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학의 만남(조성택) > 법륜불자교수회4집(불교와 문화의 만남)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법륜불자교수회4집(불교와 문화의 만남)

불교와 인문학의 만남(조성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479회 작성일 23-02-20 17:39

본문


                      불교와 인문학의 만남 


                                            조성택(고려대학교)


1. 불교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위하여


  종교의 세계관은 서사와 교리로 구성된다. 그 선후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서사로부터 교리가 구성되기도 하고 그 교리는 다시 또 다른 서사를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경우 싯다르타의 출가와 깨달음이라는 일련의 서사와 불교의 교리는 긴밀하게 교직되어 있다. 싯다르타의 출가의 근본동기를 전하고 있는 서사인 사문유관은 싯다르타가 마주치게 되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며 동시에 불교 전통을 일관하는, 핵심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사문유관의 서사에 따르면 왕자로서 누리는 세속적 안락과 행복은 무상(無常)하며 추구해야할 근본적 가치가 아니다. 생·노·병·사라고 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문유관의 서사를 통해 싯다르타의 가출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버린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라 ‘위대한 버림’(Great Renunciation)으로 이해된다. 서사는 모방을 통해 재현되고 전통이란 이름으로 제도화된다.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을 위해 세속을 떠나는 싯다르타의 서사는 삶의 모델이자 바람직한 삶을 위한 선택이 된다. 이천오백 년의 불교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도전을 받아왔지만 출가제도는 여전히 불교라는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자 불교를 제도적 종교로서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사문유관 서사와 짝을 이루는 불교교리가 바로 고집멸도의 사성제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뜻하는 사성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고(苦)이며, 그 근저(集)에는 탐욕과 미움 그리고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三毒心)이 자리 잡고 있다. 삼독심을 없앰으로써 우리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사성제는 싯다르타가 고뇌하는 젊은 청년에서 ‘깨달은 자’(Buddha)가 되는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모든 것은 고’[一切皆苦]라고 하는 통찰은 싯다르타가 출가 전 사문유관에서 목격하였던 인생의 근본적인 고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그 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싯다르타는 출가하였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바 그 결론이 바로 사성제였다. 싯다르타 자신의 경험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사성제가 붓다의 최초의 설법인 소위 초전법륜에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성제는 붓다 자신의 경험이자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사문유관의 서사 그리고 사성제의 교리는 오랜 불교전통을 통해 그리고 오늘에 까지도 불교적 세계관의 근간이 되고 있다. 앞 서 비판하였던 ‘도인불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세속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이며, 고통의 현실이다. 벗어나야할 속박이며 ‘불타는 집’[三界火宅]이다. 출가를 통한 해탈과 그리고 무지(無知)로부터의 깨달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이다. 물론 시대적 변천과 다양한 지역적 전통들과 결합하면서 다양한 재해석과 해석적 변용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무상, 고, 무아가 아닌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주장하기도 하고 세속과 탈속이 결코 둘이 아님을 강조하는 담론도 등장했지만, ‘일체개고’로 대표되는 세속의 일상에 대한 부정적 정서는 바꾸지는 못하였다. 부정하면 할수록 세속의 부정성은 더욱 더 도드라져 보였다. 선불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인간 존재의 현실태로서의 불성(佛性)을 강조하지만 그럴수록 불성과 구별되는 인간존재의 중생성이 더 크게 부각된다. 깨달음에 출재가라는 위계는 허울이라고 하지만 현실에 있어 출가중심주의는 선불교에서 더 강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승불교 전통이 진속불이(眞俗不二)를 강조하면 할수록 진과 속의 격절은 더 커졌다. 그런 가운데 선불교 전통에서는 깨달음이 ‘다반사’(茶飯事)임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 ‘예사로움’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깨달음을 더욱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근대 이후 불교전통에 대한 서구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사문유관의 서사와 사성제의 교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용된다. 소위 불교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의 등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고집멸도는 개인적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에 따르면 고통은 근본적으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치유로서의 깨달음은 일종의 행복한 ‘체험’으로 이해된다. 이와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명상은 일종의 마음을 조작하는 기법처럼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통념적인 불교적 행복론은 대부분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얻어지는 심리적 평안함을 얻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세속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세속을 긍정하는 것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의 치유와 행복을 개인의 문제로 국한 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없다. 새로운 불교 서사가 필요하다.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서사와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 서 언급한대로 사문유관의 서사와 사성제의 교리는 한 짝으로서 출가중심적인 전통적인 불교관을 대표하고 있다. 생·노·병·사라는 삶의 실상을 목격한 싯다르타가 출가를 하게 되고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생사의 문제를 극복하였다는 서사다. 그리고 이 과정을 교리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것이 고·집·멸·도의 사성제다. 사문유관과 사성제는 엄밀하게 보자면 싯다르타의 구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 이후의 붓다로서의 삶 그리고 제도적 종교로서 불교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 서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부처님의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이야기’ 또한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붓다의 삶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불교 경전의 경우 “여시아문 일시...” [如昰我聞 一時 佛在...,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로 시작된다. 설법의 장소는 명시되지만 시간은 명시 되지 않는다. 불교의 ‘역사’는 단지 ‘한 때’(一時, one time)로만 언급되고 있다. 붓다의 교화활동이 35세부터 80세까지 45년간이라고 하지만 불교경전에서 45년이라는 시간적 흐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늘 ‘한 때’일 뿐이다. 따라서 경전을 통해 붓다의 일대기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대승경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는 붓다의 역사성은 완전히 탈각된다. 진리의 구현자로서 ‘붓다’의 영원성만 강조되고 있다. 

   역사의 빛으로 붓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 그리고 오늘의 관심으로 붓다를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다.[ppt 자료 및 졸고, “불교는 자유다” 참조]. 이와 함께 불교를 교리로 환원하고 불교지식의 습득을 곧 불교 신행이라고 여기는 풍토에서 벗어나야 한다.[졸고 “불교는 이야기다” 참조] 



2.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경우를 보자.

     사례 1. 

      식물의 생식 기관으로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와 색채가 매우        다양하여 각각 그 특징이 있으며, 구조상으로는 필수기관인 꽃술과 보조기관인 화피(花        被)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술은 수술과 암술이 있는 데 이를 모두 가진 것을        양성화(兩性花), 하나만 가진 것을 단성화(單性花)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에서 요약발췌)]

       

    사례 2. [김춘수 ‘꽃’ 그리고 ‘꽃 1’에서 각기 발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中에서]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微笑)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꽃1>中에서]


  두 경우 모두 꽃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례 1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설명의 경우다. 이는 곧 꽃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정확성 여부가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한편 사례 2는 꽃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여기에서 꽃은 사물화(事物化)된 객관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이야기를 통해 ‘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매체이자 의미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의미의 세계’에서 꽃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사례 1의 경우처럼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한 사물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지식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한 사물이 드러내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단 하나의 의미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삶이란 늘 익숙한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그 발견의 의외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은 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빗대어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한국불교인들의 일반적인 불교 이해는 사례 1에서와 같은 지식적인 이해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주류란 양적인 의미에서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국불교의 지향점을 형성해 온 일종의 출재가 지도자 그룹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그 영향력의 측면에서  주류라고 하는 것이다. 

 조계종단에서 일반신도들을 위한 기본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불교개론』을 보면 고성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인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色)’이란 몸을 이       루고 있는 물질 일반을 말한다. ‘수(受)’란 ... 감수작용이다. ‘상(想)’이란 ... 지각하는 작       용이다. ‘행(行)’이란 ... 결심·노력 등을 말한다. ‘식(識)’이란 ... 판단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고 실체화하며 고정       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고통이 발생한다. 그것이 오취온고의 의미다.

      [『불교개론』,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2012년, 114-115쪽에서 요약 발췌]

  

오온에 대한 위 인용문의 설명이 정확하냐의 여부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위 설명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위 불교 공부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위 인용문이 잘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불교는 ‘불교적 지식’을 통해 불교를 교육하고 또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개론서의 목적이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지식화하여 전달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개론서 자체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을 중심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불교에 대한 공부방식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지식중심의 불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복신앙에 젖어있는 소위 ‘보살들’을 비판하고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식불교의 폐해는 기복불교의 폐해보다 결코 적지 않다. 지식불교의 관념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종교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지 때문이다.  

  사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큰 흐름중의 하나는 불교의 ‘지식화’였다. 현재 종단의 출재가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보더라도 불교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불교의 지식화’는 한편으로 조선 오백년의 ‘산중불교’를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불교 선각자들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교의 지식화는 근대 식민주의의 한 부산물인 근대불교학이 추동해온 세계불교사의 한 흐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근대불교학이 직접 혹은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근대불교가 원하는 불교지식의 주 공급원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대불교학은 잘 알려진 대로 교리와 역사를 통해 불교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유럽의 발달된 문헌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와 그 역사에 대한 ‘사실’과 객관적 ‘지식’이었다. ‘의미’는 근대불교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 결과 불교는 과거의 전통으로 그리고 ‘텍스트’로 환원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교는 지식으로 박제되고 관념적인 철학체계로 변하고 말았지만 동양의 근대불교 선각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겼다. 막 밀려들기 시작한 기독교의 교세에 대항 할 수 있는 불교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지식’으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대불교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전근대적 ‘무지’ 그 자체였다. 지식이 아니라 신앙을,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내 세운 전근대적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기독교의 현실적 힘은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전 인류의 그리스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체계일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은 예수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이지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요체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 신학에 있지는 않다. 바이블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기독교의 요체다. 해방, 사랑, 구원, 용서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 바이블의 이야기는 예수 이후 이천년이 넘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로 변용되고 활용되어 왔다. 

  반면 불교는 적어도 근대이후 지금의 불교는 관념적 교리와 역사로 구성된 ‘과거의 전통’일 뿐이다. 불교 경전에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냥 ‘꾸며낸’ 혹은 방편적인 장치로서만 이해되고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불교경전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화소(話素) 즉 이야기의 요소들은 ‘이야기’로서 재구성되거나 활용되고 있지 못한 채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가 담론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교리로서만 논의되고 통용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 관한 지식을 곧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관념일 뿐이다. 지식이 현실의 삶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담론화 되어야 한다. 담론이란 곧 이야기다.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 서사 담론의 모든 형태가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 지식은 비로소 ‘의미’를 발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도 밝고 교리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역사와 교리를 통해 불교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생애가 어떻게 뭇 생명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로 재구성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다. 교리와 역사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불교는 아니다. 그리고 지식은 실천을 담보하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불교에서 감동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교리만 있을 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꽃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불교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김춘수의 시가 그러한 것처럼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이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단 하나의 사실’을 추구하지만 사물에 대한 의미는 다양하며 늘 새롭게 발견된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과거의 전통을 ‘재생’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재현’하고자 한다. 재생과 재현의 차이는 지식과 의미의 차이이자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재생은 삼인칭의 일이지만 재현은 바로 ‘나’ 일인칭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를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부처로 살자’는 모방(mimesis)을 통해서다. 따라서 ‘부처로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삶을 ‘이야기’로서 재현하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다.  



                    3. 불교는 자유의 종교다



  서양의 고전 『오디세이아』의 대주제는 ‘귀환’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오디세우스가 겪는 ‘어드벤처’는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양념일 뿐이다. 영원한 삶과 재물을 보장해주겠다는 칼립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오디세우스의 집념 때문이었다. 인류의 문명사를 보면 ‘집’은 늘 돌아갈 곳이었다. 삶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지만 그 여행의 목적은 집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데 있다. 

 

  『오디세이아』는 인류가 정주문화를 시작한 이래 집을 ‘떠남’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더라도, 또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몇 해씩 떠나더라도 늘 인간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집’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그리고 치국治國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집’은 늘 세계의 중심이다. 군신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효와 충이 동일시 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집’이 세계의 출발점이자 완성태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등장은 ‘집’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청년 싯다르타에게 ‘집’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었다. 처자식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애’였다. 집을 떠나고자 하였던 것은 싯다르타만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났다. 그들을 사문沙門 즉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싯다르타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었다. 이를 위해 ‘집’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집’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세기경』에는 ‘집’을 바라보는 불교적 입장의 문명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따르면 ‘집’이란 개인의 욕망을 은폐하는 곳이자 재화를 축적하는 장소다. 요컨대 집은, 당시 사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욕망의 ‘발전소’이자 욕망을 재생산하는 장소였다. 집 그리고 가족이란 자신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게 되는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참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적합하지 않으며…”라고 하는 예수의 언급 또한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의 경우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출가’를 정신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으로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집’을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와 ‘떠나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는 인류의 문명사를 통해 늘 일정한 대립관계를 유지해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환의 문화’가 늘 주류였고, ‘출가의 문화’는 늘 소수에 속하는 비주류의 문화였다. ‘집’이 신체적·정신적 쉼터의 역할을 지나쳐 욕망의 근거지이자 탐욕의 은신처가 될 때, 출가의 문화는 우리에게 자아실현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하게 해주었다. 

 

  불교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늘 불온시 되었던 것도 불교에 내재되어 있는 ‘출가’라고 하는 지향점 때문이었다. 흔히 인류의 문명을 유목민의 이주문화와 농경민의 정착문화로 나누고 있는데, 여기에 숨어 있는 문명적 코드가 바로 ‘출가의 문화’와 ‘귀환의 문화’다. 이주와 정착은 단지 생산 수단과 방법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아실현의 장소로서 ‘집’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서로 다른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청년 싯다르타의 출가, 수행, 깨달음 그리고 전법의 여정은 그대로 전통으로 계승되어 지금까지 불교의 제도적 기반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출가제도’ 그 자체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동아시아 근대불교의 과정에서 출가제도를 폐기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세계불교 전체를 보면 출가제도는 흔들림 없는 불교 전통으로 유지되고 있다. 

 

  출가라는 제도가 현대불교에서도 유효하며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가는 바람직한 전통이냐 아니냐의 논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가톨릭의 예를 들어 종국에는 ‘독신주의’의 종교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출가제도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독신주의와 불교의 출가제도는 그 기원이나 성격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출가제도는 교조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수행의 일부이자 불교적 정체성 그 자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출가자의 역할 특히 재가와의 관계 등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혁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불교전통이 유지되는 한 출가제도 또한 함께 존속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출가의 의미에 대해서는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 이래 지금까지 ‘출가’는 세간을 벗어나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출가는 ‘집’을 중심으로 한 혈연적 관계는 물론 사회에서의 일상적 의무와 권리 또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야말로 출가란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세간사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모든 시간과 노력은 오로지 ‘해탈’을 위한 수행에 집중되었다. 

 

  실제로 모든 출가수행승이 그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나 세간의 일반적 기대는 그러하여 왔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 등장하면서 초기불교의 ‘출가중심주의’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출가에 대해 세간을 떠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전하였다. 이 점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더욱 더 강조되었다. 세간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담당하는 가운데 불교가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은 세간의 ‘바깥’으로 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청년 싯다르타의 ‘출가’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문명의 코드를 읽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유’라고 하는 코드다. ‘출가’를 단지 세간을 떠나는 것으로만 이해하였던 것은 사회를 세간과 초세간으로 이분하여 나누었던 고대인도의 종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싯다르타의 출가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집’ 혹은 가족으로 표상되는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과 관습이라고 하는 사회적·제도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탄생게로 잘 알려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당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 제공하였던 신神중심적 세계관과 사제司祭중심의 사회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나’를 선언한 것이다.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거나 사제가 아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소위 ‘인본주의’의 선언이었다. 이는 곧 종교, 관습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자유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싯다르타에게 있어 출가는 ‘나’의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의 첫걸음이었다. 혈연적 관계는 본능과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당연시하는 근거이며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더구나 싯다르타는 ‘집’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탐욕이 은폐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집’을 벗어난다는 것은 욕망과 탐욕의 한 근거를 없애는 일이었다. 또한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은 가능하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뭇 생명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혈연’이라는 이름의 생물학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적 종교로서 불교를 생각할 때 ‘출가제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출가를 생각할 때 출가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의 정신과 실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불교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다. 출가는 자유의 첫 걸음이며, 깨달음 그리고 ‘뭇 생명의 안녕과 행복’은 바로 그 자유의 완성이자 실천이다.

 

  최근 새로운 문명의 코드로 등장하고 있는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은 어쩌면 지금 21세기 인류의 문화가 ‘출가의 문화’로 바뀌고 있는 징표는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지난 2천여 년간 인류는 너무 오래 동안 ‘집’에만 안주해온 것 같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009
어제
7,616
최대
7,694
전체
1,252,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