교가 기본적으로 표방하는 것이 공입니다. 연기란 존재에 대한 체계입니다. 공은 연기를 깨우치면 알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공은 또한 무자성(無自性)입니다.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똑같은 하나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이 중론의 저자는 용수입니다. 용수가 살아있었던 부파불교 시대에는 모두 각자 주장하는 불교가 있었습니다. 용수가 이를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모두 깨트리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마음으로 중론을 지은 것입니다. 용수에게는 파사 밖에 없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깨트리면 자동으로 바른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수의 말에는 이것이 맞다는 말이 없습니다. 만약 용수가 무언가를 맞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용수에게는 맞는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용수에게 파사란 당시 부파불교 가운데 잘못된 것을 깨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용수의 중론 이후 대승불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용수를 대승불교의 중조라고 하기도 합니다. 흔히 불교에서 용수라하면 이 중론과 함께 화엄경도 떠오릅니다. 전설에 따르면 화엄경은 용수가 용궁에서 구해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시 중론으로 돌아가면 산스트리트어 원본이 있고 구마라집이 편집한 한문번역본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구마라집의 한문번역본이 더 체계적이라고 봅니다.

 중론을 펴보면 귀경게가 나옵니다. 이것은 연기를 설명한 것입니다.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 있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희론을 적멸하면서 상서로운 연기를 설하신 설법자 중 최고의 설법자 붓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만약 우리가 1층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하로 가버리면 안 보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일 때를 말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소멸하거나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진실은 올라갔다가 내려갈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제1결집에서 불탑 신앙이 형성되었고, 제2결집에서 부파불교가 시작됩니다. 부파불교 이후 대승불교가 일어납니다. 전세계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대승불교와 가깝습니다. 이런 대승불교를 일어나게 한 것에 용수의 중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방법은 사성제입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만약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면 아픈 것 자체 현상은 고집멸도 가운데 ‘고’입니다. 집은 원인, 이유로 허리가 디스크 때문에 아픈 것이라면 디스크가 집에 해당합니다. 그럼 멸은 디스크를 일어나지 않게 하여 허리를 안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도는 실천방법으로 수술, 주사, 운동으로 디스크를 치료했다면 이것들이 도입니다. 이 세상 모든 문제는 고집멸도의 관계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고집멸도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답만큼 미지수가 있다면 그 미지수만큼 식을 만들어주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중론입니다. 기존의 문제를 열심히 푼 것은 이전의 경전, 논서들입니다.

 출발은 연기입니다. “연기(상응부경전 12.21).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긴다.(유전연기) 이것이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환멸연기)” 세상의 모든 구조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유전연기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화엄경이라면 이 중론은 환멸연기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공이 바로 환멸연기입니다. 하지만 유전연기나 환멸연기나 결국은 같은 것입니다. 이 중론은 환멸연기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멸연기와 유전연기는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환멸연기는 절대부정에 해당하며 중론, 반야경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유전연기는 절대긍정에 대항하며 화엄경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처라는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이 지구, 태양, 은하계도 모두 우주고 지구 안에 있는 ‘나’도 우주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 우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를 환멸연기에서 본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를 유전연기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우주입니다. 우리가 볼 때 하찮게 보이는 미물조차 우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중론에서 나오는 무자성도 환멸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깨우치면 모든 것이 무자성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청정이라고 합니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청정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자성이라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자성도 됩니다. 이것을 긍정으로 보면 일체 모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다 우주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부정이나 절대긍정이나 결국 같은 것입니다.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때 ‘보리도차제론’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종교심이 나옵니다. 공부를 할 때 우리도 이 종교심을 가장 먼저 일으켜야 합니다. 종교심이란 바로 항상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는 죽는가?”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삶에 대한 고민, 고찰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종교심이 생겨야 불법, 진리에 귀의하게 됩니다. 종교심을 일으킨 뒤 우리는 출리심(出離心)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출리심은 벗어나려는 마음으로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입니다. 해탈의 삶을 위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승문, 연각, 보살이 아닌 부처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우리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해탈을 해야 합니다. 출리심의 마음이 생긴 후 우리 마음에는 보리심(菩提心)이 일어납니다. 보리심이란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을 지향하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위해 지혜와 자비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내 속에 자비심이 성숙되지 않으면 아직 부처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의 사특한 마음 즉 이기심이 사라지면(破邪) 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 끝없는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이런 자비심을 가진 존재만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은 끝없는 자비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비(大悲)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이 아만, 아집, 아애, 아견에 휘둘려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불교의 내용 모두 끝없는 자비를 내 속에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중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중생이 전생에 나의 어머니였음을 상기하라.” 만약 싸움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내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면 싸울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싸움은 내가 맞다는 아집, 아만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맞고 상대방도 맞습니다. 맞는 비율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게 싸움에서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상대방도 맞는 면이 있음을 알게 되고 상대방을 인정하게 됩니다. 눈이 굴러가듯이 처음에는 미미하겠지만 이것이 점점 더 살이 붙어 크게 되면 결국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듭하고 거듭하여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이번 생에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전생의 업을 가지고 전생에 행했던 것만큼 본전치기만 할 뿐입니다. 자비란 끝없는 배려입니다. 이것이 끝없는 긍정의 원천이 됩니다. 내가 자비에 가득 찼으면 내가 가는 어디라도 불국토, 부처님의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고 공부하여 자비심을 키우는 사람이 세상을 구합니다. 돈이나 권력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중론의 핵심은 파사, 즉 우리에게 있는 잘못된 모든 것, 이기적인 마음(아견, 아집, 아애, 아만)을 깨트리고 자비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내 것만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순간 자비가 일어납니다. 모든 존재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 때 출리심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선사가 애지중지하던 찻잔을 사미승이 청소를 하다가 깨트렸습니다. 사미승이 선사에게 세상의 이치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세상의 모든 것은 생하고 멸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미승은 깨진 찻잔을 선사에게 보여주며 “스승님 이 찻잔도 생했다가 오늘 마침내 멸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사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내 것은 없습니다. 생하고 멸합니다. 그러므로 ‘나’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파사하고 자비심을 키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다음 중론에서 위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연기가 곧 공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연기란 존재의 체계를 말하고 공은 존재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무자성이므로 공이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一心)입니다. 뿌리를 통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다 건너 제주도와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바닷물을 다 빼면 어떻습니까. 땅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나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비가 일어납니다. 나에게 잘하듯이 다른 존재에게도 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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