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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불자교수회4집(불교와 문화의 만남)

법향을 피우다_이기태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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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109회 작성일 22-08-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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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立文字의 심리언어학적 이해


이기태/(영남대, 초대, 2대, 3대 회장)


 불립문자는 깨달음에는 말과 글을 세울 수 없다는 뜻의 禪宗의 法門이다. 언어와 깨달음의 관계는 선종의 입장에서 논할 수도 있지만 언어학의 입장에서도 논할 수가 있다. 특히 심리언어학은 인간이 언어활동을 할 때 어떤 기억구조를 가지고 어떤 정신작용을 하는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불립문자를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불립문자 법문은 현대 심리언어학의 연구결과에 비추어 볼 때 ①眞인가 僞인가 그리고 ②선종에서의 일반적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는가를 논하여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석가여래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 진리의 법당에 찾아 들어갈 수 있도록 온갖 법문을 열어 보였으며 이것을 84000법문이라고 하며 그 설법을 글로 적은 것을 8만대장경이라고 하는데 이 대장경이 곧 敎門이다. 석가여래가 8만대장경의 내용을 45년간 설법하였으나 世尊一字不說(세존은 한 말씀도 설법한 일이 없다)이라고 주장하고 불립문자를 표방하고 禪修를 통한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것이 禪門이다.

 이 선문의 불립문자라는 법문의 구체적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초조 달마대사부터 6조 혜능대사까지와 그 후의 南宗禪의 여러 선사의 설법 내용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선사의 설법 중에서 불립문자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대표적인 부분을 간추려보기로 한다.

 초조 달마: “마음 지키는 한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있다.” “經藏의 반쪽지식이나 듣는 공부에 매달린 수행으로는 불도를 얻을 수 없다.”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허덕거리는 마음 없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2조 혜가: “나의 깨달은 경지는 스스로 깨달아 알지언정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이 곧 부처요 법이다. 마음을 보지 문자경론으로 찾아 들지 말라.”

 3조 승찬: 승찬은 信心銘이라는 훌륭한 저서를 남겼으며 지금도 선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이 신심명의 마지막 구절에 言語道斷(언어의 길이 끊어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5조 홍인: 홍인은 달마 이후 소중히 여겨온 능가경 외에도 금강경을 존중하였다. 이 금강경은 곳곳에 相을 여희고 또 문자에 住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홍인이 금강경을 선종의 所依經典으로 삼은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6조 혜능: “한 생각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萬法이 自心에 있음을 알라.” “사람들이 입으로만 반야를 외우고 自性般若(원래 자기가 갖추고 있는 반야지혜)를 알지 못하면 입으로만 밥을 말하여도 배부르지 않음과 같다.” “본성에 스스로 반야지혜가 있나니 그 지혜로서 觀照하기 때문에 문자를 빌리지 않느니라.”

 고령 신찬 선사: 항상 文字不拘, 無聲三昧, 無言之道를 강조하였으며 임종에 제자를 모아놓고 이 도를 실천해 보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불립문자의 내용은 ①깨달음의 내용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함이요 ②깨달음에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 있음이요 ③본성에 반야지혜가 있어 그 지혜로써 관조하기에 문자를 빌리지 아니함이요 ④듣고 배우는 학문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함이요 ⑤문자에 주하면 깨닫지 못함이요 ⑥그러니 무성삼매, 무언지도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불립문자 법문을 심리언어학적 차원에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심리언어학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말을 듣고(또는 글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는 어떠한 정신작용이 내재해 있는가. 이 글에 필요한 부분만 소개해보기로 한다.

 첫째 언어음의 단계. 사람의 발성기관이 발성을 하면 그것은 음향의 흐름을 이루어 聽者에게 전달된다. 청자의 뇌 속에는 그 음향의 音韻資質(여러 음운자질들이 모여서 하나의 音素가 되고 또 여러 음소가 모여서 하나의 낱말이 됨) 하나 하나를 감지하는 신경선유가 있어 이것을 감지하며 그 감지한 것에 또 다른 정보가 입력되어 낱말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낱말이라는 것은 일정한 음, 즉 음운형태에 불과하지 달리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영어나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애플”, “링고”라는 낱말을 말해주어도 그 사람은 사과의 개념을 머리에 떠올릴 수가 없다. “사과”라고 발음해야 둥글고 꼭지가 있고 새콤하고 달고 상점에 가서 사서 깎아먹고 등등 사과와 관련된 정보가 머리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니 낱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 속에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형성시켜주는 음운자극에 불과하다.

 둘째 낱말의 뜻 단계. 이렇게 언어음을 듣거나 글자를 보고 우리가 형성하는 개념(그 낱말의 뜻)은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과”라는 음운자극이 형성한 뜻은 사실 자체(1차자료)가 아니라 경험에서 자기에 맞도록 만들어낸 추상적인 개념(2차자료)인 것이다. 소위 분별심이 만들어 낸 것이다.

 셋째 統辭 단계. 이러한 낱말이 모여서 文을 이룬다. 文이 나타내는 뜻을 언어학에서는 기저구조라고 하고 심리학에서는 명제라고 칭한다. 다시 말하면 말이나 글은 기저구조(명제)를 전달한다. 그런데 이 명제를 얻음으로서 우리가 그 말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명제를 얻는 것은 말 이해의 제1단계일 뿐이다. 즉 명제를 이해한 다음에는 그 명제가 진인가 위인가, 그 명제와 다른 명제와의 관계 여하, 그 명제를 토대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등 여러 평가가 가하여지며 이 평가는 기억 총체인 장기기억이 행한다. 요는 말 이해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말이 전달한 내용(명제)을 이해하는 단계와 그 명제를 평가 판단하는 단계의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심리언아학의 연구결과에 비추어 불립문자 법문을 평가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불립문자 법문은 현대 심리언어학상으로도 진실이다. 심리언어학은 말이나 글로서는 제1단계의 명제 이해까지만 도달할 수 있고 마지막 이해는 기억총체가 비언어적으로 행한다고 결론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의 말 한 마디도 이러하거니와 견성의 깨달음에서는 당연히 불립문자인 것이다. 단 불립문자는 “깨달음에는 말과 글은 소용이 없다.”는 강한 해석을 할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서는 마지막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다.”(언어는 중간 도구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합당함을 심리언어학은 제시해주고 있다.

 둘째 심리언어학의 입장에서 볼 때 불립문자는 세 가지 차원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음운자극 즉 용어의 차원이다. 불립문자를 이 차원에서 적용하면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기존의 용어를 轉用해서 개념 형성을 유도하니 용어의 전용에 속지 말라.”는 해석이 나온다. 둘째는 용어(낱말)가 담고 있는 뜻의 차원이다. 불립문자를 이 차원에서 적용하면 “낱말의 뜻은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에 맞도록 만들어 낸 추상적인 것이지 사실 자체는 아니니 즉 분별심의 소산이니 자기가 만들어 낸 뜻에 속지말라.”는 해석이 나온다. 셋째는 말이나 글이 전달하는 명제 차원이다. 불립문자를 이 차원에서 적용하면 “문이 전달하는 명제는 기억총체의 평가를 받으며 마지막 이해는 기억총체가 비언어적으로 행하니 말과 글은 마지막 이해까지는 이를 수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심리언어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불립문자는 이 세 가지 차원마다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끝맺음에 있어 필자는 두 가지를 제언하고 싶어진다. 첫째는 불립문자라는 용어는 맥락과 차원에 따라 옳게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문자를 세울 수 없다는 마지막 결론만 지키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않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이와 같은 공부 태도는 문제가 있다. 필자의 주장은 불립문자의 현실적 해석은 말과 글은 깨달음까지에는 이를 수 없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지, 말과 글은 소용이 없으니 말로는 가르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립문자는 불립문자를 스스로 證得한 사람만의 것이라는 뜻이다.

 둘째는 세간의 학문과 출세간의 공부는 相補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결론이 다를 수 없다. 다르면 한 쪽이 미비인 것이다. 이 사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지식인이나 학자들 중에는 三藏에 담겨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무관심하면서 단지 이웃 노보살들의 신앙적 행위만 보고 불교는 미발달이니 심지어 미신이니까지 속단하고 편견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크게 무식한 소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불교의 經, 論을 진지하게 공부해본 이는 그러한 틀린 생각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불교의 경과 론에서 자기의 연구주제나 연구방향이나 비교평가의 자료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경론을 이해함으로서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가 하는 학문이나 과학 연구에 큰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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