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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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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448회 작성일 23-02-2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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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김종욱(동국대학교)


서양철학과 불교에서 지혜 – 소피아와 반야


서양철학에서는 지혜를 소피아라 하고, 불교에서는 지혜를 반야라 한다. 지혜를 바라보는 양자의 관점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소피아로서의 지혜


  그 어떤 것을 잘 아는 것을 일러 '지식'이라 하기도 하고, '지혜'라 하기도 한다. 이 때 그 앎이 '어떻게 그런지에 관한 앎(know how)'일 때는 흔히 지식(knowledge)이라 하는 반면, 그것이 '왜 그런지에 관한 앎(know why)'일 때는 지혜(wisdom)라고 부른다. 즉 지식이 방법과 기술에 관한 것이라면, 혜는 의미와 가치 혹은 이유나 근거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명 혹은 삶(life)에 관한 앎일 경우, 지식은 어떻게 생명체는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 되며, 생명체는 신진대사 작용과 생식 작용과 진화 작용을 하며 살아간다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 된다. 이에 비해 지혜는 그런 작용들을 하는 생명체나 인간이 도대체 왜 사는 것인지, 또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그리고 이 우주에서 그런 생명체나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지 등에 관한 것이 되어, 삶의 의미나 가치를 해명하는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지식이 일상이나 현상을 기술하는 차원의 것이라면, 지혜는 본질이나 본체를 탐문하는 차원의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이익과 관련된 유용성의 측면으로 쉽게 이어지는데 반해, 지혜는 특정한 이익을 넘어선 총체적인 사고 방식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지혜란 삶 전반이나 우주 전체와 관련된 총체성 속에서 개체의 존재 의미와 근거를 해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지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삶이나 우주의 질서 내지 이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모든 심오한 사상들은 이러한 총체적인 지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에선 그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라 부르고, 이런 소피아에 대한 한없는 갈망과 애정(phil)을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철학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선 그런 지혜를 반야(般若, prajñā)라 부르며, 이런 반야의 최고 완성(波羅蜜, pāramitā)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ñā pāramitā)이라고 하여, 이것의 완벽한 구현을 불교는 지향한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세상의 총체적 본질에 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본질을 서양철학의 발원지인 플라톤(Platon)의 사상에선 이데아(idea)라고 불렀다. 원래 모양이나 형상을 뜻하던 이데아는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 하는 본 모양이나 원형이 되는 본(本, paradeigm)을 의미하며, 이 세상의 사물들은 이런 각각의 이데아를 본뜨고 본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을 하나 그리고 있다고 하자. 기하학에서 원은 임의의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을 이은 선과 그 내부의 면이라고 정의된다. 또한 점은 위치는 있으나 크기는 없는 것으로, 선은 길이는 있으나 넓이는 없는 것으로, 면은 길이와 넓이는 있으나 깊이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점을 찍고 길이를 표시하기 위해 선을 긋고, 넓이를 표시하기 위해 면을 그리지만, 그런 점과 선과 면이 실제로 종이 위에서 그려지는 순간, 점은 크기를, 선은 넓이를, 면은 깊이를 갖게 된다.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본래의 원과 그것을 본떠 그려진 원 사이의 이런 관계가 곧 본체의 이데아와 현상의 사물 사이의 관계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그려지는 원은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이상적인 원을 본으로 하여 그것을 모방할 수밖에 없지만, 현실의 원은 이상의 원을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고, 현실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 사이에는 괴리의 틈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현실의 원이 지워져 없어지는데 반해, 이상의 원은 사라져 없어지지 않으므로, 현실은 덧없는 변화를, 이상은 영원히 고정된 불변을 함축한다. 이처럼 개별 사물이 생성 소멸 변화해도, 그것의 보편적 본질로서의 이데아는 영원 불변하고, 이렇게 영원 불변하는 보편자를 인식하는 것은 물질 작용의 육체가 아닌 정신 활동의 이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변화 소멸하는 물질이나 육체의 현상계와 불변 불멸하는 정신이나 이성의 본체계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세상은 가변(可變) 가멸(可滅) 가사(可死)의 현상 세계와 불변(不變) 불멸(不滅) 불사(不死)의 본체 세계로 나누어지고, 이런 구분에 맞추어 순간과 영원, 우연과 필연, 개별적 다수와 보편적 하나 등이 분립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 철학에서 지혜란 본체를 식별하여 현상과 구별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인데, 불교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지혜는 일종의 차별지(差別智)나 분별지(分別智, savikalpa-jñāna)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 이 세상의 총체적 본질이나 그 의미에 관한 앎을 지혜라 하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라고 불렀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적 기운이 쇠잔해지고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자, 그리스에서 인간의 지혜는 중세에선 신의 지혜로 바뀌고, 소피아는 사피엔티아(sapientia)가 된다. 소피아적 지혜의 대상이 우주 만상의 이치이듯이, 사피엔티아로서의 지혜도 세계의 질서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사피엔티아는 어디까지나 ‘신적인 지혜’(divina sapientia)이기 때문에, 그런 지혜의 내용도 신의 세계계획이나 섭리와 그로 인한 만물의 완전한 질서나 영원한 법칙 등이 된다. 이제 지혜는 한갓된 피조물인 인간의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에게나 합당한 것이 되고, 지혜가 떠난 그 자리를 인간은 신앙으로 채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신앙으로써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 댓가로, 창조주인 신은 나머지 피조물들인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의 권한을 인간에게 위임한다. 인간은 위로는 신앙을 통해 신을 숭배하고 아래로는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배한다는 기독교적인 이런 위계의 구도는 지혜의 근저에 지배의 의지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세상을 창조한 신이 전체 세계의 시원이라는 신중심주의(theocentrism)와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이 나머지 피조물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처럼 신중심주의에 기대어 인간중심주의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에도 신에 의해 보장된 인간의 자연 지배권은 흔들림 없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우리는 지혜가 자연의 지배로 강화되는 이런 근대적 권력화 과정의 시작을 베이컨(Bacon)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말했을 때, 그 앎이나 지식은 과학으로서의 학문을 지칭하고, 그 힘은 이런 과학에 의한 자연 지배의 능력으로서의 권력을 가리킨다. 결국 “지식은 권력이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던 ‘지혜’가 특정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방법과 기술을 찾는 한낱 ‘지식’으로 전락하고, 이런 지식이 어떤 타자의 지배를 위한 권력으로 절대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어느 철학사가가 “현대문명은 지식은 압도적으로 많으나 지혜의 깊이는 놀랄 정도로 얕다”고 진단한 것이 어느덧 현실화되는 단초를 우리는 여기서 목도하게 된다. 더욱이 베이컨이 과학의 목적은 첫째, 신을 찬미하는 것이고 둘째, 인간을 위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지혜의 이런 천박화 과정 밑에는 인간에 의해 거행되는 숭배와 지배의 이중주가 여전히 가로놓여 있음을 역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가 지식과 등치되고 그런 지식이 지배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근대 철학의 실질적 비조인 데카르트(Descartes)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에게서 지혜란 “모든 기술들을 발명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일체 사물들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이런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 이것은 자연이란 ‘과학을 통해 이용가능한 정복의 대상’이라고 본 베이컨과 동일한 맥락에서의 귀결점이지만,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됨의 조건을 자아의 주체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야말로 근대적 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그의 유명한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나의 존재의 근거를 나의 사유에 둠으로써 자아와 자아의 사유 능력인 이성을 진리의 절대 부동의 기초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을 지닌 자아가 주체가 되어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등극하자, 그 맞은 편에 있는 자연은 감성에 의해 타자화된 객체로서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자아와 타자,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등이 주체와 객체로서 분열한다. 그리고 이런 분열은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인과 유색인, 산업과 농업, 진보와 퇴보, 남성과 여성, 중심과 주변 등으로 대립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생태계는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상의 경로를 반추해 볼 때, 서양에서 지혜의 역사는 지혜가 지식으로 되고 그 지식이 지배의 권력이 되는 과정이며, 그 밑에는 언제나 분별과 분리라는 양분화의 논리가 잠복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분별은 차별을 낳고 그 차별은 다시 폭력적 지배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식 지혜의 변천 과정은 오히려 ‘분별의 종식’(無分別) 없이는 자비의 평화도 없다는 불교적인 깨달음을 인류 구원의 메시지로 부각시키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2. 반야로서의 지혜


일상의 이익이나 표피적 현상을 넘어, 삶의 본질과 만물의 이치를 탐문하여 아는, 그래서 세상 전체에 대해 총체적인 사고로 통찰하는 것을 일러 동서양에서는 모두 지혜라 하였다. 특히 서양에서는 이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나 사피엔티아(sapientia)라고 불렀는데, 합리성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성을 소피아라고 한다면, 섭리를 주관하는 신의 전지전능성은 사피엔티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든 신의 지혜든, 가변적 물질 세계와 불변적 정신 내면을 현상과 본체 또는 객체와 주체라는 식으로 양분한 다음, 본체의 장악을 통해 현상의 세계를 힘과 권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차별적 분별지’였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을 지혜라고 할 때, 불교에서는 이것을 반야(般若, prajñā)라고 부른다. 이것은 ‘뛰어오른다’는 뜻의 접두사 pra와 ‘인식한다’는 뜻의 jñā가 합쳐진 말로서, 지혜 직관 통찰력 인식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는 일상적 지각이나 개념적 분별을 뛰어넘어, 보다 깊은 불이(不二)의 근원적 실상으로부터 체험되는 직관적 통찰력이며, 따라서 주객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다. 즉 일상의 지식과 분별에서 뛰어올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적 지혜로서의 반야인 것이다. 결국 반야란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만하는데, 이 때 세상의 이치를 다르마(dharma, 法)라고 한다면, 그 다르마의 내용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다시말해 불교적으로 볼 때 세상은 연기를 이치로 하여 전개되어 가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들(衆緣)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和合) 형성되는 것(生起)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연기로서 받아들이는 지혜(攝受緣智)가 곧 ‘법에 의지하는 지혜’(法所依智)이다. 이렇게 ‘법에 의지하는 지혜’는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런 관찰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원리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지혜는 연기법에 따른 통찰이며, 그 내용은 세상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인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법구경(제 277, 278, 279 게송)에 나타난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도 확인된다.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라고 지혜로써 관찰하는 자는 괴로움을 진정으로 싫어하게 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형성된 모든 것’이란 ‘조건지어진 모든 것’ 또는 ‘인연따라 형성된 모든 것’, 즉 한마디로 ‘연기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생멸을 언제까지나 반복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매 찰나마다 생멸을 거듭하는 것들에 대해 영원 불변성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無常)이고, 결코 변치 않고 동일하게 남아있는 자아와 같은 것이 실체로서 따로 존재한다고 여길 수도 없는 것(無我)이며, 이렇게 무상과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무시이래 훈습된 사유 습관(業)에 따라 불변적인 신이나 동일한 자아를 내세워 이를 토대로 집착과 소유를 일삼지만, 실상과의 이런 괴리로 인한 상실감은 어쩔 수 없이 삶의 고통(苦)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연기이므로 무상이고 무아이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할 때 삶은 고통일 수 밖에 없다는 이와같은 지혜의 통찰은 무상한 것에 대해 항상하다고 착각하는 전도, 괴로운 것에 대해 즐겁다고 집착하는 전도, 무실체적인 것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강변하는 전도 등 일체의 전도 망상을 바로 잡아 우리를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연기하므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는데, 그 후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무상과 무아는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 즉 연기이므로 자성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공이라는 것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비록 연기하여 오온 가합의 무아라 하더라도, 오온(五蘊)과 그것이 확장된 75가지의 요소들 자체만은 삼세에 걸쳐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자성(自性, svabhāva)을 지닌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경향을 이른바 소승이라 비판하여 등장한 반야경을 위시한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연기하기 때문에, 즉 무수한 조건들이 끝없이 개입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계속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연기적 추세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떨어져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자성과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는 연기이므로, 고정 불변의 실체성이 결여된 무자성의 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직설인 연기법이 불멸후 오백여년이 지나 정립된 공사상과 무리 없이 연결될 경우에만,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의 시공적 차이를 극복하고 불설의 바람직한 계승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초기불교적 지혜의 내용이던 연기관(緣起觀)이 대승불교에 이르러 공관(空觀)으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실체성이 결여된 무자성의 공으로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이 찰나 생멸을 거듭하며 인연따라 잠정적으로 성립된 가립태(prajñapti)일 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며, 이렇게 실유가 아니기에 고정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非有), 인연따라 가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없는 것만도 아니다(非無)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인(因)과 연(緣)이라는 직․간접의 조건들에 맞춰 상호의존하여 생멸을 거듭하므로, 전혀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不生),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만도 아니다(不滅)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空)․가(假)․중(中) 또는 비유비무․불생불멸의 중도로 보는 중관(中觀)적 공관이 불교적 지혜인 반야(般若)이다.


그리고 이런 지혜는 무시이래 지속된 번뇌의 훈습에 따라 계속 분별하는 우리의 의식을 보리(菩提)와 열반으로 전환해서 얻어진 지혜(轉識得智)이며, 무수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바(依他起性), 여기서 주관과 객관을 대립시켜 허망하게 분별하여 어느 일방에 집착하는 것(遍計所執性)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대립을 가환(假幻)으로 여겨, 아는 주체(能知)와 알려진 객체(所知)가 하나의 일체가 되어 분별이전의 것으로 원만하게 성취된 실상(圓成實性)이 달성되는 지혜이다. 이렇게 변계소집성이 원성실성으로 변혁된 지혜 상태에서는, 우리의 누적된 잠재의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大圓鏡智)로, 우리의 뿌리깊은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은 나와 남사이의 차별을 여의는 일여(一如)의 지혜(平等性智)로, 일상의 현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意識)은 비실체의 공으로 묘하게 있는(妙有) 실상을 정통하게 관찰하는 지혜(妙觀察智)로 전환된다. 이처럼 삼성(三性 → 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가 바로 유식(唯識)에서 바라보는 불교의 지혜이다.


그런데 중관적으로 보건 유식적으로 보건 참다운 지혜는 번뇌와의 일체 관련을 이미 끊어버린 득도 상태에서의 무루지(無漏智) 또는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할 수 있는데, 진정한 보살은 중생 구제를 위하여 훌륭한 방편을 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위해 평소와 같이 분별하는 자비로운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무분별의 득도 후에 이루어지는 분별지이기에 ‘후득(後得)의 유분별지(有分別智)’ 혹은 줄여서 ‘후득지(後得智)’라고 한다. 이렇게 무분별지이면서 후득의 유분별지가 된다는 것이 바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도 그 마음을 내는 것’(應無所住而生其心)이고, 무심(無心)이 자비를 매개로 진심(眞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임과 동시에 언제나 자비를 위한 지혜라는 점은, 분별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지배로 이어지는 일종의 ‘차별적 분별지’로서의 서구적 지혜, 즉 소피아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지배 없는 지혜, 그래서 우주의 모든 존재자를 향해 열려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자비로운 개방된 지혜, 그것이 불교의 지혜 곧 반야이다.


이처럼 반야의 통찰은 해탈과 자비라는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된 종교적인 지혜라는 점에서 단순히 학문적인 철학적 지혜와도 다른 것이며, 어디까지나 ‘계를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戒所成智)이고 ‘선정을 닦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修定所成智)라는 지극히 실천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이론적이기만 한 지혜와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야의 지혜는 연기법에 따라 일체를 상호의존하여 연결된 전체로 보아, 특정한 입장과 이익에 맞춰 사물의 실상을 개념적으로 분화 고정시키지 않는 무분별적인 중도의 태도라는 점에서 지극히 편벽된 분별의 지혜와도 다른 것이다. 소피아나 사피엔티아처럼 분별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지배를 조장하며 지배가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진정한 지혜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분별의 해악이고, 인간의 앎에 내재한 이런 독소는 분별 이전의 총체적 실상을 회복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 분별된 양항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분별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전체를 실상 그대로 보는 것이 반야적 지혜에서 통찰되는 총체성이다. 여기에서는 현상과 본체가 차별되지 않고, 주체와 객체가 분열되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이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연기적 총체성의 터전에서만 지혜는 치유이자 구원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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