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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인도철학의 만남(임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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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469회 작성일 23-0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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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인도철학: 업(karma) 개념의 형성과 발달


임승택 (경북대학교)

 

  [개요]

  업 관념은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적․철학적 사유에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고찰은 인도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로 확대되는 성격을 지닌다. 업 관념은 인도철학사의 발달과 궤적을 같이 하면서 점차적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최초의 제식주의적 업 관념은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 우주적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간 존재의 자존적 능력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인정된다. 이후 '우빠니샤드'는 제식 행위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가 특정한 목적과 결과에 연결된다는 방식으로 업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한편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물질 입자로 이해하여 그것의 지음과 받음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정착시켰다. 나아가 초기불교에서는 그것을 내면적인 의도의 차원으로 해석하여 제식주의라든가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도철학의 각 종교에서 시도된 업 해석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고, 업 문제를 둘러 싼 상이한 관점들은 교리적․형이상학적 입장뿐 아니라, 사회적․계급적 측면과도 유기적인 상관성을 띠게 되었다. 업 개념은 본래부터 고착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종교적인 신념의 영역에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며, 개방된 학문적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주제어: 업(業, karman), 윤회(輪廻, saṃsāra), 해탈(解脫, mokṣa), 요가(yoga), 의도(思, cetāna),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1. 시작하는 말

  인도에서 성립된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는 ‘고통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구원론적 경향을 지닌다. 또한 업(業, karman)이라든가 윤회(輪廻, saṃsāra)․해탈(解脫, mokṣa)․요가(yoga) 등의 개념을 공유한다. 각각의 학파 혹은 종파에서는 이들에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전개함으로써 인도철학사의 다양한 학문적 색채를 더하였다. 본 고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업 개념에 초점을 모은다. 주지하다시피, 업 개념은 윤회의 관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현재의 삶 너머로까지 업의 논리를 확대․적용하면 그것이 곧 윤회이다. 나아가 윤회의 속박을 벗어난 이상적 경지가 해탈이며, 또한 해탈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 수단이 요가이다. 이러한 업 개념은 인도철학사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업(業, karma)이란 일반적으로 “특정한 행위 혹은 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응보적 힘(retributive power)”으로 정의된다. Wilhelm Halbfass, “Karma and Rebirth, Indian Conceptions of” (1998), 209쪽.  

 William K. Mahony 등에 따르면, 이러한 정의는 모든 학파에서 별다른 이의 없이 용인된 듯하다. William K. Mahony, “Karman” (1981), 673-676쪽; Wilhelm Halbfass, 앞의 글, 209쪽; L. De La Vellee Poussin, “Karma” (1981), 673-676쪽.

 그러나 구체적인 해석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입장에 따라 상이하다. 예컨대 이슈와라(Īśvara)의 존재를 수용했던 니야야(Nyāya)와 와이세시까(Vaiśesika) 및 유신론적 힌두 학파들에서는 그것을 은총(prasāda)의 문제와 연계시켜 해명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거룡, 「업설과 은총의 양립 문제」 (1995), 235-257쪽 참조.

 반면에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했던 초기불교와 자이나교(Jainism) 및 상키야(Sāṁkhya) 학파 등에서는 초월적 절대자의 섭리를 배제하고서, 업의 논리 자체만으로써 현상계에 얽힌 제반 문제들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업 해석에 관련한 상반된 태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며, 더욱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분류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상키야에서는 업 개념을 물질세계(prakṛti)의 전개(pariṇāma) 원리로 수용하였는데, 이 경우 업이란 주체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현상계의 물질적 삶을 한계 지우는 요인으로서 결정론적․결과론적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초기불교에서는 그것을 현실 삶을 위한 일종의 조건(paccaya)으로 이해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행위자의 의지적 대응 여부가 부각되어 주체적․비결정론적 색채가 강조된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정통 힌두 학파들은 수구적인 업 해석의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비정통 학파에서는 결정론적 색채를 부인하였거나 혹은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본고는 이와 같이 상이한 관점에서 이해되곤 하는 업 관념이 과연 어떠한 발달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는가에 관심을 모은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바라문교의 제식주의적 업 관념에서부터 초기불교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업 해석의 다양한 계기와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확인․정리해 보고자하며, 또한 이 개념을 수용․발전시킨 각 학파들의 사상적 경계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업 문제를 둘러 싼 여러 상이한 관점들이 각 학파의 교리적․형이상학적 입장뿐 아니라, 사회적․계급적 측면과도 유기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조명은 업 문제에 관련한 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또한 진행형일 수 있음을 분명히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업 개념의 함의  

  업이란 산스끄리뜨어 karma의 한역으로서 동사원형 √kṛ(행하다, 만들다)에서 유래한 말로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행위(action)․일(work)․행동(deed)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업 개념을 인도종교의 보편적 특징으로 언명한 최초의 인물로 이슬람 역사학자 알 비루니(Al-Biruni, 973-1048)가 있다. 그에 따르면 까르마는 모든 인도종교에서 발견되는 기본 전제이다. Wilhelm Halbfass, 앞의 글, 209쪽 재인용.

 이러한 언명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인도철학 전반의 성격을 업 개념과 관련 지워 규정한 최초의 사례로서, 이것이 지닌 종교적․철학적 함의가 과연 어떠한지를 생각게 해보는 계기를 부여한다.  

  Wilhelm Halbfass는 이러한 업 개념을 다음의 3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Wilhelm Halbfass, 앞의 글, 210쪽.

 ①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인과론적인 설명을 가능케 해주는 측면, ②윤리적 수련의 당위성과 종교적 태도를 결정짓는 틀로서 기능하는 측면, ③세속적인 삶의 불만족스러움에 대한 해명과 함께 해탈로 나아가는 근본 원리를 제공하는 측면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업 개념을 둘러 싼 논의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서 ①은 업 개념이 생리적․심리적․사회적 문제들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며, ②와 ③은 인도철학 고유의 종교적․구원론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각 학파의 실천체계 및 형이상학과 긴밀한 관련을 지닌다.    

  한편 업 개념에 관련한 기존의 연구 성과 또한 3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류에는 업 개념의 사회적 성격과 기능에 초점을 모은 연구물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업의 문제를 다룬 논문들로는 길희성의 「'바가바드기타'에 나타난 힌두교의 사회윤리」(1989), 정승석의 「業說의 合理性 分析」(1979)과 「업설의 양면성과 불교 업설의 의의」(1994), 김호성의 「'바가바드기타'에 나타난 까르마 요가의 윤리적 조명」(1992), 박경준의 「불교업설에서의 동기론과 결과론」(1992), Gerald James Larson의 “Karma as a ‘Sociology of Knowledge’ or ‘Social Psychology of Process/Praxis”(1983), Gananath Obeyesekere의 “The Rebirth Eschatology and its Transformations: A Contribution to the Sociology of Early Buddhism”(1983), Ariel Glucklich의 Theories of Karma in the Dharmaśāstra(1983)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는 이 개념에 내포된 이데올기적 성격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것이 야기하는 긍정적․부정적 내용들에 대한 고찰이 포함된다. 두 번째 부류에는 윤회의 문제라든가 행위의 주체 및 책임소재 등의 문제에 관련하여 업 개념을 다룬 경우를 배속해 볼 수 있다. 정승석의 「무아와 윤회의 양립문제」(1994), 최봉수의 「업과 윤회란 무엇인가」(2000), 윤호진의 「無我․輪廻問題의 硏究」(1992), 김진의 「無我說과 輪回說의 問題」(1999), Johannes Bronkhorst의 Karma and Teleology: A Problem and its Solutions in Indian Philosophy(2000), David J. Kalupahana의 Karma and Rebirth: Foundations of the Buddha's Moral Philosophy(2006)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업의 지음과 받음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짓거나 받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관련한 다수의 논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 부류로는 업 개념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함께 이것의 형이상학적 측면에 대한 검토를 위주로 한 연구 성과들을 배속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속한 논문들로는 정승석의 「윤회관에서 微細身 개념의 전개」(1996), 「요가철학에서 잠재업과 훈습의 관계」(2001), 「요가 철학과 불교에서 業論의 대응」(2001), 이태영의 「古典요가의 理論과 實踐에 대한 硏究: 요가브하샤를 中心으로」(1993), Gananath Obeyesekere의 “The Rebirth Eschatology and Its Transformations”(1983), Karl H. Potter의 “The Karma Thoery and Its Interpretation in Some Indian Philosophical Systems”(1983), Wilhelm Halbfass의 “Indian Conceptions of Karma and Rebirth”(1998)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는 잠재업(karmāśaya)이라든가 잠세력(saṁskāra), 훈습(vāsāna) 등과 같은 유사 개념들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함께, 초기불교․부파불교․상키야(Sāṁkhya)․요가(Yoga) 등에서 발달된 업 이론의 정교화 경향이 반영된다.

  이러한 3가지 부류는 앞서 언급한 Wilhelm Halbfass의 구분과 맥락을 같이하며, 이 개념의 함의를 구체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필자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업 관념의 양면성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부류의 논문들에 특별히 주목한다. 이들은 사회 구조적․계급적 관점에서 업의 문제에 접근하는 상반된 태도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대부분의 정통 힌두 학파들이 수용한 업 관념은 과거에 지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시하며, 또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유도하는 결정론적 양상으로 포착된다. 반면에 그들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사문(samaṇa) 전통의 업 해석은 미래 지향적이며 현재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한 원리로서 현실 개조적(reconstructive) 색채를 띠게 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박경준은 업 개념의 해석 양상을 동기론(Motivismus)과 결과론(Konsequentismus)으로 대별한다. 그에 따르면, 동기론은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기준을 동기나 의도에서만 찾는 까닭에 관념론으로 흐르기 쉽다. 반면에 결과론은 결과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박경준의 논지는 불교적 업 해석이 동기론적 측면뿐 아니라 결과론적 내용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업 개념이 지닌 일상적․사회적 함의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인도철학 고유의 종교적․구원론적 색채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인도철학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회적․구조적 측면보다는 개개인의 구원과 해탈 문제에 치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속제적 관점에 한정하여 업의 문제에 접근해 들어갈 경우 그러한 색채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종교적 측면을 반영할 때라야 비로소 윤회(saṃsāra)라든가 해탈(mokṣa) 등의 관념을 업 개념과 연계시켜 온전히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아가 이것이 내포하는 종교적․철학적 함의가 일관된 체계로써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업 개념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불가결한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업의 논리를 윤회 등의 관념과 결부시키면 그것은 곧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예컨대 태생에 의한 신분의 차별과 제약은 과거생의 업의 결과인 까닭에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아직까지 인도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카스트(Caste) 제도에 의한 신분 차별이야말로 이것의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B. R. Ambedkar는 업을 재생이나 윤회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을 사기(jugglery)라고 혹평한다. 이명권, 「암베드카르와 현대인불교」 (2003), 188쪽.

 그러나 업과 윤회의 상관성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악용하지 않았던 사례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들 양 개념을 엄격하게 주체적․비결정론적 관점에서 추구해 들어간 초기불교와 자이나교의 사례가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고의 제5장 “사문(samaṇa) 전통의 업 해석”을 다루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로 한다. 

 그들의 경우는 업과 윤회의 문제를 사회적․계급적 맥락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아무튼 이와 같은 업과 윤회가 고통의 실존 상황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구원의 이상향이 곧 해탈이다. 해탈이란 동사원형 √muc에 기원을 두는데, ‘벗다’ ‘풀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 Monier Williams, A Sanskṛt-English Dictionary (1899), 835쪽.

 해탈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윤회로부터 벗어난 상태인데, 이 개념 또한 업과 윤회를 수용한 거의 모든 학파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해탈에는 생해탈(jīvanmukti)과 이신해탈(videhamukti) 등의 구분이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업에 대한 학파적 해석의 차별성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유신론적 베단따와 같이 업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한 학파에서는 육체적인 죽음 이후라야 완전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길희성, '인도철학사' (1989), 226쪽.

 반면에 불교에서처럼 이것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접근해 들어간 학파에서는 현재에 삶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상에서 언급한 윤회와 해탈을 수용한 모든 학파에서 인정한 실천적 수단이 곧 요가이다. 요가란 마차에 연결된 말을 다스리듯이 해탈의 길을 나가기 위해 육체와 정신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태영, 「고전요가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연구」 (1992), 6-9쪽.

 이러한 요가 개념 또한 업과 윤회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상이하게 설명된다. '바가바드기타(Bhagavadgīta)'에 나타나는 지혜의 요가(jñāna-yoga)․행위의 요가(karma-yoga)․신애의 요가(bhakti-yoga) 등은 바로 그러한 양상을 종합․열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신론적 베단따에서처럼 업과 윤회를 심리적 관점에서 해명해 들어간 학파에서는 지혜의 요가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미망사에서처럼 실재론적 입장에서 접근해 들어간 학파는 행위의 요가에 치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유신론적 업 해석을 고수한 학파들에서는 당연히 신애의 요가에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은 업 개념이 지닌 교리적․철학적 함의가 과연 어떠한지를 생각케 하는 내용들이다. 이와 같이 인도철학사를 주도했던 주요 흐름들은 특정한 학파 혹은 종파에 상관없이 고통스러운 윤회의 현상계가 반복되는 이유를 업의 원리에서 찾았다. 또한 한결같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이상향으로서의 해탈을 제시하였고, 나아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서 요가를 내세웠다. 따라서 이들 4가지 개념은 인도철학사 전체를 일관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업 개념은 바로 그것에 대한 해석의 여부에 따라 다른 나머지 개념들의 내용 또한 달라지게 만드는 각별한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제식주의에 나타나는 업 관념

  인도철학사에 있어서 '베다(Veda)'와 '브라흐마나(Brāhmaṇa)' 및 이들 문헌에 근거한 고대 바라문교의 제식주의가 갖는 의미는 독보적이다. 이후에 출현한 모든 정통 및 비정통 학파들은 이러한 바라문교적 사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이것에 대한 비판 속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구체화하였고, 다른 일부에서는 그러한 비판에 대한 재반박 속에서 자신들의 논지를 분명히 하였다. 나스띠까(nāstika)로 일컬어지는 불교라든가 자이나교 등의 사문(samaṇa) 전통은 전자에 속하고, 아스띠까(āstika)로 일컬어지는 상키야라든가 요가 등의 6파 철학은 후자에 속한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업 관념의 발달사적 궤적을 추적하고자 하는 본고 또한 제식주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업 관념은 그 성립 단계에서부터 윤회의 관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업 관념이 초창기의 성립 단계 혹은 '리그-베다'에서부터 윤회와 결부되어 있었다고 보는 다양한 사례들은 다음의 논문들에 정리․소개되어 있다. 정승석, 「업설의 양면성과 불교 업설의 의의」 (1994), 183쪽; 박경준, 「불교업설에서의 동기론과 결과론」, (1992), 528쪽.

 그러나 Wendy Doniger O'Flaherty에 따르면, 최초의 문헌인 '베다'에는 ‘재죽음(re-death)’에 관련한 단편적인 관념들만이 나타날 뿐이며, 업과 재생의 이론이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Wendy Doniger O'Flaherty, “Karma and Rebirth in the Vedas and Purāṇas” (1983), 3쪽.

 따라서 Wilhelm Halbfass는 업 관념이 비아리안적 분위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베다' 문헌과는 별개일 가능성이 높다는 언급을 하였다. Wilhelm Halbfass, 앞의 글, 209쪽;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2쪽. 

 그에 따르면, 대중적인 업 관념은 자이나교 및 초기불교의 등장과 더불어 비로소 구체화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베다' 문헌에 업 관념의 시원적․맹아적 형태로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베다'의 시인들은 자연 세계에 일정한 규칙과 경로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했으며, 이 우주적 규칙성을 ‘리따(ṛta)’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이 용어는 √ṛ 즉 ‘간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우주적 균형(balance) 혹은 정의(justic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Surendranath Dasgupta는 이 리따 개념을 제식주의와 결부시켜 업 관념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Surendranath Dasgupta,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1 (1969), 21-22쪽. 

 즉 사물의 운행에 일정한 법칙성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제식주의적 응보 관념 사이에는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의 실천이 모든 사물의 발생과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리그 베다(Ṛg-veda)'의 「뿌루샤수꾸따(Puruṣa-sūkta, X. 90)」는 이러한 제식주의적 사고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제식의 실천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게 된다는 Puruṣa-sūkta(X. 90)의 해당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완벽하게 집행된 그 제사에서 기름이 떨어져 한데 고였노니, 공중의 짐승과 숲의 짐승과 마을의 짐승들이 그로부터 나왔도다.(8) 완벽하게 집행된 그 제사에서 찬송의 가사와 선율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운율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제사의 주문이 생겨났도다. (9) .....   브라흐만은 그의 입이었으며 그의 두팔은 라자냐가 되었고 그의 두 넓적다리는 바이샤가 되었으며 그의 발에서 수드라가 생겨났도다.(12) ...... ” 정승석 옮김, '리그베다' (1984), 228-232쪽 인용.

  

  한편 William K. Mahony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제식주의적 사고와 업 개념의 상관 관계를 규명해 들어간다. 그는 최근의 언어학적 성과를 소개하면서, ceremony라는 영어 단어가 kwer(to act)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kwer가 √kṛ(to act)라는 karma의 산스끄리뜨 어근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2쪽.

 이 분석에 따르면 의례(=제사)와 업이라는 용어는 동일한 뿌리에서 유래한 만큼 양자간에는 긴밀한 상관성이 존재한다. 또한 그는 동일한 맥락에서 '브라흐마나' 문헌에 나타나는 ‘apūrva-karma(이전에 지은 업)’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apūrva-karma란 제식주의의 전문 술어로서, 특정한 제사 행위가 아직 그 결과를 드러내지 않고 잠재적인 힘으로 존속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것은 제식주의적 응보 관념을 구체화한 개념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후대에 이르러 체계화된 업 관념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제식주의적 사고는 현재의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후대의 업 관념에 대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Wendy Doniger O'Flaherty에 따르면, '베다'의 제식주의는 죽고 난 이후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는 단순한 욕망을 반영했을 뿐이다. Wendy Doniger O'Flaherty, 앞의 글, 3-4쪽.

 또한 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은 사후의 세계에 재차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고통을 받지 않도록 빌기 위한 수단으로만 기능하였다. 더구나 사후의 세계 자체에 대한 관념도 '베다' 전체에 걸쳐 일관성 있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할 때, 바라문교의 제식주의를 곧바로 후대의 업 관념에 연결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후대의 체계화된 학파 가운데에서는 미망사(Mīmāṁsā)가 이러한 바라문교의 제식주의를 계승하였다. 그들은 제식의 실천원리를 그들만의 독특한 업 관념과 결부시켜 더욱 구체화하였다. 미망사에서는 바른 형식에 의거한 제사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공덕을 낳으며,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타당한 형식에 의해 치러진 제사의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타당한 형식에 의해 치른 제사는 신들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2쪽.

 이러한 미망사의 입장은 최고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경향으로 귀착된다. 그들에 따르면, 현상계의 전개 과정에는 초월적인 인격신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정교한 제사의 실천에 의한 냉정한 업의 법칙만이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제식주의적 업 관념은 본격적인 무신론적 업 해석에 나아가기 위한 과도적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제식주의는 원래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의 의례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제식 행위의 형식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경의 대상이었던 신마저 제사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리하여 신의 보호 아래 존재하던 인간이 오히려 신의 우위에 서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제식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사를 주관하는 인간은 더 이상 신들의 지배 아래에 묶이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신들의 영역에 가담하여 우주의 생성과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맞는다. 이와 관련하여 '까우시따끼 브라흐마나(Kauṣītakī Brāhmaṇa)'에서는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기술한다.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3쪽 재인용.

 이러한 제식주의적 사고는 인간 자신에 대한 주체적․자존적 능력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제식주의에 있어서 제사라는 행위는 미래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제식주의는 주체적․비결정론적 업 해석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다른 대부분의 힌두 학파들이 결정론적 색채를 띤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주체적 업 해석은 과거에 지은 업의 현재적 결과보다는 현재의 업에 의한 미래의 변화된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미래 지향적이며 현재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한 원리가 될 수 있다. 반면에 결정론의 그것은 과거 지향적인 까닭에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시킬 여지가 많다. 현실의 고통은 과거의 업의 결과인 까닭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바라문교의 제식주의적 업 해석이 갖는 의미는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식주의는 제사라는 물리적․비인격적 체계의 폐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약점을 지닌다. 그리하여 행위의 형식성에 치중한 나머지 행위자 자신의 ‘성스러운 의지(divine will)’를 반영하지 못하는 난점을 안게 된다.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2쪽.

 다시 말해 제사의 목적이라든가 의도보다는 거기에서 낭송된 주문이 제대로 발음되었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하며, 제사의 결과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모든 사안들은 소수의 바라문 사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가 드러난다. 따라서 제식주의적 업 해석은 신들을 조정할 수 있는 바라문 사제들의 전유물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권위와 지위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주체적․비결정론적 업 해석이 갖는 원래의 참신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우빠니샤드'에 나타나는 업  

  '베다'와 '브라흐마나'에 나타나는 업 관념을 제식주의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빠니샤드(Upaniṣad)'의 그것은 고유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금욕주의적 측면에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 '우빠니샤드'가 이루어 낸 가장 중요한 철학적 성과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브라흐만(梵, Brahman)과 내면의 주체적 자아인 아뜨만(我, Ātman)이 결국은 하나라는 梵我一如의 일원론적 사고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우빠니샤드'의 성인들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정신적 행위를 우주적 과정(cosmic processes)의 내적 반영으로 이해하였다. William K. Mahony, 앞의 글, 263쪽 참조.

 즉 개인의 모든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것 자체로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공식적인 제식 행위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모든 행위가 특정한 목적 혹은 결과에 연결된다고 생각하였다.   

  '브리하다란야까 우빠니샤드(Bṛhadāraṇyaka-Upaniṣad)'에는 “사람이 죽을 때 그를 떠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실로 좋은 행위에 의해 좋은 이가 되고 나쁜 행위에 의해 나쁜 이가 된다.”는 구절이 나타난다. “yatrāyam puruso mriyate, kim enaṁ na jahātīti. .......   puṇyo vai puṇyena karmaṇā bhavati, pāpaḥ pāpeneti.” Bṛhadāraṇyaka-Upaniṣad, III. 2. 12-13.

 이 구절은 업에 관련한 '우빠니샤드'의 전형적인 관념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따르면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좋거나(puṇya) 나쁜(pāpa) 일상적인 행위(karma) 자체이다. 이렇게 해서 '우빠니샤드'의 업 관념은 제식주의적 사고와 분명한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 즉 과거에 행한 모든 행위는 현재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현재의 모든 행위는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편 '우빠니샤드'의 성인들은 세속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수행되는 제식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졌다. 그들은 세간적인 즐거움의 추구가 끝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가져오며 결국은 불행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까타 우빠니샤드(Kaṭha-Upaniṣad)'에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미혹한 이에게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있을 뿐 다른 세상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의 지배 아래에 떨어질 것이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na sāmparāyaḥ pratibhāti bālam pramādyantaṁ vittamohena mūḍham: ayaṁ loko nāsti para iti mānī, punaḥ punar vaśam āpadyate me.” Kaṭha-Upaniṣad I. 2. 6.

 이 내용은 '우빠니샤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엿보게 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을 넘어선 영원한 세계야말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설해진 다음의 구절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오 나찌께따여, [그대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쾌락을 얻게 하는 도구, 무수한 결과를 가져오는 제식의 실천, 두려움이 없는 피안, 위대한 불꽃으로 저 멀리까지 뻗치어 있는 제식을 [보고서도] 흔들리지 않고 [유혹을] 물리쳤도다. 그대는 진정으로 현명하도다.(kāmasyāptiṁ jagataḥ pratiṣṭhāṁ krator ānantyaṁ abhayasya pāram stoma-mahad urugāyam pratiṣṭhāṁ dṛṣtvā dhṛtyā dhīro naciketo 'tyasrākṣīḥ.)” Kaṭha-Upaniṣad I. 2. 11.

 

  이러한 내용은 '우빠니샤드'의 업 관념이 제식주의에 내포된 세속적 성격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미 확인했듯이, 제식주의에서의 업은 제식의 실천이 언젠가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응보적 원리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세간적인 욕구나 바람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빠니샤드'의 성인들은 윤회의 세계 안에서 얻어지는 행복보다는 그것을 벗어난 이상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제아무리 큰 즐거움이라고 하더라도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탄생과 죽음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업은 고통스러운 실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업 관념은 윤회라든가 해탈 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에 나타나는 업과 윤회의 관념이 완벽한 체계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브리하다란야까 우빠니샤드'와 '찬도갸 우빠니샤드(Chandogya-Upaniṣad)'에는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겪게되는 ‘5가지 단계(五火說)’와 ‘2가지 길(二道說)’에 관련된 언급이 나타난다. Bṛhadāraṇyaka-Upaniṣad, VI. 2. 15-16; Chandogya-Upaniṣad V. 9. 1-10.

 먼저 ‘5가지 단계’란 ①죽은 영혼이 달(月)에 이르고, ②비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오고, ③식물의 뿌리에 흡수되어 음식이 되고, ④남자에게 먹히어 정자가 되고, ⑤여성의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한편 ‘2가지 길’이란 ‘신들의 길(devayāna)’과 ‘조상의 길(pitṛyāna)’을 말하는데, 전자는 고행(tapas)을 닦은 영혼이 가게 되는 길로서 윤회를 벗어난 브라흐마(brahmā)의 세계로 연결되며, 후자는 선행을 한 보통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길로서 앞에서 언급한 ‘5가지 단계’를 대략적인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5가지 단계’와 ‘2가지 길’은 여러 변수를 내포하는 까닭에 체계화된 윤회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③에서 ④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지극히 우연적인 계기들이 포함된다. 이점은 '우빠니샤드'의 윤회에 대한 서술이 사후의 영혼이 겪는 실제 과정이기보다는 단순한 메타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한편 여기에는 윤회를 벗어난 브라흐마의 세계에 대한 묘사와 함께,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고행(tapas)이 나타난다. 이것 역시 조잡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고행자의 영혼이 브라흐마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불 → 낮 → 커져 가는 보름 동안의 달(月) → 북행하는 여섯 달 동안의 태양 → 신들의 세상 → 태양 → 번개 → 브라흐마의 세계 (Bṛhadāraṇyaka-Upaniṣad, VI. 2. 15; Chandogya-Upaniṣad, V. 10. 1-2)”이다. 이러한 설명 역시 각각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필연적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난점을 안고 있다. 

 제사를 최고의 선행으로 간주하였던 제식주의적 사고로부터의 인식의 전환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대목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금욕주의적 태도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내용은 업 관념이 윤회라든가 해탈 및 요가(=고행) 등과 엮이면서 점진적으로 체계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찬도갸 우빠니샤드'에는 ‘조상의 길’을 통한 ‘5가지 단계’의 마지막 과정을 설명하는 와중에, 좋거나 나쁜 특정한 가문에 태어나게 되는 이유를 밝히는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서 좋은 행위를 행한 자들은 바라문이나 끄샤뜨리야나 바이샤의 모태와 같은 좋은 모태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쁜 행위를 행한 자들은 개나 돼지 찬달라의 모태와 같은 나쁜 모태에 들어갈 것이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tad ya iha ramaṇīya-caraṇāḥ, abhyāśo ha yat te ramaṇīyām yonim āpadyeran, brāhmaṇa-yoniṁ vā kṣatriya-yoniṁ vā vaiśya-yoniṁ vā; atha ya iha kapūya-caraṇāḥ abhyāśo ha yat te kapūyāṁ yoniṁ āpadyeran śva-yoniṁ vā sūkara-yoniṁ vā caṇḍāla-yoniṁ vā” Chandogya-Upaniṣad, V. 10. 7.  

 이 대목은 과거의 생에서 행한 행위에 의해 미래의 태생과 가문이 결정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업 관념이 보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윤회와 결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업을 특정한 태생 혹은 신분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위의 내용을 뒤집으면, 찬달라 가문에 태어난 미천한 사람은 전생에 나쁜 행위를 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현재 처해있는 신분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상과 같이 '우빠니샤드'에는 사후의 영혼이 또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는 전체 과정이 최초로 묘사된다. 또한 윤회의 상태를 벗어난 이상적인 경지에 대한 언급도 나타난다. 이러한 내용은 비록 완성된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과 요가(=고행) 등을 서로 관련시켜 엮어 낸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의 업과 윤회는 과거의 업을 미래 혹은 현재의 태생과 관련 지워 설명한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이 전생의 행위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으로, 카스트(Caste)에 의한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러한 '우빠니샤드'의 업 해석은 제식주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지니지만, 수구적․결과론적 업 해석의 원형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5. 무신론적 업 해석의 양상

  가. 짜르와까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식주의와 '우빠니샤드'의 업 해석은 결국 바라문 사제들의 계급적 이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과 대립 관계를 유지했던 세력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무신론적 업 해석의 최초 모델은 업 관념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짜르와까(Cārvāka)로 통칭되는 일부 유물론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행위의 응보 관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기불교의 '니까야(Nikāya)' 문헌에 따르면, 전형적인 유물론자인 뿌라나 깟사빠(Pūraṇa Kassapa)는 선이라든가 악은 사회적 관습에 의한 구분일 뿐이며,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거기에 필연적인 인과응보는 없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고 죽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고문하고 고문하게 하더라도 그로 인한 어떠한 죄악도 없고 죄악이 생기지도 않는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스스로 보시하고 보시를 하게 하고 스스로 공양하고 공양을 하게 하더라도 그로 인한 어떠한 공덕도 없고 공덕이 생기지도 않는다. 보시하고 자신을 길들이고 다스리고 바른 말을 하더라도 공덕이 없으며 공덕이 생기지도 않는다. (Dakkhiṇañce' 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ācento, natthi tato nidānaṃ pāpaṃ, natthi pāpassa āgamo. Uttarañce' 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natthi tato nidānaṃ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 dānena damena saṃ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ti.)” DN. I. 52-53쪽. 

 또한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인간 존재는 흙(地, paṭhavī)․물(水, āpo)․불(火, Tejo)․바람(風, vāyo)․허공(空, ākāsa)이라는 물질적 요소의 결합과 흩어짐에 불과하며, 죽고 나면 영혼 따위와 같은 것은 남지 않는 까닭에 현실적인 쾌락 밖에 인생의 목적은 없다고 보았다. “보시 [따위는] 어리석은 자들의 교설일 뿐이다. 누구든지 [과보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거짓되고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신체가 무너지면 단절되고 소멸하여 죽고 난 다음에 존재하지 않는다.(Dattupaññattaṃ yadidaṃ dānaṃ. Tesaṃ tucchaṃ musā vilāpo ye keci atthikavādaṃ vadanti. Bāle ca paṇḍite ca kāyassa bhedā ucchijjanti vinassanti na honti parammaraṇāti.)” DN. I. 55쪽.

 이와 같이 유물론자들은 경험된 사실만을 지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았고, 신이라든가 영혼 따위는 감각적 경험에 기반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경험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지각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나 속성에 호소하지 않고도 성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르바다르샤나상그라하(Sarvadarśanasaṁgraha)'에 따르면, 짜르와까에서는 의식을 포함한 일체의 사물에 대해 돌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이론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1991), 33-34쪽.

 예컨대 수소에도 산소에도 습기가 없지만 그들의 특정한 결합에 의해 생산된 물에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짜르와까는 특정한 행위가 특정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응보의 관념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결합은 지각할 수도 없고 논증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미래의 즐거움을 얻고자 현재의 삶이 제공하는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망상의 소치이며, 이것을 조장하는 일체의 종교적 관념은 안락한 생계를 유지하려고 바라문 사제들이 지어낸 허구이다. 이러한 짜르와까의 주장은 인과율과 보편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 이지수 옮김, 앞의 책, 29-32쪽 참조.

 그러나 바라문 사제들에 의한 계급적 지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이나교

  '베다'의 권위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등장한 보다 체계적인 종교 관념의 하나가 자이나교(Jainism)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īva)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정통 힌두 학파에서와는 달리 단일하거나 보편적인 영혼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거부는 우주의 창조자이며 유지자인 이슈와라(Īśvara)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동일한 맥락이다. 바로 이점에서 자이나의 업 해석은 무신론적 특징을 지니는데, 실제로 그들은 업을 미세한 물질(pudgala)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업 물질은 신체(kāya)와 언어(vacī)와 마음(mano)의 행위를 통해 생성되며, 이것이 내면의 영혼과 뒤엉킴으로써 ‘업에 의한 육신(karmaśarīra)’을 형성시킨다고 한다. 그 결과 순수한 인식 주체로서의 영혼은 고통스러운 현상계에 묶이게 되며 윤회의 속박 아래에 놓인다.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II (1996), 102-109쪽 참조.

 

  이러한 자이나교의 업 이해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주체적․비결정론적 관점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 존재가 업의 속박에 무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업의 축적을 막을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을 소진시켜 업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그들은 업을 물질 입자로 이해했던 까닭에 그것의 유입을 막거나 소진시키기 위한 방법은 물리적인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즉 육체적인 고행(tapas)을 통해 영혼에 달라붙은 업 물질을 정화하고 또한 제거해야만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자이나의 실천론은 금욕적 고행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초기불교의 '니까야'에서도 이러한 자이나교의 모습을 금욕주의로 소개한다. 예컨대 '사만냐팔라 숫따(sāmaññaphala sutta)'에는 “대왕이여, 여기에서 니간타(자이나교)는 모든 [악을] 금지하여 막아내고, 모든 [악을] 금지하여 다스리고, 모든 [악을] 금지하여 제거하고, 모든 [악을] 금지하여 [해탈을] 얻는다.” “Idha mahārāja nigaṇṭho sabbavārivārito ca hoti, sabbavāriyuto ca, sabbavāridhuto ca, sabbavāriphuṭo ca.” DN. I. 57.

고 기술한다. 이 대목은 금욕의 실천을 통해서만 악을 제거하고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자이나교의 기본 신념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우빨리 숫따(Upālisutta)'에는 “실로 신체적 행위가 악한 업을 짓고 악한 업을 발생시키는 데에 있어서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나니, 언어적 행위는 그와 같이 않으며, 마음의 행위 또한 그와 같지 않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atha kho kāyadaṇḍova mahāsāvajjataro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No tathā vacīdaṇḍo no tathā manodaṇḍoti.” MN. I. 377쪽. 

 이것은 마음이나 언어와 같은 내면의 행위보다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신체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업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서 육체적인 노력을 강조했던 고행주의적 사고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형이상학과 실천론에서 업 이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업 이론에 관련한 자이나교의 해설은 매우 상세하고 방대한 체계로 나타난다. Wilhelm Halbfass에 따르면, 업 이론에 관련한 자이나교의 문헌량은 힌두교와 불교 양자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현상계의 속박과 고통은 누적된 업의 총량에 비례하며, 수행의 진전과 해탈 역시 그것에 의해 판가름된다. 이것은 자이나교의 기본 경전인 '땃뜨와아르타 아디가마 수뜨라(Tattvārthādigāmasūtra)'의 7가지 명제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거기에 따르면 자이나의 기본 교리는 ①영혼(jīva), ②비영혼(ajīva), ③업 물질의 영혼 ‘유입(āsrava)’, ④업 물질에 의한 영혼의 ‘속박(bandha)’, ⑤업 유입의 ‘차단(saṁvara)’, ⑥업 물질의 ‘제거(nirjarā)’, ⑦업의 제거를 통한 해탈(mokṣa)로 구성된다. 이들 중에서 ①은 업이 달라붙는 대상이며 ②는 업 자체가 거기에 포함된다. 또한 ③에서부터 ⑦의 과정 역시 업의 작용과 그것을 다스려 나가는 양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전체 교리체계는 업이라는 기본 구도 아래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바탕 위에서 업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을 명확히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의 업은 불변적 법칙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결정론 혹은 숙명론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금욕과 고행은 그러한 벗어남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업 해석은 인간 존재의 주체적 능력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업에 대한 지나친 실체화 경향은 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를 전문 출가자들에 국한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자이나교의 업 관념 또한 재고의 여지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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