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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연기, 공, 무자성, 공의 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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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424회 작성일 21-07-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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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02


 자성이란 내 자신의 성품입니다. 법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품입니다. 청정법신인 본래 내 성품을 깨치면 자성이 법성이 됩니다. 법성은 곧 불성입니다. 하지만 자성을 깨우치지 못하면 자신의 업에 의해 형성된 것을 자기라 착각하게 됩니다. 이 업을 깨트리면 물들기 전의 똑같은 것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개, 소, 호랑이, 벌레들과 다르듯이 같은 인간 안에서도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독일인 다 다릅니다. 표면적인 성품은 다 다릅니다. 같은 한국인 안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각 성품이 다릅니다. 하지만 물들기 전의 것의 본성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한 뿌리, 일심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분별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가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쌓아놓고 그대로 머물면 지식이 되지만 이것이 허물어지면 지혜가 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불교에서도 자비와 더불어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쌓여있던 것이 허물어져 우리를 가리고 있던 무명이 사라지면 밝은 상태 명이 됩니다. 이것이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통해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면 자비가 됩니다. 이 자비는 지혜가 없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의 굴레들을 모두 깨트리면 그 속에 숨어있는 본질이 자비입니다. 연기는 자성과 법성을 어떻게 터득해갈 수 있는가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중론은 자성과 법성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연기가 곧 공이다. 무자성이므로 공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시피 연기는 존재의 체계를 말하며 공은 존재의 내용, 성품을 말합니다. 무자성이므로 공이란 말은 일심은 무자성이란 말과도 통합니다. 일심은 하나이기 때문에 자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실체 지을 만한 것이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공이 됩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내용, 성품이 됩니다. 이것이 중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됩니다. 공은 모든 것들의 부정과 모든 것들의 긍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 있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이것도 결국 공과 무자성과 연관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중론을 논리학과 연결시키는 관점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논리학에서는 개념, 판단, 추론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무언가가 개념 지어지면 그것을 판단하고, 판단을 중심으로 추론을 하게 됩니다. 개념이 여러 개 모여 판단을 하고 판단이 여러 개 모여 추론을 하게 됩니다. 사람->사람은 죽는다->사람인 소크라테스는 죽을 것이다. 이런 것입니다. 개념이 건축 자재라면 판단은 서까래, 기둥에 해당하고 추론은 집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학을 중론에서는 깨트립니다. 예를 들어 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론에서는 모든 것이 공이며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산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판단도 그렇습니다. 산이 높다는 판단도 주관적이며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추론도 판단에 근거하여 나오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산이 높다->높은 산은 오르기 힘들다->저 산은 높아서 오르기 힘들 것이다. 실은 아무리 높은 산도 몸 상태가 좋거나 길이 쉽게 되어 있거나 케이블카 같은 편한 시설이 있다면 오르기 쉬워집니다. 그리고 그 산이 높다는 것도 애당초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이 추론은 틀리게 됩니다. 때문에 이렇게 주관적이며 확실하지 않는 내 속의 판단, 아집을 허물어트리자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며 이 중론의 주장입니다.

 논리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론에서는 연기한 것이기에 모든 것은 공이라고 주장합니다. 개념 자체를 부정합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름이 개념이지, 그 존재 자체는 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하나의 뿌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는 개념이 따로 떨어져 있고, ‘산’이란 개념이 따로 떨어져 있고, ‘고양이’란 개념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따로 구분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머리속에서 분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무자성이고 공인 것입니다. 연기해서 생긴 것은 공이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본래는 모든 존재가 일심을 통해 하나로 되어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 의식이 작용해서 그것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연기되기 때문에 분별되고 개념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중론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 자체를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개념에 빠져있습니다. 이 개념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개념, 업들을 허물어져야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중론에 의하면 판단도 나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시각에 따라 판단은 다르게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죽는다’는 판단도 그렇습니다. 우리 불교만 봐도 사람은 윤회를 합니다. 이것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판단은 나의 주관적 생각에 불과하여 자가 당착에 빠지기 쉽게 만듭니다. 이것을 중론에서 사구부정을 통해 깨트립니다. 판단에서 나오는 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판단보다도 더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 추론은 어디까지나 추론이기 때문에 어떤 추론이든 상반되는 추론이 있습니다. 이것이 맞으면 저것은 아니게 된다는 말이 언제든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론이 반 논리학이라고도 불리는 이유가 이와 같이 우리의 개념, 판단, 추론 모두를 허물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허물어트리면 물들지 않은 본래 청정한 본성이 드러납니다.

 중론에서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은 하나 밖에 없다는 말로 개념 자체를 비판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는 일심, 진여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립된 성품,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 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립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계연기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우리가 우주라고 했을 때 나도 우주고 당신도 우주고 내 앞에 있는 물건들도 우주고 저 앞에 기어가고 있는 벌레도 우주고 저 멀리 날아가는 새도 우주입니다. 우리가 이 사는 우주고 태양도 우주고 은하계도 우주입니다. 이 세상에 우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이 모든 것이 살이 될까요? 이렇게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원자나 성분 단위로 봅시다. 우리의 육체는 그냥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작은 원자 단위의 세포 세포가 모여서 이룬 것이 불과합니다. 이것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썩어서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이것이 뭉쳐 어떤 물체가 될 수 있고 어떤 다른 생명을 이루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념 비판의 출발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하나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고,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살이라고 한다면 언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라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것은 화두의 과정과 같습니다. 의심이 일어나고 생각의 벽에 부딪혀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산철벽과 같은 마음 속의 의문을 뚫고 넘어가려는 과정이 바로 화두입니다. 내 생각을 한 군데로 모아 철벽을 뚫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뚫어지면 어떤 화두에도 자신의 답으로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구 부정에 대해 살펴봅시다. 네 가지 말에 대해 부정한다고 4구 부정입니다. 첫 번째는 “A다.”라는 말이고(의미 중복의 오류), 두 번째는 “A가 아니다.”라는 말이고(사실 위배의 오류), 세 번째는 “A면서 A가 아니다.”라는 말이고(모순의 오류), 네 번째는 “A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유 영역에 들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정신과 육체로 예를 들어 봅시다. 첫 번째 부정은 “정신과 육체는 같다.”라는 말로 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유물론입니다. 이것은 정신과 육체라는 개념이 중복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같은 말이 중복되어 나왔기 때문에 오류라는 것입니다. “비가 내린다.”도 그렇습니다. 비 속에 이미 내리는 성질이 있는데 내린다는 말을 썼으므로 의미 중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두 번째 부정은 “정신과 육체는 다르다.”는 말이 됩니다. 세 번째 부정은 “정신과 육체는 같으면서 다르다.”라는 말입니다. 네 번째 부정은 “정신과 육체는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다.”는 말이 됩니다. 중론은 이런 4구 부정의 방법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정신과 육체 모두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고 일심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합니다.

 “연기하기에 실체가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긴다.”(유전연기)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 판단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방이 있으면 내 속의 업에 따라 크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작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체가 있으면 내 속의 기준, 판단에 따라 긴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짧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존재는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에, 이 연기 때문에 판단하여 실체가 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든 존재는 우리의 주관이나 업에 따라 인식하기 때문에 사실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됩니다. 그래서 연기하기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론의 제1게가 바로 팔불(八不)입니다.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불래역불거(不來亦不去). 생겨나지도 않으며 또한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으며 또한 단절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으며 또한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으며 또한 가지도 않는다.” 부처님의 연기를 여기서 팔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기를 보면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으며, 이것 말미암아 저것 생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존재든 생겨야 있게 됩니다. 그것을 부정문의 형태로 하면 ‘생겨나지 않으면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그대로를 말한 것입니다. 일심, 진여의 세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눈앞의 세계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용수는 이 팔불연기를 논파하여 공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있어서 차제법,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할 때 순서를 바꾸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용수도 이에 따라 팔불연기를 논파할 때 불생 다음 불멸, 불상 다음 부단, 불일 다음 불이, 불래 다음 불거를 논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답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용수가 묻고 대답한 것이지만 배우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구성을 한 것입니다. 묻는 사람이 말합니다. “존재들은 무수히 많은데 어째서 단지 이 여덟가지 설명만으로 모든 것을 논파할 수 있는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존재가 비록 한량없이 많지만 이 여덟가지 설명만으로 일체법을 모두 논파할 수 있다.” 그리고 용수는 불생에 대해 설명합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긴다.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있다. 원인 속에 결과는 내재해있지 않다. 생의 상은 없기 때문에 불생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고 배워왔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수는 이것마저 깨트리며 불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수는 그 다음 불멸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불멸에 대해 설명하겠다. 생이 없다면 어떻게 멸이 있겠는가? 생도 없고 멸도 없기에 나머지 여섯 가지도 없다.” 생의 상도 없고 멸도 없고 다른 여섯 가지도 없기 때문에 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로 이미 일체법을 파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여섯 가지를 설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오자 용수는 말합니다. “이는 불생불멸의 이치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다. 불생불멸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불상부단은 믿는 사람이 있다. 불상부단의 이치를 깊이 추구하면 그것이 바로 불생불멸과 같아진다. 네 가지 설명을 듣고도 제법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어 불일, 불이, 불거, 불래를 더 설명한 것이다.” 용수는 불생불멸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섯 가지를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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