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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속제와 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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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329회 작성일 21-07-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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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05


 용수의 중론은 생각을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본질이 공임을 깨달아 생각이 제대로 되면 수행, 행동은 그 후에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그에 앞서 용수의 깨달음은 언어에서 옵니다. 개념 비판, 판단 비판, 추론 비판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개념 비판에서 ‘연기한 것은 공하다’는 것을 배웠고, 판단 비판에서는 사구부정을 배웠고, 추론 비판에서는 상반되는 추론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일심이라고 하기도 하고 진여라고 하기도 하고 용수의 공, 무자성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개념, 판단, 추론이 있기도 전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현재 개념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 추론합니다. 이 개념이 판단이나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줍니다. 하지만 선문답을 보면 이것과 완전 어긋납니다. 누군가 조주 스님에게 부처란 무엇인가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합니다. 개념과 판단, 추론이 완전히 연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서 생각을 일으키고 발전시킵니다. 이것들은 중론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깨트려야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통해 깨달음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론에서 파사현정의 대상은 앞선 부파불교의 학설이었습니다. 부처님 사후 일어난 부파불교 가운데 가장 성했던 것 중 하나가 설일체유부의 실재론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실유한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실제로 있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실재론입니다. 용수는 진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고 이를 부정하여 공이라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현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한 것이며 가짜라는 것입니다. 설일체유부의 실재론이 불교의 체계화,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본질에서 볼 때는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수는 부처님의 핵심 사상인 연기를 들고 와서 ‘연기는 공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대상만이 존재합니다. 내가 있고 내가 인식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때 오온이 나오고 12처가 나옵니다. 오온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인식처를 말합니다. 12처는 오온에 ‘의’를 더하고 각각의 오온에 대응하는 대상들을 더하여(의에 대한 대상도 더함) 12처가 됩니다. 이 12처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를 인식하는 방법이 바로 사성제이고 어떻게 살면 되는가에 대한 답이 팔정도입니다. 부처님의 철학은 연기, 사성제, 팔정도로 기본 골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화되어 5위 75법이 나옵니다. 용수는 부처님 이후 학설들이 이것을 근거삼아 세상이 존재한다는 쪽으로 흘러가자, 이를 깨트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수가 볼 때 진리란 무엇인가 봅시다. 용수 이후의 수많은 연구가들은 용수가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 가지 진리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관점에서의 진리로 세속제(samvrti-satya)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인 관점에서의 진리 제일의제(paramartha-satya)입니다. 현상적인 언어의 개념을 통해 진리를 표현한 것은 세속제에 해당합니다. 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경지는 제일의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눈 것은 내용, 형식에 따라 나눈 것으로 속제(俗諦), 진제(眞諦)라 하기도 합니다. 진제에는 현상의 공성, 개체의 공성, 시간의 공성, 속박의 공성, 열반의 공성이 해당합니다. 세제에는 사성제, 업과 과보, 12인연, 사견의 논파가 해당합니다. 공성이란 말은 바로 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현상, 개체, 시간, 속박, 열반 모두 공하다는 말입니다. 중론 전체의 내용을 이렇게도 나눌 수 있습니다. 

 중론은 원래 Madhyamika-Sastra라고 합니다. 그래서 줄여서 MS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MS24.8이란 24품의 8게라는 말입니다. 우선 산스크리트 원어부터 봅시다. “부처님들의 교법(敎法)은 이제(二諦)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승의(勝義)로서의 진리이다.(dve satye samup ritya buddh n dharmade an/ lokasa v tisatya ca satya ca param rthata//)” 구마라집의 한문 번역을 봅시다.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며,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만 단어는 약간씩 다르게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 세속제와 제일의제를 통해 설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진리에 들어가게 하고 그것을 통해 제1의제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4품 9게도 봅시다. “이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ㄴ는 심원(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ye'nayorna vij nanti vibh ga satyayordvayo/ te tattva na vij nanti gambh)” "만일 누군가 이제(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불법(佛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우리가 진제와 속제를 구별해야 심오한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진제인지 속제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음식을 옮기기만 하고 맛보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렇듯 아무리 절에 열심히 다녀도 심오한 진실을 알지 못하면 불교를 진정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24품 18게를 봅시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중도(中道)이다.(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여러가지 인연으로 생(生)한 존재를 나는 무(無)라고 말한다. 또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여기서 무(無)라고 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입니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의존된 가명이란 말은 바로 연기에 의해 생긴 가짜라는 말입니다. 중도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나 행위가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불교의 본질 즉, 여기서 말하는 공성이나 법성을 알면 중도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한 것이며 가짜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설명하기 위해 언어로 가설한 것입니다.

 24품 19게를 봅시다. “연(緣)하여 生起[연기]하지 않은 존재(=法)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하지 않는 존재는 그 무엇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aprat tya samutpanno dharma ka cinna cidyate/ yasm ttasm da nyo hi dharma ka cinna vidyate//)”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우리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란 그렇지 않습니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인연으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현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해 발생합니다. 이것은 진리와 다릅니다.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이 현상의 모든 것은 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상에서 진리는 어떻습니까.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이 진리조차 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속제와 진제에 대해 살펴봅시다. 진제란 진리의 세계로 공하며 무아입니다. 그에 반해 속제는 연기에 의해 발생하며 존재한다고 인식됩니다. 이것은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 존재가 아닌 가명에 불과합니다. 물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느끼기에 물과 수증기, 얼음은 모두 다릅니다. 이 물과 수증기, 얼음은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와 성질을 가지지만 본질은 H2O입니다. 이 H2O가 관계(연기)에 따라 물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 수증기, 얼음은 속제에 속합니다. 본질인 H2O는 진제가 됩니다. 결국 연기에 의해 생긴 것은 가명이고 속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순간 진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속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진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은 연기에서 벗어난 말을 통해 진제로 갈 수 있습니다.

 세속제는 법, 사물, 존재, dharma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非有),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非無) 비유비무 중도입니다. 비무란 존재하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형성된 현상으로, 관습적 의미에서 이름과 언어로 존재합니다. 세속적 차원의 진리입니다. 비유(非有)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있다가 사라지고, 인연에 의해 왔다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비무(非無)라고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중도입니다. 팔정도의 실체를 통해 중도로 들어갑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 이름과 언어로 존재한다는 말은 지금 이 현상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봅시다. 이번 생에 몸 받아 태어나 이름이 붙여지면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관습적 의미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전생이나 내생이 되면 이 이름은 바뀔 것입니다. 이관습적 이름과 언어란 것은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로 형성된 모습을 보고 서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면 무상이고 무아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며 나라는 것을 깨트려야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현상론적 연기입니다. 

 진제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어떤 사물도 그 자체의 본성[自性, svabhava]을 가진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닙니다.[非有] 이것이 결국 사물의 공성이며 제일의제이며 궁극적 차원의 진리[진제]입니다. 물들기 전의 본래 성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개념들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 속에 있는 업들이 다 없어집니다. 연기를 알면 세속제이고 알고난 후는 진제, 제일의제입니다. 

 중론의 24품 10게를 보면 이 세속제와 제일의제는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상즉합니다. 내용을 살펴봅시다. “(세간의)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의의(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vyavah raman ritya param rtho na da yate/ param rthaman gamya nirv na n dhigamyate//)” "만일 속제(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여기서 하는 말은 바로 속제를 알아야 진제로 가고 진제를 알아야 열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한 순간의 인식이 열반입니다. 진제에 들어가는 순간 열반적정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하나, 일심이 됩니다. 무자성, 공임을 인식하는 순간 하나가 됩니다. 이런 하나된 상태, 열반의 상태가 되면 극락이 되는데, 우리는 죽지 않아도 열반을 증득하면 극락에 살 수 있습니다. 

 속제를 통해 진제로 가는 과정을 현악기 소리에 비유해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기판, 가죽, 줄, 봉, 튀김 등의 연연에 의존하여 표상되는 것입니다. 즉 이것도 인연의 화합에 의해 시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온 곳도 간 곳도 머무는 곳도 없습니다. 원래 없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진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속제를 통하여 진제에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눈앞에 현존하는 악기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제일의제(paramartha)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18품 9게를 봅시다. “다른 연(緣)에 의해서가 아니며, 고요하고, 희론들에 의해 희론되지 않고, 무분별이며, 다양하지도 않은 것이 진리의 상(相)이다.(aparapratyaya nta prapa cairaprapa citam/ nirvikalpaman n rthametattattvasya lak a am//)” "스스로 알며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 적적(寂寂)하고 희론이 없으며 다르지 않고 분별도 없다. 이것을 실상(實相)이라고 부른다.(自知不隨他 寂寂無戱論 無異無分別 是則名實相)" 희론이란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감정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은 제일의제가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렇다는 말입니다. 

 제일의제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로 산스크리트어로 paramartha입니다. parama는 뛰어나다는 뜻이고 artha는 뜻이란 말입니다. 출세간의 무분별지를 말합니다. 분별이 없는 절대적 지혜에 의해 자각되는 것이며 공성입니다. 개념적 사유 과정과 망상이 없는 상태로 적정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분별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잠재워진 상태가 적정입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망상도 없어지고 개념적 사고도 뛰어넘게 됩니다. 

 제일의제가 어떤 것인지 예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입중론>을 봅시다. “데바푸트라여 만약 승의로서 제일의제가 몸과 말과 생각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제일의제라 할 수 없다. 제일의제는 일체의 세속을 초월하고 불생불멸로서 말의 대상과 주관 앎의 대상과 주관을 떠난다.” <반야등론>을 봅시다. “여래께서 ‘문수사리여 승의를 설하여 보라.’고 하자 문수사리가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래는 ‘문수사리여 그대는 승의를 잘 설했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제일의제는 무자성입니다. 이것은 제15품 1게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자성(自性)이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生)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인(因)과 연(緣)이 모여 생기는 자성(自性)은 작위(作爲)된 것이 되리라.(na sa bhava svabh vasya yukta pratyayahetubhi/ hetupratyayasa bh ta svabh va k tako bhavet//)” "여러 인연 가운데 그 자성(自性)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자성(自性)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지어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성품, 나라는 것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성(空性)으로 공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모두 무자성입니다. 

 그 다음 15품 2게를 봅시다. “더우기 어째서 그야말로 자성(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자성(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svabh va k tako n ma bhavi yati puna katham/ ak trima svabh vo hi nirapek a paratra ca//)” “자성(自性)이 만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말이 되겠느냐? 자성(自性)이란 지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일컫는다.(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생긴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자성은 법성이며 불성입니다. 모든 것이 일심이며 하나라는 말과 통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무아(無我)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자성을 이해하고 인식하면 열반적정의 세계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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