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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문화_ 분황 원효가 일심의 철학을 전개한 까닭은?(고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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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647회 작성일 23-02-2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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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 원효가 일심의 철학을 전개한 까닭은 ?


                                                                고영섭(동국대학교)


  1. 일심과 진망화합식


  불교의 역사는 마음의 탐구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동력이자 주체를 변화시키는 구심력이며 무아와 윤회 및 해탈과 열반의 근거이다. 열 아홉(남전) 살 혹은 스물 아홉(북전) 살이었던 싯다르타는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어가는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하였다. 그는 마음의 평안을 통하지 않고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존재에 대한 불안정’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 끝에 고통 발생과 고통 소멸의 연쇄 고리를 벗어나 붓다가 되었다. 붓다가 설한 안이비설신의 육근과 색성향미촉법의 육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안이비설신의의 육식은 현실적 인간의 표층의식이었다. 용수는 이 제6식을 나누어 구체적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상중하 3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친은 초능변과 제이능변과 제삼능변을 통해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관계를 해명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표층의식은 다시 7전식의 작용을 통해 심층의식으로 잠세되어 심층의식을 변화시키며 성숙시켜 갔다. 

  분황 원효는 일심의 철학을 통해 이 심층의식의 구조와 관계에 대해 해명하였다. 먼저 그는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이문(二門)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원용하였다. 분황은 일심을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파악하는 『대승기신론』의 정의에만 붙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일심을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진식(眞識)으로만 이해하는 유식가들을 따르지도 않았다. 분황은 오히려 일심을 진망화합식으로 해명하는 『대승기신론』의 구조를 원용하여 일심의 철학을 건립하였다. 그는 부처의 영역과 범부의 영역을 갈라 볼 것인가 함께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결국 분황은 일심을 제8식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9식을 향해 열어두었다. 그는 ‘자성청정심은 제9아마라식이라고 하며 제8아라야식과는 ‘체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體同義別]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은 분황이 8식설을 지지하면서도 9식설을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점이다. 그는 8식과 9식 사이에 ‘성자신해’(性自神解) 즉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알아차리는 역동성과 신해성을 부여하고 있다. 

  분황은 자신의 주요 저술에서 일심을 삼보(三寶), 일각(一覺), 일성(一性), 일제(一諦), 일미(一味), 일승(一乘), 여래장(如來藏), 아라야식(阿黎耶識), 중생심(衆生心), 대승법(大乘法), 열반(涅槃), 적멸(寂滅), 불성(佛性), 법성(法性), 중도(中道), 실제(實際) 등으로 확장하여 사용한다. 이들 개념 사이에는 여러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때문에 이들 개념 사이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각 개념 사이의 상통성과 상관성을 온전히 꿰어내지 못하면 매우 혼란스럽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주요 개념이 모두 ‘일심’이라고 강변하게 될 위험이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심과 일심지원 사이의 역동성과 신해성이 오히려 다른 개념과 개념 사이의 스펙트럼을 차단할 수도 있다. 때문에 그는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 이문(二門)의 구도를 원용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마음은 하나이지만 심진여문과 심생멸문, 즉 불변하는 마음과 변화하는 마음의 구도로 파악하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여는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한다. 반면 생멸심은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개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총상(總相)은 별상(別相)과 상대되는 통상(通相)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진여는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체의 구별이 사라진 세계이며, 변화도 없고 파괴도 없는 세계이다. 때문에 진여는 모든 현상과 사물을 총괄한다. 하지만 진여는 생멸심과 달리 불변의 측면인 정적인 측면을 띄는 것으로 비춰진다. 여기에는 여래장을 근거로 생멸심을 낳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동적인 측면도 있다. 즉 진여가 비록 움직여서 생멸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의 진여의 측면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여는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마음이면서도 불변의 측면만이 아니라 변화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진여에 불변의 의미뿐만 아니라 변화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멸심에도 변화의 의미뿐만 아니라 불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진여의 개념과 실재


  여기서 진여와 생멸심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여의 동적 측면과 생멸심의 변화 또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의식되는 것은 생멸심의 변화밖에 없으며, 진여의 동적 측면은 생멸심의 단서로 하여 머릿속으로 추론해낸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여의 동적 측면을 분황은 일심의 ‘역동성’ 혹은 ‘신해성’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진여의 운동은 차별이 배제된 상태에서 모든 운동과 변화를 포괄한다. 때문에 진여의 운동은 멸(滅)이면서 생(生)이며 정(靜)이면서 동(動)인 변화이다. 이것은 현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동정은 어떠한 힘도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머물러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진여의 불변적 의미와 생멸심의 불변적 특성과는 어떻게 변별되는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용어를 통해 이를 해명하고 있다. 이 말은 이미 입의문(立義文) 서두에 보이고 있다. 일심은 심진여문과 심생멸문 두 측면에서 파악되며 진여는 대승(마음)의 본체[大乘體]를 나타내고 생멸문은 마음의 자체상용(自體相用)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분황은 “몸체[體]는 진여에 있고 몸꼴[相]과 몸짓[用]은 생멸심에 있으며 생멸심 안에 체가 있지만 그 체는 ‘상에 종속된 체’[體從相]이므로 별도로 말할 필요가 없다”[大義中, 體大者在眞如門, 相用二大在生滅門, 生滅門內亦有自體, 但以體從相, 故不別說也.]”고 말한다. 하지만 법장은 “진여는 대승(마음)의 본체를 나타내지만 생멸심 안에는 체와 상과 용이 갖추어져 있다[眞如門中示大乘體, 生滅門中具宗三大.]”고 말한다. 분황은 둘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하여 생멸문 내의 체를 ‘상에 종속된 체’로 보는 반면 법장은 둘 사이의 독자적 행로를 염두에 두고 생멸문 내의 체를 ‘별도의 체’로 파악한다. 이것은 진여와 생멸심의 관계에 대한 두 사람의 미묘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분황은 “‘대승의 자체를 나타냈다’는 것은 곧 생멸심 내의 본각심이니, 생멸의 체(體)와 생멸의 인(因)이며 이 때문에 생멸심 내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여문 안에서는 곧 ‘대승의 체’라 말하고, 생멸문 안에서는 ‘자체’라고 한 것은 깊은 까닭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아래 해석 중에서 그 의미가 스스로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상’과 ‘용’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여래장 중에 헬 수 없는 본성(本性)의 공덕(功德)의 상을 잘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곧 상대의 뜻이며, 또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이 곧 용대의 뜻이다. 다른 하나는 진여가 일으킨 염상(染相)을 상이라 하고, 진여가 일으킨 정용(淨用)을 용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여의 정법에는 진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으로 훈습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는 것이다. 무명의 염법에는 본디 정업(淨業)이 없지만, 다만 진여로 훈습되기 때문에 곧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하나인 일심’과 ‘넓은 대승’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부분이다. 분황은 일심 내의 심진여문과 심생멸문 뿐만 아니라 대승과 심진여문과의 관계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분황은 생멸심의 불변적 특성과 진여의 불변적 특성의 상호 관련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아라야식 개념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이 아라야식을 여래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래장은 현상계에 머물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진여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관한 해답은 제시한다. 하지만 본성상 진여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이 어떻게 미혹한 상태에 놓여있게 되는가에 관한 해답은 제시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대승기신론』에서는 여래장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그와는 강조점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개념으로서 아라야식을 제시한 것이다. 분황은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일심과 아라야식의 관계를 촘촘히 해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심의 신해성 문제는 자연스럽게 아마라식과의 관계로 옮겨가게 된다. 

 


  3. 불리와 부잡의 관계


  인간의 의식을 여덟 개로 볼 것인가, 아홉 개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변이 팔식구식론이다. 이것은 부처의 영역과 범부의 영역을 나눠 볼 것인가 함께 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처와 범부를 함께 보려고 하면 8식설을 취하게 되고, 부처와 범부를 갈라 보려고 하면 9식설을 취하게 된다. 이 논제는 구역(舊譯) 유식(唯識)과 신역(新譯) 유식(唯識)의 주요한 특징이자 7~8세기 동아시아 사상 논변의 가장 큰 주제이기도 했다. 분황은 『대승기신론』의 구조에 따라 팔식설을 수용하면서도 일심의 신해성을 상정함으로써 구식설에 대한 그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일체 정식을 여덟 가지 식으로 규정하고, 암마라식을 제9식으로 상정함으로써 구식설을 인정하고 있다. 분황이 역동성과 신해성의 의미를 부여하여 일심을 팔식으로 규정하면서도 구식과의 소통을 열어두고 있는 것은 중생의 성불가능성에 대한 열린 시선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분황은 일심을 동과 적, 생과 멸의 구분을 넘어선 자리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동과 적, 생과 멸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나라고 고집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화쟁 회통’의 인식 위에 있기 때문에 적멸은 일심이며 불성의 체가 된다. 그리고 예토와 정토는 본래 일심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생사와 열반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이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不一不異]는 대목이다. 바로 이 대목이 있기에 동과 적, 생과 멸은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으며’, 전체가 연을 따라 생하고 동하며,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주제가 머물지 않고 머물며[無住而住], 떠나지 않고 떠나는 것처럼[不離而離] 서로 떨어지지 않고[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不相雜] 역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8식과 9식의 관계 역시 신해성을 매개로 하여 섞이지도 않고[不雜] 떨어지지도 않는[不離]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시설은 그의 일심관이 아라야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제9 암마라식으로 향해 열려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중의 실체인지라 허공과 같지 아니하므로” 그런 것이다. 또 일심의 본성이 스스로 신해하기 때문에 ‘심’이라고 한다는 대목이나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또 분황은 일심을 고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심의 본성이 스스로 신해하다”고 규정한다. 일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심이 아라야식의 범주를 뛰어넘어 암마라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분황이 말하는 일심 본성의 신해성은 본각의 마음 본성이 스스로 신해하며 그 신해의 의미가 제8 아라야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제9 암마라식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분황은 일심의 철학을 통하여 『대승기신론』의 8식설과 『금강삼매경』의 9식설을 윤활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종래의 해석과 달리 일심에 역동성과 신해성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이해와 일심 이해의 외연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일심의 철학은 화쟁과 회통의 논법을 통해 무애와 자재의 원행으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일심은 ‘작은 나’의 자각을 통해 ‘큰 나’와 ‘더 큰 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작은 나’는 ‘일상의 나’이며 이러한 내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큰 나’로 태어나게 된다. 큰 나로 태어난 나는 다시 또 어떠한 계기를 통해 ‘더 큰 나’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원효, 『금강삼매경론』(『한불전』 제1책).

원효, 『대승기신론소·별기』(『한불전』 제1책).

일연, 『삼국유사』(민족문화추진회, 1975; 1992).

고영섭, 『나는 오늘도 길을 간다: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한길사, 1997; 2002; 2009).

고영섭, 「원효 일심의 신해성 분석」, 『불교학연구』 제20호, 불교학연구회, 2009.

고영섭, 『원효탐색』(연기사, 20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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