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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강설

제12강 진리의 존재, 속박의 존재, 희론의 적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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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6,552회 작성일 21-07-2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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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12


 이번에는 세속제에 대해 자세히 공부해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제, 용수의 삼제게, 부처님의 사성제는 모두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속박이 존재합니다. 업과 과보, 무명이 이런 것입니다. 이런 속박들은 부단부상하고 불생불멸합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 일정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문제의 시작은 무명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보이고 믿게 됩니다. 무명을 타파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사성제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모를 때 원인을 정확하게 살펴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희론들이 적멸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수가 중론을 설파한 것입니다.

 24품 8게를 봅시다. 이것은 이제(二諦)에 대해 다룬 것입니다. “부천임들의 교법(敎法)은 이제(二諦)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승의(勝義)로서의 진리이다.(dve satye samup ritya buddh n dharmade an/ lokasa v tisatya ca satya ca param rthata//)”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로써,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로써.(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설명을 봅시다. “모든 부처님은 두 가지 진리에 의존해서 법을 설했다. [그것은] 세속에 가려진 입장의 진리와 궁극적 입장에서 본 진리이다.” 이제란 바로 세속제와 제일의제입니다.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말합니다. 설명에 나오는 두 가지 진리란 보이는 현상 속의 진리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진리를 말합니다. 이제를 모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24품 18게를 봅시다. 이것은 그 유명한 삼제게(三諦偈)입니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중도(中道)이다.(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여러가지 인연으로 생한 존재를 나는 무라고 말한다. 또 가명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의 이치라고도 한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설명을 봅시다.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공성이다.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것[假名]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이다.” 우리는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 때문에 결과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기,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임시이며 가짜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란 어떻습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니 언제 어디서나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것 없이 항상 변합니다. 이것은 인과 때문이고 실체가 없는 임시,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노병사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생겼다가 멸합니다.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이 세상의 진리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연기이고 공성, 무자성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란 극단을 떠난 바른 길입니다. 내가 바르게 깨어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고 아니다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공부해보니 별 것 아니다.’라는 말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해봤으니 별 것 아닌 것이지, 공부도 해보지 않고 별 것 아니라하면 그것은 궤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교를 열심히 배우지만 이것을 몸소 실천하고 체험해봐야 그 진리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중도에 나아갈 때 가장 방해되는 것이 우리의 업입니다. 우리는 게으름을 피울 때 합리화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우선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업을 따르는 것입니다. 업에 따라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할 때 방해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6년 동안 고행을 했던 부처님과 같이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마음을 먹고 끝까지 수행해내면 마음속에 힘과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것은 공부와 수행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중도를 봅시다. “벗들이여, 그대들은 두 극단을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한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면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며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을 돕느니라.(잡아함경 제12 301경)” 우리는 욕망이 어리석고 추하고, 범부의 소행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이 없음을 알지만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의 욕망에 집착하다 갑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욕망에 집착하는 중생들의 모습과 스스로에게 고행을 일삼는 고행자들의 삶은 둘 다 성스럽지 못하고 이롭지 못합니다. 둘 다 극단적입니다.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적정과 열반에 드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는 사마타와 윗빠사나를 통해 갈 수 있습니다. 

 교종도 중도를 말했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유명합니다. 양 극단을 막고 중도에 들어 쌍으로 이제(二諦)를 비추는 것입니다. 천태 지의(538-597)의 말씀은 쌍차쌍조의 중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心旣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실천적 중도는 앞선 부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 수행관을 비판한 것으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입니다(不苦不樂). 사상적 중도는 이 중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겨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영원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고(不常不斷)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고(不一不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4품 19게를 봅시다. “연(緣)하여 生起(연기)하지 않은 존재(=法)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하지 않은 존재는 그 무엇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aprat tya samutpanno dharma ka cinna vidyate/ yasm ttasm da nyo hi dharma ka cinna vidyate//)”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설명을 봅시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은 없다.”

 24품 20게를 봅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기(生起)는 존재하지 않고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yadya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catur m ryasaty n mabh vaste prasajyate//)”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성제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설명을 봅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진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사성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성제란 원인과 결과를 말하는 연기의 법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공하지 않고 실체가 있으면 생멸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으면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의 모든 문제는 사성제의 고집멸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에 적용될 뿐입니다. 실체가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가 의미가 없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24품 21게를 봅시다. “연(緣)하지 않고 生起(緣起)한 고(苦)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無常한 것은 苦다.’라고 말했는데 그것(무상한 것)은 자성(自性)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aprat tya samutpanna kuto du kha bhavi yati/ anityamukta duhkha hi tatsv bh vye na vidyate//)” "만일 연(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고(苦)가 존재하겠는가? 무상(無常)은 고(苦)의 이치지만 결정된 자성(自性)으로는 무상(無常)도 없다.(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설명을 봅시다. “연하지 않고 생기한 고가 어디 있겠는가. 무상은 ‘고’라고 설해졌다. 자성을 지닌 것은 무상하지 않고 일정한 모습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苦)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란 실체가 없고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있고 자성을 지닌 것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변화하지 않고 일정한 모습을 가집니다. 제행무상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자성이 있고 실체가 있으면 변하지 않고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성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생멸을 반복하며 끝없이 윤회합니다. 생멸을 반복하고 끝없이 윤회하는 것, 이것이 고(苦)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인 무상과 무아를 알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고가 락(樂)으로 바뀌고 극락이 됩니다. 

 17품 1게를 봅시다.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을 이익되게 하는 자애로운 마음은 (사람이 행해야 할) 법도(法道)이다. 그것은 금세(今世)에도 후세(後世)에도 과보(果報)의 씨앗이다.(tmasa yamaka ceta par nugr haka ca yat/ maitra sa dharmastadb ja phalasya pretya ceha ca//)” "사람은 능히 그 마음을 억누르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을 자선(慈善)이라 부르며 (이것은 현세와 내세의) 이세(二世)의 과보를 초래하는 씨앗이다.(人能降伏心 利益於衆生 是名爲慈善 二世果報種)"

 설명을 봅시다.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자비심은 법에 맞는 행위이며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과보를 받는 종자이다.” 과보란 내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선한 과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자비심은 법에 맞는 것으로, 현세와 내세에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평등하게 생각해야 자비심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 몸이 아프면 급히 낫게 하는 방법을 찾듯이 세상 모든 존재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심이 넘치는 부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이 끝도 없이 구제해야할 대상이며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야할 연민의 대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 때문에 그것을 발할 수 없습니다. 무상을 알고 무아를 알면 자연스럽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상과 무아를 모르고 억지로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닙니다. 내가 베푼 자비는 베푼만큼 인과의 법칙으로 인해 다음 생애에 과보로 돌아옵니다.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면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일 겁니다. 많이 베풀면 그 과보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많이 베풀지 않으면 그 과보로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17품 7게를 봅시다. “싹에서 시작하는 연속(상속)은 씨앗으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싹)으로부터 열매가 (출현한다). 씨앗이 없다면 그것(=연속체)은 출현하지 않는다.(yo' kuraprabh tirb j tsa t no 'bhipravartate/ tata phalam te b j tsa ca n bhipravartate//)” "싹 따위가 상속하는 것이 모두 씨앗에서 생기는 것 같이 그것(싹)으로부터 결실이 생기고 씨앗 없이는 상속도 없다.(如芽等相續 皆從種子生 從是而生果 離種無相續)"

 설명을 봅시다. “싹으로 시작하는 식물의 연속이 종자에서 나타나 그로부터 다시 과일이 생기는 것이라면 그 연속은 종자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연속성과 끝없는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17품 8게를 봅시다. “종자로부터 연속이 또 그 연속으로부터 과실이 생기(生起)한다. 종자는 과실에 선행하기 때문에 (종자와 과실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b j cca yasm tsa t na sa t n cca phalodnhava/ b jap rva phala tasm nnocchinna n pi vatam//)” "종자(씨앗)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과실이 있다. 종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과실이 있으므로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種子有相續 從相續有果 先種後有果 不斷亦不常)"

 설명을 봅시다. “그리고 종자로부터 연속이 일어나며 또 연속으로부터 과일이 생긴다. 먼저 종자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과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절(종자와 과일의 연속)도 아니고, 항상하는(종자와 과일은 다른 것) 것도 아니다.” 씨앗과 과일을 통해 연속성과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17품 21게를 봅시다. “무엇 때문에 업은 생(生)하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karma notpadyate kasm n ni svabh va yatastata/ yasm cca tadanutpanna na tasm dvipra a yati//)” "모든 업은 그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본래 생하지 않는다. 모든 업은 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滅 以其不生故)"

 설명을 봅시다. “왜 업은 생기지 않는가. 그것은 자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소멸하는 일도 없다.” 이것은 업의 생겨나지 않음을 말한 것입니다. 업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본질적으로 보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그냥 존재한다는 것을 업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는 것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할 뿐입니다. 

 17품 28게를 봅시다. “살아있는 놈은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渴愛)에 매여 있다.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 자이다. 또 (업을) 지었던 자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것(=같은 것)도 아니다.(avidy niv to jantust sa yojana ca sa/ sa bhokt sa ca na karturanyo na ca sa eva sa//)” "무명에 덮이고 갈애(渴愛)에 묶여 있고 본래의 짓던 놈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無明之所蔽 愛結之所縛 而於本作者 不卽亦不異)"

 설명을 봅시다. “무명에 가리워진 중생은 또한 갈애에 결박되어 있다.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 자이다. 이렇게 업의 과보를 받는 자는 업을 지은 자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갈애는 바로 집착입니다. 우리가 갈애에 결박되어 있는 이유는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12연기를 보면 애(愛)앞에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가 있습니다. 무명에서 행이 나오고 행에서 식이 나오고 식에서 명색이 나오고, 명색에서 육처가 나오고 육처에서 촉이 나오고 촉에서 수가 나옵니다. 수에서 애가 나옵니다. 이 구조를 알면 갈애의 원인에 수 즉 느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좋은 느낌이 쌓이고 쌓여 갈애하게 되고, 갈애하게 되어 집착(取)하고 곁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에서 알아차리면 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에 대한 부분을 봅시다. 업의 과보를 지은 자와 받는 자는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생에서 업보를 지으면 다음 생에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지금 이 생의 나와 다음 생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같은 업보를 물려받으며 업보를 쌓는 존재이기 때문에 둘은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18품 5게를 봅시다. 여기서는 희론의 적멸을 다루고 있습니다. “업과 번뇌가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일어나고) 그것(=분별)은 희론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사라진다.(karmakle ak ay nmok a karmakle vikalpata/ te prapa c tprapa casts nyat y nirudhyate//)” “업과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른다. 업과 번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공(空)에 들어가면 희론(戱論)이 소멸한다.(業煩惱滅故 名之爲解脫 業煩惱非實 入空戱論滅)”

 설명을 봅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해서 없어지기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 사고로부터 생긴다. 분별 사고는 형이상학적 논의[戱論]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희론은 공성에서는 멸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하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일어나고 분별은 희론에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희론도 본질, 공에 들어가면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중론의 가장 큰 목적이 희론의 적멸입니다. 진리를 알아서 우리가 일으키는 부질없는 생각, 번뇌망상들을 잠재우는 것이 중론의 목적입니다. 

 사실 이 희론과 분별은 우리가 깨달아가는 과정에서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때때로 추측, 추론도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추론하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으면 이들조차 버려야 합니다. 이들을 계속 갖고 있으면 결국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성 즉, 본질에 가면 희론이 적멸되는 것입니다.  

 18품 7게를 봅시다.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사라지면 언어의 대상이 사리진다. 실로 발생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법성(法性)은 열반과 마찬가지다.(niv ttamabhidh tavya niv tte cittagocare/ anutpann niruddh hi nirv amiva dharmat//)”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은 마음의 작용이나 언어가 끊어져 있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적멸(寂滅)하여 열반과 같다.(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無生亦無滅 寂滅如涅槃)”

 설명을 봅시다.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소멸하면 언어의 대상도 소멸한다. 법성은 생겨나지도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으며 실로 열반과 같다.”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면 언어의 대상도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중론은 언어로 출발해서 언어의 소멸로 귀결됩니다. 언어를 통해 공성, 무자성을 증명한 후 세상의 모든 것, 언어조차 깨트리는 것입니다. 

 전체 내용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뽑았고, 이 정도를 알면 중론의 핵심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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