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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문화_대혜종고선사 서장에 나타난 선수행 방법과 표현 방법(전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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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479회 작성일 22-08-1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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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慧宗杲禪師 『書狀』에 나타난 禪修行方法과 表現方法


전재강(안동대학교)



- 次  例  -


1. 序 論

2. 『書狀』에 나타난 禪修行方法    1)看話禪의 修行方法  2)正觀과 回光返照의 修行方法  

3. 『書狀』에 나타난 表現方法      1)修辭法             2)敍述方法

4. 結 論     * 參考文獻     


1. 序 論


  大慧宗杲(북송철종 4년 1089 - 남송 효종 2년 1163)는 중국 南北宋 交替期에 살았던 臨濟宗 系列의 禪師이다. 먼저 臨濟宗 黃龍派에 속하는 담당문준(1061-1115)에게 사사하고 그의 사후 臨濟宗 양기파 숭려 원오극근의 제자가 되어 그의 법을 계승했다. 1137년 徑山(절강성)에 머물면서 천여 명의 弟子를 길러 ‘臨濟의 復興’으로 일컬어졌다. 1141년 정쟁에 휘말려 형주(호남성), 매주(광동성)로 귀양 갔다가 풀려나 명주(절강성) 아육왕산으로 갔다. 1158년 다시 경산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향년 75세로 입적했다. 저서는 『大慧語錄』, 『大慧法語』, 『대혜보설』, 『書狀』 등이 있다. 

  曹洞宗系의 黙照禪을 강하게 비판하고 五祖법연에서 원오극근으로 이어진 화두를 사용한 지도법을 발전시켜 看話禪法 話頭修行法

을 확립했다. 王法과 佛法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간화선을 당시 士大夫들에게 積極的으로 가르쳤다. 『서장』은 바로 이러한 간화선 지도 내용이 담긴 대혜의 편지를 모은 책이다. 『서장』의 편지 수신 인물  『서장』에 실린 전체 65편의 편지 가운데 증시랑 천유가 한 차례, 이참정 한노가 두 차례 질문한 편지를 제외하면 대혜 스님이 써준 편지는 62편이다. 증시랑에게 답한 편지가 6편,  이참정 한노, 부추밀 계신, 왕내한 언장, 여사인 거인에게 답한 편지가 각각 3편, 진소경 계임, 허사리 수원, 유통판 언충, 왕장원 성석, 유시랑 계고, 누추밀 중훈, 영시랑 무실에게 답한 편지가 각각 2편이고 그 외 다른 인물들에게는 한 편씩 보냈다. 강급사 소명, 조대제 도부, 유보할 언수, 진국태부인, 장승상 덕원, 장제형 양숙, 하운사, 여랑중 융례, 종직각, 이참정태발, 증종승 천은, 왕교수 대수, 이랑중 사표, 이보문 무가, 향시랑 백공, 진교수 부경, 임판원 소첨, 황지현 자여, 엄교수 자경, 장시랑 자소, 서현모 치산, 양교수 언후, 조태위 공현, 황문사 절부, 손지현, 장사인 장원, 탕승상 진지, 번제형 무실, 성천 규 화상, 고산 체 장로 등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 인물을 보면 한 사람의 여성, 두 사람의 승려(대혜 제자와 손제자), 벼슬이 표시 되지 않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직에 있는 인물이다. 공직 재직자가 受信者의 大部分이다. 그런데 편지 내용이 모두 불교의 선 수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特異하다. 출가 수행자가 아닌 세속인, 세속인 가운데서도 가장 多忙한 現職 官吏들에게 禪修行 관련 조언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62편에서 수신인은 벼슬아치 59명, 승려 2명, 보살 1명이다.  

이 대부분 세속인들이기 때문에 대혜가 지도한 선의 가르침도 이와 상관이 있다.  『서장』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기본 필수 교재로서 사집(四集) 가운데 하나이고 선종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선의 교과서로 통한다. 따라서 이 책 의 이해는 중국 간화선의 이해는 물론 한국 간화선의 이해로, 한국 간화선의 이해는 바로 불교의 근본적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서장』은 선을 지도하는 과정에 쓰였기 때문에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 선사의 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대혜는 크게 세 가지의 선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법을 기초로 당시에 유행하던 黙照禪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세 가지 선법의 하나는 看話禪이고 다른 하나는 正觀法, 나머지는 回光返照이다. 그러나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있어서는 간화선이 정관이나 회광반조에 비하여 훨씬 더 크다. 선법을 제시하고 黙照禪을 비판하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수행하고 그 수행의 결과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일러 주고 있다. 구체적 사회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현실 속에서 실천 가능한 선수행의 방법을 보이고 있어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선수행법을 먼저 논의하고 그가 주장하는 선법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가 보여준 표현방법도 분석하고자 한다. 논의 자료는 『대혜어록』을 참고로 『서장』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  『書狀』에 나타난 禪修行方法


   看話禪을 정립한 대혜로서 看話禪만 강조했을 것 같은데 正觀, 回光返照라는 또 다른 선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세 가지 선법이 실제 자료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간단히 제시한다. 간화선을 나타내는 작품이 더 많은데 <중시랑에게 답함>(1)(3)에서 수미산, 방하착 두 가지 화두를 제시하고, (5)에서는 사례로 무자, 죽비화, 한입에 서강수 물을 다 마신다,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부추밀계신에게 답함>(1)(3), <진소경계임에게 답함>(1), <유통판 언충에게 답함>(1)(2),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1), 여사인거인에게 답함(1),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1), <종직각에게 답함>, <왕교수 대수에게 답함>, <누추밀 중훈에게 답함>(1), <장사인 장원에게 답함>, <고산 체장로에게 답함> 등의 작품에서 無字 話頭를 들었다. 그리고 <여사인거인에게 답함>(2)(3), <서현모 치산에게 답함>에는 마른 똥 막대기 화두, <누추밀 중훈에게 답함>(2)에는 둘러메고 가라는 화두를 들었다. 그리고 특정하지 않고 그냥 화두를 참구하라고 말한 내용은 <중시랑에게 답함>(2),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2), <여랑중 융례에게 답함>,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2), <증종승 천은에게 답함>, <황지현 자여에게 답함>, <탕승상 진지에게 답함>, <번제형 무실에게 답함> 등에 나타난다.  그리고 정관법과 회광반조의 선법을 나타내는 작품은 아주 적게 나타난다. <이참정에게 답함>,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3), <이참정 태발에게 답함>, <이랑중사표에게 답함>, <이보문 무가에게 답함>, <영시랑무실에게 답함>(2) 등이 있다. 그리고 두어 사람에게 회광반조와 화두를 동시에 말한 <장제형 양숙에게 답함>,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1)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혜가 제자와 손제자에게 준 편지 이외에는 모두 世俗人들에게 편지를 주어서 그런지 선 수행의 방법이 出家者 中心, 고요한 山門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히려 世俗 中心, 生活 中心이라는 現實 안에서 修行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 공부 시간도 시끄러울 때의 공부를 강조한다.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데서 여일할 수 있도록 一句를 참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부하는 자세는 머리에 불을 끄는 것처럼 하라(<答趙待制道夫>)고 하면서도 너무 느슨하지도 조급하지도 않게 하라고 하여 중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躁急하게 하면 散亂에 빠지고 느슨하게 하면 昏沈에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체적인 입장을 전제로 수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1)간화선의 수행방법

  대혜는 화두 참구 방법을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參究의 方法이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이를 체계화해 보면 일정한 수행의 법칙이 드러난다. 核心的 修行方法을 담고 있는 작품을 실제 들면서 논의를 繼續하고자 한다. 


  (1)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없다.”고 하시니 이 한 글자는 허다한 나뿐 지식과 생각을 꺾는 무기입니다. 있다 없다는 분별심을 짓지 말며, 도리에 대한 분별심을 짓지 말며, 의식에서 분별하지 말며, 눈썹을 치켜들고 눈을 깜짝이는 곳을 향하여 뿌리 내리지 말며, 말길을 따라 살림살이를 짓지 말며, 일없는 속에 머물러 있지 말며, 화두(話頭) 드는 곳을 향하여 깨달으려 하지 말며, 문자 속을 향하여 인용하여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루 생활 속에서 항상 참구해 가되 “개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이르되 “없다.”고 한 것을 일용(日用)에서 여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공부해 나가면 언젠가는 문득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니 한 군내 천리의 일이 모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씀하시되 “나의 이 속은 살아 있는 조사의 뜻이라 무슨 물건이 있어서 능히 그를 얽어매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일용을 떠나서 따로 구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파도를 떠나서 물을 구하는 것이며 금 그릇을 떠나서 금을 구하는 것이라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此一字者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垜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颺在無事甲裏 不得向擧起處承當 不得向文字中引證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時時提撕 時時擧覺 狗子還有佛性也無 云無 不離日用 試如此做工夫看 月之日便自見得也 一郡千里之事都不相妨 古人云我遮裏是活底祖師意 有甚麽物能拘執佗 若離日用 別有趣向則是離波求水 離器求金 求之愈遠矣<答富樞密季申>114



  (2)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로서 길이 일체 선한 법을 기른다.”고 하셨고 또 이르시되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더하여 자라게 하고 믿음은 능히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리를 가고자 하면 한 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십지보살이 장애를 끊고 법을 증득(證得)하는 것도 처음에는 십신(十信)으로부터 들어간 뒤에 법운지(法雲地)에 올라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환희지(歡喜地)도 믿음을 인하여 환희심(歡喜心)을 낸 연고(緣故)입니다. ---중략--- 날로 일어나 응용하는 곳에 두루 분명해서 석가나 달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스스로 본인이 보기를 철저하지 못하며 뚫어 통과하지 못하고 온몸이 성색(聲色) 안에서 활동하고 있어 도리어 그 속을 향하면서 나오기를 구하니 더욱 교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黃面老子曰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又云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如來地欲行千里一步爲初 十地菩薩斷障證法門 初從十信而入然後 登法雲地而成正覺 初歡喜地 因信而生歡喜故也 ---中略---逐日起來應用處 圓陀陀地與釋迦達磨 無少異 自是當人 見不徹透不過 全身跳在聲色裡 却向裏許求出頭 轉沒交涉矣<答許司理壽源>152



  (1)의 내용은 狗子無佛性話의 수행 방법으로 되어 있다. 이 화두 수행에 예상되는 여덟 가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무자 화두에서의 思量分別로서 있다 없다는 알음알이, 도리에 대한 알음알이. 눈썹 치키고 눈 깜짝이는 곳을 향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말을 따라 살 계획을 짓지 말며, 일 없는데 머물지 말며, 화두 드는 데서 깨달으려 말며, 문자 인용으로 증명하지 말라는 것이 이것이다. 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垜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颺在無事甲裏, 不得向擧起處承當, 不得向文字中引證. 

 이런 警戒를 이행하며 간화선수행을 하되 반드시 日用을 떠나서 따로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구한다면 파도를 떠나 물을 구하고 금 그릇을 떠나 금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구할수록 더 멀어진다고 했다.

   간화선을 수행할 때 이와 같이 일상을 떠나지 말라는 지적을 富樞密에게도 繼續하고 있다. <又(答富樞密季申)>에서 고요한 곳에 빠져 있지 말고 시끄러운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라고 했다. 예로 광액도아가 초심자로서 칼을 놓고 성불한 것도 고요한 공부를 해서 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끄러운 곳이나 마음이 어지러운 때에 무자 화두를 참구하고 힘을 얻거든 고요히 앉되 昏沈과 掉擧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答劉通判彦冲>에서도 고요하고 시끄러운 데에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요함에 집착하는 것은 日常을 떠난 工夫이기 때문에 이것은 世間相을 부수고 實相을 구하는 잘못이라고 했다. 즉 일상 속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세간상이 바로 실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看話禪은 日常이 바로 眞理라는 佛敎의 存在原理에 철저히 立脚한 修行方法이라고 할 수 있다.    

   (2)는 <答許司理壽源1>의 앞 部分으로 믿음은 道의 根源이고 功德의 어머니로서 智慧를 자라게 하고 如來의 境地에 이르게 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引用하여 믿음을 强調하고 있다. 眞實한 믿음 與否에 따라 發心은 先後가 있으나 깨달음은 先後가 없다고 하였다. <答曾侍郞1>에서는 須彌山, 放下着 話頭을 着實히 들고 물러서지 않는 誠實함을 가지면 깨닫는다고 하고 여기에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믿는 진실함이 있어서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외 또 다른 <答趙待制道夫>145에서도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사대부가 도를 배우는데 어려운 장애가 생기는 것은 결정적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士大夫學道 多自作障難 爲無決定信故也<答趙待制道夫>145

 지적하고 이어서 믿음을 강조한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수행에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文脈으로 보아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연기, 공, 무아라는 불교 진리를 설하는 禪師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1)에서 提示한 世間相이 바로 實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있는 이대로의 一切가 緣起, 空이고 無我라는 것을 믿는 데서 看話禪 修行이 제대로 始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믿음에 根據하여 眞實하고 誠實하고 물러나지 않고 看話禪 修行을 계속할 때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상을 벗어나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일상 자체가 연기, 공의 진리 세계라는 불교 존재론에 근거한 것이고 일체가 바로 연기, 공, 무아라는 것을 믿어야 간화선 수행을 시작 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간화선 수행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더 요구한다. 


  (3)편지를 받아 보니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거림을 없애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돼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이 말은 방편 달마 스님의 이 말씀은 법이 아니고 방편이다. 

의 가르침입니다. 방편의 가르침을 빌려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만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아니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진실로 보내온 말과 같아서 내가 읽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근세에 마군(魔軍)은 강하고 법은 약하여 담담(湛湛)하고 맑은 곳에 들어가서 담담(湛湛)하고 맑은 곳에 합쳐지는 것으로 구경(究竟)을 삼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또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것으로 종사(宗師)를 삼는 사람이 삼대나 좁쌀같이 많습니다. 제가 근간에 일찍이 승려들과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니 정히 보내온 편지에 말한 것과 같아서 한 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반야 가운데 마음을 두었으되 생각 생각이 간단(間斷)하지 아니함이 아니었다면 능히 위로부터 모든 성인의 모든 다른 방편을 밝게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承諭 外息諸緣 內心無喘 可以入道 是方便門 借方便門 以入道則可 守方便而不捨則爲病 誠如來語 山野讀之 不勝歡喜踊躍之至 ---中略--- 近世魔强法弱 以湛入合湛爲究竟者不可勝數 守方便不捨爲宗師者如麻如粟 山野近嘗與衲子輩 擧此兩段 正如來書說 不差一字 非左右留心般若中 念念不間斷則不能洞曉從上諸聖 諸異方便也<又(答曾侍郞)5>76



  (4)이미 온 곳을 알지 못하며 또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면 문득 마음이 혼미하여 답답함을 알 것이니 정히 미혹하고 답답할 때에 또한 다른 물건이 아닙니다. 다만 이 속에 나아가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께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이 이르기를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니 다만 이 화두를 들어서 홀연히 기량이 다할 때에 문득 깨달을 것입니다. 간절히 문자를 찾아 끌어와 증명하고 어지럽게 널리 헤아리고 주해하지 마십시오. 비록 주해가 분명하고 말이 맞더라도 다 귀신 집에서 살아갈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旣不知來處 又不知去處 便覺心頭迷悶 正迷悶時亦非佗物 只就遮裡 看箇話頭 僧 問雲門 如何是佛 門云乾屎橛 但擧此話 忽然伎倆盡時便悟也 切忌尋文字引證 胡亂博量注解 縱然註解得分明 說得有下落 盡是鬼家活計 <答呂郞中隆禮>232


 


  (3)에서는 ‘外息諸緣 內心無喘 可以入道’라는 達磨大師의 말도 方便이기 때문에 方便을 固守하면 病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話頭도 方便이지 窮極的 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시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삼대나 좁쌀 같이 많다고 비유하였다. 이 글의 뒤 부분에서 바로 須彌山, 放下着 , 狗子無佛性話, 竹篦子話, 一口吸盡西江水話, 庭前栢樹子話 등의 화두도 방편으로 보고 공부하라는 말을 계속이어 가고 있다.  이런 공부가 꿈과 생시에 한결같다는 도리를 대혜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와서 향시랑에게(<答向侍郞伯恭>310) 말하기도 했다. 방편과 법을 구분하고 화두 참구를 생시와 꿈에 관통이 되도록 공부할 것을 교시했다. 

  (4)에서는 乾屎橛을 참구하여 깨달아야지 문자로 증명하고 주해를 일삼지 말라고 했다. 疑情을 打破하면 生死心이 끊어지고 煩惱見, 佛見, 法見도 저절로 버리게 된다고 했다. ‘話頭 위에서 疑心을 打破하면 千萬 가지 疑心이 打破되지만 文字와 經典의 가르침, 古人 公案, 日常 煩惱 가운데서 疑心을 일으키면 삿된 魔軍의 무리가 될 뿐이다. 화두 드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고 思量分別로 헤아리지 말고, 主意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나아가서 疑心하면 소뿔 속에 들어간 쥐가 넘어지고 끊어지는 것과 같이 깨치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문자를 찾거나 주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대혜는 작품에서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다른 작품에서 보면 思量分別하는 識情을 내려놓고 禪旨를 참구할 것(又(答曾侍郞)2),  또 <又(答曾侍郞)>6에서는  鐵石같은 마음으로 工夫를 꾸준히 해야지 빨리 이루겠다는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와 유사하게 <答曾宗丞天隱>284에서 지나치게 급하게 하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고 참구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내는 조바심 역시 분별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答江給事少明>103에서는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달려가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으면 이해한다고 해도 이익이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밖으로 달려가 구하는 것 역시 思量分別 行爲의 一種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思量分別心을 경계하는 작품이 더 있다. <答陳少卿季任>에서 사대부가 知見이 많아서 문제라고 한 것, <答宗直閣>273이나 <答呂舍人居仁1>226에서 말한 一切 思量分別을 버릴 것,  <答趙待制道夫>148에서는 塵勞事를 思量할 때 話頭를 돌이키라는 것, <答汪內翰彦章1>206에서 逆境과 順境, 三世를 모두 생각하지 말라는 것,  <又(答汪內翰彦章)2>에서 스스로 어리석고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 등이 모두 思量分別 關聯 具體的 事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又(答汪內翰彦章)2>에서 화두를 참구하되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거나 <答劉寶學彦修>167에서 생사심(生死心)을 타파하면 한 번 깨달아 일체를 깨달으며 한 번 증득하여 일체를 증득하여 한 묶음의 실을 일시에 끊는 것과 같다는 것이 思量分別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참구하여 깨달을 것을 강조한 말이다. <答富樞密季申1>에서 知解에 관여하지 말고 활구를 참구하라 하고, 思量分別이 일어나는 곳을 알면 사량분별이 해탈의 장소, 생사를 벗어나는 곳이 되고 그 위에서 자비를 실천하고 불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고, 일상을 떠나서 구하지 말라고 하고 그렇게 구한다면 파도를 떠나 물을 구하고 금 그릇을 떠나 금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구할수록 더 멀어진다고 한 것이 모두 思量分別과 관련된 말이다. 

  종합적으로 무자 화두에서의 思量分別로서 있다 없다는 알음알이, 도리에 대한 알음알이. 눈썹 치키고 눈 깜짝이는 곳을 향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말을 따라 살 계획을 짓지 말며, 일 없는데 머물지 말며, 화두 드는 데서 깨달으려 말며, 문자 인용으로 증명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 무기에 떨어지지 말라는 지적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思量分別을 경계한 것이다. 

 

    2)正觀와 回光返照의 修行方法

   여기서 正觀은 話頭를 들지 않고 一切 存在의 實相을 바로 보는 修行方法이다. 실제 正觀을 어떻게 修行하는 지를 該當 例文을 根據로 論議하고자 한다.  


(5)오탁악세(五濁惡世) 가운데 모든 것이 허망(虛妄)하여 하나도 진실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데에 항상 이런 생각으로 관찰하면 날이 오래고 달이 오램에 점점 녹아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히 번뇌할 때에 자세히 헤아려서 끝까지 힐문하되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납니까? 만약 일어나는 곳을 궁구하지 못하면 지금 번뇌하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옵니까? 정히 번뇌할 때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허망한 것입니까? 실재한 것입니까?’라고 하십시오.---중략---영가가 말하되 “무명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상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참된 말이고 진실한 말이며 속이는 말이 아니며 망령된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아서 통달하면 헤아리고 번뇌하려고 해도 또한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 보는 사람은 정관(正觀)을 한다고 이름하고, 만약 다르게 보면 삿된 관을 한다고 이름합니다. 五濁世中 種種虛幻 無一眞實 請行住坐臥 常作是觀則日久月深 漸漸銷磨矣 然正煩惱時 子細揣摩窮詰 從甚麽處起 若窮起處不得 現今煩惱底 却從甚麽處得來 正煩惱時 是有是無 是虛是實---中略---永嘉云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是眞語實語 不誑不妄等語 恁麽見得了 要思量要煩惱 亦不可得 作是觀者 名爲正觀 若佗觀者 名爲邪觀 (又<答汪內翰彦章3>)220-221

 


   (5)에서 먼저 五濁惡世의 모든 것은 虛妄하다고 觀察하면 恩惠와 사랑의 習氣가 점점 녹아 없어질 것이라고 먼저 말했다. 그러나 煩惱가 일어날 때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가? 煩惱하는 사람은 어디서 오고 煩惱는 있는가? 없는가? 비었는가? 實在하는가? 를 詰問해 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對答으로 ‘無明의 實性이 佛性이고 幻想의 빈 몸이 法身이라’고 한 永嘉스님의 말씀대로 보아서 通達하면 煩惱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니 이렇게 보는 것이 正觀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一切를 虛妄하다고 보아 煩惱를 克服해 가고 다시 그 無明實性이 바로 佛性이고 幻身이 곧 法身이라고 보는 것이 正觀의 수행이라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수행법을 <答李參政泰發>282에서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生死禍福에 임하여 살림살이가 다 드러나는 士大夫는 富貴貧賤에 拘碍되지 않고 慾心 없이 살아가는 시골 사람만도 못하다고 먼저 말하고, 華嚴重重法界를 理解하여 逆順 境界와 바르거나 顚倒된 것이 모두 自己와 다른 物件이 아니라고 觀하라고 말한다. 즉 境界와 自己, 主觀과 客觀이 하나라고 살피는 것이 正觀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答劉侍郞季高1>295에서 부처님께서 出家하시고 成佛하셔서 馬軍을 降伏 받고 法輪을 굴려 衆生을 건지고 涅槃에 드신, 有無를 超越하여 自由自在하신 부처님의 時節이 편지 받는 相對方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正觀이라고 했다. 나의 삶이 바로 부처의 삶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 正觀이라고 하였다. 일어나는 煩惱와 煩惱를 일으키는 當事者라는 주관을 幻이면서 眞理라고 보고, 역순 경계가 바로 자기이며, 부처의 삶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 사유하는 것이 正觀의 수행법이라 밝혔다.

   正觀이 主觀과 客觀이라는 一切 存在의 實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修行法이라면 回光返照는 客觀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어떤 생각이나 行爲를 하는 自身을 돌이켜 비추어보는 수행법이다. 즉 自己內面을 돌이켜 비추어보는 修行法이다. 다음 例文에서 回光返照의 修行法을 仔細하게 말하고 있다. 


(6)제가 비록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그 일하는 것을 보건대 크고 작은 일에 맞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으니 다만 이것이 문득 도가 합치되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 세속(世俗) 생각을 하지 말며 또한 불법(佛法)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불법과 세속은 모두 바깥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바깥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행동할 때에 무슨 모양이 있으며, 하는 바를 이미 판단하고는 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두루 주선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자람과 남음이 없으니 정히 이런 때가 되어 누구의 은혜력(恩惠力)을 받는가?’ 하십시오.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사람이 활쏘기를 배움에 저절로 적중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妙喜老漢 雖未目擊 觀其行事 小大折中 無過不及 只此便是道所合處 到遮裡 不用作塵勞想 亦不用作佛法想 佛法塵勞都是外事 然亦不得作外事想 但回光返照 作如是想者 從甚麽處得來 所作所爲時 有何形段 所作旣辦 隨我心意 無不周旋 無有少剩 正當恁麽時 承誰恩力 如此做工夫 日久月深 如人學射 自然中的矣 <答張提刑暘叔>191



   (6)에서 보면 大慧는 먼저 相對方을 稱讚하고 塵勞와 佛法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둘이 모두 밖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回光返照를 하라고 强調하고 있다. 回光返照 修行의 具體的 方法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나의 心意를 따라 周旋하지 않음이 없어 조금도 남음이 없는데 이런 때에 누구의 은혜를 받는가?’라고 되물으라고 했다. 공부를 이렇게 하면 마치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이 세월이 지나면 的中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世間과 出世間을 생각하지 말고 생각 일으키는 自己內面을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하지 않은 다음 부분을 보면 境界를 쫓아가다가 限量없는 苦痛을 받지만 알아차리면 主觀과 客觀이 없는 智慧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答李郞中似表303>에서는 回光返照라는 用語는 直接 使用하지 않고 回光返照의 修行을 가르치고 있다. 經敎나 話頭 關聯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일시에 다 내려놓으라고 命令한다. 그리고는 工夫 捷徑을 가르쳐 주기를 要求하는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前을 向해 보라고 했다. 回光返照라는 用語는 한 생각 일어나기 以前을 돌이켜 보라는 뜻이다. 이어 느슨하게 하지 말라는 警戒의 말도 덧붙였다. 여기가 바로 聖人의 이마를 끊는 자리인데 여기서 물러나지도 말라고 했다. 그러면 반드시 깨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答李寶文茂嘉306>에서 根性이 미련하여 깨닫지 못한다는 相對方의 말에 미련함을 아는 사람은 결코 미련하지 않다고 하고 돌이켜 잡아 보라고 하였다. 미련함을 아는 사람, 잡아 보는 사람, 混沌함을 아는 사람도 다 李寶文의 本來 그 자리라고 지적해 주었다. 여기서 大慧는 이것을 병에 맞게 주는 약이라고 하였다. ‘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 그러할 때 무엇이 그대의 본래 면목인가?’ 盧公曰不思善不思惡 正當恁麽時 那箇是上座 本來面目<答李參政>91

라고 한 육조스님의 말 역시 상대방을 回光返照하게 한 예로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회광반조는 대혜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인데 그는 이것을 인용해 법문에 사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大慧가 『書狀』에서 말한 修行法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看話禪, 正觀, 回光返照가 그것이다. 대혜는 수행법을 가르치면서 수행이 제대로 시행될 때 나타나는 수행의 효과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 <又(答富樞密季申)2>에서 수행을 잘 하게 되면 殺活自在하여 生死에 自由自在하고 임금을 堯舜으로 만들고 그 힘이 家庭, 社會, 國家에 미쳐서 대단한 成果를 낼 수 있다고 强調했다. 또 <答張提刑暘叔>에서는 天堂과 地獄이 자기 마음에 있으니 비추어 보고 억지로 다투지 말라고 하고 이렇게 하여 힘이 덜리면 佛祖가 되고 地獄이 天堂이 되고 生死를 벗어나고 임금을 堯舜 지위에 올리고, 百姓을 건지며 子孫에게 陰德을 끼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간화선에 중점을 두되 상대방의 공부 성격에 따라 正觀과 回光返照의 修行法을 敎示하고 있다. 간화선의 경우에는 수행에 따른 다양한 구체적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쳤고 다른 두 가지 수행법에 대해서는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수행법 설명을 대신하였다. 大慧는 修行의 잘못된 側面을 많이 지적했는데 특히 당시 流行하던 黙照禪의 問題를 指摘하고 批判하였다.  <又(答曾侍郞)>(3)에서 마음을 寂寂하게 쉬기만을 가르치는 것을 批判했다.  <又(答富樞密季申)2>에서 고요에 치우친 공부는 돌로 풀을 눌러 놓아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하고 고요한데 정체 되지 말고 시끄러운데서 힘을 얻을 것 강조했다. 그리고 <又(答陳少卿)2>에서는 묵조가 靜坐를 究竟法으로 삼기 때문에 원수 맺는 것을 두려하지 않고 이를 꾸짖어 부처님의 恩惠에 報答하고 末法 時代 弊端을 驅除한다고 하였다. 또 <又(答宗直閣)>에서는 마음을 엉기게 하고 생각을 收斂하며 일을 거두어 눈을 감고,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억누른다는 見解는 空에 떨어진 外道와 魂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과 자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며 자기를 속이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黙照禪의 병통이라고 批判하였다. 

 思量分別을 無視하고 바로 話頭를 들라는 事例, 一切存在의 實相을 바르게 보라거나 思量分別을 일으키는 根源을 돌이켜 보라는 事例, 根源을 돌이켜보는 데서 話頭를 들라는 事例, 화두 드는 자를 돌이켜 보라는 事例 등이 모두 나타난다. 이 가운데 첫째 사례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는 상대의 근기에 따라 교시를 내린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수행법은 경우에 따라 상호 보완적으로 知解를 넘어 상대방을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했던 대혜의 대기설법의 결과 나타난 것이다. 看話禪, 正觀, 回光返照가 각각 話頭를 들거나, 一切를 바로 보거나, 自己를 돌이켜보는 修行方法은 달라 보이지만 내면에 主客一體가 되고 三昧를 거쳐 開悟하는 內容은 같다고 할 수 있다.   

         



3. 『書狀』의 表現方法


  여기서는 大慧가 看話禪과 正觀, 回光反照와 같은 선 수행법을 說明하고 主張면서 敎示의 效果를 높이기 위해서 어떤 표현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대혜는 표현법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심인 修辭法과 敍述方法으로 나누어서 論議를 진행하고자 한다. 


   1)修辭法

  대혜는 그가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내용, 비판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아주 緊切한 修辭法을 驅使하고 있다. 


  (7) 이는 진공묘지(眞空妙智)가 태허공과 더불어 수명을 가지런히 하니 다만 이 태허공중에 도리어 한 물건이 장애가 됩니까? 한 물건의 장애도 받지 않아서 모든 물건이 공중에 왕래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으니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러해서 생사(生死)와 범성(凡聖)과 구염(垢染)이 조금도 붙을 수 없습니다. 붙을 수 없으나 생사 범성이 그 가운데 왕래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此眞空妙智與太虛空 齊壽 只遮太虛空中 還有一物礙得佗否 雖不受一物礙 而不妨諸物 於空中往來 此眞空妙智亦然 生死凡聖垢染 着一點不得 雖着不得 而不礙生死凡聖 於中往來(又<答曾侍郞>2)63



  (8)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과거의 법을 망령되게 가지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일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도 머물지 않으면 삼세(三世)가 다 비고 고요함을 통달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조주가 ‘없다’고 한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청컨대 부질없는 알음알이의 마음을 무자(無字) 위에 돌려서 시험 삼아 헤아려 보십시오. 홀연히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향하여 이 한 생각을 타파하면 문득 이것이 삼세를 통달하는 자리입니다. 釋迦老子云心不妄取過去法 亦不貪着未來事 不於現在有所住 了達三世悉空寂 但看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請只把閑思量底心 回在無字上 試思量看 忽然向思量不及處 得遮一念破 便是了達三世處也(答汪內翰彦章1)207



  (9)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별도 문자 위에 가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 일반적으로 공안(公安)과 화두(話頭)는 구별하지 않고 같은 말로 사용하나 이 글에서 대혜는 양자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 가운데 의심을 일으키면 다 이것은 삿된 마군(魔軍)의 무리입니다. 若棄了話頭 却去別文字上起疑 經敎上起疑 古人公案上起疑 日用塵勞中起疑 皆是邪魔眷屬(答呂舍人居仁)227



   (7)에서는 佛敎的 眞理 世界인 眞空妙智를 太虛空에 比喩하고 있다. 먼저 壽命이 같고, 太虛空中에는 한 물건도 걸림이 없는 것처럼 眞空妙智에도 生死와 凡聖과 垢染이 걸림이 없다고 하였다. 일체 걸림이 없는 眞空妙智의 성격을 太虛空中에 비유한 것이다. 이 引用文에 이어진 部分에서 이와 같이 믿고 보아가면 趙州의 放下著, 雲門의 須彌山이라는 話頭를 깨칠 수 있다고 했다. 대혜는 『書狀』에서 多樣한 比喩를 通하여 觀念的인 無形의 精神現象을 具體化하여 정확하게 認識시키는 效果를 거두고 있다. 

  이외의 比喩의 事例를 더 들어보면 이런 意圖가 더욱 分明해진다. 같은 人物에게 준 又<答曾侍郞6>82에서 파리가 어느 곳에나 앉을 수 있지만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듯이 衆生도 곳곳에 攀緣하지만 般若위에서는 攀緣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또 일용을 떠나서 따로 구하는 것은 파도를 떠나 물을 구하고 금 그릇을 떠나 금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若離日用하고 別有趣向則是는 離波求水며 離器求金이라 求之愈遠矣리라<答富樞密季申1>114

 화두 참구를 바로 일상 속에서 해야 하는 이유를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드러냈다. 깨달음의 순간을 두고도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를 통달하면 일체를 통달하고 하나를 깨달으면 일체를 깨달으며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증득하는 것은 한 다발의 실을 한번 베어 일시에 끊는 것과 같아서 無邊法門을 證得하는 것도 또한 그러해서 다시 次第가 없다 一了一切了一悟一切悟一證一切證 如斬一結絲一斬一時斷 證無邊法門亦然 更無次第<答劉寶學彦修>160

고 하였다. 또 스스로 根性이 어리석고 劣等하다고 하면서 入門할 곳을 찾는 것은 含元殿 안에서 長安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 若自生退屈 謂根性陋劣 更求入頭處 正是含元殿裡 問長安 在甚處爾 正提撕時 是阿誰 能知根性<又(答汪內翰彦章)2>29

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회광반조를 철저히 해 가는 것을 ‘성인의 이마를 끊는 자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遮裡是坐斷千聖頂寧處라<答李郞中似表303>

 즉 존재원리, 수행과정, 깨달음 등 드러내기 어려운 重要한 局面을 모두 的實한 譬喩를 使用하여 相對方을 정확하게 理解시키고 있다.   

  (8)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하고 있다. 過去法과 未來事, 現在를 가지거나 탐착하지 않으면 일체가 空寂함을 通達할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먼저 引用하고 思量心을 돌려 趙州無字話를 드라고 했다. 그래서 思量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한 생각을 깨뜨리면 삼세를 통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을 引用하여 思量하지 않고 話頭를 打破하면 깨닫는다는 것을 立證하고 있다. <答汪狀元聖錫1>257의 앞부분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부처님[老瞿曇]의 ‘唯此一事實이요 餘二則非眞이라’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大慧는 이와 같이 經典에 나타난 부처님의 말씀은 勿論 다른 조사스님들의 말씀도 필요할 때는 항상 인용하고 이를 根據로 主張을 展開한다. <答劉侍郞季高1>295에서 ‘불성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보라’ 古德이 云欲識佛性義인댄 當觀時節因緣<答劉侍郞 季高1>295

고 한 百丈懷海의 말을 引用하고 이를 근거로 부처의 일생과 자신의 일생이 다르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점을 교시하고 있다. 교시의 한 마디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두 인물 사이 선문답 전체를 인용하여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答劉侍郞季高1>298의 경우 어떤 스님과 한 선지식 사이에 더위를 두고 주고받은 問答 全體 <答劉侍郞 季高2>298

를 引用하여 日常生活 가운데서 工夫할 것을 敎示했다. 간화선 수행과 관련된 일체 존재나 수행 방법을 이해시키는데 필요한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신뢰성과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認識이나 修行이 잘못된 경우, 수행 과정, 깨달음 등의 모든 과정과 관련하여 대혜는 불조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의 교시적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9)를 보면 話頭 參究를 하지 않는 잘못된 방법의 事例를 4回에 걸쳐 列擧하고 있다. 화두에서 의심이 일어나야 하는데 여기서는 文字, 經敎, 公案, 日用塵勞中에서 起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여 ‘起疑’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잘못된 사례 여럿을 알려주기 위해 열거법을 사용하고 있다. 

  <答曾侍郞1>52에서는 전에 지은 죄를 실제로 여긴다면 지옥과 천당, 번뇌와 무명, 업 짓기, 과보 받기, 법문 등이 ‘또한 실제[亦實]’가 될 것이라고 하여 <答曾侍郞1>52

 하나를 잘 못하면서 따라오게 되는 여러 가지 잘못을 나열하고 있다. 여기서는 ‘또한 실제[亦實]’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열거법을 통해 어떤 문제를 자세히 알려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答呂舍人居仁>248에서는 대혜가 상대방 여거인이 일체 모든 일을 하는 당사자임을 각인시키면서 그가 하는 다양한 일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모든 相이 떠나 있음을 아는 여거인, 死後斷滅不斷滅을 의심하는 여거인, 바로 끊어 지시해주기를 요구하는 여거인, 일상의 성내고 기뻐하고 헤아리고 분별하며 昏沈과 掉擧하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를 하는 여거인 <答呂舍人居仁>248

을 여러 번 열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여거인이 믿음이 미치면 삼매에 들고 거기서 일어나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일체 행위의 주체가 본인임을 일깨우고 대혜가 제시한 수행으로 나가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행위를 하는 ‘여거인’이라는 이름을 열거하였다. <答呂舍人居仁3>254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거인이 이와 같이 믿는다면 부처와 조사도 이와 같으며, 깨달음, 미혹함, 의심, 사는 것과 죽는 것, 일상 번뇌, 사후 斷滅과 不斷滅, 조정 벼슬 하는 것, 조용히 있는 것, 徑山 大衆에 둘러싸여 있는 것, 귀양 가서 형주에 있는 것 등도 ‘이와 같다[如是]’고 주장하고, 다시 믿는가라고 묻고 믿는 것, 믿지 않는 것 등이 모두 ‘이와 같다[如是]’는 말을 반복하고 여러 사실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논의한 比喩法은 중요한 사실을 正確하게 認識시키기 위해서, 引用法은 大慧 自身의 主張을 뒷받침하여 강화하기 위해서, 列擧法은 事實에 대한 說明과 自身의 主張을 强化하기 위해서 使用된다는 것을 確認했다.       

   

  2) 敍述方法 

  여기서는 文章을 構成하고 敍述하는 方式의 基準에서 表現法을 論議하고자 한다. 대혜는 다양한 문장을 구사하고 이를 하나의 글로 構成하면서 상대방을 說得力 있게 修行으로 나서게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이러한 敎示를 逆轉시킴으로써 그가 입각한 本來成佛의 佛敎的 立場을 明快하게 드러내기에 이른다. 實際 作品을 들어가면서 論議를 繼續하고자 한다. 


  (10)만약 마음을 두고 깨달음을 기다리면 기다리는 마음이 도안(道眼)에 장애(障碍)줌을 입어 더욱 급하게 하면 더욱 더디게 될 것입니다. 단지 화두를 잡다가 문득 잡은 자리에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면 이것이 집에 돌아와 편안히 앉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고인의 갖가지 방편을 꿰뚫어서 여러 가지 분별심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若存心等悟則被所等之心 障却道眼 轉急轉遲矣 但只提撕話頭 驀然向提撕處 生死心絶則是歸家穩坐之處 得到恁麽處了 自然透得古人種種方便 種種異解自不生矣(<答湯丞相進之>401) 

  


  (11)진실로 출세간의 이 문중에서 몸을 한 번 돌이켜 던지면 어찌 허리에 십만 관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오르는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옛날 문공(文公) 양대년(楊大年)이 서른 살에 광혜연공(廣慧璉公) 스님을 만나서 가슴에 막힌 물건을 제거하고 그 이후로부터는 조정에 있거나 마을에 살거나 시종 한결같이 공명(功名)에 끄달림을 당하지 않았으며 부귀(富貴)에 끌림을 당하지 않았으나 또한 일부러 부귀와 공명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도가 있는 곳에 법이 이와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苟能於此箇門中 飜身一擲 何止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而已哉 昔楊文公大年三十歲 見廣慧璉公 除去礙膺之物 自是已後 在朝廷居田里 始終一節 不爲功名所移 不爲富貴所奪 亦非有意輕功名富貴 道之所在 法如是故也(<答汪壯元聖錫>263), 



  (12)만약 믿음이 부족하고 놓아 내리지 못하면 도리어 청컨대 하나의 수미산을 짊어지고 가서 도처에 행각하여 눈 밝은 사람을 만나서 분명히 들어 보여 주십시오. 한 번 웃습니다.若信不及放不下 却請擔取一座須彌山 到處行脚 遇明眼人 分明擧似 一笑(<又(答曾侍郞)(2)>65)



  (10)에서는 ‘(만약) ---하면 ---하다’는 式의 文章을 두 번 거듭 反復하고 있다. 첫 문장에서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면 기다리는 마음이 道眼을 障碍하여 急하게 하면 할수록 더 더뎌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형식상 ‘若, 則’ 等의 글자를 쓰지 않으면서 條件을 보이는 文章이 이어진다. ‘이런 데에 이르면 저절로 古人의 갖가지 方便을 透得하여 갖가지 다른 見解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大慧는 條件을 提示하고 거기에 따른 結果를 제시하여 論理的으로 남을 설득할 때 이와 같은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즉 自己 主張의 說得力을 높이기 위해서 ‘그릇된 修行法을 施行하면 나쁜 結果, 바른 修行法을 施行하면 좋은 結果가 導出된다.’는 形式의 論理的 條件文을 使用한다.  

  다른 예를 더 보면 <答汪狀元聖錫1>257에서 ‘만약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뚫으면 이러한 말들도 도리어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곧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若透得狗子無佛性話 遮般說話 却成妄語矣.

라고 하여 狗子無佛性話를 터득하면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本分事의 일을 論理的으로 밝혀 主張했다. <答宗直閣>272에서도 ‘이미 불법 가운데 있으면 차별 경계가 아니고 이미 차별 경계 가운데 있다면 불법이 아닙니다.’ 旣在佛法中 卽非差別境界 旣在差別境界中 則非佛法矣

라고 하여 對句 形式으로 두 번에 걸쳐 條件文을 사용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佛法中에 있으면 이미 差別境界가 아니고 이미 差別境界에 있으면 佛法이 아니다.’라고 하여 佛法世界와 差別境界의 關係를 條件文으로 反復 說明함으로써 佛法이 어떠한가를 먼저 알리고 이어서 佛法을 알려면 話頭를 들어야 한다는 主張을 强化하고 있다.      

  (11)에서는 ‘이 門中에서 몸을 한 번 뒤집으면 어찌 허리에 十萬貫을 차고 鶴을 타고 楊洲에 가는 것에 그치겠는가?’라고 하여 수행해서 깨닫는 것이 富貴功名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것을 反語的 疑問文을 통하여 강하게 主張하고 있다. 反語的 疑問은 문장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과 반대의 뜻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答曾侍郞1>52에도 보면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이 한 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오히려 선지식으로부터 증득한 삼매(三昧)도 한순간에 잊어버렸는데 하물며 시작 없는 허위(虛僞)와 악업(惡業)과 습기(習氣)이겠습니까?’ 善財於彌勒彈指之間 尙能頓亡諸善知識所證三昧 况無始虛僞惡業習氣耶

라고 하여 ‘선재동자가 미륵의 손가락 한번 퉁기는 순간에 모든 선지식이 증득한 삼매도 잊었는데 하물며 시작 없는 虛僞와 惡業과 習氣이겠습니까?’라고 하여 虛僞, 惡業, 習氣는 반드시 잊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又(答曾侍郞)2>61에 보면 어찌 쾌활하지 않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豈不快哉 豈不暢哉)라고 하여 知解를 쓰지 않고 金剛王 寶劍으로 單番에 葛藤을 끊어 버리면 本分자리가 드러나서 ‘매우 快活하고 痛快하다’는 것을 反語的 疑問文으로 强調하고 있다. 

   强調할 때 反語的 疑問文을 使用하기도 하지만 大慧는 直說的으로 ‘---을 하라’는 命令의 方式을 頻繁하게 使用하기도 한다. 그래서 反語的 疑問文과 命令文은 語感은 다르지만 强調의 本來 意圖는 같다. <答曾宗丞天隱>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다만 이 답답한 자리가 문득 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어, 앉아서 천하 모든 사람의 혀를 끊는 자리이니, 소홀히 하지 말고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只遮迷悶 便是成佛作祖 坐斷天下人舌頭處也 不可忽不可忽

라고 하여 ‘이 답답한 것이 佛祖가 되어 천하 사람의 혀를 앉아서 끊는 것이니 소홀히 하지 말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중요한 내용을 가르쳐 주고 이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거듭 명령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不可忽不可忽’의 표현은 바로 뒤에 나오는 <答王敎授大授>289에도 거듭 나타난다. 중요한 가르침을 내리고 이런 방식의 命令法을 구사하여 敎示 內容을 實踐할 것을 强調한다. <答李郞中似表303>에서 보면 바로 ‘어떤 행동을 하라, 하지 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청컨대 당신께서는 혹 평소 모든 경전과 화두를 보거나 혹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가르쳐 준 것으로 인해서 얻은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모두 가져다 일시에 내려놓으십시오. 옛날 같이 백 가지를 알지 못하고 백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되 세 살 먹은 아이와 같이 되어 감각은 있으나 작용하지 않거든, 도리어 공부 지름길을 가르쳐 주기를 요구하는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향하여 보십시오. 보아 오고 보아 감에 점점 코끝이 없으며 마음이 더욱 편안하지 않을 때를 알아서 반드시 놓아 느슨하게 하지 마십시오.’ 請左右 都將平昔 或自經敎話頭 或因人擧覺指示得滋味歡喜處 一時放下 依前百不知百不會 如三歲孩兒相似 有性識而未行 却向未起求徑要底一念子前頭 看 看來看去 覺得轉沒巴鼻 方寸轉不寧怗時 不得放緩

라고 하여 먼저 ‘경전이나 화두에서 재미있고 기쁜 것을 일시에 내려놓으라.’고 명령한다. 이어 ‘지름길을 구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향하여 보라’고 명령하고, 또 ‘코가 없는 것을 알아 점점 편안하지 않을 때 느슨하게 하지 말라’고 세 번에 걸쳐 명령법을 사용했다. 이는 回光返照 修行을 할 때 方法을 매우 切實하게 조목조목 알리고 실천을 강조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대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실천하도록 요구할 때 이와 같이 반어적 의문문이나 명령문을 사용하고 있다 하겠다. <又(答陳少卿季任)2>142-3에서도 ‘간절히 기억하라[切記取]’, ‘기억하고 기억하라(記取記取)’ ‘記取記取’라는 표현은 <答秦國太夫人>186에도 보인다.  

고 하여 단락이 끝나면 바로 앞서 말한 내용을 반드시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12)에서는 믿음이 미치지 못하고 놓지 못하면 하나의 須彌山을 짊어지고 到處에 行脚해서 눈 밝은 사람을 만나 들어 보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 引用文 바로 앞에서 眞空妙智가 太虛空과 같아서 生死와 凡聖이 往來해도 障礙가 없다고 믿고 보면 生死에 自由를 얻을 것이라고 한 말에 이어서 덧붙인 말이다. 즉 (12)의 내용은 수행을 열심히 하며 선지식을 만나 공부를 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믿음이 없고 내려놓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열심히 행각하며 공부하라고 말해 놓고 맨 마지막에 와서는 ‘한 번 웃는다’라고 段落을 끝맺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앞에 한 말을 뒤집는 逆轉法이다. 本來成佛의 立場에서 보면 行脚하기 前에 이미 다 이루어져 있는데 工夫를 통해 부처를 보고 부처되라고 권해서 우습다는 것이다. 本來佛인데 行脚하며 修行하여 깨달아 부처가 되라고 했으니 우습다는 것이다. <答李參政泰發>283에서도 便紙 마지막 부분에서 ‘一笑’라는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고 해 놓고 한 번 웃는다고 하였다. 本來佛인데 그에게 교시를 내리는 것이 우습다는 反轉을 보여주고 있다.  <又(答曾侍郞)2>63, <答李參政>101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반전은 ‘一笑’라는 표현 외에 喝을 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答劉通判彦冲1>180에서 ‘咄! 且置是事.’라는 표현이 보이는 데 여기서 ‘咄!’이 일종의 喝이다. 발언을 마치고 마지막에 하는 이런 표현은 앞의 ‘한 번 웃는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한 말을 일체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 喝을 통한 逆轉法을 구사하는 理由다. <又(答曾侍郞)5>80에는 연이어 세 차례나 ‘咄!’이 나온다. 세 개의 각 단락에서 말한 내용을 각기 부정하는 역할을 하여 逆轉法을 反復 사용하고 있다. 수행과 관련된 이런저런 교시를 내리고 스스로 이를 부정함으로써 本來成佛을 드러내고 이를 통하여 편지 상대를 高次元의 修行으로 이끄는 機能을 감탄문을 통한 逆轉法이 擔當하고 있다고 하겠다.       

  大慧는 敍述方法에서 條件文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主張의 說得力을 높이고 命令文이나 反語的 疑問文을 통하여 敎示한 내용을 반드시 實踐하도록 强調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感歎文을 驅使하여 至今까지 主張하고 實踐을 要求했던 內容을 뒤집음으로써 論理的 矛盾과 함께 새로운 次元의 깨우침을 刺戟하는 高度의 敎示方式을 보여 주었다.    


4. 結論


  至今까지 大慧宗杲 『書狀』에 나타난 禪修行의 方法과 그 表現方法을 論議했다. 看話禪의 定立者로 일컬어지는 그가 實際 어떤 種類의 禪을 어떻게 修行하게 指導하고 있는지? 그런 禪修行法을 便紙라는 하나의 글쓰기 方式에 의지하면서 어떤 表現法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 결과 그가 의도한 교시의 성과는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했다.

  먼저 선수행의 방법에서 대혜는 『서장』에서 看話禪을 위주로 하되 正觀과 回光返照라는 또 다른 선수행법을 人物에 따라 敎示하고 있었다. 看話禪 修行에 있어서는 一切가 緣起이고 空, 無我라는 불조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는 바탕 위에서 일상이 곧 법이기 때문에 수행도 일상 속에서 해야 하며, 화두 역시 방편임을 철저히 알고, 세속 진로에 대한 思量分別은 물론 話頭에 대한 思量分別도 完全히 排除하고,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절박한 마음으로 하되 조급하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고. 밖으로 달려가 구하지 말며, 화두 참구만 철저히 해 나가는 것을 구체적 간화선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서장』에서는 무자 화두에 대한 구체적 수행법을 여덟 가지를 제시하여 다른 모든 話頭를 參究할 때에도 중요한 지침이 되게 하였다. 그가 주로 제시한 화두는 趙州無, 須彌山, 竹篦話, 放下着, 마른 똥막대기, 한입에 西江水 물을 다 마신다. 뜰 앞의 잣나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正觀은 世俗 一切가 虛妄하다고 보며 그런 觀點에서 번뇌와 번뇌를 일으키는 사람도 허망하다고 하면서 그 ‘無明의 實性이 佛性이고 幻想의 빈 몸이 法身이라’고 한 永嘉스님의 말씀대로 보는 것, 華嚴重重法界를 理解하여 逆順 境界와 바르거나 顚倒된 것이 모두 자기와 다른 물건이 아니라고 보는 것, 부처의 일생과 자기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 즉 주객을 하나로 보는 것을 正觀이라고 했다. 回光返照에서는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기 전을 돌이켜보는 수행법으로 塵勞와 佛法, 世間과 出世間이 다 경계이니 일체를 생각하지 말고, 工夫의 捷徑을 가르쳐 달라는 생각, 근성이 미련하다는 생각, 經傳이나 話頭 關聯 재미있는 생각 등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그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돌이켜 보는 것을 수행의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善惡을 생각하지 않을 때 너 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물은 六祖스님의 事例를 回光反照의 先例로 들었다. 여기에 느슨하게 하지 말 것,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 수행방법의 具體的 警戒로 제시했다.  

   다음은 表現方法을 修辭法과 敍述方法의 둘로 나누어서 論議하였다. 佛祖가 大衆에게 설법을 할 때에는 그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말하기 방법을 援用한다. 大慧 亦是 便紙를 통하여 그가 하고자 한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갖가지 수사법과 서술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修辭法에서는 譬喩法, 引用法, 列擧法 등을 주로 구사했다. 비유법에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관념적 교시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에 견줌으로써 상대방이 그 意味를 明確하게 理解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예를 들면 따로 구하지 말라는 것을 금과 금 그릇, 물과 파도의 관계, 깨닫는 것을 한 묶음의 실을 일시에 끊는 것, 眞空妙智를 태허공, 입문할 곳을 찾는 것은 含元殿에 앉아 長安이 어디냐고 묻는 것, 회광반조의 실천을 성인의 이마를 끊는 것에 각각 비유하여 존재의 실상 등을 이해시키고 참선 수행의 방법과 깨달음의 순간을 설명하였다. 인용법은 부처님의 교시를 경전에서 인용해 오거나 조사들의 말을 인용해 와서 그가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여 설득력을 극대화하였다. 열거법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권장하거나 금지해야 하는 사항을 같은 방식으로 나열하여 알리고 주장하는 효과를 동시에 높이는 수사법이다. 수사법에서는 중요 문제를 부각하여 알리고 실천해야 할 핵심 사항을 강하게 주장하여 상대로 하여금 반드시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의도에서 세 가지 수사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敍述方法에서는 條件文, 命令文과 反語的 疑問文을 驅使하고, 段落이나 作品을 마무하면서 감탄문을 통하여 스스로 주장한 일체 교시 내용을 역전시키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條件文은 合理的 主張을 통하여 相對를 論理的으로 설득할 때 사용하는 교시 방법이었다. 명령문과 반어적 의문문은 대혜가 의도하는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실천하게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서술방법이었다. 수행 과정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할 때 命令文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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