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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판단의 사실성 비판, 4구 부정, 3구 부정, 2구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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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497회 작성일 21-07-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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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08 


제6품은 10게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이 ‘오염과 오염된 자에 대한 관찰(garaktapar k n ma a tha prakara a)’입니다. 나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은 오염되기 전의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12연기의 애로부터 시작해서 내 행위에 의해 업을 형성하고, 오염된 것을 만들어냅니다. 살아가면서 내 삶 속에 축적된 것은 모두 오염된 것입니다. 이런 오염과 오염된 자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제6품입니다. 여기서 ‘오온, 12처, 6계는 존재한다.’는 말을 논파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2구부정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오온, 12처, 6계가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고 정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론에서는 그것을 논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2구부정이란 말이 나옵니다. 앞서 우리는 4구부정을 했습니다. 4구부정이란 A다, A가 아니다, A면서 A가 아니다, A가 아니고 A가 아님도 아니다 이 네 가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부처님의 14무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긍정도 하지도 않고 부정도 하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3구부정도 있는데 이것은 행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나온 걷는 행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부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구부정은 문장 속에 들어있는 두 구절이 서로 모순되어 부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탐욕을 갖지 않는 탐욕자’란 말을 봅시다. 탐욕자가 탐욕을 갖지 않는게 말이 됩니까? 탐욕자가 탐욕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한다고 하면 탐욕은 그 사람을 조건으로 생기겠지만 그러면 탐욕자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이 다시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 탐욕자가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 도대체 누구에게서 탐욕이 생길까요? 이로 인해 탐욕을 갖지 않는 탐욕자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6품 1게를 봅시다. “만일 탐욕이 있기 이전에 탐욕과 관계없는 탐내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원래는) 그놈을 연(緣)하여 탐욕이 있으리라. (즉) 탐내는 놈이 존재할 때 탐욕이 있으리라.(r g dyadi bhavetp rva rakto r gatirask ta/ ta prat tya bhavedr go rakte r go bhavetsati//)” "만일 ‘물들이는 법(法)’을 떠나서 미리 물든 놈이 있다면 이 물든 놈으로 인하여 물들이는 법(法)도 생(生)해야 한다.(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탐내는 놈이 있다고 가정하면 탐욕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탐욕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의 해설을 봅시다. “부처님께서 탐욕이나 탐욕자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오온, 12처, 6계는 존재한다.’는 반론을 논파한다. 만일 ‘탐욕을 갖지 않는 탐욕자’가 탐욕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탐욕은 그 사람을 조건으로 생기겠지만 그러면 탐욕자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이 다시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오온, 12처, 6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유식도 근본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있다고 가정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갖지 않는 탐욕자는 비유하자면 물이 들어있지 않은 물통입니다. 물통이 있으면 물을 넣을 수 있듯이 탐욕자가 있으면 탐욕이 탐욕자에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탐욕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나’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물이 가득찬 물통이 되듯이 ‘탐욕을 갖는 탐욕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결국 존재하고 성립할 수 없는 것(탐욕을 갖지 않는 탐욕자)을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6품 2게를 봅시다. “그와 달리 ‘탐내는 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탐욕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1게와 2게의 전반부에서 밝힌대로) 탐욕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듯이 ‘탐내는 놈’에서도 그것은 절차가 똑같다.(rakte sati r ga kuta eva bhavi yati/ sati v sati v r ge rakte pye a sama krama//)” "물든 놈이 없다면 물들이는 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물들이는 법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물든 놈도 역시 그와 같다.(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해설을 봅시다. “다른 한편으로 탐욕자가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 도대체 누구에게 탐욕이 생기겠는가.(2구부정) 탐욕이 이미 존재하는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바로 앞에서 탐욕을 부정한 것과 같은 논법이 탐욕자에게도 적용되어 부정된다.” 탐욕자가 사전에 없다고 가정할 경우 탐욕이 생길 곳이 없어집니다. 물통이 없는데 물을 어디 담겠습니까. 탐욕도 부정되고 탐욕자도 부정되는 것입니다. 

 6품 3게를 봅시다. “그와 달리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sahiva punarudbh tirna yukt r garaktayo/ bhavet r garaktau hi nirapek au parasparam//)” "물든 놈과 물들이는 법(法)이 함께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든 놈과 물들이는 법(法)이 함께 하고 있으면 서로 상대하지 못한다.(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해설을 봅시다. “탐욕과 탐욕자가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동시에 일어나는 탐욕과 탐욕자는 서로 상대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주체인 탐욕자에 의해 대상에 접촉하여 탐욕이 일어납니다. ‘나’는 탐욕자가 되고 모든 대상은 탐욕이 됩니다. 여기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독립적인 존재로 봅니다. 이에 따라 보면 앞의 1게 2게에서 탐욕은 탐욕자가 있어야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탐욕은 이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탐욕이 탐욕자에게 의존하므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러므로 두 개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탐욕은 탐욕자를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탐욕자가 없으면 탐욕이 없게 됩니다. 존재하고 있는 것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탐욕을 일으키는 주체인 탐욕자가 탐욕을 일으킬 때, 대상이 탐욕이 됩니다. 여기에 황금이 산더미처럼 있어도, 탐욕자가 탐욕을 일으킬 때 황금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 그건 그냥 덩어리입니다.

 6품 4게를 봅시다. “만일 하나라면 결합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자체와 결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다르다면 도대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느냐?(naikatve sahabh vo 'sti na tenaiva hi tatsaha/ p thaktve sahabh vo 'tha kuta eva bhavi yati//)” "물든 놈과 물들이는 법(法)이 하나라면 하나의 법(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물든 놈과 물들이는 법(法)이 다르다면 다른 법(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해설을 봅시다. “나아가 탐욕과 탐욕자가 완전히 같은 경우 양자는 공존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공존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양자가 완전히 별개인 경우 완전히 별개인 것이 어떻게 공존하겠는가.(2구부정)” 대상과 주체가 완전히 같으면 공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달라야 공존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체가 있어야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별개로 아예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탐욕과 탐욕자는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6품 5게를 봅시다. “만일 하나인 중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합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되고 만일 다른 것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합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된다.(eka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p thak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만일 하나인데 합하는 것이라면 짝 없이도 합함이 있어야 하고 만일 다르면서 합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짝 없이도 합해야 하리라.(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설명을 봅시다. “양자가 완전히 같은 것일 때 공존 관계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와 같은 공존 관계는 관계되는 한 쪽이 없어도 성립해야 할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것일 때 공존 관계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와 같은 공존 관계 또한 관계되는 한 쪽이 없어도 성립해야 할 것이다.(2구부정)” 두 가지가 완전히 같은 경우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가 없어도 성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를 경우 다른 한 쪽이 없어도 다른 하나는 따로 성립해야 합니다. 같아도 성립하고 달라도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말은 모순됩니다. 

 “만일 서로 다른 것이면서 결합한다고 하면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가 어떻게 서로 각각인 존재로 성립되어 있을 수 있겠는가?(그러니 성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양자가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p thaktve sahabh va ca yadi ki r garaktayo/ siddha p thakp thagbh va sahabh vo yatastayo//) "만일 다르면서 합한다고 하면 물들이는 법과 물든 놈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양자의 상(相)이 미리 차이지고 난 다음에 결합하는 상(相)을 설하는 것이다.(若異而有合 染染者何事 是二相先異 然後說合相)"

 설명을 봅시다. “나아가 양자가 완전히 별개일 때 공존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 탐욕과 탐욕자가 각각 별개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만약 각각 별개임이 성립한다면 양자가 공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완전히 별개일 경우 관계성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공존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탐욕과 탐욕자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과 탐욕자가 완전히 별개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두 가지가 완전히 같을 경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공존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별개일 때 공존이란 말이 성립합니다. 결국 말이 모순되므로 두 가지 모두 부정되는 것입니다.

 “또는 만일 탐욕과 탐내는 놈 양자가 서로 다른 각각의 존재로 성립해 있다면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그 둘이 결합된 존재라고 상정하는가?(siddha p thakp thagbh vo yadi v r garaktayo/ sahabh va kimartha tu parikalpayase tayo//)” "만일 물들이는 법과 물든 놈이 미리 서로 다른 상(相)을 이루고 있다면 이미 다른 상(相)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합한다고 말하느냐?(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설명을 봅시다. “그러나 만일 탐욕과 탐욕자가 각각 별개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그대가 양자는 공존한다고 상정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각각 별개라는 것은 이미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떨어진 존재에게 같이 존재한다는 공존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이야기할까요? 다음을 봅시다.

 6품 8게를 봅시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처럼 결합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다시 결합된 존재임을 논증하기 위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희구한다.(p thagna sidhyat tyeva sahabh va vik asi/ sahabh vaprasiddhyartha p thaktva bh ya icchasi//)” "서로 다른 상(相)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합한 상(相)이라고 대답하려 하지만 합한 상(相)이 성립하지 못하니 (그대는) 다시 서로 다른 상(相)이라고 말하는구나.(異相無有成 是故汝欲答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설명을 봅시다. “그대는 한편으로는 ‘양자는 각각 별개의 것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가 공존한다.’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그 공존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그대는 ‘양자가 각각 별개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그것은 자기모순이다)” 우리가 각각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존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이 참으로 자기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분별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순들을 통해 ‘탐욕과 탐욕자가 존재한다.’는 말에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품 9게를 봅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결합되었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이런 것에서 어떻게 당신은 결합된 존재를 희구하느냐?(p thagbh v prasiddhe ca sahabh vo na sidhyati// katamasmin p thagbh ve sahabh va sat cchasi//)” "서로 다른 상(相)이 성립하지 않기에 결합된 상(相)도 성립하지 않는데 어떤 다른 상(相) 중에서 합한 상(相)을 말하려 하느냐?(異相不成故 合相則不成 於何異相中 而欲說合相)"

 설명을 봅시다. “나아가 탐욕과 탐욕자가 각각 별개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공존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 사이의 어떤 개별적인 차이(別離性, 각각 별개라는 것)를 전제로 하여 양자 사이에 공존관계가 있다고 그대는 주장하는가.” 주체와 객체 두 가지가 존재할 경우, 두 가지가 같을 경우에도 모순이 생기고 두 가지가 다를 경우에도 모순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가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존재의 본성은 공(空)이 되는 것입니다.

 6품 10게를 봅시다. “이와 같이 탐욕의 성립은 탐내는 놈과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탐욕과 같이 모든 법의 성립은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eva raktena r gasya siddhirna saha n saha/ r gavatsarvadharm siddhirna saha n saha//)” "이와 같이 염법과 염자(染者)는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은 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도 역시 이와 같아서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은 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如是染染者 非合不合成 諸法亦如是 非合不合成)"

 설명을 봅시다. “그러므로 탐욕과 탐욕자와 동시에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순서대로 선립하는 것도 아니다.(2구부정) 탐욕과 마찬가지로 모든 법은 동시에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순서대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2구부정)” 6품의 결론 부분입니다. 앞서 죽 나온 ‘모든 주체와 대상은 따로 존재하지도 않고 같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서 순서대로 성립한다는 말이란 다름이 아니라 별개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제9품은 관본주품(觀本住品)으로 근본 주체에 대한 관찰을 다룬 것입니다. 선행자의 고찰이라 이름하기도 합니다. 총 12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품의 주제는 ‘행위는 물론 감각기관이나 그것에 기반하는 마음의 작용이 속해야 할 주체(사람, 뿌드갈라)가 존재한다.’고 하는 독자부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독자부란 무엇일까요. 독자부는 설일체유부의 부파 중 하나입니다. 원시불교는 진보적인 대중부와 보수적인 상좌부로 나뉘어졌습니다. 보수적인 상좌부는 교리를 중시하는 부파입니다. 이후 상좌부는 설일체유부와 설산부로 나뉘어졌고, 설일체유부는 독자부, 학지부, 경량부, 음광부로 나뉘어졌습니다.

 9품 1게를 봅시다. “무릇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 등이 속하여 존재하는 것, 그것은 선행하여 존재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asya pr gebhya so 'st tyeke vadantyuta//)” "눈과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과 고락 따위의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바 그것을 바로 本住(근본주체)라고 부른다.(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설명을 봅시다. “독자부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행위 대상과 행위자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각기관, 청각기관 등의 감각기관, 혹은 감수 등의 마음작용이 존재하기 이전에 그것들이 이후에 속하게 되는 사람이 이미 존재한다.” 감각기관이나 감수작용 이전에 그것들이 속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이미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독자부의 주장입니다.

 9품 2게를 봅시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있어서 보는 작용 등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확립되어 있는 그 존재가 그것들에 선행하여 존재한다.(katha hyavidyam nasya dar an di bhavi yati/ bh vasya tasm tpr gebhya so 'sti bh vo vyavastita//) "만일 본주(근본주체)가 없다면 눈 따위의 법(法)을 소유한 놈은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미리 본주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설명을 봅시다. “왜냐하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시각기관 등이 속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것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람이 확립된 것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독자부의 주장입니다. 이에 용수는 반박합니다.

 9품 3게를 봅시다.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 또 감수(感受) 작용 등에 선행하여 확립되어 있는 존재, 그것은 어떻게 인지(認知)되는가?(dar ana rava dibhyo vedan dibhya eva ca/ ya pr gvyavasthito bh va kena praj apyate 'tha sa//)” “만일 눈 따위의 존재와 고락 따위의 존재를 떠나서 미리 본주(근본주체)가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若離眼等法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설명을 봅시다.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 등 그리고 감수 등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람이 확립된 것으로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기반해서 개념설정이 되는 것인가.” 그러니 감각기관이 먼저인가 사람이란 틀이 먼저인가하는 것입니다. 용수는 감각기관이 먼저라는 관점을 가지고 독자부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일반적인 관점도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나’를 인식하고 대상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9품 4게를 봅시다. “만일 보는 작용 따위 없어도 그것(=본주 本住)이 확립되어 있다면 그것들(=보는 작용 따위) 역시 그것(=본주) 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vin pi dar an d ni yadi c sau vyavastita/ am nyapi bhavi yanti vin tena na sa aya//)”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서 본주가 존재한다면 응당 본주를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설명을 봅시다. “예를 들어 시각기관 등이 없어도 만일 사람의 존재가 확립되는 것이라면 전자 사람도 또한 후자(시각기관 등)가 없어도 확립된 것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의심은 없다.” 감각기관 없이 사람이란 존재가 확립된다면 독자부의 말이 맞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식기관,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고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존재든 인식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야 만들어지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용수의 반박을 계속 봅시다. 

 9품 5게를 봅시다. “무엇인가에 의해 누구인가가 표시되며 누구인가에 의해 무엇인가가 표시된다. 어떻게 무엇인가가 없이 누구인가가 있겠으며 어떻게 누구인가가 없이 무엇인가가 있겠는가?(ajyate kena cit ka cit ki citkena cidajyate/ kuta ki cidvin ka citki citka cidvin kuta//)” "법(法=사람의 구성요소)이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있음을 안다. 사람이 있음으로 인하여 법이 있음을 안다. 법을 떠나서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을 떠나서 어찌 법이 있겠는가?(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설명을 봅시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무엇인가의 원인, 즉 오취온이라는 집착의 대상에 의해 나타나게 되고 어떤 원인의 존재는 무엇인가의 사람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무엇인가의 원인이 없으면 어떤 사람의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가. 무엇인가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원인의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가. 양자는 서로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나 감각기관이나 둘 다 본질로 가보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지만, 연기의 법칙은 성립합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사람과 같은 존재, 대상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각기관이 원인이고 사람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12연기를 보면 식이 명색, 육입을 만들어냅니다. 식이 작용한 연기로 인해 명식이 만들어지고, 명식이 성숙하여 안이비설신의란 능력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 능력체들을 통해 몸과 육신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만약 사람이 감각기관 이전에 존재한다면 식 이전에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근거, 원인에 식(감각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9품 6게를 봅시다. “보는 작용 등 일체의 것 배후에 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보는 작용 등은 (그 각각이) 다르다는 점에 의해, (그 작용하는 시기가) 다른 때라는 점에 의해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sarvebhyo dar an dibhya ka citp rvo na vidyate/ ajyate dar an d n manyena punaranyad//)” "눈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에 실로 그 본주는 없다. 눈이나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은 그 모습을 달리하여 분별된다.(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해설을 봅시다. “시각기관 등의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각기관 등의 어느 것이든 하나에 의해 각각 다른 때 각각 다른 인식주체의 존재가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란 바로 무명을 말합니다. 무명에 의해 오염되면 각각 다른 인식주체의 존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9품 7게를 봅시다. “만일 보는 작용 따위 모두에 선행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는 작용 따위의 각각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겠는가?(sarvebhyo dar an dibhyo yadi p rvo na vidyate/ ekaikasm thatha p rvo dar an de sa vidyate//)” "만일 눈 따위의 감각기관 모두가 본주를 갖지 않는다면 눈 따위의 감각기관 각각이 어떻게 능히 대상을 지각하겠는가?(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해설을 봅시다. “만일 시각기관 등의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각기관 등 하나하나가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 각각 별개의 인식 주체가 존재하는 일이 있겠는가.” 이것은 감각기관이 생기기 이전은 어떠한가에 대한 용수의 대답입니다. 감각기관도 선행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지각하게 됩니다. 그 선행하는 것이 바로 12연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무명입니다. 

 9품 전체는 식과 육입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몸이 만들어지려면 형상이 없는 감각기관 식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감각기관이 활성화되면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6품은 주체와 대상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9품은 주체 가운데 인식, 감각기관과 육체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6품과 9품의 문제는 결국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감각기관->인간의 육체->내가 인식하는 대상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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