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녹아든 기암골의 신선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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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3-12-05 17:30 조회 2,080 댓글 0본문
경주 남산 숨은 유적을 찾아서
불교에 녹아든 기암골의 신선 사상
심경 김혁배(통섭불교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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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뜬금없이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 2019년 기해년(己亥年)을 맞이하게 된다. 언제나 새 밑이 되면 보내는 아쉬움과 맞이하는 새 희망이 교차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들뜬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포석정을 지난다. 이곳을 지날 때면 어릴 때 배운 신라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서 상상이 된다.
포석정은 술을 먹고, 즐기던 연회장소라고 배웠고, 신라 천 년 사직의 막을 내리는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배우고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경주에 살면서 발굴과 연구를 토대로 단순한 연회장소가 아니고 성스러운 제사 의식을 행한 장소라는 학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말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춤을 추었으나 오직 왕의 눈에만 보였다고 한다. 왕이 따라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이 전해오면서 「어무상심」 혹은 「어무산신」이라고 한다. 이 남산신이 춤을 보여준 의도는 신라의 국운이 기욺을 경계한 것이라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
1999년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주변을 발굴했다. 그 결과 통일신라 이전의 제사시설로 추정되는 건축유적과 제사에 사용하는 많은 그릇과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포석정과 연관된 포사(鮑祀), ‘포석사’ (여기서 ‘사’는 제사를 뜻한다.)라는 단어가 나와,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다는 의견이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곳이 통일신라 이전에 왕실의 별궁이나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 의식이 행해지던 곳이라는 학설이 있다. 중요한 인물의 초상화가 있었다는 내용과 진골 이상 고위 신분의 결혼식을 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포석정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호국의 성지 역할을 한 것이란 추정을 할 수 있다.
견훤의 침략으로 인해 경애왕이 붙잡혀 최후를 맞았을 때는 음력 11월로 기록되어 있다. 양력으로 치면 오늘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 답사를 하러 가는 이 시점이 된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다. 추운 바람이 불고, 얼음이 어는 시기에 야외에서 술잔을 띄우며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이 베푸는 연회인데 따뜻한 방이나 안압지 같은 좋은 시설에서 하면 될 것이다. 왜 추운 한겨울 보온이 제대로 되지 않는 야외에서 행사를 진행했을까? 하고 의문점을 던져 본다.
신라는 원성왕 이후 잦은 왕권의 다툼으로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호족을 견제할 국력이 사라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통일 신라의 넓은 영토는 고려의 왕건이나 후백제의 견훤에게 내어 주고, 경상도 일부분에서만 명맥을 유지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한편으론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고, 자신은 이 겨울 포석정에 직접 행차하여 마지막 남은 신라의 힘을 호국신(남산신)께 빌다가 견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기울어가는 신라를 상상하면서, 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 포석계 기암골로 가기 위해서 포석정의 담장을 지나니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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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계는 포석정에서 남산을 바라봤을 때 남산의 사자봉에서 발원하여 내려온다. 북쪽에서부터 윤을골, 포석골, 기암골로 골짜기가 형성되며, 이 세 골짜기가 포석에서 합쳐 기린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2.5km의 골 깊은 계곡이다.
오늘은 포석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기암골을 탐방할 계획이다. 기암골은 황금대와 부엉더미가 바위 능선을 조성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정상에는 신선과 관련된 각종 유적이 남아있는데 바둑을 두었다는 바위가 있다.
『동경잡기』에 보면 바둑바위는 금오산에 있고, 돌을 깎은 것이 바둑판 모양과 같다. 신라시대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전설로 인해서 마을 사람은 계곡에 있는 절터를 모두 장구(將棋)절터라고 부르고,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학자에 의해 기암곡(棋岩谷)으로 불렀다 한다. 이 골짜기의 또 다른 이름은 배실골이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왜 배실이라 불렀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글의 중간 부분에서 그 근거를 적어 본다.
주차장에서 남산순환도로를 따라가면 포석정 담장이 끝나는 부분 10m 전방 우측에 텐트촌인 가족쉼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계곡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이 길을 따라올라 가면 우측 산기슭에 지마왕릉으로 인해 솔밭이 형성된 한적한 길이다. 심호흡하고 산림욕을 즐기며 걷다 보면 과수원의 대문을 만나게 된다. 과수원 대문 우측에 탱자나무 울타리 길을 걷다 보면 울타리가 끝나는 부분에 큰 축대가 있는데 이곳이 기암골 제1사지 일명 장구절터이다.
축대의 높이는 3~5m 정도가 되며 길이는 남북으로 대충 10m 정도로 보인다. 축대 위에는 넓은 터가 조성되었고, 지금도 장대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 터에서 편단우견에 항마촉지인상을 한 머리가 없는 석조 석가여래좌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경주 국립 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기암골 제2 절터로 가기 위해 숲속 길을 걸어야 한다. 계곡을 따라 400m 정도 되는 이 길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지금 겨울이지만 머리를 들면 푸른 솔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나 좋다. 나무 등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또한 싱그럽다. 고개를 숙여 소나무 등걸 주위를 살펴본다. 겨울이지만 회양목의 푸름이 소나무 갈비와 대비되어 싱싱한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 숲속을 혼자 다 가진 듯 기쁨에 한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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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 길이 끝이 나면 또 신우대가 긴 터널을 만들어 답사를 오는 방문객을 환영하며 맞이한다. 잡목과 신우대 사이로 대형 축대가 보인다. 눈짐작으로 남북으로 20m 정도 높이는 3m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축대 위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제2 절터다. 이곳은 억새나 찔레 신우대 칡넝쿨로 얽혀져 있어 여름에는 자세히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같이 모든 잡목이 잎을 떨어뜨린 늦가을 이후에서 초봄까지 답사를 해 보면 넓은 터와 축대를 나름대로 상세히 볼 수 있다.
이 터 바로 위에 또 다른 축대가 보인다. 대형축대로⤶ 형태로 축조했다. 우측면의 축대는 계곡에 접해 있으면서 계곡과 일직선의 형태로 쌓았다. 앞면의 축대를 조성하는 데는 많은 공을 들인 것 같다. 높이 5m 정도의 축대를 쌓기 위해 3번 정도 계단을 만들어 들여쌓기를 했다. 전체적으로는 4단인 것 같다. 아래쪽 2단은 석축의 기초로 막돌을 사용했다. 3번째 단이 주 석축이 되는 것이다. 이 높이가 3m 정도 된다. 마지막 4단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 축대로 생긴 터에 탑을 조성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0년과 2002년 2차에 걸쳐 발굴 조사하고 그 중 부재가 많이 남아 있던 동탑을 우선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반의 유적으로 추정하는 탑이다. 서남산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쌍탑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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