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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인도철학의 만남2(임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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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422회 작성일 23-02-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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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초기불교

  자이나교에 비해 약간 늦은 동시대에 출현한 불교 역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나스띠까(nāstika)의 사문(samaṇa) 전통에 속한다. 이전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업 관념은 초기불교에 이르면서 더욱 정교해진 양상으로 나타난다. '쭐라깜마비브항가숫따(Cūḷakammavibhaṅgasutta)'에는 “중생들은 업을 소유하며, 업을 상속받으며, 업을 모태로 하며, 업에 묶이어 있으며,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들이다. 업은 중생들을 천하거나 귀한 존재로 구분되게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Kammasak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ā. Kammaṃ satte vibhajati yadidaṃ hīnappaṇītatāyāti.” MN. III. 203쪽.

 이 대목은 초기불교의 업 관념을 대변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있어서 업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업 개념이 현실의 차별상을 설명하는 원리로 확고히 정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마하깜마비브항가숫따(Mahākammavibhaṅgasutta)'에 따르면,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좋거나 나쁜 세상에 ‘이미 태어났다(upapanna)’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현재나 미래에 ‘태어난다(uppajāti)’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 [사악한 업으로 인해] 지옥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 [사악한 업으로 인해] 지옥에 태어난다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주장은] 여래가 지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의 지혜와 다르기 때문이다. ( ....nirayaṃ upapannan ti. Idam pi ssa anujānāmi.....  nirayaṃ upapajjatī'ti. Idam assa nānujānāmi...  Taṃ kissa hetu: aññathā hi ānanda, tathāgatassa mahākammavibhaṅge ñāṇaṃ hoti.)” MN. III. 212쪽.

 이것은 초기불교의 업 해석이 이미 결과를 낳은 과거의 업만을 불변의 사실로 인정했을 뿐, 미래나 현재의 삶까지 그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고는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현재 의 삶에서 각자가 처한 조건은 업의 결과로서 인정하되, 현재나 미래의 삶 자체가 그것에 의해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 해석은 확고한 주체적․비결정론적 입장에 근거한 것으로, 전생의 업이 미래의 삶까지를 결정한다는 '우빠니샤드'의 숙명론적 업 해석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받아야 할 업을 짓고서 그것을 그대로 받나니,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청정한 행위를 닦으면 바르게 고통을 종식시킬 기회를 얻는다.”는 '로나팔라박가(Loṇaphalavagga)'의 언급 또한 이러한 주체적․비결정론적 업 해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을 그대로 받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청정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바르게 고통을 종식시킬 기회를 얻지 못한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받아야 할 업을 짓고서 그것을 그대로 받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청정한 행위를 닦으면 바르게 고통을 종식시킬 기회를 얻는다.(“yathā yathā'yaṃ puriso kammaṃ karoti, tathā tathā naṃ paṭisaṃvediyatī'ti. Evaṃ santaṃ bhikkhave brahmacariyavāso na hoti. Okāso na paññāyati sammā dukkhassa antakiriyāya.....  yathā yathā vedanīyaṃ ayaṃ puriso kammaṃ karoti, tathā tathāssa vipākaṃ paṭisaṃvediyatī'ti. Evaṃ santaṃ bhikkhave brahmacariyavāso hoti, okāso paññāyati sammādukkhassa antakiriyāya.)” AN. I. 249. 


  또한 초기불교는 자이나교와 달리 업을 물질의 일종으로 보지 않고 내면적인 의도(cetāna)의 차원으로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난 연후에 신체와 언어와 마음으로써 업을 짓는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N. III. 415쪽.

 예컨대 누군가를 죽일 의도를 가졌다면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업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이점은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만 상응하는 업의 결과가 뒤따른다고 보았던 제식주의 및 자이나교와 전혀 상이한 맥락이다. 따라서 Nyanatiloka는 불교적 업 해석의 독특성을 행위의 결과라든가 운명 따위를 배제한 의도(cetāna, volition) 자체에서 찾는다. Nyanatiloka, Buddhist Dictionary; Manual of Buddhist Terms and Doctrines (2000), 77-79쪽. 

 실제로 '니까야'에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하나니, 의도하고 난 연후에 신체와 언어와 마음에 의한 업을 짓는다”는 언급과 함께, “Cetanāhaṃ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N. III. 415쪽.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 manokamma)’이 가장 중요하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그와 같이 신체로 지은 업(身業)이 아닌, 그와 같이 언어로 지은 업(口業)이 아닌, 마음으로 지은 업(意業)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manokammaṃ mahāsāvajjataraṃ paññāpem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No tathā kāyakammaṃ no tathā vacīkammanti.)” MN. I. 373쪽 이하. 

 이로써 업 개념은 외부적인 행위의 차원을 벗어나 내면의 심리까지를 포함하게 되는 내용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한편 불교의 교리체계 안에는 업에 못지 않게 중요한 가르침으로서 무아설(anatta-vāda)이 존재한다. 항구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attan) 혹은 영혼(jīva)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아설은 불교교리사의 중심부에 자리하면서 윤회라든가 업의 문제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쟁을 야기하였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적 해답은 단일한 실체로의 자아가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paṭiccasamuppāda)의 규칙에 종속된 일련의 사태가 간단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무아와 윤회의 교리는 오히려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루게 되고 또한 업은 양자의 실제 내용이 된다. 연기의 규칙에 종속된 일련의 간단없는 사태란 곧 업의 흐름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적 업 개념의 이해는 무아와 연기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Nyanatiloka, 앞의 책, 79쪽 참조.

  

  초기불교의 무아윤회설은 업에 의한 유전의 과정을 12단계에 이르는 인과의 사슬로 표현한 십이연기설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무명(無明)→지음(行)→의식(識)→정신․육체(名色)→6가지 감각영역(六入)→접촉(觸)→느낌(受)→욕망(愛)→집착(取)→있음(有)→태어남(生)→늙음․죽음․근심․고통․번민(老死憂悲苦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각각의 지분들은 뒤이어 나타나는 지분들의 인과적 계기를 부여하며, 고통스러운 실존 상황이 발생하는 조건(paccaya)으로 기능한다. 즉 늙음․죽음․근심 등은 그것을 촉발하는 선행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며, 그들 각각을 관통하는 단일한 형이상학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Puligandla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항구적인 영혼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존이 인과적 조건 아래에 놓여 있는 부단한 흐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지수 옮김, 앞의 책, 68-73쪽 참조.

 바로 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7번째 지분인 느낌에서 8번째 지분인 욕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인데, 느낌의 존재는 욕망 발생의 조건으로만 기능할 뿐이며 욕망 자체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

  느낌이란 개인의 기호라든가 취사선택의 여부와 무관하게 이전에 지은 업의 결과로서 다가온다. 즉 무명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전 지분들의 연쇄적 계기를 통해 자연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느낌 자체는 새로운 업을 일으키는 작용력을 갖지 않는다. 특정한 느낌이 발생하면 그것에 대해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기 십상인데, 바로 그것이 새로운 업으로 연결되는 능동적인 작용력을 지닌다. 따라서 느낌에 대해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면 있음․태어남․늙음․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단절할 수 없고, 반대로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을 차단하여 새로운 업의 지음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기불교에서는 업에 의한 받음과 지음의 순환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구체화하였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느낌은 일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 현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직시할 때 비로소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무명이 종식된 지혜(vijjā)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비자빠하나숫따(Avijjāpahānasutta)'에는 “눈(眼)의 접촉(觸)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이 존재하나니, 바로 그것을 무상한 것으로 알고 관찰하면 무명이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난다.”고 기술한다.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aniccato jānato passato avijjā pahīyati, vijjā uppajjati”. SN. IV. 31쪽.

 이 대목은 이상에서 언급한 초기불교의 교리체계와 수행론을 집약한 것으로, 느낌에 대한 통찰이 무명의 제거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무명은 고통스러운 실존이 전개되는 최초의 근원으로서, 그것이 존재하는 한 고통 발생의 실제적 계기가 되는 ‘업에 의한 지음(行, saṅkhāra)’은 계속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음(行, saṅkhāra)이란 12연기의 2번째 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통상 ‘신체에 의한 업(kāyakamma)’, ‘언어에 의한 업(vacīkamma)’, ‘마음에 의한 업(manokamma)’의 3가지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존자 비사카여, 3가지 지음이 있나니, 신체에 의한 지음, 언어에 의한 지음, 마음에 의한 지음이 그것이다.(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 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ti., MN. I. 301쪽)”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욕망을 벗어나 무명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초기불교 수행론의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업에 반응하는 개인의 태도는 2가지 양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느낌의 형태로 드러나는 그것에 대해 욕망하고 집착하여 새로운 업의 지음으로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느낌의 실체를 깨달아 무명을 제거하고 모든 유형의 ‘업의 지음’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범부 중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앞에서 살펴본 '쭐라깜마비브항가숫따'의 내용이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법구경(Dhammapada)'에 나타나는 다음 구절을 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무명을] 소멸한 자에 대해서는 [존재와 비존재를] 헤아릴 기준이 없으며 말할 만한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법이 완전히 끊어졌고 언어의 길 또한 완전히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Atthaṃ gatassa na pamāṇam atthi, Yena naṃ vajjuṃ taṃ tassa natthi, Sabbesu dhammesu samuhatesu Samuhatā vādapathā pi sabbe ti.” Sn. 1076송, 207쪽.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업에 대한 반응 여부에 따라 업에 묶인 존재가 되기도 하고, 혹은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가르친다. 즉 범부 중생에게 있어서 업에 의한 구속과 속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범부의 차원을 벗어난 존재에게는 일반적인 인식의 기준(pamāṇa)이 적용되지 않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업의 구속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성에 도달한 수행자는 설령 자살을 하더라고 업을 받지 않는다는 '고디까 숫따(Godhikasutta)'의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위한다. [비록 자살을 했지만, 완성에 도달한] 고디까는 욕망을 뿌리 채 뽑고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Evaṃ hi dhīrā kubbanti nāvakaṅkhanti jīvitaṃ, Samūlaṃ taṇhaṃ abbuyha godhiko parinibbutoti.)” SN. I. 121쪽; “어디에 [자살한] 고디까의 의식이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kattha godhikassa kulaputtassa 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nti. Appatiṭṭhitena ca bhikkhave viññāṇena godhiko kulaputto parinibbutoti.)” SN. I. 122쪽. 

 이상의 내용을 통해 초기불교의 업 해석은 실재론적 관점이 아닌 인식론적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 ‘행위의 길(karma-yoga)'보다는 인식의 전환을 우선시하는 '지혜의 길(jñāna-yoga)’ 위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초기불교의 업 해석은 연기론적 교리체계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업이라는 것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위한 조건(paccaya)에 불과하며 개인의 노력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내면적인 의도가 강조된 점은 '베다'의 제식주의라든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데에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소수의 전문 출가자나 바라문 사제들에게 국한되었던 주체적인 업 해석의 가능성을 모든 이들에게 개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무명의 타파를 통해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삶 안에서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계급이나 신분에 구애됨이 없는 보편적인 중생 구제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업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약점이 있다. 먼저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신체로 짓는 업(身業)․언어로 짓는 업(口業) 사이에 필연적 상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내면의 의도(cetāna)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비해 가변적인 까닭에 의도와 행위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도 중심의 업 해석에 고정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난점으로 이어진다. 또한 Johannes Bronkhorst가 지적하듯이, 죽음과 재생 사이에 업의 효력이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Johannes Bronkhorst, Encyclopedia of Buddhism, vol.1., 2003, 416쪽 참조.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업을 보존하여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중재자 혹은 매개적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불교 고유의 무아설이 훼손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편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은 개인 존재에 국한된 업 문제만을 다룬 것이라는 비판 또한 가능하다. 예컨대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공동의 업(共業, sādhāraṇa-karma)’은 개인적인 욕망과 집착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지 않다. 나아가 개개인의 특수한 업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외부의 물질 세계와 어떠한 방식으로 조화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역시 십이연기에 의한 업 해석에서 해결해야 할 난점의 하나로 남는다. 이러한 취약점은 초기불교 자체의 교리만으로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후 새롭게 발달된 아비달마(Abhidharma)라든가 유가행파(Yogācāra-Vijñānavāda) 등의 성립에 일정한 동기 부여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6. 마치는 말 

  알 비루니의 언급처럼, 업 관념은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에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이해는 인도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로 확대되는 성격을 지닌다. 필자는 인도철학의 전체 영역을 커버할 만한 주요 키워드로 업 관념 이외에 윤회․해탈․요가 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업은 그것 자체에 대한 해석 여부에 따라 나머지 다른 개념들의 내용 규정 또한 달라지게 만드는 지위에 있다. 윤회란 업 관념의 구체적 적용이라 할 수 있으며, 해탈이란 그러한 윤회로부터 벗어난 이상향을 말하고, 요가란 다시 그러한 해탈의 길을 나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는 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물질적 실재로 이해되기도 하고 혹은 심리적․인식적 차원의 것으로 달리 이해될 수도 있다. 

  본 고를 통해 필자는 업 개념이 인도철학사의 발달 과정과 궤적을 같이 하면서 점차적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최초의 제식주의적 업 관념은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 우주적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간 존재의 자존적 능력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공로가 인정된다. '우빠니샤드'는 제식 행위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모든 행위가 특정한 목적과 결과에 연결된다는 방식으로 업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한편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물질 입자로 이해하여 그것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정착시켰다. 나아가 초기불교에서는 그것을 내면적인 의도의 차원으로 해석하여 제식주의라든가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업 관념은 인도철학사의 흐름과 더불어 지속적인 업그레이드의 과정을 걸쳤다. 

  또한 필자는 이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학파적 이해가 해당 학파의 교리적․형이상학적 입장뿐 아니라, 사회적․계급적 측면과도 유기적인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사실 업 개념은 지난 역사를 통해 카스트의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악용된 측면이 없다. 따라서 암베드까르가 지적하듯이, 인도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족쇄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 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세력의 입장을 반영하는 분파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초기불교의 업 해석은 계급이나 신분에 구애됨이 없는 보편적인 중생 구제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나아가 인식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삶 안에서도 궁극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원리가 되었다. 바로 이점은 업의 논리가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기능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Wilhelm Halbfass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업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러한 시도가 다음과 같은 양상들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Wilhelm Halbfass, 앞의 글, 216쪽.

 즉 ①천국이라든가 지옥 따위를 포함하는 윤회의 관념과 다소 급진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고, ②물리적인 인과의 법칙이라든가 사물의 규칙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원리와 결부되는 양상을 띠며, ③서구사상과 결합하여 윤회라든가 해탈보다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영적 성장(growth) 혹은 진화(evolution)의 관념에 결부되는 경향 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업 해석의 경향은 이것에 관한 논의가 아직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확인했듯이, 업 개념은 본래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었으며, 인도철학사의 발전과 더불어 점진적인 체계화의 과정을 걸쳤다. 따라서 본고는 이러한 현대적 업 해석에 대해 그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원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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