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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추론의 타당성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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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301회 작성일 21-07-2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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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04


 제3게를 봅시다. “불서에 의하면 사물과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네 종류의 조건이 있다. 인연, 소연연, 무간연, 증상연이다. 다섯 번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번에 할 4게, 5게와 연결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생각을 만들어 낼까요? 바로 말과 글입니다. 중론은 이 언어가 갖고 있는 실체성과 사실성을 깨트립니다. 이를 통해 공한 진리의 세계를 보이게 해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뜻이 소리 글자나 문자로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이것은 모든 언어가 통할 수 있다는 여지를 줍니다. 이것은 모든 언어가 뿌리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기호 언어로 가면 모든 언어는 통한다는 말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수학과 같은 기호 언어는 어느 나라를 가던 다 풀 수 있습니다.

 인도의 전승 의학인 아유르베다 가운데 짜라까 상히타(Charaka Samhita)란 의학서의 3장 8절에 추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용수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추론의 타당성 비판에 대한 체계를 세웁니다. 예를 들어서 짜라카 상히타를 보면 “모든 병은 그 원인과 동질적이다. 마치 냉병과 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냉병에 걸리면 추워서 오들오들 떨게 됩니다. 그 원인은 추위로 원인과 병의 증상이 동질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수는 이것을 답파(Uttara)합니다. “모든 병은 그 원인과 이질적이다. 마치 동상과 같이.” 동상은 추위로 인한 병이지만 열이 엄청나게 납니다. 여기서 용수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추론의 타당성을 비판한 것입니다. 비록 경험을 통해도 추론은 우리 생각에서 나온 추론일 뿐 진리 그 자체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수는 사성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중론의 제24 관사제품이 바로 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타당성 비판을 다룬 것입니다. 논쟁하는 상대방이 말합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다면 일어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그래서) 그대의 경우 사성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그 말을 듣고 용수가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일어남도 존재하지 않고 소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경우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용수의 말은 이 세상의 본질이 공하기 때문에 일어남도 존재하고 소멸함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앞의 일어나고 소멸하는 현상에서 벗어나 공한 진리의 세계,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사성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수가 주장하는 말은 그런 것입니다. 용수는 상대방의 말을 반대로 틀어 논파하는 동시에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용수는 공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성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론의 타당성 비판에 해당하는 다른 또 하나의 논쟁이 중론에 나옵니다. 어떤 상대방이 말합니다. “불교가 파괴된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그에 맞대응하여 용수가 말합니다. “불교가 파괴된다. 모든 것이 공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은 모든 것이 공하다는 용수의 주장 때문에 기존의 불교 교리가 모두 부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용수는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의 본질이 공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교의 본질이 흐려지고 파괴된다고 맞섰습니다. 본질을 알고 모든 것이 공한 것을 알면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불교를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중론 제4게를 봅시다. “제법의 자성이 연 가운데 있지 않듯이 자성이 없기에 타성도 없다.” 4게의 설명을 봅시다. “사물과 현상을 일으키는 작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작용이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조건의 관점에서 보면 작용을 수반하건 수반하지 않건 모든 조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구마라집의 한자 번역에 따른 것입니다. 연은 인연의 연입니다. 원인과 결과 가운데 원인에 해당하고, 인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연은 나 이외의 것으로 인한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결과를 바꾸기 위해 이 인연 가운데 무엇을 바꾸는 것이 쉬울까요? 바로 나에게 있는 인입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고 시각, 기준을 바꾸면 세상이 그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만약 부처라면 이 세상이 다 부처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세상에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합니다.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성이 없기에 타성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에 의해서 생기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착각하여 허망한 생각만 가지고 허우적대고 있을 뿐입니다.

 제5게로 넘어가봅시다. “연에는 인연과 연연 차제연(등무간연)과 증상연이 있다. 4연이 제법을 생하게 하며 다른 제5의 연은 없다.” 마음이 형상화될 때 네 가지 연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여기서 나온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然),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입니다. 인연이란 선한 생각(보시 등)이나 악한 생각(살생 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등무간연은 선한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고 선한 생각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시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보시해서 뭘해. 그 자가 게을러서 먹을 것이 없는 것이지.’ 이러면 보시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보시하자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소연연은 경계를 말합니다. 증상연은 다른 법이 생기지 못하도록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선한 마음에 힘을 실어주어 더욱 더 지속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제법들은 이 네 가지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유식에서도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앞에서는 좋은 경우로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나쁜 경우도 이 네 가지는 해당합니다. 마음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누구를 미워하는 경우,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를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는 것이 인연입니다. 그 미워하는 대상은 소연연입니다. 이 미워하는 행위를 계속 지속되게 하는 것이 등무간연입니다. 미워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증상연입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증폭됩니다. 이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반대로 미워하는 마음을 그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마음은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심이 가득한 부처님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용수는 개념 그 자체를 깨트림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깨트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이 고착되어 있습니다. 그 언어로 된 생각을 깨트리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용수도 그랬기 때문에 이 세상은 공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업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지만 이것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 감정이 얼마나 제멋대로냐 하면 좋았던 일들은 금새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원망스럽고 기분 나빴던 일은 작은 일이라도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내 업에 축적되어 있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임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노력하고 받아들이면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인과율을 법칙을 봅시다. 인과율의 법칙은 E=e^(c-1)x R입니다. E는 effect로 결과를 말하고 C는 cause 원인, 주체, 인을 말합니다. R은 relationship으로 연, 대상, 객체, 관계를 말합니다. 소문자 e는 대강 2.78정도 되는 숫자로 보시면 됩니다. 이 법칙에 숫자를 대입해봅시다. 주체와 객체가 변하지 않았을 때, 나와 대상이 변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러면 주체가 1이 되고 객체가 1이 될 것입니다. 그럼 E=e^0 x 1=1 어떤 수의 0승은 어떤 경우든 1입니다. 1x1은 1이 됩니다. 주체와 객체가 변하지 않으면 결과는 그냥 그대로입니다. 두 번째 주체는 변하지 않고 객체가 3이 되었을 때, E=e^0 x 3= 1x3= 3이 됩니다. 객체가 바뀐 만큼 정확하게 결과가 나옵니다. 세 번째 주체가 3으로 변하고 객체가 변하지 않았을 때를 봅시다. 주체 C가 3이고 객체 R이 1이 됩니다. E=e^2 x 1= 7.3 x 1= 7.3이 됩니다. 주체가 바뀌니 결과가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객체가 변했을 때와 같이 원인에 따라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결과의 숫자도 크게 변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주체인 우리의 생각, 마음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이런 법칙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6게를 봅시다. “과는 연에서 생하는 것인가? 연이 아닌 것에서 생하는 것인가? 이 연은 결과를 갖는가? 이 연은 결과를 갖지 않는가?” 과는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서 생깁니다. 인과 연의 관계 속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반드시 연에 의해 생긴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따라 연은 결과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고 결과를 갖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봅시다. “사물과 현상을 일으키는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작용이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조건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작용을 수반하건 수반하지 않건 모든 조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을 조건으로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것들은 연(조건)이라 불리고 그러나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한 어떻게 그것들이 조건일 수 있겠는가?” “아직 존재하지 않건 존재하건 조건을 산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제7게를 봅시다. “이것으로 인하여 과가 생할 때 이것을 연이라고 한다. 만일 그 과가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비연이라 하지 않겠는가.” 씨앗을 심어서 열매가 아직 안 맺혔다면 씨앗을 연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과가 생겨야 연이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8게를 봅시다. “연 속에 이미 과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없었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이미 있었다면 연은 어디에 쓸 것인가.” 설명을 봅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경우 무엇 때문에 조건이 있겠는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 조건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언어, 생각들이 갖고 있는 오류는 왜 생길까요? 오랫동안 축적된 삶에 의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오류를 깨트려야 청정한 본질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중론에서 개념, 판단, 추론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해 연기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탐색하고, 윗빠사나와 사마타를 통해 수행을 합니다. 우리는 중론의 관사제품을 봄으로써 이것들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각이 일어나고 행동화하는 이 과정을 살펴보며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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