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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제일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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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376회 작성일 21-07-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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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09


 중론의 내용은 공성과 가명으로 나뉩니다. 공성은 이 세상의 본질로 제일의제라고도 합니다.  중론에서는 현상의 공성, 개체의 공성, 시간의 공성, 속박의 공성, 열반의 공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가명은 세속제라고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결국 공이며 중도며 연기입니다.

 오늘 다룰 게들은 주로 개체의 공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체의 공성이란 주체작용의 부정을 말합니다. Pudgala(개인아), 아트만의 부정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트만은 ‘나’, ‘자아’를 말합니다. 결국 주체의 문제란 인식 주체의 문제로, 인식의 성립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금강경의 내용을 봅시다.

 “(3-3) 왜냐하면 수부티야. 보살은 존재하는 것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3-4) 그러므로 수부티야.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바로 앞에서 말한 아트만(atman)으로 자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상(我相)이라고도 합니다. 상대가 있다는 생각은 자바(java)로 개체, 대상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인상(人相)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은 푸드가라(pudgala)로 각각 개인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이라고도 합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삿트바-삼즈나(sattva-samjna)로 살아있는 것이 실존한다는 생각입니다. 수자상(壽者相)이라고도 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4상(四相)이라고 합니다.

 주체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주로 푸드가라의 부정과 연결됩니다. 푸드가라 즉 개인아의 부정이란 오온의 공성을 말합니다. 푸드가라는 윤회의 주체가 아니고 열반의 주체가 아닙니다. 아트만 또한 오온이 아니며, 공합니다.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트만 앞에 선행하는 존재도 부정됩니다. 이것은 불과 섶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섶이란 불쏘시개라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불이 섶을 태우는 것으로 보지만 실은 불이 섶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불과 섶은 서로 의존합니다. 원인과 결과 연기에 의해 불이 붙어 섶이 타는 것일 뿐, 불이 주체가 되어 섶을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나’란 주체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인과에 의해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오온을 비롯해 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수상행식은 우리의 정신작용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생명체의 업이 결합하여 개인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푸드가라입니다. 아트만은 나, 자아의 성품을 말합니다. 아트만이 나 그 자체를 말한다면 푸드가라는 각각 분별되고 다른 나를 말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4품은 오온의 공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4품 2게를 봅시다. “색(色)의 인(因)이 없이 색(色)이 있다고 한다면 무인(無因)의 색(色)이 있다고 집착하는 오류에 빠진다. 무인(無因)인 사물은 어떤 것이건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r pak ra anirmukte r pe r pa prasajyate/ hetuka na c styartha ka cid hetuka kva cit//)” "색(色)의 인(因)을 떠나서 색(色)이 있다면 이 색(色)은 인(因)이 없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인(因)이 없이 법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설명을 봅시다. “만일 물질적인 현상[색]이 원인[물질적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 지, 수, 화, 풍 등]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어디서건 원인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육체, 오온을 비롯한 이 현상의 물질 덩어리들은 지수화풍과 같은 그 구성요소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현상) 가운데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음 설명을 봅시다. “물질적 현상이 실체[자성]라면 원인[물질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다. 원인 역시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 현상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물질적 현상은 원인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앞서 나온 설명의 모순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물질적 현상이 실체(자성)를 가지고 있다면 따로 구성요소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가지고 성립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도 원인 없이 성립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인과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원인 그 자체, 구성 요소도 보면 그 자체가 원인이 되지만 이것도 현상에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 원인을 따라 올라가보면 태초의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현상에 성립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이 원인 없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현상이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품 4게를 봅시다. “색(色)이 존재한다면 색(色)의 인(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색(色)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색(色)의 인(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r pe s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r pr 'sa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만일 이미 색(色)이 있는 것이라면 색(色)의 인(因)은 소용없다. 만일 색(色)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색(色)의 인(因)은 소용없다.(若而有色者 則不用色因 若無有色者 亦不用色因)"

 설명을 봅시다. “물절직 현상이 이미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물질적 현상의 원인은 성립할 수 없다. 또 물질적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물질적 현상의 원인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물질적 현상이 이미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물질적 현상의 원인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본래 있는 것에는 원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애초부터 있었을 뿐입니다. 결국 물질적 현상은 그 자체가 자성이 되건 안 되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4품 6게를 봅시다. “인(因)과 같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因)과 같지 않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na k ra asya sad a k ryamityupapadyate/ na k ra asy sad a k ryamityupapadyate//)” "만일 결과가 인(因)과 같다고 하면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결과가 인(因)과 같지 않다고 하면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時事亦不然)"

 설명을 봅시다. “결과[물질적 현상]가 원인[물질적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과 비슷하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결과가 원인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현상의 모든 물질은 지수화풍과 같은 구성요소를 원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이것들은 서로 비슷합니다. 현상의 물질이란 구성요소들이 섞여 그 특징이 나타나고 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인과 결과가 성질이 비슷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거꾸로 원인과 결과가 아예 따로 놀아버리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원인과 결과가 비슷한 것도 모순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아예 다른 것도 모순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지만 원인과 결과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다음 설명을 봅시다. “물질적 현상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원인은 각각 독립 자존적인 실체가 아니라 서로 의존해 상대를 성립시키는 연기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오온이 각기 그것의 원인들과 인연하고 있는 연기적 존재이며 오온이 원인이 되어 구성되는 인격적 개체[개인아, pudgala] 역시 오온과 상호의존하고 있는 무자성적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의 업에 의해 그에 합당한 육체를 받으며 윤회합니다. 그 업과 육체도 보면 같은 것도 아니고 아예 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업과 육체는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의존적으로 얽혀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성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모두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호의존적이며 모순적입니다. 물질적 현상의 실체, 자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모두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때문에 자성이 없는 무자성적인 존재라고 중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있는 것은 자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은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성입니다. 

 16품 2게를 봅시다. 이것은 푸드가라(Pudgala)는 윤회의 주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개아(個我)가 윤회한다면 온(蘊), 처(處), 계(界) 들에서 다섯 가지로 조사해 보아도 그것(=개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윤회하겠는가?(pudgala sa sarati cetskandh yatanadh tu u/ pa cadh m gyam o 'sau n sti ka sa sari yati//)” "만일 중생이 왕래한다면 오음(五陰), 십이입(十二入), 십팔계(十八界) 중에서 다섯 가지로 추구해 보아도 (그런 개아 個我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왕래하는 자이겠느냐?(若衆生往來 陰界諸入中 五種求盡無 誰有往來者)"

 설명을 봅시다. “만일 개인아[중생, pudgala]가 윤회한다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 속에서 구해보아도 [개인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개인아가 주체이고 자성이 있다면 다음 생에 태어나도 이번 현생과 똑같은 개인아가 되어야 합니다. 즉 지금의 제가 다음 생에 태어나도 똑같은 저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현상을 보면 이번 생의 몸이 다음 생에도 똑같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생의 업이 다음 생의 새로운 육신을 만들어 그리로 옮겨갑니다.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지금의 저와 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개인아[pudgala]는 우리 안의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 사실상 윤회의 주체는 우리 속에 있는 업입니다. 이 생의 개인아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다른 개인아로 태어나게 됩니다. 현생을 통해 달라진 업에 의해 개인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16품 3게를 봅시다. “하나의 집착(取)으로부터 다른 집착(取)으로 윤회하는 자는 신체가 없는 자가 되리라. 신체가 없고 또 집착이 없는 자는 어떤 자이겠는가? 또 그것이 어떻게 윤회하겠는가?(up d n dup na sa saran vibhavo bhavet/ vibhava c nup d na ka sa ki sa sari yati//)” "만일 몸에서 몸으로 왕래한다면 몸이 없는 꼴이 된다. 그렇게 몸이 없다면 왕래도 없다.(若從身至身 往來卽無身 若其無有身 則無有往來)"

 설명을 봅시다. “만약 몸에서 몸으로 윤회해 간다면 윤회하는 것은 몸이 없을 것이다. 만약 몸이 없다면 윤회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윤회란 한 덩어리에서 한 덩어리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해체-> 업을 통한 재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업을 통해 뭉쳐있던 것이 해체되었다가 업을 통해 다시 결합됩니다. 현생의 개인아도 이 해체 과정을 통해 해체되었다가 다시 새로운 개인아로 결합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아도 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6품 4게를 봅시다. “형성작용들(諸行)의 경우에 있어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에 있어서도 또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sa sk r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sattvasy pi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제행(諸行)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중생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諸行若滅者 是事終不然 衆生若滅者 是事亦不然)"

 설명을 봅시다. “모든 형성된 것[제행, samskara]은 열반에 들어갈 수 없다. 중생이 열반에 들어가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형성된 모든 것은 열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현상의 모든 중생도 열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집착하고 번뇌 속에 살게 됩니다. 중생은 무아와 무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 중생도 무아와 무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한 열반에 들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들면 중생을 벗어나 보살, 부처가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특별한 과정 같지만 사실 진리와 현상은 같이 존재합니다. 해수 표면의 일렁이는 파도가 현재 우리의 현상이라면 심해 깊이 고요한 곳이 바로 본질의 세계입니다. 해수 표면과 심해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 속에 같이 있습니다. 이것이 일심(一心)으로 회통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끝없는 분리와 분열 속에 살다 갑니다. 

 16품 5게를 봅시다. “생과 멸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인 형성 작용들(諸行)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 앞에서와 같이 중생도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na badhyante na mucyanta udayavyayadharmi a/ sa sk r p rvavatsattvo badhyate na na mucyate//)” "제행의 생멸하는 모습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중생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諸行生滅相 不縛亦不解 衆生如先說 不縛亦不解)"

 설명을 봅시다. “모든 형성된 것은 생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중생 역시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색을 가리킵니다. 이 색은 연기에 의해 생합니다. 때문에 인과에 의해 멸합니다. 색 안에 우리의 개인아도 있는데 이 모두 인과에 의해 생멸하므로, 주체나 자성이 없습니다. 때문에 개인아는 열반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개인아란 업에 의해 형성된 개체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벗어나 열반의 주체가 되려면 무아와 무상을 인식해야 합니다. 무아와 무상을 제대로 인식할 때 열반이 됩니다.

 16품 9게를 봅시다. “‘취하는 요소가 없는 나는 열반할 것이다. 나에게 열반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자들은, 그들은 취하는 요소에 대한 커다란 집착이 있다.(nirv sy myanup d no nirv a me bhavi yati/ iti ye grahaste mup d namah graha//)” "만일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획득하리라. 만일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도리어 받아들임에 속박된 꼴이 된다.(若不受諸法 我當得涅槃 若人如是者 還爲受所縛)"

 설명을 봅시다. “‘나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는 자가 되어 열반에 들 것이다. 나는 열반을 성취할 것이다.’라는 사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리어 그러한 집착이 큰 사견이 된다.” 여기서 하는 말은 우리가 만약 열반에 매달리게 된다면 그것 또한 집착이란 말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도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집착은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무엇에 대한 집착이건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적당히가 필요합니다. 열반을 향해 가는 것은 좋지만 그것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절에 스님들이 수행하다 보면 상기병에 걸립니다. 기운이 머리 쪽에 쏠려서 생기는 병입니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깝다고 배터지게 먹거나 누가 준다고 배부르게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탈이 납니다. 어떠한 것에든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수행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죽 집중을 해야 합니다. 급한 마음에 몰아서 수행을 하다보면 효과도 안 나고 몸만 상하게 합니다. 집착이 앞서면 공부가 제대로 안 됩니다. 내 마음 속에 확신이 서 신념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진리로 흘러가게 됩니다.

 16품 10게를 봅시다. “무릇 열반을 꾸며내지 않고 윤회를 무시하는 일도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 윤회와 어떠한 열반이 분별되겠는가?(na nirv asam ropo na sa r pakar a am/ yatra kastatra sa s ro nirv a ki vikalpyate//)” "생사를 떠나서 따로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겠는가?(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설명을 봅시다. “열반을 내세우지 않고 열반을 버리지도 않는 궁극적 진리의 영역에 어떤 윤회, 어떤 열반이 있겠는가?” 가명, 가짜 이름을 분별하지 말고, 윤회나 열반이란 말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진정한 열반의 상태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자리, 진리의 세계에서 무슨 윤회가 있고 무슨 열반이 있겠습니까. 그곳에는 본래 성품 밖에 없습니다. 

 18품 1게로 가봅시다. 아트만은 오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아(아트만)가 오온(五蘊)이라면 (자아는) 생멸을 가진 것으로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모습(相)이 아닐 것이다.(tm skandh yadi bhavedudayavyayabh gdhavet/ skandhebhyo 'nyo yadi bhavedhavedaskandhalak a a//)” “만일 자아가 오음(五陰)이라면 자아는 생멸하게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음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음의 상(相)(을 띄는 것)이 아닐 것이다.(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

 설명을 봅시다. “만일 자아[我,atman]가 심신의 여러 요소[오온, skandha]와 동일한 것이면 그것은 생멸할 것이다. 만일 자아가 심신의 오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면 이러한 요소들의 특징[相, laksana]이 없을 것이다.” 만약 자아가 오온이라면 자아가 생멸하게 되고,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상을 띄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생멸을 반복하며 끊임없는 윤회를 합니다. 바로 육체, 즉 오온 안에 우리의 자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 무아와 무상을 깨달아 해탈을 하면, ‘나’를 깨트리게 되어 오온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해탈을 하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오온의 상을 띄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와 오온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18품 2게를 봅시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에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자아와 이기심이 소멸함으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관념도, ‘자의식’도 사라진다.(tmanyasati c tm ya kuta eva bhavi yati/ nirmamo niraha k ra am d tm tman nayo//)”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무아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若無有我者 何得有我所 滅我我所故 名得無我智)"

 설명을 봅시다. “자아(나)가 없는데 어찌 자아의 소유(我所, atmani, 나의 것)가 있을 것인가. 자아와 자아의 소유가 없으므로 자아의식도 없고 소유 의식도 없다.” 우리는 ‘나’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의 것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탐욕이며 집착입니다. 무아가 철저하게 되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소유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 소유란 말은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도, 자신의 집착을 채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비의 실천입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어떤 집착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없으면 색과 같은 육신과 수상행식도 없게 됩니다. 무아를 철저히 인식하면 이처럼 소유 의식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공성, 무자성의 터득이며, 곧 견성입니다.  

 내 몸을 두드려보면 어디를 두드리건 느낌이 옵니다. 하지만 다른 물체를 두드리면 느낌이 없습니다. 무자성을 알고 이 세상 모든 것과 하나가 되면, 모든 것에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물건을 두드려도 내게 두드리는 것 같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에서 자비가 나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내는 마음을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내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가 원래 없는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18품 4게를 봅시다. “바깥에 관해서도 자신에 관해서도 ‘나의 것’이라든가 ‘나’라는 관념이 소멸할 때에 집착(取)이 억제된다. 그런 소멸로 인해 (다시) 태어남이 소멸한다.(mametyahamiti k e bahirdh dhy tmameva ca/ nirudhyata up d na tatk ay jjanmana k aya//)” "안이건 바깥이건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집착(取)이 사라지게 되고 집착(取)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內外我我所 盡滅無有故 諸受卽爲滅 受滅則身滅)"

 설명을 봅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생도 없게 된다.” 끝없는 집착이 모든 것을 뒤틀리게 하고 만들어냅니다. 이로 인해 너와 나를 구분하게 되고, 번뇌망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집착이 없으면 그를 바탕으로 하는 생도 없게 됩니다. 생이 없으니 따라서 멸도 없게 됩니다. 생멸이 사라지니 윤회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면 해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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