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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불자교수회4집(불교와 문화의 만남)

신행_영원 무한한 나 절대정신으로 가리라(권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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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269회 작성일 23-02-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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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무한한 나 절대정신으로 가리라


                                                 권순백(대구가톨릭대학교) 


법륜불자교수회 창설 30주년을 맞아


법륜불자교수회가 결성된 지 어언 30성상이 되었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창립 시에 영남대학교의 김성규 교수와 박원주 교수 그리고 저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권순백 교수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뜻을 모아 시작하였는데, 이제 모두 60대가 되어 저는 금년 8월에 정년퇴직합니다.  그동안 부침이 많았으나 한결같이 지금까지 우리 법륜회를 중심축으로서 지탱해온 김성규 교수에게 깊은 찬사를 보내며, 지난 10년 가까이를 거의 참석하지 않은 저로서 우선 반성과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중고등학교를 기독교재단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매주 예배시간도 가지고 때로 교회에도 나가며 보냈으나, 대학시절 대학생불교연합회에 가입하며 1974년에는 전국 부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불교서적과 경전 공부도 다소 하면서 아는 체 하였으나, 많은 생각과 알음알이로 그치고 실제 행동에서는 불자로서 계율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교리실천도 못하면서 나태와 안일에 빠져 지냈습니다.

대학교수로서도 학생들에게 깊은 전공지식과 삶의 지혜를 전해주지 못하면서도 본교에 여러 가지 불평이나 하면서 지나친 혜택을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대해 빚이 많습니다.  이제 늙어서 은퇴하여 여기저기 다니며 봉사할 심신의 여력과 신분 지위가 없으나 다만 글로서라도 불교계와 국가에 대해 작은 기여라도 해볼 작정입니다.  실제로는 번문욕례만 남기게 될 것 같으나, 노력하는데서 인생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사람에게는 경지가 있다고 하는데, 저의 불교경지와 신념체계는 오히려 퇴보한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가 생시와 사후를 다루는데, 특히 불교는 생사문제에 관하여 가장 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윤회와 열반이라는 중심교리는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현재 저의 신념은 경전 상의 설명과는 다소 이해를 달리합니다.  

개체로서의 나는 즉 이 육신은 분명히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고 생각하여, 생시에 제 맘대로 살려는 욕구덩어리로서 생노병사로 전변하며 실체의 나는 없음을 이해합니다.  다만 열반적정은 불경에서의 형식설명과 달리 개체로서의 영혼이 어떤 초탈의 경지에 도달하여 누리는 상태가 아니라 믿어집니다.  

참으로 열반에 든다는 것은 개체를 초월하여 우주전체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 생각되며, 죽으면 결국 이 육신은 모두 흩어질 따름이라 이해됩니다.  즉 모든 종교가 각기 다른 형태로 주장하는 영구불변한 개별 영혼이나 업식 윤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념이지요.  다만 허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 된 환함이 열반이라 믿어집니다.  결국 개체의 나는 원래 없거나, 생시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없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존재전체는 빛을 발하며 영원무궁하게 생명과 광명을 이어갑니다.  바로 무량수 무량광의 존재라는 아미타불이지요.  이것을 철저히 깨쳐서 세상에 생명과 광명을 베풀 수 있다면 개체로서 살아있는 현재도 진아 대아로서 아미타불의 경지라고 믿습니다.

그런 뜻으로 최근 발간한 저서 ‘나 참으로 즐거운 사람’에서의 아래 글을 소개합니다.


“영원 무한한 나 절대정신으로 가리라” 하는 내용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이 나는 제 맘대로 살려는 의지의 욕구덩어리


탐욕이 남아있으면 갈증과 불만도 붙어있다

심리학과 인간행동과학 및 복지경제학에서 행복은 어떤 욕구대상의 효용가치에 의한 욕구충족의 정도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의하여 욕구대상이 어느 정도 이상 확보되면 아무리 더 많이 주어져도 별로 만족은 커지지 않습니다.

정도에 지나치게 주어진 대상은 경우에 따라서 불편함과 성가심 또는 오히려 압박감이나 불만이란 역효과를 줍니다.  만약 제대로 수용 통제되지 못할 경우에는 자타 동시 피해의 역작용도 합니다.

돈과 재물, 권세와 명성, 건강과 육욕 등의 세속적 대상이 그러하여, 편리한 의식주 및 화목한 성생활과 원만한 사회친교를 위한 기본적 충족수준 이상이 되면 아무리 더 많이 주어져도 별로 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심리입니다.

오히려 갈증의 욕구만 더욱 커져서 탐욕에 의한 끝 모르는 불만에 허덕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자존망상의 허욕만 쫓아 헤매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심신의 건강성상태에도 심각한 위해를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왜곡된 자아실현은 자타에 참사를 불러온다

인간내심의 다양한 욕구가 또한 심리학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생리적 욕구, 안정욕구, 사회적 욕구 및 존경욕구를 뛰어넘어 최고수준의 욕구는 자아실현욕구라고 해명합니다.  인류의 철학 문학 과학 예술 종교 등 모든 문화와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은 이 자아실현욕구에 의해 달성된 것입니다.

자아실현은 그러나 세계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도덕과 윤리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운데서 무턱대고 자기실현을 위해 왜곡된 삶을 살며 남들도 그렇게 강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임이 분명합니다.

역사는 예술창조 명목으로 로마를 불태운 폭압광인 네로, 신세계질서 명목으로 세계대전을 일으킨 정치광인 히틀러, 대동아공영 명목으로 대학살을 자행시킨 침략광인 소화 등 수많은 독재 광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지금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뒤를 이어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북의 독재자 김정은과 남한에서도 민주와 자유 및 민의 명목의 수많은 이기적 정치꾼들을 보여주며 왜곡된 자아실현을 예시해줍니다.

작게는 자유표현, 성해방, 민중예술, 폭력해부 등등 명목의 얼치기 사이비 문예가들 및 심령부흥, 말세휴거, 혈통복귀, 예수천도제, 정도령출현 등등 명목의 자기중심적 카리스마적 종교인들과 기타 수많은 각종의 욕심충족이나 자아도취 내지 자기현혹에 빠진 기업가, 노조간부, 교사, 교수, 대학생, 정치인, 법관 등등에서 한계 상황적 실존인간들을 무수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개체를 벗어나서 타인의 존재를 참된 자아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아의 모습입니다.  남을 자기 속에 포용하여 동체대비의 지혜를 베풀지 못하므로, 이 사회는 배척과 지배욕과 반목과 투쟁의 이지러진 역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실현에는 동체의 대비와 반야의 혜명이 있어야 한다


자아실현은 진리애와 봉사심의 초월적 욕구에 따라야 한다 

자기실현은 가장 높은 수준의 욕구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가치 있는 인간정신의 진실한 실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역시 참된 자기를 발견하려는 끊임없는 구도행과 위대한 자기를 실현하려는 박애의 보시행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욕구의 오단계설을 주장한 마슬로우도 만년에 와서는 자아실현욕구 위에 다시 초월적 욕구를 주장합니다.  봉사심과 진리애를 최고의 가치로서 생각하였습니다. 

봉사활동과 진리추구의 이 경우에는 자기실현욕구의 충족에 의한 실제로 현실상의 만족스런 행복도 달성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용가치도 훨씬 넘어선 진실가치의 성취와 구현에 의해 참된 인간화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으로서의 인간 진실화와 아울러 인생의 방법으로서의 삶의 행복도 달성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 길로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진실은 진실해지고자 하는 의지와 진실하도록 가르치는 대상들에 의하여 얻어집니다.  진리애와 봉사욕구는 세속적 욕구와 달리 인간을 끝없는 갈증으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복가치 이상의 최고가치인 진실가치를 담고 있으며, 행복가치 자체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한 사람은 결코 진실로 불행해질 수 없으니까요.

진리와 봉사에 대한 욕구가 크면 클수록 자기진실화가 이루어져 진실도가 더 커집니다.  진실화를 이루게 하는 대상으로는 현재 스승의 존재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사색하며 진리를 찾는 의지가 있다면.

또한 과거의 성현들이 남긴 말과 글도 당연히 스승이 되며, 대자연도 말없이 뜻을 전해주는 위대한 스승이 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순수한 자아에서 절실하고 진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미타불 천지신명이 지금도 비밀의 진언을 끝임 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태양의 햇빛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뿐.


진리를 찾으려 생각하는 사람만이 배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바쁘고 피곤한 현실의 삶에서나마 한숨 돌리고 참다운 삶의 진리를 생각하며 어려운 세인에 봉사하려는 그런 의지의 사람들은 언제나 즐겨 배울 수 있습니다.  눈 밝은 스승에게서, 일상 대하는 이웃에게서, 지혜로운 현인들의 책에서, 몸으로 직접 가르쳐주는 대자연에서, 경건한 시간의 자기내심에서, 그리고 초월계에 존재하는 신에게서 진실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자아상실의 타인지향형 인간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아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참다운 자기가 존재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영위하기 위하여, 아의 본질에 관한 올바른 인식과 아의 완성을 위한 끝없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아의 본질에서 아를 규정짓는 것은 결국 자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도 자기가 이해하고 믿는 바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테두리로 규정되어집니다.

기독교적인 유신론의 입장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도 있고, 불교적인 초월존재의 내용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불타를 전지전능한 인격신으로 보는 기복신앙의 신도들이 많으며, 하나님을 인격적 실체라기보다 진리자체로 보는 범신론적 이해의 교인들도 많은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가보다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종교가 다르다고 비난하는 것은 허위로 믿기 때문이다

종교의 형식적 명칭 보다는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의 이름 보다는 신의 본질적 성격이 근본적 문제입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를 믿는가 보다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올바로 믿는 것인가가 종교의 정도에서 훨씬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석가와 예수와 공자와 소크라테스 등이 모두 성인 현자로서 진실과 박애의 길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지각없는 광신자나 또는 무조건 배타적인 과신자 외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사이비로 비난하는 것은 본인이 허위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목상의 종교 그 자체에 정사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인간의 의식과 신앙의 방향에 있어서 옳게 믿는가, 그르게 믿는가에 따라 정사가 판별되는 것입니다.

물론 범세계적인 특정종교의 가르침에도 유파별 교사별 차이가 있으며, 별별 종류의 사이비종교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교사를 만나 올바른 종교에 입문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정사를 판별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이며, 이 정신의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발휘에 있습니다.

적어도 기본적 교양을 배웠고 윤리적 판단능력이 기초적으로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인간정신이 접하게 된 종교를 바로 이해하여 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 그렇게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런 이성적 비판이 있는 한 결코 사이비 유사종교나 극단 교리에 현혹되어 광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자기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타종교의 본질적 가르침도 모르면서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찰이 따르면 어떤 종교라도 바르게 믿을 수 있다

특히 이천년 전후의 역사와 세계인에 의해 유지 존속되어온 위대한 종교들, 불교 기독교 회교 힌두교 도교 유교 기타 등등은 나름대로 인류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범우주정신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억지로 구분해서 그렇지 본질적 차원의 내용에 있어서 모두 공통방향일 수 있습니다.

이 종교의 교리들은 설사 그 교주가 성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역사상 수많은 현인들의 정신에 의해 계승 발전되며 성화된 것입니다.  혜지의 빛으로 진지하게 비추면 가불도 진불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위대한 인간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그 심오한 뜻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비방하고 훼손하는 짓은 선현들의 위대한 인간정신에 대한 천박한 모독입니다.  본서는 진아관에 대한 하나의 진지한 종교적 고찰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떠한 인간이 세운 종교나 종교교리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의 판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옳다고 주장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설교하는 누구나 그렇듯이 본설은 불타의 교리라기보다는 저자의 불교관이라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사유하는 한 인간이 자기 정신에 의해 쓴 글이니 독자께서도 인간정신에 의해 자기의 소견으로 이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사실 본설은 저자의 덜 정화된 마음호수에 비친 달빛 모습을 그려내었을 뿐, 결코 전일 우주정신이 보낸 반야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다만 나름대로 조요한 시기에 사람들에게서도 자연에서도 벗어나 혼자 오롯이 사유하는 계기에서 철학적 인간정신이 보내는 내심의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의 유무가 결정됩니다.  님이시여, 저자의 부족한 문장력으로 타인의 가르침을 이왕 받은 즉, 당신 자신의 내면적 가르침으로 비판하시거나 소화하소서.  철학하소서!  명상하소서!


인생의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인생이 가치가 있다


인생은 승패결과가 명백히 드러나 있는 자업자득의 투기이다

아의 본질 문제와 아의 개발 완성이 이성적 상식적으로 따져보아 중요한 일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나의 진아관이 독자의 자아 이해와 개발에 도움이 된다면, 나와 여러분의 이 행위가 서로 함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인생도 동시에 더 가치 있고 풍요해질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명백히 그 승패의 결과가 드러나 있는 어쩔 수 없는 자업자득의 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생의 선악 행위를 평가하여 인과응보를 베푼다는 천당 지옥의 타 공간적 존재와 그러한 별천지에 새로이 태어나는 영혼의 영원성이 인정된다면, 사후를 위해 당연히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은 명명백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가 별도로 없다 해도, 자기를 이해하고 개발하며 참되게 살려하고, 또 그에 만족하는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러한 진지한 성의와 노력 또 선행과 만족에 의해 이미 인생의 승부에 명백히 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별세계에 없더라도 그 마음이 선함과 기쁨에 가득 찬 천국이라면 이미 승리 터에 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천국의 본질적 개념은 마음이 즐거운 곳입니다.  천국이 어찌 즐겁고 편안하며 평화로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이 무제한 풍부하고 동식물이 번성하며 짐승들이 서로 풀 뜯어 먹으면서 화평하게 노는 곳이라도, 시기 질투와 권세 지배욕이 또 유혹과 욕정의 어리석은 마음이 그곳의 인간정신에 남아있다면 곧 전쟁터가 됩니다.  반목과 투쟁에 또 불손한 충동에 의해 조만간 아비지옥을 이루는 것이 반드시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늘나라의 천사 장이던 루시퍼가 시기와 지배욕 때문에 권력투쟁을 하다가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사탄이 된 이야기와 영악한 뱀의 유혹에 홀리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에덴낙원에서 쫓겨나 거친 현실의 이 유사지옥계에서 고생하게 된 인간 원조의 이야기가 이를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러한 낙원은 완전한 천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은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나의 세계

아무리 명성과 권세와 재물이 많더라도, 참되고 선하게 살지 않는 사람이나 진실한 자기를 찾아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현실이 지옥은 아니더라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또 때로 흘러가는 덧없는 쾌락들을 누리더라도 필경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 삶이 무가치하므로 불쌍하고, 그 인간이 어리석어 만족하지 못하므로 불행하고, 참된 자신이 누리는 삶이 아니라 가아의 거짓 생명이 누리는 삶이므로 불쌍합니다.  이런 불행에 권력이 재물이 명성이 한 때의 자아도취 쾌락 외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옥의 올바른 개념은 분명 마음이 괴로운 곳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몸은 고달프더라도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로 가는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맑고 밝아서 천국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빈 술통 속에 사는 쇠약한 노인이었지만 햇빛 한 줄기로도 알렉산더 대왕의 영화보다 더욱 행복하였던 그리스 현인 디오게네스의 예가 이를 실증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얼굴과 사지가 뒤틀어진 뇌성마비 병신이었지만 누구보다 욕심 없이 감사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착한 일 많이 하며 살았던 명동성당 거지노인의 예는 이 이치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평생 기어 다니며 새벽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명동성당 계단자리에서 구걸하였으나, 항상 웃으며 행인들에게 복 받으시라고 축원하였고, 수억 원이나 되는 동냥재산을 자선재단에 기부하였으며, 임종 시에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여 김수환 추기경님이 직접 장례식을 치러주었습니다.  사후에 알고 보니 환란을 겪거나 실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가다가 밝게 웃는 그를 보고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현자 선인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 스스로의 주위에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분명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겉보기를 벗기고 찾아보시라!  스스로에게서도 살펴보십시오.  성찰을 하면 보입니다.


탐욕 진애 우치 삼독에 찌든 자에게 이미 행복은 없다

진아 발견의 길에 만족하는 지혜가 없는 우매한 자나 대아 발현의 길에 봉사하는 자비가 없는 탐욕스런 자는 참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재물이나 권세 또는 명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한때의 즐거운 감정이나 쾌락적 생활이 아니라, 감정적 차원도 넘어선 것으로서 참된 아의 인식과 개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심에 대하여 진아의 가치개발로 자기 인생이 족함을 모르는 몽매함이나 사회중생에 대하여 대아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주인공 없는 만족함은 허욕의 고생이나 허무한 탐락일 뿐입니다.  참되고 복된 인생과는 거리가 멉니다.

결국 참된 행복의 구성요소는 역시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로 가서 진실하고 광대한 자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적으나마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부인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체험하는 존재는 자기이므로, 참되고 착한 자기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참 자기 외에 누가 무엇이 행복을 누릴 것입니까?

아의 완성에의 길은 단순한 행복 이상의 차원입니다.  그 길은 행복뿐만 아니라 진실도 보장하는 숭고한 사명의 길입니다.


진실로 행복한 인간, 나?의 결론은?

결론적으로 스스로가 자기를 크고 참되게 규정짓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표를 진대아의 완성으로 세워서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들이쉬는 숨은 지혜로 채우고 내쉬는 숨은 자비로 채워서 생명의 호흡마다 진아발견 대아발현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참 인생이요 참 행복입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 수행으로는 기도 사색 명상의 삼문에 들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도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삼문 육도행을 꾸준히 닦아감으로써 종국의 필경에는 무명 업장으로 구성된 번뇌 생명으로서의 아, 곧 중생아가 아미타바(Amitabha: 無量光) 붓다와 같이 무한한 광명과 수명의 존재로서의 완성된 아, 곧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대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상 모든 취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무아미타불(歸命無量佛)

이 목숨 받들어 영원 무한한 절대정신 하나님으로 돌아가리다.

우리 모두 하나 되는 이런 세상에 어찌 죽음이 두려우랴?


아미타불은 천지광명 비로자나 하나님이다

여호와의 본뜻은 하나님이고, 알라의 본뜻도 하나님입니다.  오로지 일념의 기도만이 통하는 모두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이름 따위에  매이지 말고 고뇌도 두려움도 없이 이 나를 바라보는 참 나를 향하여 한마음으로 끝없이 불러보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을 찾아서]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빛나는 심정으로 행복을 느끼며]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 된 경지에서 무념무상으로]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 나는 지금 여기 시공간에서 아직 깨치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으로 험한 세상살이를 해나갑니다.  이 어려운 세계에서는 언제나 이 나약한 정신을 인도해주는 의지처 존재가 필요합니다. 

관음 보살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 안에 계시며 곁에서 지켜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동서양의 그분 성자들과 같은 참 삶의 길을 가기 위해 대비 구세 행을 세상에 베풀도록 합시다. 


내 모든 세계의 삶을 환한 보람으로 밝게 파동쳐 나갑시다!

성부(聖父) 아미타 하나님은 성자(聖子) 관음보살과 예수님을 통하여 성신(聖神)으로 하나 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아들 인간인 내가 동화되어 신성으로 가는 그 길은 지혜와 자비의 길이며, 천지광명이 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길입니다.

보살도와 구세주행은 이 나의 심신이 그 나의 세계에 베푸는 큰 선업(善業)입니다.  그렇게 복덕(福德)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행복하고 진실한 나의 세계가 영원무궁하게 빛나는 참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숨 쉴 때마다 이런 삶의 축복을 누리세요!

틀에 짜인 특정종교나 이름일 뿐인 구세주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참 나인 하나님이 나를 지옥으로 보내겠습니까?  빛나는 마음을 가지세요. 

천지신명 하나님은 무궁한 광명이시니 온 몸과 마음을 하나 된 환한 빛으로 가득 채우소서.  이 나를 지켜보시는 영원한 그 나를 찾아 참으로 즐거운 사람, 나로서 살아가는 편안한 숨을 쉬소서.

죽음을 넘어서서 끝없는 세상의 끝까지. 우주를 하나로 덮은 인드라의 그물에서 무한히 많은 모든 구슬이 하나 같이 영롱하게 빛날 그때까지. 나 스스로에게 또한 나의 세상에 빛을 비춥시다.

한 때 나의 소유물인 이 육신의 흩어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모든 세계의 삶을 환한 보람으로 밝게 파동쳐 나갑시다!


진실로써 행복한 인간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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