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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불자교수회4집(불교와 문화의 만남)

법향을 피우다_이기영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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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110회 작성일 22-08-1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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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


                                             이기영교수(동국대학교, 본회 고문)


보살의 길

보살이란 부처의 길에 들어선 인간이다. 그러나 보살과 인간은 결코 같은 생존양식을 갖는 자가 아니다. 인간은 육악도(六惡道)의 하나이지만, 보살은 이미 육악도의 울타리를 벗어난 생존양식을 갖기 때문에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모든 국민, 악인, 귀인, 선인, 노인, 젊은이, 남자, 여자, 상인, 농민, 기타 어떠한 부류의 사람이건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에서 환희행(歡喜行)을 닦는 보살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하고 땀 흘려 다른 많은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 주되,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보살이다. 중생은 중생이지만 차원이 달라진 중생, 즉 보살이 바로 그들이다. 더 온전해지면 불(佛)이 되는 것이다. 

은혜는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갚아야 하는 빚이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 원망하는 관계가 없어지도록 하려면 원한과 인과를 맺어서는 안된다. 자비만을 행하는 것이 보살이다. 흉악한 뜻을 품고, 원한을 쌓아 만대에 전하는 것은 제불(諸佛)의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받쳐 중생을 구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보살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구제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혼자 성불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나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보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을 다 못 갚았기 때문인 것이다. 

보살(菩薩)은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로써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을 통한 성불(成佛)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수행의 과정에 있는 분이다. 불교에서 보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살로서의 수행과정은 깨달음의 과정이자 동시에 부처님으로의 완성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불자들은 이미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고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를 하는 중생으로의 삶이 아니라, 무명(無明)의 세상에서 벗어나 무명을 진리의 빛으로 환히 비추고 이 세상의 수많은 중생들을 진리의 길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 되어야겠다. 

보살은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중생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중생의 아픔을 없애기 위해 원력(願力)을 세우고 생사(生死) 속에 들어와 용감하게 사는 사람이 보살이다.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보살이 아니다. 도인(道人)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리 열성이 강하더라도, 수도(修道)가 뛰어나더라도 보살이 아니다. 보살은 거룩하고 훌륭한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보살은 있다.

오히려 보살은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여 법을 구현해 가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며 명예와 지위를 누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철저하게 인간의 평등과 고(苦)로 부터의 해방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때문에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은 종교라는 형식을 짊어지거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보살은 참고 용서하며 법의 본질을 따라 세상의 칭찬이나 욕설이나 핍박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보살은 한없는 자비심에 가득찬 사람이다. 남의 잘못이 내 잘못처럼 아픈 사람이다. 그리고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역시 보살의 마음을 갖고 자비로운 마음, 너그러운 마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바라밀다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진정한 불자는 바로 보살이다. 이 보살만이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할 수 있다. 그는 무상(無上)의 대원(大願)을 발(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온 누리의 중생이 모두 다 깨달을 수 있도록, 작은 담장과 울타리를 헐며 살고 이 세상의 가난과 미망(迷妄)과 과오를 치유하는 이타행(利他行)의 대열의 선두에 선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불자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자각(自覺)의 중생’ 즉 보살의 배출이 요청된다. 아니 전 중생의 보살화가 시급하다. 중생들로 하여금 정법을 알게 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생사에 들어가는 대원(大願)을 발하게 하고 안으로는 선정의 수련과 지혜의 연마에 정진하며 밖으로는 법(法)과 재(財)와 무외(無畏)의 보시에 능하고 또 율의(律儀)와 중선(衆善)을 존중하고 마침내 이러한 지계로써 중생들을 요익)하며 또 나아가 인욕의 덕을 닦아 어려움을 참을 뿐더러 기꺼이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고 대락(大樂)을 누리며 태연해지는 보살들을 키우고 그 활동을 돕는 일, 이것처럼 오늘의 한국불교에 시급한 일은 따로 없지 않은가?

대승의 보살은 사람을 단순한 중생으로 보기에 앞서 이미 사람에게서 불의 법신과 보신, 화신을 본다. 보살은 사람이다. 그러나 보살은 ‘인간’[사람들 사이]에서 최선의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을 행하는 자이다. 그 업은 법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업이지, 인과(因果)의 속박을 수반하는 업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그 표본이요, 대세지보살이 그 표본이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 표본이요, 그밖에 수없이 많은 탁월한 표본이 있다.

불교적 휴머니즘은 바로 이러한 보살을 귀감으로 삼아 사는 새로운 인생의 길인 것이다. 우리가 휴머니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이 보살도를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보살의 길은 물론 조건 없는 평균화의 길은 아니다. 다 꼭 같은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획일적인 생활조건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색(色)· 수(受)· 상(想) · 행(行)· 식(識)이요, 그것을 움직이는 마음의 능력에 따라 그 생활의 양상을 달리하는 존재이다. 보살의 길은 양심 계발의 길이요, 양심 구현의 길이다. 보살의 길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각자의 마음속에서 이기주의적 독소를 제거하는 것을 밥 먹는 것보다도, 잠자는 것보다도 더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 땅을 이렇게 더럽힐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하여 인간존재는 그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가치없는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가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해 본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공연히 먹고 입고 잠자리를 차지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것이 옆에 함께 사는 다른 중생들에게 가지가지의 폐해만 입히는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 그의 생존이 함께 사는 다른 중생들과 이 온 누리 전체에 오늘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이익이 되는 일을 할 때 그것을 가치 있는 삶이라 하겠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란 존재는 불이나 보살이 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중략)  

따라서 이타행이 곧 자리행임을 표방하고 이타행의 완성을 추구해가는 보살만이 ‘깨달은 중생[Bodhisattva]’으로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다. 따라서 보살은 중생이되 중생이 아니다. 이 말은 보살은 중생 속에서 살되 중생의 마음가짐이 없이 산다는 것을 뜻이다. 즉 중생의 욕심 없이 사는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승만부인이나 유마거사는 보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분들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특별한 표시 없이 중생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보살들은 이미 타인을 위한 원력을 가지고 있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으며 중생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들 보살은 원으로 살아간다. 이 원은 중생이 욕심, 사리사욕과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과는 달리 중생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원이다.

대승보살도란 단적으로 이러한 유한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마찰과 대립 내지는 모순의 관계에서 원만한 융통자재의 관계로 바꾸는 길을 말한다. 이 모순의 관계를 ‘생사’라 한다면, 이 자재의 관계, 무애의 관계를 ‘열반’이라 보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정신이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보살은 끊임없이 모순대립의 관계를 원융무애의 관계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서원의 소유자이다. 이 원이 곧 그의 생의 주체적 추진력이다. 그는 결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며 피동적으로 자기의 본능과 주위 환경의 노예처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사는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된 철학이 없을 수가 없다. 승만부인은 재물의 수축(受蓄), 받고 모으는 일을 빈고중생의 성숙이라는 데 두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유마거사더러 말하게 한다면, 그것은 빈고중생(貧苦中生)의 아픔이 바로 내 아픔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보살행의 효과는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 및 그 운영 면에까지 파급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살의 이상(理想)이 단순히 대중에게만 적용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윤리를 그에 따라 확립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연구가 시급하다. 나는 아직도 참된 보살도에 입각한 사회과학 이론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시도된 일이 없음을 안다. 아마도 그러한 시도가 가능한 곳은 오직 대한민국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이 시대에 그것을 해 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전 세계의 미래를 옳게 인도하는 가장 참신한 원리가 될 것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보살의 길을 가야 한다. 출가스님네나, 재가신도나 다 보살이 되자. 그리하여 우리 삶의 터전에 불국토를 실현시키고야 말자. 새싹들이 자란다. 그 새싹들이 말라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 아름다운 숲을 이루게 하자.

우리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보살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승의 여러 가지 경전들은 다 제각기 강조하는 일정한 테마들이 있다. 시대와 사회 환경에 따라 특히 불교사상 자체의 심오한 재해석의 시도에 따라 나타난 제 경론의 특색을 발견하여 그 계통을 나눌 수가 있다. 확실히 반야중도(般若中道) 사상은 무착(無着)· 세친(世親)의 시대에 유식(唯識)의 이론으로 한층 더 정비된 이론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허무주의적 오해의 소지가 불식되었으며, 따라서 견고한 사회 윤리적 실천의 타당성이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현학적이요, 공리공론적 양상을 띠게 된 후대의 중관(中觀)학파나 유식(唯識)학파보다는 초기 유식의 사상이, 중생을 다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보는 대승불교의 독특한 휴머니즘으로써 현대의 빛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7세기 우리 신라의 원효대사가 받아들인 불교, 보살불교인 것이다.

보살은 어떤 강제나 종용에 의해서 보살의 길을 가는 자가 아니라, 그 마음에 본래 무르익은 서원(誓願)의 힘, 원력(願力)에 의해 자발적으로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존재이다. 보살은 항상 회향(廻向)하는 정신을 갖고 산다. 즉 자기 자신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을 더욱 완전케 하고, 또 동시에 주위의 다른 중생들이 역시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함에 있어서 삼매의 수련을 쌓아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회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과 중생들, 양쪽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 보살의 길을 밟지 않고서 성불을 했다거나, 열반에 도달했다거나, 해탈을 얻었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보살이 사회에서 남들과 관계를 맺고 일하는 과정이 원만해지는 길은 삼매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열린다고 믿고 있다. 모든 일은 정업(正業) 즉 바른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업은 정정진(正精進)이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가 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일 자체에 몰두하는 정신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곧 요익유정하는 길이다.” 이렇게 자부할 수 있는 근로자는 행복하지 않겠는가? 나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을 그 만큼 잘 만들고 있는가? 나는 사회에 해독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다워지는 것 이상으로 남들이 인간다워지는 것을 저해하면서까지 내 이익, 나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어떤 세계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가? 옛날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어찌 보살이 아프지 않을 수 있느냐 라고 했다. 나는 중생의 아픔을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가? 나는 보살로서 충분히 겸허한 무아(無我)의 자세, 희생의 자세, 온 누리, 온 겨레, 이 나라 전체의 행복을 나 자신의 행복으로 삼고 봉사하고 있는가? 

대승의 이상상(理想像)은 ‘보살(菩薩, bodhisattva)’이다. 이것은 구도자(求道者),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자라는 뜻이다. 원래 자타카(Jātaka, 本生譚)에서는 성도 이전의 석존(釋尊)을 그렇게 불렀다. 대승불교에서는 불(佛)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지가 바로 보살임을 강조하고, 이에 따라서 보살을 만인의 이상상으로 삼았다. 보살은 자기의 깨달음에 관심을 갖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희생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 pranidhāna)’과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는 ‘회향(回向, parināmana)’은 보살에게 절대로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지원하여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되었다. 서원은 처음에 깨달음을 구해 출발했을 때[發心, 發菩提心]부터 가지는 것이므로, 사람들 마음 속에 본래 깊이 숨어 있는 것이라 하여 이것을 본원(本願)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되는 길에는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나 이름이 없다. 다만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자각, 그 본질적 공성(空性)을 투철하게 자각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든 중생의 해탈을 목표로 향해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투철하게 뛰어넘어야 할 관문(關門)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살의 실천 

원효가 내세운 생활이상, 생의 궁극적 목표가 귀일심원하고 요익중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이 일생(一生)에 안되면 다시 태어나서라도 못 다한 목표를 다하고야 말겠다는 『유마경』의 교훈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었다.

그가 내세운 요익중생이란 이상은 그가 따로 새롭게 만들어 낸 문구가 아니라 대승경전 도처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대승불교의 이상인데 그것을 그가 유달리 다른 사람들 보다 관심 깊게 보고 중히 여기고 부각시킨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화중생이라고 하던 것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상구보리와 한 쌍을 이루던 표현을 바꾼 것이다. 상·하라는 차별의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원효가 대승경전 속에 이미 나와 있던 요익중생을 하화중생을 대신 하는 말로 채택하면서 상구보리라는 추상적이요 이미 너무나 낡았다 싶은 표현을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귀일심원으로 바꿨던 것이다. 이 후자에는 원효의 독창성이 없지 않다. 

이 요익중생과 귀일심원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삶의 이상이었다. 얼마만큼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풀 수 있었는가, 얼마만큼 일심의 근원으로 귀일해 갔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의 가치와 질을 높이는 기준이 되었다.

요익중생과 귀일심원은 인연소기(因緣所起)를 질적으로 값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일심원이 되지 않으면 인(因)이 원만히 갖춰지지를 않게 되고, 인이 잘 갖춰지지 않으면 연분이 잘 맺어지지를 않게 된다. 즉 요익중생이 원만하게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귀일심원의 요체는 제법실상의 자각에 있다. 제법의 진실된 상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제법이란 무엇인가? 인연소기로 전개되는 갖가지 사물과 현상들, 그 하나하나, 결코 고정적 불변의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찰나생 찰나멸의 모든 일 모든 것들이 제법이다. 그 모든 일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 즉 공한 것, 허깨비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 숱한 대상을 대하는 마음에 걸림이 없고 언제나 평등하고 여여한 심일경성, 일심동체의 경지가 된 상태를 말한다. 

그런 마음가짐의 경지를 원효는 인간 본래의 마음가짐으로의 환귀라고 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사람이 원효에 의하면 불이요 보살이다. 보살과 불에 수행계위상 차등을 두는 논리에 입각하면, 불이 인간이상의 최고위를 점한다는 원리가 원효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효는 그 최고의 위상을 그대로 둔 채 더 중요한 의의를 보살과 그 생활이상에 두고 있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 이론적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로 보살은 『유마경』의 가르침과 같이 중생이 단 한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함으로써 제도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보살은 그가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원하여 이 세상 삶을 살겠다고 태어난 그 본래의 원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성불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보살이 처음 그와 같은 원을 발하고 그 삶의 목표를 정했을 때, 즉 초발심했을 때 보살은 이미 부처와 같은 마음가짐을 지녔다는, 즉 정각을 얻은 것이라는 『화엄경』의 이치를 믿고 따르기 때문인 것이다. 

원효는 그것을 귀일심원· 요익중생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종래의 상구보리·하화중생의 근본정신을 이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마치 불교의 역사상에서 숱한 성문승, 독각승의 용어들이 대승경전에 계승되면서 변화를 보인 것과 같은, 의미의 심화확대, 세속화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반야가 마하반야바라밀다로 바뀌었듯이 말이다. 

귀일심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곧 ‘위로는 보리를 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중국의 선가들이 지적했듯이 만약 그 말이 보리가 어디 높은 하늘에라도 있어서 그곳을 쳐다보며 구하러 가는 행위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보리(菩提)’의 객관화, ‘구한다는 행위’의 형식화, 적어도 이것을 지양하는 태도가 ‘귀일심원’에는 표현되어 있다.

원효가 사용한 언어를 통해 그의 영원한 공동체의 철학에 대해서 들었다. 그것을 화쟁의 철학이라고도 하였고 새로운 실천명제라고도 하였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일심동체인 모든 중생들, 지금 비록 탐·진·치 때문에 잘못 사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더 이상 멸망의 구렁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이치를 일깨워 주고,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익히도록 줄 수 있는 모든 소중한 것을 주라.” 

이것이 귀일심원·요익중생의 이상이었다.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구하는 일이 누구를 미워하고, 편애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다 중생들 마음속에 있다.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알고, 하느님으로 알고, 합장하고 공경하라는 원효대사의 음성이 지금 하늘에서 진동한다.

실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디에서건 어둠을 밝히는 새벽의 햇빛처럼 이 지혜와 자비의 빛을 비쳐내라고 한다. 세계의 어느 한구석이 썩어 없어질지라도 이 햇빛이 다시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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