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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문화의 만남_종교와 사회 갈등에 관한 연구(신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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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557회 작성일 22-08-1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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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사회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의 종교로 인한 갈등을 중심으로-

                                                 신 준 식(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언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 내지 믿음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고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도 많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종교를 가진 사람보다 많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에도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 종교에 대한 믿음 정도도 다르고, 종교에 관련한 태도 또한 다양하다. 신(神)본위적인 믿음으로 인간을 신에 종속화 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본위에서 인간의 바른 삶을 인도해주는 위대한 가르침으로 하여 믿는 사람도 있다. 신본위적인 믿음이 인간의 삶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 뜻에 따라서 인생을 사는 형이라면, 인간본위적인 믿음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종교를 해석하고 인간의 측면에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신이 만든 인간”이냐 혹은 “인간이 만든 신”이냐 하는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 관한한 이러한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다종교(多宗敎) 사회이다. 다종교상황은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장점도 될 수 있지만 종교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다종교 상황에서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우주관·인생관·생사관·선악관 등의 가치관을 갖고서 행동한다. 종교가 다르다면 이러한 가치관을 달리 한다는 것이 된다.

    현대를 지구사회라고도 한다. 이민(移民)이 보다 쉽게, 보다 많이 이루어지는 현대에 다종교의 상황을 띄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와 같은 이른바 세계종교와, 수많은 한국의 자생종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속과 같은 고유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마치 종교 백화점 같은 현상을 띄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종교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주도적 위치에 있는 종교는 없다. 

    종교가 종교의 주요 덕목을 잘 실천할 때는 그 긍정적 효과는 크다. 그러나 종교가 종교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문제는 달라진다. 종교가 자기 종교의 세력팽창을 위해 무규범적인 경쟁관계가 되면 문제가 된다. 종교가 경쟁관계를 넘어 갈등관계, 나아가 종교 간의 적대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종교는 절대 신념체계이므로 종교 간의 갈등은 그 해결이 쉽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 사회에서 다종교 상황은 한 사회에 절대 신념 체계가 여러 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종교적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날 세계 여러 곳에서 발생하는 국제적 또는 국내적 많은 분쟁이 종교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상 크고 작은 많은 전쟁도 종교에 관련한 신(神)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무자비한 살육도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신의 뜻이라 하며 그 무자비한 행동에 인간은 뒤로 숨어 어떠한 양심의 가책(呵責)도 갖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이러한 갈등이 심하다. 현재 종교적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여러 갈등 현상이 있는 현실에서 종교 간의 갈등마저 심화된다면 사회통합에 큰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더욱 종교적 갈등이 다른 사회적 갈등과 중첩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나라 종교인의 분포도 지역 간에는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다. 비교적 정도가 심한 지역갈등과 종교 갈등 이들 두 개의 갈등이 중첩하게 되면 우리사회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종교를 믿는 개인이나 종교단체 그리고 국가가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Ⅱ. 한국사회에 있어서 갈등적 현상


우리사회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들어서서는 총체적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되었다. 宋復,「한국사회의 葛藤構造」現代文學, 1990), p.47

 80년대를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사회의 전분야가 갈등을 격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갈등으로는 정치적 갈등, 공공조직의 부처 간의 갈등, 학원내의 갈등, 지역갈등, 이념갈등, 사회계층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업종간의 갈등 한의사와 약사간의 업권 분쟁이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업종 간의 갈등은 단순히 양자 간의 갈등에서 끝나지 않고 특정 업종과 국가 간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산업사회를 겪는 사회이면 다 겪는 현상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겪다 보니 더욱 심하였다. 아직도 그 일부의 갈등으로 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하겠다.

    갈등은 왜 일어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송복 교수는 갈등의 기초와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宋復, 前揭書, pp.24-25.

 갈등의 기초며 핵심은 내 의견, 내 요구, 내 이익에 대한 상대방의 <반대>로 야기되는 것이다. 갈등은 이 <반대>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갈등의 빈도가 높고, 그 갈등의 강도가 센 사회에서는 반대의 수용력이 아주 낮다. 반대를 하는 쪽에선 자기가 하는 반대를 바른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그 반대를 받는 쪽에선 그 반대야 말로 파괴적인 것이라고 생각 한다. 상대방이 하는 반대를,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생각한다. 반대하는 쪽에선 자기들이 하는 반대야 말로 영웅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행위라 한다. 결단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정의감에 투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희생적 반대>,  내 몸을 희생해서라도 끝까지 목숨을 걸고 반대한다는 것이다. 희생심에 불타고 사명감에 불타는 반대 내지 반대 정신을 갖는 것을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반대로 반대를 받는 쪽에선 그 반대야 말로 일방적 파괴, 일방적 승리만을 시도하는, 가장 자기중심 적이고 편향적이며 대세나 사태를 그릇 판단하는 데서 오는 왜곡된 반대로 받아들인다. 반대하는 쪽에서나 반대를 받는 쪽에서나 다 같이 반대가 되는 상대방을 완전히 파괴시키거나, 완전 굴복 시키거나, 적어도 최대한 손실만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도 노사관계에 있어서나 정치적 현실을 보면 더욱 실감나는 것이다.

    그러한 반대가 왜 있게 되느냐? 모든 개개인은 개인적인 특성이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가치관의 차이는 인간관계에서 반대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이 된다. 개개인은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는다. 특히 세계관의 차이는 인간의 이기심 못지않게 인간관계에서 반대의 원인 내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종교는 신자의 세계관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종교적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를 낳고 세계관의 차이는 타협할 수 없는 반대로 이어져 심각한 갈등이 되는 것이다.

    선의(善意)의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심한 경쟁은 적대관계로 까지 이르게 된다. 현대 산업사회는 분업과 협업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산업사회는 같은 직장의 구성원내에서나 같은 업종 간에는 끊임없이 경쟁이 일어나고 그 경쟁관계는 구조화되어 있다. 분업은 분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연대를 전제로 하는 분업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분업이 많아 또한 협력이 많이 요구되는 상호의존관계가 높은 사회이다. 분업이 심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조화로운 연대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대사회는 항상 긴장과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분업이 심화되어 사회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경쟁이 많아지고 갈등관계도 많아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적인 이해관계나 이념적 차이로 갈등관계가 더해가는 사회이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한 갈등의 조정은 이념적인 갈등에 비해 비교적 쉽다. 물질적 이해관계는 다시 조정되기만 하면 그 갈등의 상처는 쉽게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신적이고 이념적 갈등은 물질적인 이해로 생긴 갈등처럼 쉽게 조정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적 의미와 삶의 가치에 얽힌 이념은 쉽게 바뀌지 않고 쉽게 타협도 되지 않는다. 막스 베버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재화는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합리적 막스 베버가 말하는 행위의 종류로는 전통적 행위, 감정적 행위, 가치합리적 행위, 목적합리적 행위로 나눈다. 전통적행위는 전통에 따른 행위를 말하고, 감정적행위는 감정에 따른 행위이고, 가치합리적 행위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고서 그것을 위해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고, 목적합리적인 행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효과적인 수단이란 체계적으로 혹은 계산적으로 행동하여 목적을 잘 달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행위를 하게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재화는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제한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제한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 함께 합리적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경쟁은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종교인이 갖는 합리적 행위는 가치합리적 행위이다. 이 가치합리적 행위는 행위자체에 가치를 두는 행위이다.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행위 자체에는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인의 행동으로 빚어지는 종교 갈등도 가치 합리적이어서 서로 간 조정이나 타협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Ⅲ. 한국의 다종교 상황의 특색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다원화 여기서 다원화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의식적 근원이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   다.

이다. 현대사회의 특성 중 다원화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많다. 다종교 상황에도 장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위험한 요소가 많다. 다종교상황은 근원적 가치를 달리하는 다원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에 다종교상황은 예민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는 하나의 종교가 우리 사회의 절대적 가치체계가 되어 왔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교가 되어 나라의 통치측면에서까지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 조선말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로 우리나라는 불교·유교·천주교·개신교 등의 세계종교로 구성되어 있는 다종교사회이다. 이 점이 다른 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종교적 특색이다.

    오늘날에도 종교는 무조건 믿어야 되는 것이라고 하는 종교도 있고, 그러한 신앙태도를 갖는 사람도 많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교의에 모순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합리화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서는 맞지 않다. 다음 〈표 1〉과 〈표 2〉는 우리나라 종교인의 현황이다. 이 표들에 어떤 유의미한 것이 있는 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 〈표 1〉 우리나라의 종교인 현황



    *이 자료는 통계청 자료와 문체부, ‘「한국의 종교현황」을 참고한 것임. 


〈표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2000년 전후에는 종교인구가 전체 인구 반을 상위하였으나 2015년에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56%를 넘는다. 그 감소의 폭이 크고 그 주 원인이 불교도의 감소에 기인한다. 2015년의 통계에서 불교도가 10년 전 2005년도의 통계보다 300여 만 명이나 줄었다. 천주교의 신자 수도 통계년도에 따라 큰 변화가 있다. 2015년은 2005년보다 신자가 많이 줄었으나 그 앞선 통계와 관련해서 보면 신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현대에 있어 전체 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의 종교인구의 변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되겠다. 서양에서 종교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2005년도 통계에서까지도 불교가 제일 많은 신도를 갖는 종교이었으나, 2015년의 통계에서는 개신교가 제일 많은 신자를 갖는 종교로 나타났다.

    〈표 1〉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종교인 구성에서 유교도의 비율이 전체 종교인구의 1%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영향력이 큰 종교이다. 조선 500여 년 동안 유교가 국교가 되어 정치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국민의 의식 중에는 유교적인 가치(삼강오륜과 같은 가치)가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기본가치로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 국민 중 그들이 어느 종교를 믿고 있든 그들의 생활태도에는 유교적인 가치가 많다. 불교를 믿더라도 유교적인 불교인이 되고, 기독교를 믿더라고 유교적인 기독교인이 된다고까지 한다. 통계에서 유교도의 숫치는 미미하지만 유교의 영향은 크고 그 잠재력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는 불교·유교·개신교·천주교와 같은 세계종교가 한국인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겠다. 

    현 우리사회에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고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자신만의 ‘종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세계종교와 같은 기성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제일로 따른다고 해서 자신의 종교를 ‘진리의 종교’라 하고, 과학에 의한 지식이 인간을 제일 이롭게 한다고 해서 자신의 종교는 ‘과학의 종교’라고 한다. 또한 어떤 이는 자연의 법칙은 예외가 없는 진리임으로 ‘자연의 섭리’의 종교를 믿는다고 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표 2〉 행정구역별의 각 종교 인구



    이 자료는 2005년 통계층의 자료임, 단위는 명

 

〈표 2〉는 2005년의 통계에 의한 것이다. 십 수 년이 지난 통계이기는 하나 지역별 종교인의 숫자는 이상과 같다. 서울, 인천, 경기, 광주(光州), 전남, 전북은 개신교도가 불교도보다 크게 많고, 부산, 울산, 경남, 경북, 제주도는 불교도가 개신교도의 3-4배가 될 정도로 많다. 강원도도 불교도가 개신교도의 약 1.5배가 될 정도로 많다. 전북은 전국 어느 곳에서보다도 원불교도가 크게 많다. 종교인의 분포로도 영남과 호남이 큰 차이를 나타낸다. 영남과 호남이 지역감정의 골이 깊다고들 우려한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정치적 성향도 많이 달리한다. 정치가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종교는 보다 신념체계로서 개인 행복과 인류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한 문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가 지역갈등에 휩싸여서 중첩적인 갈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것이다. 



        Ⅳ. 다종교상황의 문제점


사회학과 종교사회학에 큰 업적을 남긴 뒤르케임(Emile Durkheim)은 종교의 주요 사회적 기능으로 사회통합의 기능을 들고 있다. 吳庚換 「종교사회학」,서광사, 1984, PP.121-123. 뒤르케임은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그의 사회적 유대를 승화시킬 것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낸 인간 희망의 최고 표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종교의 사회통합의 기능은 한 사회에 그리고 한 국가에, 한 종교가 문화적 중심역할을 훌륭히 해 낼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종교의식(儀式)에 다 같이 참가하는 것은 일체감과 동류의식을 갖게 된다. 나아가 같은 가치관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체감과 동류의식은 사회체계의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뒤르케임은 종교가 사회통합의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뒤르케임의 사회통합이론이 적용될 상황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다종교 상황은 사회통합의 원리를 갖기 보다는 다종교로 인한 사회갈등을 우려해야 할 입장이다. 다종교 상황에서의 자기 종교인들끼리의 강한 유대는 전체 사회의 통합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자기 종교의 세력 확장을 위해 의식적으로 타종교를 무시 내지 배척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종교 갈등을 넘어 종교로 인한 적대관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사회통합에 방해가 될 소지가 크다. 종교는 훌륭한 문화이면서 하위문화의 산실이 되기 때문에 다종교 상황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거듭 밝힌다. 다만 여기서는 이 점을 논외로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랜 동안 종교 간에는 대화보다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종교인이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한 노력은 미흡했다. 종교 자체나 자신의 신앙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마저도 한 세기 남짓한 세월이었을 뿐이다. 종교가 서로 상반되는 진리체계를 주장하는 데서 오는 갈등을 많은 사람이 인식하게 된 것도 고작 100여 년의 세월이 될 뿐이다. 종교 간에는 처음부터 근원적인 불일치가 있어 종교로 생성되고 존재할 수 있었지만, 각 종교마다 세계상까지도 달리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다. 모든 종교가 저마다 자기 종교의 세계상이 옳다는 것은 현 과학의 시대에서는 맞지 않다. 물질적 존재의 세계 그것은 과학의 영역에서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따라 이 우주가 다른 원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자기 종교의 세계상만이 옳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시대에서는 더욱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주는 것이 ‘하나의 종교’라는 개념이다. 이는 곧 ‘유일 종교’라는 말이 되겠다.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재직했던 종교학자.

는 ‘하나의 종교’라는 개념은 오늘날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는 특정 시대와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발생한 인간 문화의 일부분이다. ‘하나의 종교’ 즉 ‘유일의 종교’라는 개념은 서양 철학의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 黃弼昊 譯編, 존 H. 힉 원저, 종교철학개론, 종로서적, pp.198-199.

 종교가 문화인 이상 문화는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 이러한 명제를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종교 상황으로 야기되는 문제는 앞에서 거론된 것 종교 간의 갈등, 종파간의 갈등, 종교와 사회 규범과의 갈등, 종교와 국가조직간의 갈등 외에도 많다. 

 외에도 많다. 개인적 혹은 가족적 문제로 제사나 결혼에서 야기되는 문제, 단군성전의 건립에 관한 문제, 종교적 국경일지정의 문제에서,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 문제에서, 특정 교당 훼손 등 많은 것에서 종교적 갈등문제가 있었다. 선거에 있어서도 종교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현실이다. 정치인은 선거에 있어 당선이 절대적인 목표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으로서 보다는 우선 신자수가 많은 종교를, 표를 잘 몰아주는 종교를 찾아 신자가 된다고들 한다. 표를 잘 몰아주는 지역을 찾고 그러한 곳에 유독 약해지는 것이 정치인의 약점이기도 하다.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선거에서 후보자의 종교가 당락의 주요 변수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정치인과 종교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한 행동이다. 종교는 정치에 힘을 뻗어 종교의 세력을 키우려 한 것이다.


    

        Ⅴ. 종교에 의한 구체적인 갈등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인 종교 간의 갈등과 종교와 사회규범과의 갈등, 종교와 국가조직간의 갈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종교 간의 갈등

종교는 인간의 존재의미를 알게 하고 바른 삶을 권하여 도덕을 지지해 주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종교적 문제로 국가 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전쟁을 종교전쟁이라고까지 했다. 이종교(異宗敎) 내지 이교파의 갈등으로 야기된 국가 간의 분쟁과, 한 국가 내에서의 종교 간의 갈등도 많았다.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문제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교도와 이라크의 수니파 이슬람교도 간의 전쟁이 종교 문제로 생긴 것이다. 한 나라에서의 종교 간의 갈등은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간의 분쟁, 인도의 힌두교와 시크교도간의 분쟁,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간의 분쟁, 스리랑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타밀 힌두교와 신할리즈 불교도간의 분쟁 등이 그 예이다. 월남의 패망에도 종교의 분쟁이 있었다. 불교와 가톨릭의 마찰과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1991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도 그 원인에는 종교적 문제가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와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의 전쟁이 그러한 예이다. 이 5년간의 전쟁으로 작은 나라에서 20여 만 명이 죽고 나라전체가 거의 초토화되다 시피 하였다.

 

    종교 갈등의 주요 요인에는 전교(傳敎)가 있다. 전교는 종교 생존의 문제로 중요하다. 다종교 상황에서의 전교가 있는 곳에서는 마찰이 있기 쉽다. 이러한 마찰이 일어나는 보다 근원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전교(傳敎)란 내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믿는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당신도 구원을 함께 얻자’ 라는 순수한 마음도 있다. 이러한 순수한 태도도 있지만 자기 종교의 세력 확장 이라는 세속적 의미가 더 풍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곧 종교 갈등을 가져오고 타종교에 대한 대결을 가져오기까지 한다. 교세확장을 위한 무원칙한 전교는 종교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혼란을 조장하게 된다. 전교의 방법이 사회의 보편적 규범을 무시하면 더욱 그러하다. 자기 종교의 확장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 하겠다는 광신적인 신자도 있다. 그러한 죽음에 순교라는 이름을 부쳐주면 문제는 확대된다. 순교는 자기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이라는 보편적 면이나, 사회규범에서 보면 죄가 되기도 한다. 타종교를 해치면서 일어난 죽음까지도 순교니 하면서 미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대를 해치는 죄악이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순교라 할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은 자기 종교에서 이해되는 특수한 현상인 경우가 많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에서는 순교가 쉽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종교사회에서 개별 종교는 전교적인 대사회활동에 신중해야 한다. 그러한 대사회활동은 절대 확신에 근거함으로써 그 종교 신념을 사회에 전파하는 것이 된다. 종교적 절대 확신은 자기 종교 이외의 다른 어떤 종교도 절대적이 못 된다는 우월감을 동반하게 된다. 이는 다시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로 이어진다. 문제는 하나의 종교가 이러한 팽창주의를 갖게 되면 다른 종교 또한 그러한 팽창주의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 종교의 대사회적 활동은 종교 간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전교적 대사회활동을 고집하는 종교인들은 타종교인들도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교리에 따라 진지하게 종교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적 행동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기까지 한다. 

    절대 신념 체계로서의 종교는 자기의 정당성과 진리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외부로부터의 증명이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러한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정당화하려 한다. 종교적 신념에는 해당 종교가 표방하는 진리성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동시에 포함된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체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종교의 신념체계를 대하게 될 때에는 거부반응을 갖게 된다. 막스 베버는 종교의 믿음은 내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 번은 자기 수업을 받는 학생이 스승 베버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을 하였지만 베버는 신앙은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말하지 않았다. 같은 신자끼리는 종교를 말하고 함께 교당에 가는 것을 공공연히 서로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대중이 함께 자리에서 묻지도 않는 자신의 종교를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요사이 주택의 대문이나 아파트 출입구에 ‘나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라는 표지까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한 표지는 같은 종교를 갖는 사람에게는 동류의식을 갖게 하고 어떤 친밀감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 많은 다른 사람에게는 신년체계가 다르다는 말하는 것으로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태도도 다종교의 사회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 간의 마찰과 갈등은 신념체계를 달리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그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종교 갈등의 위험성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측으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 <우상>숭배 거부사상,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적 구원관, 전투적인 개종주의의 선교정책, 경쟁적 교세 확장 등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길희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민음사, 1991, pp.18-19.



    2. 종교와 사회규범과의 갈등

현대사회에서 종교로 야기되는 문제들 중의 다른 하나는 개별 종교의 종교적 자유와 전체사회의 질서라는 측면과의 관계이다. 개별 종교의 측면에서는 신앙과 전교의 자유를 갖는다. 전체사회의 질서 측면에서는 한 종교의 전교를 포함한 어떠한 종교적 행동도 횡포가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과 전교를 포함한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전체 사회의 규범의 범위에서 개별 종교의 자유를 누리야 한다. 전체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면서까지 할 수 있는 개별 종교의 자유는 없다. 전교를 포함한 어떠한 종교 활동도 보편적 사회규범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인이 자기의 종교 교의로 이 사회가 혹은 이 국가가 다스려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공공연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도는 타종교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으로 다종교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인이 가져야 하는 전교의 태도는 스스로가 모범적인 종교인이 되어 본받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하는 것이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으면 길이 자연 나듯이 말이다. 그러면 자연 자신들의 종교 세력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지하철 안에서나 기차역(驛)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어떤 종교를 믿으면 천당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고 외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종교 신자를 데리고 나와 역이나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기도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거론된 바와 같이 이러한 행동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일반인이 다른 신념체계를 대하게 되는 것이므로 자연 거부반응을 갖게 된다. 이는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공공시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된다.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파는 것에 대해서는 단속하는 방송을 쉽게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전교(傳敎)를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종교적 활동에 대해서는 단속하는 것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단속하는 방송마저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뒤르케임은 종교의 중요 기능으로 종교가 도덕을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고 했다. 종교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종교를 통해 이 사회가 도덕적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이상적 목적을 향해 대사회적 행동으로서는 개인 스스로의 규제 내지 통제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 내지 이상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개인 스스로가 자제치 못하면 그 종교 단체가 자제토록 해야 한다. 관계기관에서도 전체 사회의 규범을 위해서도, 전체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도 철저히 단속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를 군중(群衆)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러한 현대는 군중의 속성이 강한 시대이다. 군중의 속성에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고 선동적인 측면이 있다. 종교 또한 인간의 감성에 근거하는 면이 강하다. 때로는 종교가 이러한 측면을 의식적으로 유도하기까지 한다. 종교적인 감성에 기초한 선동적인 행동은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을 마비시킨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종교적 가치체계는 어떤 다른 가치체계보다도 상위가치가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가 군중적 속성을 갖게 되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현대는 군중의 속성이 강하므로 종교는 이러한 군중적 속성이 종교로 이입시키지 말아야 한다. 


    3. 종교와 국가조직과의 갈등

‘종교와 국가조직과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 제 19조를 들 수 있다. 헌법 제 19조는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각기 종교에 따라 다르겠으나 대체적으로 종교와 정치와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는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종교에서는 가치 합리적 행동이 중요시 된다면, 정치에서는 목적 합리적 행위가 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윤리와 현실적 측면의 실용적인 정치의 요구와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는 ‘국가이성’의 객관적 실용주의의 요구에 철저한 반면, 종교는 보다 인생의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에 일관한다. 그래서 종교와 국가 간에는 서로 이해 충돌이 있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와 종교 간에 갈등적 현상을 걱정하는 분위기이다. 그것은 ‘종교가 현실정치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종교가 합법적인 국가 권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이다.


    1) 종교의 현실정치의 참여문제

인류 역사상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불분명한 시기는 무수히 많았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는 사제(司祭)가 곧 최고 권력자이기도 했다. 종교가 천부인권 내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이름 하에서 사회질서와 정치질서에 개입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현대의 민주입헌국가에서는 종교가 정치질서 내지 사회질서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은 당연시 된다. 하지만 종교가 자기의 교리와 신앙적 심정적 윤리를 정치적 문제에서까지 고집한다면, 다양하게 다른 가치관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인이 피치(被治)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이 만인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라면 종교의 이름으로 저항하는 것은 국민저항권과 천부인권적 차원에서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본래의 활동과는 동떨어진 세속적 이해관계에 깊이 관계하고 당파적인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교 본연의 성역(聖域)에서 멀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현실적인 보편적 규범이 있고, 종교에는 종교교의가 제시하는 인간 삶의 방식이 있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규범과 종교 교의적인 규범 간에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다. 종교와 국가와의 갈등관계는 주로 보편적 규범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일상적으로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경우 종교도 모든 사람에게 두류 관계되는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종교가 먼저냐 아니면 나의 나라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한 번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해 살 만한 미지의 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찾아갈 만한 신천지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이주한 경우는 그 옛날의 이야기이다. 역사에만 있는 일이다. 어떻게든 현대는 종교보다도 민족보다도 우선적으로 국가의 영향에서 그 테두리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종교도 가질 수 있고 민족도 있다 할 수 있지만 자기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다. 국가와 종교 간의 갈등은 위와 같은 뜻에서 잘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 발전도 있을 수 있고 종교인의 삶 자체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낱 정치구호에서가 아니라 생존적인 면에서도 종교적 교의보다는 국가의 존재가 앞서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몽고침입, 조선의 임진왜란 시 스님은 불교의 제일의 계(誡) 즉 살생의 계를 벗어나면서까지 전장(戰場)에 참여하여 나라를 지켰다. 일제치하에서는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불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교의를 초월하여 하나로 뭉쳐 일본에 대항하며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2) 종교 활동에 대한 국가의 일관되고 합당한 시책

현대사회에 있어 거의 모든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그 경계는 분명치 않다. ‘국가가 개인의 종교적 입장을 어떻게 해결해 주었느냐’에 대한 한 예(例)가 있다. 그것은 독일의 한 학교에서의 있었던 일이다. 교실의 십자가상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문을 한번 보기로 한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학교 교실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상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리스도 상을 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판결문에서 “모든 개인은 자기 신앙에 따라 살고 행동할 수 있도록 헌법이 보장하고 있고 동시에 어떠한 종교적인 상징물도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라고 밝혔다. 이러한 판결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헌법재판소의 부소장 요한 프리드리히 헨셀은 “국가는 모든 시민들의 것이지 기독교인들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매일신문, 95년 9월 12일 참조

 이 말은 다종교사회에 살고 있는 전체 국민을 위해 우리나라의 정부나 종교재단의 학교가 새겨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법 시행령 제 5조 ②항에 의하면 “국립 또는 공립의 학교는 어느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학생에 학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라면 사립학교도 이에 포함시켜야 한다. 존 듀이는 학교교육에서 종교의 일반적인 상식과 올바른 종교적 자세나 바람직한 종교관을 교육시키는 종교교육은 필요하지만 특정한 교파나 종파의 교리나 의식을 교육시키는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배타적이고 고정화된 사고를 조장시키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존 듀이가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새겨들어야 한다. 너무나 타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종교와 종파도 많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다. 국가는 전체사회를 위하는 입장에서 분명하고도 현명한 종교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Ⅵ. 다종교상황의 문제점 극복을 위한 방안


지금까지 다종교 상황에서 야기 될 수 있는 종교에 의한 갈등적인 문제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 문제점의 극복을 위한 방안을 간략히 살펴볼까 한다.


   1. 종교들에 대한 바른 이해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종교 갈등을 해소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종교인은 우선 종교의 개념적 지식이 필요하다. 종교 발생의 의의와 그 역사 그리고 종교의 존재적 의의를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종교에서 신(神)을 상정한다. 하지만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신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사유적(思惟的) 산물이다. 종교에 따라서는 신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종교란 단순히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논리에도 맞아야 하고 과학적 지식으로도 수긍이 가야 한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태도이다. 모든 종교는 각기 생성된 시대가 다르고 생성된 지역이 다르고 다른 교리를 가지고 생겨났다. 이렇게 상이한 종교가 상이한 특성을 갖고, 상이한 환경에 처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종교 간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종교 상황에서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가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종교 상황을 인정하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내면적 확신과 외적 사회활동을 위한 규범이라는 다른 차원을 갖는 것이다. 내면적 종교적 확신을 외형적 사회활동으로 표현할 때는 특정한 한계 안에서 행해야 한다. 쉽게 말해 종교인에게도 종교적 활동이 있고 일반 사람들과는 사회규범에 따른 일반적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기 그 합당한 행동이 따로 있다. 그것을 깨닫고 그에 맞는 선택적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가 여러 개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종교의 현실적 상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종교의 현실적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종교에 따라서는 하나의 충격이 될 수도 있다. 대체로 종교적 신앙은 신앙대상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자기신앙에 대한 전인적 헌신(全人的 獻身)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자기 신앙의 현실적이고 역사적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신앙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헌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인이 갖는 이중의 멍에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것이다. 다종교적이고 다원적인 현대에 살고 있는 한 어떤 형태로든 이 이중 멍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적 고민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종교를 포함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상식의 문제이다. 종교에서 절대성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것은 앞으로는 상식의 문제를 벗어나 거짓을 주장하는 사기성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보편적 종교에 대한 이해와 그를 위한 노력은 부족하다.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 종교학이다. 종교학이란 일반적인 종교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현재 개별종교를 연구하는 불교학(佛敎學)이나 유학(儒學) 그리고 기독교학(基督敎學)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다. 이제는 자기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를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 종교 일반에도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자기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각기 개별 종교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종교 의미를 규정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우(愚)를 범할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유교가 종교이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자기의 종교적 시각만으로는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기란 어렵다. 종교 일반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종교 간의 갈들을 효과적으로 예방 할 수도 없다. 현재 다종교인 우리사회에서 어느 일방적인 종교적 견해로 다른 종교를 재단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이때 거의 운명적으로 종교를 갖게 된 종교인이 많다. 그래서 자기 종교만이 유일한 줄 알고 다른 종교가 있는지도 모르는 이가 많다. 다른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가짜의 종교인줄 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무시·왜곡·적대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요인이 종교 간의 갈등을 키우는 수도 있다. 


    2. 합리적인 종교정책의 수립

지금 우리나라가 다종교상황임에도 보편적인 종교정책(宗敎政策)은 없는 것과 같다. 단순히 종교관련 단체들을 파악하고 지도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종교에 관련된 문제라면 정부는 개별종교와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다른 종교로부터는 종교 차별정책이니 하는 불평이 있다. 

    다종교의 사회인 우리 현실에서 개인과 종교 그리고 전체사회 질서와 조화를 고려한 종합적이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이 필요하다. 종교에 관련한 구체적인 법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국가와 전체 종교와의 합리적 관계를 위해서는 어떤 일반적인 원칙은 있어야 한다. 국가가 매번 종교에 이끌리어 그때그때에 종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면 모든 종교를 어우리는 일관적인 종교시책이 되기가 힘 든다. 또한 정부는 정부의 주도적 차원에서 종교일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사회에서는 정부는 종교적 측면에서 정당하면서도 확고한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여야 한다. 특히 고위 공직자의 신앙적 태도는 공과 사를 잘 가려해야 한다. 정부의 공적 행사에 개인의 종교적 성향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어떤 종교 단체가 종교시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임자가 자기 종교의 신자라 해도 공공연히 불려 벌을 주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 조직의 장(長)은 종교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이나 공공조직 등에서 종교를 같이 한다고 해서 모임을 갖는 것에도 신중해야 한다. 폐쇄적인 모임은 전체의 화합을 해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타종교인을 의식치 않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한 종교를 위한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모든 종교의 이해를 잘 조정·발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Ⅶ. 결어


종교의 중요 실천 덕목이 자비·사랑·인(仁) 등이다.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종교에서 서로 간에 갈등이 많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도처에서 종교 간의 갈등이 일어나며 그것은 다른 어느 갈등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에서 이야기된 바와 같이 종교 간의 갈등으로 한 나라 내에서의 분쟁이나 국가 간의 전쟁마저 일어난다.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분쟁은 절대 신념에 관계되므로 그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분쟁은 오랜 기간 지속된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야기되는 종교적 갈등은 종교 간의 갈등, 종교와 일반 사회규범과의 갈등, 종교와 정부기관과의 갈등, 종교와 특정 분야와의 갈등 등이 있다. 여기서 종교와 특정 분야와의 갈등에는 종교와 과학, 종교와 경제, 종교와 교육 등이 있겠다. 제사나 결혼에 있어서도 종교적 문제가 있다. 종교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가족 간 친척 간의 불화를 낳고, 잘 진행되던 결혼을 위한 절차가 갑자기 종교가 원인이 되어 무산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는 세력이 비슷한 세계종교로서 불교와 유교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와 많은 자생종교(自生宗敎), 옛날부터 내려오는 무속(巫俗)과 같은 고유종교들이 있다. 그래서 다종교 상황으로 종교적 갈등의 소지가 많지만 그래도 큰 종교적 갈등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불교도가 종교인구의 약 20% 내외를 차지하고,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나라의 종교인은 도덕적 종교라고 하는 유교의 사회규범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많은 종교적 문제가 자기 종교의 유일성이라는 신념을 갖는 데서 일어난다. 자기 종교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 종교의 우수성을 표방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다른 종교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또한 스스로 자기 종교의 부정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 어떤 대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그 결과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떤 사물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서(西)로 가서 본래 지점을 보면 동쪽이 되고, 동(東)으로 가서 보면 서쪽이 되고, 남(南)으로 가서 보면 북(北)이 되고, 북(北)으로 가서 보면 남(南)이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종교의 교의로 타 종교를 해석하고 재단(裁斷)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에서는 비판받아야 한다. 현대 우리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다원주의 사회는 많은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로 자신들의 종교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종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 때문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 때문에 인간이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살면서 종교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인간이 갖는 여러 거지의 고통, 특히 생사(生死)에서 오는 운명적인 고통을 해결해주고자 하는 것이 종교가 있게 되는 주요 원인이다. 이를 깨달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훌륭한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위대하고 훌륭한 가르침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오늘의 세계종교가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종교가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문화의 한 차원일 뿐이다. 현대 지식과 과학의 시대에서 자신의 종교 교의라 해서 무조건 믿는 것도 문제가 된다. 현대의 종교인은 보다 성숙한 종교인(보편적 규범과 과학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태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교가 긴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해온 시대적인 산물이므로 앞으로도 그 변화를 계속될 것이다. 옛날 지식이 부족했고 특히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형성된 종교 교의에는 수궁하지 못할 점도 많다. 그러면 올바른 방향으로 태도를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해 종교가 보인 태도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연구·발표하여 종교 교의에  흠집을 내었다고 하며 종교가 아인슈타인의 목에 5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제 인간 양식(良識)의 성장과 학문 특히 과학의 발달로 지난 세월의 종교적인 큰 과오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종교를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잘 믿는 것이 중요하다. 잘 믿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가 아닌 종교로 말해지는 일반적인 뜻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종교로 빚어지는 종교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는 약 2년간의 연구를 통해 교과과정을 개편하면서 종교관련 과목을 새로 ‘교양필수’로 하였다. 그 교과명은 ‘문화와 종교’이다.(중앙일보: 2007년 2월 9일자). 하버드 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그러한 하버드 대학교가 기독교학 내지 신학을 교양필수로 하지 않고 ‘문화와 종교’라는 과목명으로 한 것이다. ‘문화와 종교’를 교양필수로 한 것은 학생으로 하여금 우선 성숙한 교양인이 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종교’에 특히 ‘종교 일반에 대한 이해’를 통해 훌륭한 문화로서의 여러 종교를 공부하고 성숙한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닌가도 한다. 교양필수는 학생 모두가 꼭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에게 어떤 과목을 교양필수로 하는 가는 한 개인에게는 물론 국가의 정체성의 방향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교육기관도, 국가도 이러한 태도를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종교는 한 나라의 주요문화의 뿌리가 되므로 어떤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주류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미국을 이해하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알아야 하고, 인도를 이해하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힌두교를 알아야 하고, 일본을 이해하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도(神道)를 알면 좋다. 불교를 모르고서 고려(高麗)를 이해하기가 힘들고, 유교를 모르고서 조선(朝鮮)을 제대로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종교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은 종교로 빚어지는 사회갈등을 예방·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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