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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과학철학의 만남(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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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357회 작성일 23-02-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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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과학철학의 만남 


                                                               김성규(영남대학교) 





1. 들어가면서 

2.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연역적 방법 

  1) 귀납적 단계

  2) 연역적 단계 

3.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4. 피타고라스의 지침 

5. 데카르트의 피라미드 

6. 물리량

7. 연기 

8. 사성제

9. 마무리하며 

참고문헌 



1. 들어가면서 

과학철학을 정의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 은 과학적 인식의 기본문제에 관하여 고찰하는 학문이며 과학적 방법에 관한 모든 문제를 중요한 내용으로서 다룬다. 근세 자연과학의 방법으로서 귀납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Francis Bacon 이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연역논리 (Deduction)를 배척하고 귀납논리 (Induction) 를 주장하였다. 영국의 전통적인 경험론과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여러 가지 과학론이 전개된 가운데 칸트는 그의 비판철학을 수립하고 뉴턴 역학에 철학적인 기초를 닦아 주었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뉴턴에 의하여 완성된 수학적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사실로서 인정하고, 그 인식 위에서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선천적 종합판단을 필요로 하는 학문으로서 순수수학, 순수자연과학, 형이상학의 3가지를 생각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자연과학 전반이 급속한 진보를 이루어 뉴턴 역학, 즉 고전역학의 체계가 흔들리게 되었다. 


과학철학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은 <아르케(만물의 근원)>를 묻는 것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바로 과학 그 자체의 과제의 출발점이었다. 현대에 직접 이어지는 과학철학의 원형으로는 근세 초의 데카르트철학을 들 수 있는데, René Descartes 는 당시의 수학이나 자연철학을 모범형으로 하여, 이른바 <방법론적 회의>를 수행하여 <나는 생각한다>의 명증성에 이르고 이원론 (Dualism) 을 세워,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는 과학철학의 길을 열었다. 또 칸트철학도 그 최대 동기가 뉴턴물리학에 대한 기초 부여였다는 점에서, 과학철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그 이후로 영국 경험론과 독일 관념론의 대립 논쟁 그 자체가 과학적 인식의 기초 부여에 관한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F.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통찰, John Locke 의 실험적 정신, David Hume 의 인과성 분석, G. 버클리의 지각론, 신(新)칸트학파의 여러 학자의 과학 비판 등은 모두 과학적 인식의 기초 부여를 위한 것이었다. 과학적 귀납추리에 관한 John Stuart Mill 의 연구는 현대 과학철학의 한 원류가 되었는데 이 귀납적 방법론은 M. 뒤엠의 실증주의의 바탕을 쌓았고, 마침내 현대의 과학철학을 탄생시켰다. 현대 과학철학의 성립과 발전을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는 과학과 철학의 양면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19세기 이후에 과학의 급진전이 이루어지고 과학이 세분화되어 과학 전반을 통한 방법, 과제 개념에 대한 전체적·통일적 시야가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또 물리학을 정점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상이 비일상화 일로를 치달은 결과, 우리들의 생활 세계와의 괴리가 두드러져, 우리들의 생활체험과 과학적 개념, 과학적 체계, 과학적 설명 등의 관계가 새로이 추궁되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특히 20세기 초 이후, 과거의 사변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갖가지 형태의 언어분석철학을 낳아 일종의 과학 비판학으로서 성립하고 있었던 현상학과 관련되어 과학 내부에서의 문제의식에 대응하여 과학철학을 낳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타난 최초의 과학철학이 마하·푸앵카레·뒤엠 등의 과학자에 의한 과학론이었고, 1930년 전후의 빈 학파의 새로운 활약 가운데에 <과학철학>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서서히 정착해 갔다.


현대의 과학철학은 1930년대의 논리실증주의의 발흥을 계기로 시작되었는데, 과거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배제하고, 과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실증적·경험적 명제를 인식의 유일한 근거로서 허용한다는 엄격한 태도가 취해지고, 경험적 명제를 다른 것과 식별하는 규준이 규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경험적이라는 것을 감각적 보고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개인적 감각이란 문제가 생기고, 과학으로서의 객관적 공공성에 이를 수 없다고 하는 난점이 생겨, 단순한 감각의 집합이 아닌 <물질>을 포함하는 언어가 과학적 세계의 기술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견해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적인 감각적 경험과 물질세계와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과학적 인식의 근거에 관한 기본문제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실의 과학이론이 어떻게 구축되었으며, 어떠한 구조를 가지며, 또 어떠한 대상에 타당한가 하는 것도 과학철학의 기본과제다. 뉴턴물리학이 결정론적 자연관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데 반해, 현대 양자역학은 비결정론의 입장에 서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이 대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과학의 본질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이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철학 그 자체의 근본문제와 직결된다. 논리나 수학의 본성은 앞으로 논의가 고조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 밖에 윤리학이나 사회과학에 관해서도 과학철학적 고찰이 각 영역에 침투되어 있다. 윤리 언어의 구조, 사회적 규범성의 근거, 그들에서의 경험의 역할이 큰 테마가 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본질에 대한 추구이다. 존재 본질에 관한 추구,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구, 왜 그런가? 명제에 대한 추구,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추구,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추국, 인문철학이 다양한 변화성 속에서 보편성의 진리를 추구한다면, 과학철학은 존재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적인 속성 속에서 법칙성을 추구하고 있다. 존재의 근본적 속성은 안정이다. 서양에서는 로고스라 하고, 중국에서는 도라 하고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까지 존재한 과학철학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먼저 약술해보기로 한다. 

첫 번째 견해는 과학철학은 중요한 과학이론에 모순되지 않는,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기초한 세계관의 형성까지 포함한다. 

과학철학자는 과학의 보다 넓은 합의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해 말할 때에 사용되는 존재론적 카테고리에 관한 고찰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물리학에서의 최근의 발전은 ‘실체’나 ‘속성’이라는 카테고리가 ‘과정’과 ‘영향’이라는 카테고리로 대체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사회적 다위니즘”이나 윤리학적 상대론에 있어서와 같이, 인간행위의 평가에 관한 과학이론의 합의를 표현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견해는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이 갖는 전제와 기질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연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며, 복잡하지만 탐구자가 충분히 관찰할 수 잇을 정도의 규칙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과학철학자는 과학자가 통계적 법칙 보다도 결정ㄹ혼적인 법칙을, 혹은 목적론적 설명보다는 기계론적인 설명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결과는 과학철학을 사회학에 동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견해는 과학철학은 과학의 개념과 이론을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학문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신의 이론에 반통속적 설명을 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입자’, ‘파동’, ‘퍼텐셜’ 및 ‘복소수’와 같은 용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네 번째 견해는 과학철학은 이차의 표준설정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1) 과학적 탐구를 그 밖의 다른 형태의 탐구로부터 구별하게 하는 특질은 무엇인가? 

(2) 과학자가 자연연구에 있어서 따라야만 하는 절차는 무엇인가? 

(3) 과학적 설명이 올바른 것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4) 과학적 법칙과 원리의 인식적인 지위는 어떤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과학의 실재 그 자체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진, 과학을 살펴보기에 유리한 지점을 가정해야 한다. 과학을 행하는 걱과 과학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구분이 있다. 과학적 방법의 분석은 이차적인 학문으로, 그 주제는 여러 가지 과학의 절차와 구조이다. 


준위      학문           주제 

 2        과학철학       과학적 설명의 절차와 논리에 관한 분석 

 1        과학           사실에 대한 설명 

 0                       사실 


이 과학철학의 네 번째 견해는 두 번째, 세 번째 견해와 어떤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의 성향에 대한 탐구는 과학이론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설명의 완전성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잘 들어맞는다. 아인슈타인은 방사성 붕괴의 통계적 설명은 불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완전한 해석이란 개개의 원자의 행동에 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개념에 대한 의미 분석은 다른 형태의 탐구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구획설정과 관련될 것이다. 어떤 용어가 그 올바른 용법과 잘못된 용법을 구별하는 수단이 주어지지 않은 채 사용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그 개념을 담은 해석은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절대적 동시성’이라는 개념의 경우에도 일어났다. 


이렇게 살펴본 네 가지 견해는 주제의 차이라기 보다는 그 의도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영의 빛의 파동설이나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대한 상대적인 적합성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맥스웰의 이론이 우수하다고 판단한다. 과학철학자는 이러한 판단에 포함되어 있는 수용가능성의 일반적 기준을 탐구한다. 분명히 이러한 활동은 서로 침투된다. 이론의 평가에 있어서 앞서 행해진 업적들을 무시하는 과학자는 자기 자신을 절절히 평가하는 일을 잘 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의 실체를 무시하는 과학철학자가 과학적 방법에 대해 뛰어난 견해를 발표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과학과 과학철학 사이의 인식이 확실하지 않다는 인식은 이 역사적 객관의 주제 선택에서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휴웰이나 밀의 과학철학을 논의하는 일은 그들이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서술했던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갈릴레오나 뉴턴의 과학철학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서술헸던 것과 그들의 실제적인 과학상의 업적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연역적 방법 

1) 귀납적 단계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탐구를 관찰로부터 일반적 원리로 나아가서 다시 관찰로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으로부터 설명원리를 귀납하고, 다음에 현상에 대한 언명을 이러한 원리를 포함하는 전제로부터 연역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귀납

(1)   ------------------------>  (2) 설명원리 

(3)   <------------------------

             연역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설명이라는 것은 사실에 대한 지식(1)으로부터 사실의 근거에 대한 지식(3)으로의 이행이다. 

추리/추론/논증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통칭 귀납법, 귀납 추론이라고도 한다. 연역논증과 함께 논리학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흔히 '구체적 사실로부터 보편적 사실을 추론해내는 방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연역논증의 사례와 같이 가장 흔한 오개념 중 하나. 이것은 귀납 논증의 일례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편성에서 구체성을 유도하는 방법 역시 많은 귀납논증에서 위 정의는 매우 편협하다. 귀납 논증의 적합한 정의는 "전제가 결론을 개연적으로 뒷받침한다"이다. 반대로 연역논증은 '만약 전제가 모두 참이라면, 그 결론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그 결론이 거짓인 경우는 불가능하다)'이다. 


예를 들어 귀납 논증의 틀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전제1: x1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1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 전제2: x2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2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 전제3: x3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3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 결론: 따라서 모든 것은 φ다

  그러므로 해는 매일 동쪽에서 뜬다.


2)연역적 단계 

귀납에 의해 도달된 일반화는 최초의 관찰에 관한 언명들을 연역하기 위한 전제로서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에서의 연역적 논증의 전제 및 결론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언명의 종류에 중요한 제한을 가하였다. 

그는 어떤 집합이 다른 집합에 포함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제외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언명들을 허용하였다. 


유형    언명                           관계 

A      모든 S는 P이다.                S는 P에 전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E      어떤 S도 P가 아니다.           S는 P로부터 전체적으로 제외되어 있다. 

I       어떤 S는 P다.                  S는 P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O      어떤 S는 P가 아니다.           S는 P로부터 부분적으로 제외되어 있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M은 P이다. 

모든 S는 M이다. 

그러므로 S는 P이다. 


역사학에서는 귀납적 논증을 확률적 설명이라고도 지칭한다. 그래서 귀납논증은 '영원한 진리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논리학에서는 배제되었지만,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논리학의 한 범주로서 인정되게 되었으며, 어찌 보면 당연한 말에서 당연한 말을 이끌어내는 연역논증과 다르게 당연하지 않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기에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경험과학의 거의 대부분에서 쓰이는 추론 방식이며, 통계학은 귀납추론을 세련된 방식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수학과 형식논리학에선 함부로 썼다간 피 볼 수 있는 논증. 실제로 거의 쓰일 일이 없으며, 수학적 귀납법 역시 실제로는 연역논증이다. 


좁은 의미에서 "귀납추론"은 위와 같은 방식을 따르는 추론만을 가리킨다. 즉 논증의 결론이 구체적 사실을 관찰하기에 앞서서 미리 제시되지 않는다.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틀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제 과학 활동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

에서 과학적 방법에 응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가설-연역적 (hypothetico -deductive) 모형 또한 대부분 넓은 의미의 귀납 추론에 포함시킨다.


예를 들어 가설-연역적 귀납 논증의 틀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가설: 모든 것은 φ다?

  설명) 해는 매일 동쪽에서 뜬다?

* 자료1: x1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1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 자료2: x2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2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 자료3: x3는 φ다

 설명) 2016년 1월 3일에 동쪽에서 해가 떴다.


*결론: 따라서 '모든 것은 φ다'라는 가설이 맞다.

 그러므로 해는 매일 동쪽에서 뜬다는 가설이 맞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매번 상이한 방식으로 철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지식 그 자체가 바라는 목표며 그 어떤 실천적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이론 철학

a) 운동하지 않을 수 없는 물질적 대상을 다루는 자연학 또는 자연철학

b) 운동하지 않지만 질료로부터 분리되지는 않은 대상을 다루는 수학

c) 질료로부터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 운동도 하지 않는 대상을 다루는 형이상학


2) 실천철학은 주로 정치학을 다루는 것이지만 군사학과 경제학 및 수사학을 하위 학문으로 거느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들이 품고 있는 목적이 정치학에 종속적이고 또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3) 제작철학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또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인륜적 행위를 포함하는) 실천 철학의 경우에서처럼, 행위의 산물을 다루지 행위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으며 그 모든 관심과 목적에 있어서 기술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흔히 “형식” 논리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들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따라서 분석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적절한 성격 규정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논리학이 외부 실재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사유 형식에만 관계한다고 상정한다면 그것은 매우 커다란 오류다. 그는 주로 증명의 형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적 증명의 결론이 실재에 관한 어떤 지식을 제공한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에서, 그 결론은 단순히 논리의 형식적 법칙에 따라서 올바르게 연역된 것만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결론이 실재 세계에서 검증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실재론적 인식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 논리란 사고의 형식에 대한 분석이긴 하되, 실재를 사유하고 사고 안에서 실재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이며, 참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외부 세계에서 검증되는, 실재에 관한 진술을 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이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들이 언제나 그것들이 마음에 의하여 파악된 것과 똑같이, 마음 밖의 실재 속, 예를 들어 보편자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 논리는 실재에 관해 사유하는 인간의 사고를 분석하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발굽을 가진 모든 반추동물은 윗턱의 앞니가 없는 동물이다. 모든 소는 발굽을 가진 반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소는 윗턱의 앞니가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범주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논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범주들은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의미하지만 - 예를 들어 실체들의 성질을 단정하는 것 - 동시에 범주들은 사물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물이란 실체이나 현실적으로는 우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도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칸트의 선험적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논리는 지식을 이루어내는 능동적 과정에서 오직 마음에 의해서만 부여되는 사유의 선험적 형식을 격리시키는 일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실재론자의 인식론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사고의 범주가 동시에 마음 밖의 실재에 대한 객관적 범주이기도 하다고 상정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범주는 단순히 정신적 표상의 양태, 즉 개념의 틀만은 아니다. 이 범주들은 마음 밖의 세계에 있는 존재의 현실적 양태를 나타내며 논리와 형이상학 사이의 가교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논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측면도 지니는 것이다. 이들의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배열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실체는 말하자면 출발점이다. 단지 개별자들만이 우리의 마음 밖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개별자가 독립적으로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체여야만 한다. 그러나 개별자는 단순히 실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 개별자는 우연적 형상들도 지녀야만 한다. 예를 들어 색깔 없는 백조는 있을 수 없으며, 반면에 수량과 연장이 없이는 색깔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대상의 내적 결정 요소인 첫 세 가지 범주들, 실체와 성질, 그리고 양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백조는 다른 백조들과 종적 본질은 같지만 그 크기는 다른 실체들과 같거나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백조는 다른 백조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적 실체로서의 백조는 어떤 장소와 어떤 기간에 존재해야 하며,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실체들은 우주적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범주들 가운데 어떤 것은 대상의 내적 결정 요소로서 그 자체로서 고찰된 대상에 속하며, 반면에 다른 범주들은 대상을 다른 물질적 대상들과 일정한 관계에 있도록 하는 외적 결정 요소로서 대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범주들이 다른 범주들에 포섭됨으로써 범주들의 수가 줄어들 수 있다 하더라도, 범주들이 도출되는 원리는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본질적 정의란 유와 종차에 의한 엄밀한 정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최하위의 종들까지 이르는 구분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본질적 정의를 진정으로 정의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 유형으로 간주하면서 명목적 정의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항상 본질적 정의나 실재적 정의를 용인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는 자연학이 연구하는 자연적 대상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을 구별하거나 특징짓는 정의들에 만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의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명목적 또는 기술적 정의보다 좀 더 가깝게 본질적 정의의 이상에 접근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그것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4. 피타고라스의 지침 

피타고라스의 지침은 과학사에 있어서 매우 여향력 있는 자연을 보는 방법의 한가지이다. 이 지침은 수학적 조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수학적 조화에 관한 지식이 우주의 기본구조에 대한 통찰이라고 생각하였다.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은 눈앞에 늘 펼쳐져 있는 이 거대한 우주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가 사용하고 잇는 문자를 해독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다. 우주의 본질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져 있고 그 문자는 삼각형, 원, 그 밖의 기히학 도형이며, 이러한 것들이 없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에 관한 단 한마디의 말도 이해할 수 없다. 










 정사면체(불)                                             정육면체(흙)




정팔면체(공기)                                             정이십면체(물)     



 정이십면체(천체물질)


피타고라스의 지침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성서”와의 결합의 결과이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자비심이 풍부한 창조주에 의한 우주의 창조를 기술하고 있다. 이 창조주는 무정형의 원시물질에 수학적 패턴을 부여하였다. 

플라톤 자신은  “티마이오스”에서 다섯 가지 “원소”들(네 가지는 지상에, 한가지는 하늘에 있다고 함)은 다섯 가지의 정다면체와 상호관계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정사면체는 불을 상징하며 가장 예리한 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침투력이 강한 원소이다. 정육면체는 흙을 상징하며 뒤집기가 힘들고 단단한 원소이다. 정팔면체는 공기를 상징하고, 정이십면체는 물을, 정십이면체는 천체물질을 상징하였다.  


5. 데카르트의 피라미드 

데카르트는 과학의 최고의 성취는 그 꼭대기에 최고의 일반원리를 갖는 명제의 피라미드라고 하는 점에서는 베이컨에 동의하였다. 베이컨은 일반적인 관계로부터 귀납적인 방법에 입각한 일반법칙을 발견하려고 했는데 비해, 데카르트는 꼭대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한 하강의 방향으로, 일반원리에서 특수 사례로 나아가려 하였다. 

데카르트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의 일반원리에 대하여 확실성을 요구하였다.  









6. 물리량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공간과 공간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기는 흐름인 시간이 있다. 이것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요소이다. 공간 x, y, z가 있고 시간 t가 있고, 공간에 존재하는 질량 m을 가지는 물체가 있다.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물체 m이 있다면 x, y, z, t, m 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물리적 의미가 있는 양을 찾이야 한다. 이것이 물리량이며 물리량의 역할에 따라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차적 요소인 속도 v는 어떤 물체 m이 시간의 변화에 대한 공간의 변화량을 나타내는 값이며, 가속도a는 물체m이 시간의 변화에 대한 속도의 변화량을 나타내는 값으로 정의한다. 

이 값들을 곱하고 나누고 더하고 빼고 하여 의미가 있는 값을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질량과 위치를 곱한다거나 질량과 속도를 곱한다거나 질량과 위치를 더한다거나 질량과 속도를 더한다거나 가능한 경우의 조합을 하여 의미있는 물리량을 찾는 것이다. 

mx, mv, m + x, m + v 등을 해보는 것이며, 이것을 통하여 의미있는 값을 찾는 것이다, 


7. 연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득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 위에 떠 있는 빙산과 같다. 보이지 않는 아홉 보다는 보이는 하나에 의해서 판단되고 결정되는 것이 상례이며, 우리는 또한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아홉에 진실이 숨어 있으며, 세상의 온갖 보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아홉의 주머니를 처음 풀어헤친 진리의 문을 연 붓다의 다음 얘기를 귀기울여 들어보자. 

“이 세상의 위대한 일치고 정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갈파한 헤겔의 말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이 세상의 빛나는 삶은 모두 정열에서 비롯된다. 공자가 천하를 철환한 것도, 예수가 황야를 방황한 것도 모두 문제 제기에 대한 해결을 위한 정열이었던 것처럼 붓다의 설산에서 6 년 고행 또한 노병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값진 시간이었던 것이다. 노병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온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걸어온 6 년이란 수행과 명상과 함께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그 눈과 마음은 열린 것이다. 캄캄한 어둠을 빛이 밝히듯 드디어 노병사의 문제가 환하게 밝아진 것이다. 


“무엇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일까?”

“무엇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일까?”

“생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를 잉태하게 되는 위대한 태동 연기법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의 긴긴 고행은 드디어 인간의 존재,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환하게 밝힌 것이다. 아마도 그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라는 용어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좀더 뒷날에 그 내용이 정리되고 거의 체계가 선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붓다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으로서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

“연기(Paticcasamuppada)란 재미있는 말이다. 그것은 말미암아(綠, Paticca, grounded on)라는 말과 일어나는 것(起, Samuppada, arising)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서 붓다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그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이었으므로 결국 연기란 붓다의 존재론을 말하며, 즉 긴긴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 앉아 “진지하게 사유한” 결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그 후 붓다는 계속 명상에 잠겨 생노병사가 생기게 되는 더 근원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관조하여 ‘12연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왜 늙고 죽음이 있는가?                태어남 때문에 

왜 태어나는가?                        업의 생성력 때문에

업의 생성력은 왜 생기는가?            집착 때문에 

집착은 왜 생기는가?                   갈애(애욕) 때문에 

갈애는 왜 생기는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은 왜 생기는가?                   접촉 때문에 

접촉은 왜 생기는가?                   6식(눈귀코혀몸뜻)이 있기 때문에

6식은 왜 생기는가?                    영혼과 육체의 결합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왜 생기는가?            재생의 식 때문에 

재생의 식은 왜 생기는가?              모든 행위는 형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성력은 왜 생기는가?                 무명 때문에 


(무명)무명에 의해서                              형성력이 생기고 

(행)형성력에 의해서                            재생의 식이 생기고 

(식)재생의 식에 의해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생기고

(명색)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의해서                6식이 생기고

(육입)6식에 의해서                               접촉이 생기고

(촉)접촉에 의해서                              느낌이 생기고

(수)느낌에 의해서                              갈애가 생기고

(애)갈애에 의해서                              집착이 생기고

(취)집착에 의해서                              생성력이 생기고

(유)생성력에 의해서                            태어남이 있고 

(생)태어남에 의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노사)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무명이 축적되고,

끝없이 생멸을 되풀이 한다. 


우리 인간 존재의 생주이멸이 그렇고 우주의 존재법칙 성주괴공이 바로 이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에서부터 무생물까지 모두 이 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연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면 인과응보가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속담은 모두 연기법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식이 없는 사랑으로 중세 전역을 흑사병으로 몰고 간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전쟁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수행은 미혹으로 몰고갈 것이며, 수행이 없는 삶은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12 연기의 처음인 무명에 의하여 결국에는 삶과 죽음이 있게 되며, 이 무명이 해결된 상태가 연기인 것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관계는 무명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불교란 “무명과 연기”의 끊임없는 반복 성찰 확산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나와 남과의 관계인 것이다. 


8. 사성제 

고전 열역학 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개념의 하나로 “엔트로피”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고전역학에서 자연현상의 진행 방향을 나타내는 양으로, 예를 들면 뜨거운 물은 결국에는 식는다는 것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주목할 만한 개념이다.

 1900년대에 이르러 양자통계가 등장함으로써 “엔트로피”는 보다 중요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 “엔트로피”는 어느 정도로 막연한가를 나타내는 양으로, 막연하면 할수록, 많은 가능성이 있으면 있을수록 “엔트로피”는 크다고 한다. 

 “엔트로피”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그 하나는 자연현상의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할 수도 없고, 노인을 젊은 사람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엔트로피”는 자연의 흐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살펴보면, 물이 들어 있는 컵 속에 붉은 색 잉크를 한방울 떨어 뜨린다 하자. 그러면 잉크 물방울은 전 컵으로 확산되어 온통 붉은 물이 되는 것이다. 그후 이 변화의 반대 현상, 즉 다시 한 방울의 잉크로 되돌아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때 이 현상의 비가역성을 나타내는 양이 “엔트로피”이다.

 자연은 보다 확률이 큰 곳으로 옮겨진다. 즉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을 따른다. 

 세상은 계속 엔트로피가 증가되는 방향, 무질서의 정도가 커지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 인간은 이 순간에도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올바름에 대한 좌표 설정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역사를 이루고, 엔트로피는 커져만 간다.

 결국 종교라는 것도 엔트로피가 0인 태초의 상태로 되돌려 가지는 못할 것이다. 무질서와 혼란의 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다만 엔트로피의 증대를 억제하는 역할을 종교의 소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는 이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기도와 수행으로 우리의 삶을 맑고 밝게 빚어가는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친 연기법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느냐가 문제이다. 나에게 값진 보배가 있어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면, 먼저 부모형제, 스승, 친구들을 생각 할 것이다. 붓다가 이해시킬 대상으로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은 처음 출가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이었을 것이다. “스승이라면 나의 깨달은 바를 이해해주실 것이며 따뜻하게 맞아 주리라!” 그렇지만 세월은 흘러 스승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없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6 년 동안 함께 고행한 다섯 비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다섯 비구들에게 가서 나의 깨달은 바를 이해시키자. 수소문을 해보니 다섯 비구들은 바라나의 녹야원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있는 곳은 마갈타, 마갈타에서 바라나까지는 거의 300km나 되었다. 붓다는 10여일이나 걸어서 바라나에 도착하여 다섯 비구를 겨우 찾았다. 그렇지만 다섯 비구들은 냉정하기만 하였다. 고행을 버리고 떠난 붓다를 용서해 주지 않은 것이다. “벗들이여 나의 얼굴을 보라. 예전의 나의 얼굴이 이렇게 밝은 적이 있더냐? 나는 깨달았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좋다.” 이렇게 사정사정하여 다섯 비구는 마침내 붓다의 얘기를 듣기 시작하였다. 

연기법을 어떻게 현상에,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마갈타에서 바라나까지 걸으면서 시종 이 문제로 고민했으리라. 눈에 보이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궁핍과 질병뿐이고, 계급제도에 의한 비참한 노예생활 뿐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고”다. 먼저 현실적으로 “고”다라고 인식을 해야만 본질적인 문제에서 “고”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苦)"인 근본적인 이유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 본질을 바라보면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제행무상이며, 공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본질을 바라보면 모든 존재와 현상에 나라고 하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제법무아이다. 바로 이와 같이 시공간적으로 존재 본질을 꿰뚫어보니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기에 “고”다고 갈파한 것이다. 

그러면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로 나아가는 삶을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실천하여 생활화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남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명에서 연기로 나아가는 삶을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실천하여 생활화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붓다께서 10여일을 걸으면서 조용히 선정에 들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이 바로 사성제(四聖啼)였던 것이다.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이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과제의 제시이며, 집은 고가 발생한 이유이다. 즉 왜 고가 생겼는지 근본 이유를 밝히는 것이며, 멸은 고가 극복된 상태이며, 도는 집을 소멸하여 멸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에서 연기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인 것이다. 고, 집, 멸, 도 사성제는 다음과 같이 경전에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은 고다. 노는 고다. 병은 고다. 죽음은 고다. 시름, 근심, 슬픔, 불행, 번민은 고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가 그것이다. 그것에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서 아무 집착도 없는데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의 도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니라.”


법사 : 보살님 댁에 큰애가 지난 해 고 3이라 했는데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까?

신도 : 아닙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지금 재수하고 있습니다. 

법사 : 절마다 다니면서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왜 시험에 떨어졌습니까? 

신도 : 얼굴을 숙이며 아무 말이 없다. 

법사 : 왜 시험에 떨어졌는지 한번 공부해 볼까요? 

 불교인이라면 먼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부처가 되는 방법인 “사성제”를 생각              해야 됩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본인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고”의 성제입니다. 왜 떨

어졌는가? “떨어진 근본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이 “집”의 성제 입니다. 학생은 착하고 공부도 잘 하였는데 한번씩 마음이 흔들릴 때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것이 떨어진 이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상대방에게 감동을 줍니다. 보살님께서는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를 했지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여 기도를 못했습니다. 올해 일년 동안 아이를 위하여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일년 동안 모임을 모두 끊고 오로지 아이의 뒷바라 지를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보살님 댁의 거사님께서 사업이 아무리 중요하지만 일요일 아침은 아이와 함께 공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속극이나 영화등을 본다고 밤 늦게까지 TV을 켜 놓지 맙시다. 어떤 일이 일더라도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주도록 합시다. 학생이 밤 늦도록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거실에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시다(TV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학생은 감동하게 됩니다. 

아! 어머니께서도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한번 감동을 받게되면 학생은 저절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당연히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됩니다. 여기서 “멸”의 성제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고, “도”의 성제는 기도의 조건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연습도 하지 않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습니까? “사성제”는 일상 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사성제”를 실천              하면서 살다보면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녹야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이야기 한 것이 바로 “사성제”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설명에서 다섯 비구가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부경전 二六의 기록에 의하면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에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 명의 비구를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얻어온 것으로 여섯이서 생활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콘단냐가 붓다의 사상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콘단냐의 깨달음은 본인에게도 큰 기쁨이지만 본인보다 더 좋아한 것은 붓다였으리라.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그때의 붓다의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반복법으로 전하고 있으며,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남에게 이해 시켰을 때의 감개무량함이 가슴에 와 닿는 듯하다. 마침내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불교의 성립을 의미하는 일대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9. 마무리하면서 

과학의 연구방법론이 어떤 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원인을 찾는 작업이다. 원인의 규명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황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반복 추구와 나아감이 근본적인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친 연기도 존재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론적 규명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는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학이 귀납법과 연역법과 논리학을 바탕으로 존재라는 물체에 대하여, 근본에 대하여 규명하고 발전해 왔는 반면 불교는 생명이 있는 생명체, 더 나아가 우리 인간에 대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원인 규명인 것이다. 






참고문헌 

과학철학의 역사 존 로제, 최종덕, 정병훈역, 한겨레, 1991

Mode of Thought, 화이트헤드,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8

Systematically Misleading Expression’s G. Ryle, 1951

Posteriori Analytics, Aristotle, 

The Principles of Pilosophy, Descartes, 

2600년 불교의 역사, 김성규, 자우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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