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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강설

제3강 논리학과 반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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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317회 작성일 21-07-2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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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03


 우리는 지금까지 체계가 갖춰진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중론은 그것을 뒤집으며 본질을 설명합니다. 본질로 가면 중론의 내용이나 체계가 갖춰진 불교나 같습니다. 중론은 언어를 통한 인지능력을 깨트리고 뒤집으며 본질을 설명합니다. 그 본질이 공입니다. 개념을 깨트리며 실체성을 비판하고 있고, 판단을 깨트리며 사실성을 비판하고 있고, 추론을 깨트리며 타당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4구 판단은 “A다.(A)”, “A가 아니다.(not A)”, “A면서 A가 아니다.(A ∩ not A)”, "A가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not A ∩ not-not 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판단의 대부분은 이 네 가지에 준합니다.

 중론에서 이 4구 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A다.(A)”는 증익견으로 의미 중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합니다. “A가 아니다.(not A)”는 손감견으로 사실 위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합니다. “A면서 A가 아니다.(A ∩ not A)”는 상위견으로 상호 모순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합니다. "A가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not A ∩ not-not A)"는 희론견으로 언어 유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론의 가장 첫 부분을 보면 ‘희론을 적멸시키고’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이는 인간의 사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적멸시키라는 말입니다. 4구 판단은 생각의 작동일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불과하지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A다.”는 우리 의식에서 그렇게 느껴진 것인데 그것을 중복되게 표현했기 때문에 중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A가 아니다.(not A)”는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실제 본질은 전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긍정을 할 것도 부정을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 본질과 다르기 때문에 사실 위배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A면서 A가 아니다.(A ∩ not A)”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있을 수 있으나, 실제 본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 의식 속에서 서로 모순된 의식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상호 모순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A가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not A ∩ not-not A)"는 긍정과 부정 모두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의식 속의 긍정과 부정 모두 부정하고는 있지만, 결국 우리 의식의 작용이지 본질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식과 언어의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언어 유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4구 비판을 통해서 나오는 중론의 가르침은 우리 생각의 작용일 분이지 실제로 그런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바람이 분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하고 느낀 것을 중복되게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의식하는 것일 뿐 실제 본질은 적멸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본질과 다릅니다. “바람이 불면서 불지 않는다.” 사실 본질의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적멸하기 때문에 바람이란 존재 자체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서 불지 않는다는 말도 그냥 의식이나 언어 속에서 상호 모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질의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적멸하고 공하기 때문에 바람이란 존재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장난에 불과합니다. 

 중론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파사현정(破邪顯正)입니다. 잘못된 것을 모두 깨트리고 바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고착된 아집을 깨트리고 공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파사와 현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파사하면 바로 현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파사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번뇌를 깨트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크게 나누면 감정적 번뇌와 이성적 번뇌가 있습니다. 감정적 번뇌는 정서장애로 수혹(修惑)이라고 하고, 이성적 번뇌는 인지장애로 견혹(見惑)이라고 합니다. 탐진치에서 탐과 진은 수혹에 속하고 치는 견혹에 속합니다. 감정이나 정서가 잘못되어 있을 때 수혹이라고 하고 사고나 판단이 잘못되어 틀린 것을 맞다고 할 때 견혹이라고 합니다. 수혹에 비해 견혹은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속에 고착된 생각을 깨트리지 않는한 내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서장애는 공감하고 위로해주면 쉽게 개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지장애는 생각 자체를 깨트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관인연품. 제1게. 생겨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 “제2게. 희론을 적멸하면서 상서로운 연기를 설하신 정각자 설법자 중 제일인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관인연품은 말 그대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중론은 산스크리트 원어랑 구마라집이 번역한 한문판이 약간 내용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제2게도 보면 구마라집 번역판은 “능히 이런 인연법을 설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시키도다. 내가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가 됩니다. 그리고 1게와 2게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1게는 연기와 희론 그 자체를 말한 것이라면 2게는 그 희론을 없앤 부처님에게 예배한다는 내용입니다. 제1게의 내용이 앞에서 설명했던 팔불연기입니다. 여기 1게에 대한 설명을 봅시다. “자신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자신과 타자 양쪽으로부터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무자성을 말한 것입니다. 2게에 대한 설명을 봅시다. “사물과 현상의 고유한 성질은 그것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 등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에 고유한 성질이 존재하지 않을 때 타자의 성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게의 내용은 나중에 나올 4게와 연결됩니다. 

 중론을 보면 이에 대한 문답이 나옵니다. “만물은 무생이다.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곡식이 없으면 지금의 곡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태초의 곡식이 없이 지금의 곡식이 있는 것이라면 응당 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불생이다.” 오온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중론에서는 이러한 모든 존재를 공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오온의 무아와 말이 통하게 됩니다. 이런 공한 모든 것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인 것입니다. 용수의 주장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태초부터 다 있었던 것이 됩니다. 그것을 곡식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곡식이 없었다가 생긴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곡식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불멸에 대한 문답이 나옵니다. 질문자가 불생이면 그 반대인 멸은 있으리라 생각하고 묻습니다. “불멸은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간에는 태초의 곡식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태초의 곡식이 소멸했다면 지금 곡식이 없어야 하는데 곡식이 있다. 그러므로 불멸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한 질량을 유지하고 있으며 형태만 달라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태초의 것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것이 됩니다. 죽거나 멸하는 것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용수는 곡식을 통해 설명합니다. 태초의 곡식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곡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음은 항상 하지 않는다에 대한 문답입니다. “상주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항상하지 않음이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곡식의 싹이 틀 때 씨앗은 변하여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것은 없다.” 용수는 모든 문답에서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라고 답을 합니다. 세상에 항상 일정한 모양을 가지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변화합니다. 플라스틱, 쇠, 다이아몬드 이런 것들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지고 녹슬고 깎이고 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곡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씨앗이나 싹이 트고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도 그렇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그 다음 상주하는 것이 없다면 끊어지고 멸하는 것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질문자가 묻습니다. “단멸(끊어지고 멸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곡식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다. 끊어졌다면 상속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나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자손을 낳습니다. 자손을 낳으며 DNA를 전합니다. 겉으로 보면 중단되는 일도 있고 죽으면 끝나 보이지만, 죽어도 다른 생명들의 에너지가 되어 또 다른 형태로 생명을 이어갑니다. 끊어져 보이지만 모든 생명들은 계속 서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도 그러한 것입니다. 용수의 설명도 그러한 것입니다. 곡식에서 나온 씨앗이 땅에 묻혀 시간이 지나 싹이 되고 그 싹이 다시 곡식이 됩니다. 그 곡식은 또 씨앗을 뿌립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 다음은 같지 않다에 대한 문답입니다. 질문자가 묻습니다.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같지 않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곡식이 싹이 아니며 싹이 곡식이 아님과 같다. 만일 곡식이 싹이며 싹이 곡식이면 응당 동일하다 하겠는데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같지 않다.” 이 세상에 일정한 형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쌍둥이도 언뜻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같지 않습니다. 그들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됩니다. 비록 모든 존재가 일심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고 보이는 세상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용수가 말하는 것처럼 곡식이 싹이 아니듯이 올챙이는 개구리와 같지 않습니다. 

 그 다음 질문자가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 질문합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은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다르지 않음이 눈에 보인다. 만약 다르다면 어떻게 곡식의 싹과 줄기와 잎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겠는가. 싹과 줄기와 잎을 따로 떼어서 나무를 말하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는 우리가 잘 아는 본질과 진리에 대한 설명과 같은 맥락의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것이 일심, 진여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과 같이, 용수는 곡식의 싹, 줄기, 잎이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다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오지 않는다에 대한 문답이 나옵니다. “다르지 않다면 온다는 사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지 않는다는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오지 않음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곡식의 씨앗에는 트는 싹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오는 것이라면 나무에 새가 날아와 깃들 듯이 싹은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로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오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어느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보이는 형태만 달라질 뿐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나온 내용들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갑자기 어딘가에서 생겨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나가지 않는다에 대한 문답입니다. “나가지 않는 것은 왜 그런가?” 용수가 대답합니다. “세간에 그렇게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만물이 나가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나가는 것이라면 뱀이 굴에서 나가듯이 응당 싹이 씨앗에서 나가는 것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나가지 않는다.” 앞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갑자기 오는 것도 아니듯이, 갑자기 어디론가 가지도 않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돌고 돌 뿐입니다. 곡식에서 씨앗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형태만 달라질 뿐이지 이 세상 안에서 돌고 도는 것에 불과합니다. 

 용수는 이렇게 여덟 가지를 논파합니다. 부처님의 연기는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용수는 중론에서 이를 논파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이라 주장했습니다. 언뜻 보면 부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 같지만 이 원인과 결과도 우리의 인식, 업이 만들어낸 것일 뿐, 즉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듯이 원인을 제거해버리면 결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공의 상태가 됩니다. 결국 연기는 이렇게 공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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