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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_거금도 송광암 수련회에서 떠올린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이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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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256회 작성일 23-02-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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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도 송광암 수련회에서 떠올린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이강옥(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우리나라 근대불교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 중 하나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은 뒤 점차 더 닦는다. 문득 깨달은 뒤 점진적 수행 단계가 뒤따라야 한다)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문득 깨닫고 문득 닦는다. 한 순간 문득 깨달아 부처가 되니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에 대한 것일 테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되는 면을 갖고 있기에 상호 부정적 담론을 생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논쟁은 실제 수행의 방법론과 연결되지 못하면 공허한 반목과 동어반복이 된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 거금도 송광암 여름수련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여자 도반과 지도 법사 일선스님 사이의 팽팽한 맞섬을 옆에서 겪은 적이 있다. 두분의 맞섬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에 닿아있었다. 

일선스님은 오늘날 간화선 수행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고려 말 보조국사 지눌과 유사한 자리에 스스로 섰다고 하겠다.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권문세가의 농단이란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불교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자기 시대에 대해 가진 위기의식을 가진 수행자에 의해 돈오점수설이 먼저 주창된다는 점에서 나는 돈오점수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돈점(頓漸) 논쟁은 성철스님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철스님은 보조국사 이후 경허스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경허스님 이후 더 또렷하게 돈오점수만이 추구되면서 한국불교가 심각한 위기와 문제 상황에 봉착했다고 주장했다. 성철스님 당시까지는 구경각(究竟覺)이 아닌 해오(解悟. 생각으로 깨달음)를 견성으로 보고 그 경지에 의지해서 점차로 닦아서 부처의 경지로 갈수 있다고 여기는 돈오점수 수행자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견성했으니 인가(印可)해달라고 찾아오는 이가 일 년에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몽중일여(夢中一如)도 안 되는 자였다. 인가를 안 해주면 욕설을 퍼붓고 떠나가기도 했다.”


성철스님은 깊은 잠에 빠져서도 생시와 다름없는 화두 삼매가 이루어진 오매일여(寤寐一如) 경지가 견성이고 구경각이라 보았다. <<육조단경>>에 의거하자면 내외명철(內外明徹)한 무심(無心) 혹은 무념(無念)이 견성이라는 것이다. 이 경지는 미세한 망념까지 영원히 없어진 것이다. 미세망념까지 모두 없어지면 자기 본성을 분명히 보고, 자기 본성을 분명히 보면 구경각을 이루니 그 단계가 그대로 부처이다. 그런데 ‘자기 본성을 보는 것’과 ‘미세망념이 없어지는 것’은 찰나 동시적 현상이다. 그래서 단박에 깨치는 돈오(頓悟)이지 점차로 깨치는 점오(漸悟)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문>>, <<수심결>> 등에서 돈오 후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점수라고 했다. 


비록 본래의 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태(胎)를 길러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차츰의 닦음[漸修]이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처음 났을 때에 갖추어진 모든 기관(器官)이 남과 다를 것이 없지마는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성철스님은 이 점을 통렬히 비판했다. 돈오견성하면 습기도 함께 없어지니 돈오 후 수행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해오(解悟)’를 ‘알음알이로만의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규정하고, 보조국사가 ‘돈오’를 ‘해오(解悟)’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육조혜능의 돈오돈수를 왜곡했다고 해석했다. 즉 <<육조단경>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역시 점진적인 차례는 없다(亦無漸次)’라 하여 돈오견성한 사람은 깨달음 뒤 더 닦는 점수가 필요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성철스님은 “보조의 ‘돈오점수’는 ‘해오점수(解悟漸修)’로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돈오돈수에서는 문득 깨닫는 ‘돈오’와 문득 닦아 마치는 ‘돈수’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에 반하여 돈오점수에서는 돈오와 점수를 분리시킨다.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돈오란 해오(解悟)를 뜻하며 점수는 해오에 의지하여 구경각을 향한 ‘망념 제거와 보살수행’을 추구하는 것을 지칭한다. 

부처님도 점진적인 깨침[漸悟]라는 방편을 제시하셨기에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어느 쪽을 절대시하기는 어렵다고도 한다. ‘돈오점수’라는 용어 대신 ‘해오점수(解悟漸修)’로 고쳐 쓰기만 하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해오점수)와 성철스님의 ‘돈오돈수’가 상호 보완적인 수행법으로 오늘날 재구성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근본적으로만 생각하면, 돈오점수는 틀렸고 돈오돈수가 맞다. 돈오점수에는 아직 깨닫는 나와 깨달음의 대상이 남아 있고, 나의 알음알이와 환(幻)인 시간성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돈오돈수에서는 깨달은 사람인 부처와 못 깨달은 사람 사이의 차별이 없다. 완전한 깨달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선스님도 돈오점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다만 방법적인 차원에서 돈오점수는 돈오돈수와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양자는 열려진 관계여야 하며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나아가야 한다고도 했다. 일선스님은 이렇게 양자의 관계가 원만하게 설정될 수 있다고 낙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설명이야말로 돈오점수 쪽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님은 ‘돈수(頓修)’를 ‘번뇌가 오는 순간순간 깨닫는다.’는 뜻으로 설명하였는 바, 이것이야말로 ‘돈수’가 아니고 ‘점수’일 것 같기 때문이다. 여자 도반과 스님의 맞섬을 바라보며 여자 도반이 돈오돈수의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내가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돈점(頓漸) 논쟁과 관련하여 세 분 스승님의 견해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먼저 오경스님은 돈오점수를 가르쳤다. 오경스님의 돈오점수는 수행방법을 가르치는 경전인 <<원각경>>에 근거를 둔다. <<원각경>>은 수행의 네 단계를 정립하고 있으니, 신(信)-해(解)-행(行)-증(證)이다. 신(信)은 제법의 실상을 추구하려는 마음, 진여(眞如)에 대해 감(感)을 잡은 것, 진리를 향한 간절한 마음, 한치 앞을 못 보다가 어디로 가야될지 감을 잡은 것, 공(空)과 무아(無我)가 언뜻 느껴지는 것, 초심(初心) 등으로 이해된다. 불교에서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는 어려운 개념이다. 기독교의 ‘믿음’과는 매우 다르다. 해(解)는 깨달은 사람의 깨달은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 공(空)과 진여(眞如)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알음알이로 아는 것과는 다르다. 신(信)이 감(感)으로 이해한 것을 뜻한다면 해(解)는 완전히 이해한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해(解)는 신(信)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행(行)은 해(解)에 의해 확보한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증(證)은 완전한 깨달음이다. 

오경스님은 ‘돈오(頓悟)’를 신해(信解) 혹은 해오(解悟)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수행 과정에서 ‘해오(解悟)’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돈오’를 ‘해오’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돈오 다음에 점수가 뒤따라야 한다. 오경스님은 부처님 모든 가르침이 돈오점수에 의한 수행을 이끄는 것이라고도 했다. ‘해오(解悟)’는 알음알이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 혹은 ‘우리의 분별로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점수(漸修)’는 ‘닦지 않는 것이면서 닦는 것’ 즉 ‘무수이수(無修而修)’이다. 이 중 ‘무수(無修)’만 강조하면 돈수(頓修)가 되지만 ‘수(修)’까지도 고려하면 점수(漸修)가 된다. 닦으려면 시간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또 닦을 게 없으면서도 닦아야 한다. 하근기 중생들의 수행의 상식적 형편을 고려한다면 ‘점수’만을 인정하여야 하고 ‘돈수’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 시간은 공(空)한 것이고 환(幻)이기 때문에 한 순간의 생각이 무량겁의 생각이 된다.[一念卽是無量劫] 이 수준에서 보면, 돈수와 점수는 같은 것이다. 돈오돈수가 옳으니 돈오점수냐가 옳으니 하는 논쟁은 ‘일념즉시무량겁’을 모르거나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일으킨 부질없는 말장난이 된다. 일념 한 순간에 깨닫는 것이나 무량겁에 깨닫는 것이나 같다. 

내가 방문교수로 가 있던 뉴욕주립대학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박성배 교수님은 돈오돈수를 가르쳤다. 박교수님은 깨달음을 해오(解悟)로, 깨침을 증오(證悟)로 구별하고 선가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체험인 구경각은 깨침이라고 했다. 또 돈오돈수가 수행과정에 철저하지 못함을 방조한다는 세간의 오해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돈수’란 돈오 후 수행이 필요 없다는 뜻이지, 돈오 이전 불각(不覺) 단계에서 수행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교수님은 돈오돈수와 관련하여 몇 가지 더 인상적인 말씀을 나에게 해주셨다. 돈오돈수론이 <<화엄경>>의 ‘초발심이 곧 정각이다[初發心時便正覺]’는 가르침의 선적 표현이라고 말씀해주셨다.(2010.11.09.) 또 시간적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돈오점수론인데 그런 점에서 돈오점수론만을 주장하는 것은 시간을 환으로 보는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불교 수행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양치기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불교 수행이 스포츠나 무용 등 다른 영역의 훈련연습과 구별되는 점이다. 돈오돈수는 모든 중생이 즉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을 깔고 있기에 민중해방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박성배 교수님은 이 논쟁과 관련하여 당신이 받은 오해와 인간적 고민도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스승인 성철스님이 보조국사를 오해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 지점에서 고민이 많았다 한다. 보조국사의 <<간화결의론>>은, 성철스님이 이해한 것과는 달리,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스승인 성철스님의 견해를 제자로서 비난했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했다. 박교수님은 돈오돈수설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돈오돈수에 돈오점수가 들어있다는 취지를 말했기에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

고우 큰스님도 이와 관련하여 큰 가르침을 주셨다. <<서장>>을 가르쳐주실 때 8장인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가 논란이 많은 장임을 지적해주셨다. 돈오점수를 말하기 때문이다. 고우스님이 성철스님을 뵈었을 때 “스님 이참정공 편을 어떻게 봅니까?”라고 여쭈었는데 성철스님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답하셨다 한다. 과연 <<서장>> 오래된 이본일수록 이참정 편과 또 그와 성격이 비슷한 증시랑 편이 없다고 했다. 고우스님도 젊었을 적에는 돈오점수 하는 스님들이 많아 돈오점수에서 수행을 시작했지만 점차 선어록을 공부하고 수행도 해가면서 돈오돈수가 맞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다. 돈오점수 하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강하니 그런 점이 돈오점수설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고도 했다.

고우스님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수행의 과정과 연결하여 실감나게 구분해주셨다. 우리가 수행을 해가면 우리 의식이 ‘적적성성(寂寂惺惺)’으로 바뀐다. 선(禪)에서 보면 ‘적적’은 무심(無心)이고 ‘성성’은 평상심(平常心)이다. 교(敎)쪽에서 보면 ‘적적’은 공(空)이고 ‘성성’은 색(色)이다. 둘은 손등과 손의 관계로 항상 붙어 다닌다. 돈오돈수든 돈오점수든 이 적정성성을 이루어야 맞다 했다. 참선하면서 ‘적적’만 하는 것은 엉터리다. 그건 외도이지 진짜가 아니다. ‘적적’은 ‘성성’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큰스님은 적적성성이 언행일치와 연결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우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 등의 화두를 받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도저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근기는 그 순간 생각의 길이 끊기고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다. 이 순간의 끊김과 사라짐이 6식, 7식, 8식까지 이루어져 마침내 그 수준까지도 벗어나버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보통 수행자는 그런 충격적 화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길이 끊어지지 않고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경우를 위해 화두를 든다. 화두를 간절히 들며 화두 자체만을 의심해 들어간다.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에만 집중할 때 생각의 길이 끊기고 주객관이 사라질 수 있다. 삼매 경지라 할 수 있다. 이 집중 삼매가 6식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동정일여(動靜一如)’이다. 이 집중 삼매가 8식 수준에까지 이루어진 것이 ‘숙면일여(熟眠一如)’ 혹은 ‘오매일여(寤寐一如)’이다. 은산철벽에 들어간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 머문다면 ‘적적’이고 죽은 것일 따름이다. 그걸 깨치고 나와야 한다. 즉, 은산철벽을 뚫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확철대오’이다. 이 경지는 생각의 길이 완전히 끊기고, 주객관도 사라지고, 어떤 분별도 사라진 단계이다. 오직 어불성설이여 의심의 대상이기만 했던 화두가 이 단계가 되면 훌훌 다 풀려버린다. 이리하여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숙면일여 단계에 이른 사람이 8지 보살이다. 8지 보살이 되면 사람의 욕망 중 가장 근원적이고도 강력한 색욕조차 사라진다. 큰스님이 보시기에 이 근원적인 욕망을 뿌리 뽑지 못하면 언행일치가 안 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깨달았다는 스님 중 일상생활에서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고우스님이 가지는 핵심 고민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성철스님이 깨달음의 증표로서 ‘오매일여’를 내세웠다면, 고우스님은 ‘언행일치’를 내세운 셈이다. 언행일치가 쉽지 않다면 차라리 ‘깨달았다’ 말하지 말고 그냥 ‘지견(知見)이 났다’고 겸손하게 고백한 뒤 돈오돈수를 추구하는 것이 더 양심적일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성철스님 돌아가시자 돈오돈수를 계승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게 되었다. 성철스님이 돌아가신 뒤 성철스님의 가르침과 그분과의 관계를 거론하는 승려는 많지만, 성철스님의 뜻을 이어 치열하게 돈오돈수의 수행을 실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요즘 다시 돈오점수가 주도하는 것 같다는 것이 큰스님의 느낌이다. ‘해오(解悟)’했거나 ‘지견이 난’ 것을 깨달았다고 공언한다. 승려 사회에서의 인간적 관계가 없다면 스님 스스로가 돈오돈수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스님 사회에서 배척될 것 같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설을 생각할 때 언제나 큰스님의 이 말씀을 떠올린다. 그리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수행론이 다만 우리나라 양대 사찰인 해인사와 송광사 출신 수행 스님들의 대결로만 비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다. 거금도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나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가르침이 우리 생각을 헷갈리게 하지 않고 수행생활을 더 치열하게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축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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