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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10. 한국에서의 불교 전개 51. 조선시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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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9,311회 작성일 21-07-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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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의 거듭남 만큼 신비로운 것도 드물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연금술사처럼, 꽁꽁 얼어붙은 대지와 앙상한 가지에 스치는 바람을 건너 새 생명의 싹을 틔우는 계절의 기운은 신비로움의 압권일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문득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귀절이 생각난다. 여름은 여름의 더위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이 미워지고 싫어지지만, 겨울은 외부의 추위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필요로 하는 겨울이 차라리 더 지내기 편안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이웃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요즈음 사회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감방의 추운 겨울에 피어나는 조건 없는 따뜻한 인간애야말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우리 불자들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냉철히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불교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불교수용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불교는 정치와 유착된 국가의 비호 아래 귀족스러운 불교로 성장하였다면, 조선시대의 불교는 정치와 분리된 국가로부터 배척을 당하면서 승단자체의 수행에 의한 서민불교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보조 지눌에 의한 정혜결사운동은 승단자체의 수행으로 승화되고 이 운동이 조선시대로 연결되면서 조선의 성립에 의한 척불정책은 더욱더 수행승단으로 결속시켰던 것이다. 결속속에 잠재된 힘이 결국은 임진왜란때 국가의 운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며, 서산과 사명, 언기에 이르러 한국 선불교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가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은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종 6년 4월에 예조의 계청에 의하여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 하나로 하고,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 하나로 하여, 지금까지의 7종을 선종, 교종의 양종파로 이분하여 전국에 36개 절만을 남겼다. 또 선종 18사에 논 3700결과 총 승려수 1800명으로 각각 그 사찰과 사찰 소유의 논 및 승려수를 제한하였다.

 그때까지 시행해오던 승록사를 폐지하고 서울에 있는 홍천사를 선종의 도회소(총본사)로 하고, 흥덕사를 교종의 도회소(총본사)로 하여 나이가 많고 덕행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제반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불교는 세종때에 이르러 선교 양종으로 종단이 통폐합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수천개의 사찰이 242개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사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로부터 나라를 인수한 조선의 신흥귀족집단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서민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엄청난 재력이었다. 이 엄청난 재력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표면적으로 들어난 사실은 숭유억불의 허울좋은 이름이었고, 이면의 실제적인 사실은 사원경제를 재정리하면서, 그 엄청스러운 토지와 노비로 재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흐름 속에 불교의 자취는 희미해지고, 법맥도 이어지는둥 마는둥 하였던 것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서산 휴정에 의한 한국 선종의 기풍확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인종이 재위 8 개월 만에 승하하자 어린 명종이 등극하였다. 어린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이어졌으며, 이 때 보우의 등장으로 조선불교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보우에 의하여 승과가 부활되었고, 선교 양종이 다시 확립되었다. 이 때 부활 승과 1차에 장원한 이가 서산대사이다. 역사에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이지만 그래도 서산을 조선불교의 중심점이 되게 한 보우의 역할은 길이 빛날 것이다. 

 휴정(1520~1604)은 호가 청허이며, 속성이 최씨이다. 묘향산에 오래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그는 안주에서 태어나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세에 아버지마저 여의었는데, 군수 이사회의 도움으로 상경하여 공부하였다. 15세에 진사과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세풍을 개탄하여 동학교도 몇 사람과 남쪽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지리산에서 숭인장로를 만나 불법의 오의에 눈을 떠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는 영관에게서 법을 얻고

명산을 유행하였다. 스님은 도솔산 학묵을 찾아가 인가를 받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을 보림하였다. 그 후 전국을 유행하다가 어느 날 용성(지금의 남원)을 거쳐 성촌 마을을 지나다가 낮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였다. 서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머리는 희었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髮白心非白

고인들은 모두 말했네.                     古人曾漏예

이제 낮닭 울음소리에                      今聽一聲鷄

장부가 할 일을 능히 마쳤네.               丈夫能事畢


 33세에 당시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4세에 주지가 되고, 36세 봄에 전법사가 되었으며, 그 여름에 판교종사가 되고, 가을에 판선종사가 되어 줄곧 선교양종 판사라는 최고 승직에 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곧 판사직이 출가의 본의가 아닌 것을 깨닫고 38세 되는 겨울에 양종판사직에서 물러나 다시 운수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리하여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등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도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을 읊었다. 


나라의 수도인 서울은 개미집이며            萬國都城如蟻垤

세상의 모든 영웅호걸은 파리와 같네.        千家豪傑若醯雞

창에 비친 밝은 달을 청허가 배개하니       一窓明月淸虛沈

솔바람 소리마저 귀결에 머문다.             無限松風韻不齊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가장 완숙한 40대에 이르러 300년 조선불교의 길잡이가 된 <선가귀감>을 저술하게 된다. 스님은 선과 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과 아난이다. 말없음으로써 말없는데 이르는 것이 선이고, 말로써 말없는데 이르는 것이 교다.>

 선교가 둘이 아님을 밝히면서도 먼저 깨달음을 앞세우고 있다. 아울러 선적 수행과 교적 연구의 병행으로 원만한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염불이라 하지만 입으로 하면 송불(誦佛)이고 마음으로 할 때 비로소 염불이 된다>는 지적에서 당시 불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정토신앙까지도 승화,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선조25년에 왜란이 일어나 왕은 왕성을 버리고 피난 길에 올라 용만에 이르렀으나, 관군은 변변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쫓기기만 하였다. 이 때 의승장 영규가 청주성을 도로 뺏아 크게 이겼다는 쾌보가 전해졌다. 이에 선조는 감격하며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를 불러 국난을 타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73세의 노승 휴정은 국내의 모든 승려를 총동원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그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무려 5천에 이르렀다. 선조는 곧 휴정에게 8도도총섭의 직함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제자 유정이 거느린 관동지방의 800여 의승이 가담된 의승군은 명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러 평양성을 회복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선조는 환도하였고 환도 후 휴정은 노병을 이유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휴정의 제자 천여명 중에 뛰어난 자가 70에 달했다. 특히 유정(송운파), 언기(편양파), 태능(소요파), 일선(정관파)이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서산 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이후부터 한국 선종의 법맥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사명 유정(1544 - 1610)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7세에 조부로부터 유학을 배우고 13세 때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에게 출가하였다. 명종 16년(1561년)에 승과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선조 8년(1575년)에 봉은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에게 심인을 얻어 송운파를 열었다. 휴정이 묘향산에서 격문을 산중에 전하자 유정은 솔선하여 의승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유정은 휴정의 선맥을 이었으며 휴정을 뜻을 받드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강화사절로 일본으로 건너간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편양 언기(1581 - 1644)는 죽주 출생으로 현빈에게 출가하여 서산의 심인을 얻어 편양파를 열었다. 서산의 어린 제자로서 전쟁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며, 평양에 있을 때 평양의 거지들을 모아 교화하여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준 공덕은 불교의 대 사회활동으로 빛나는 업적이다. 평양 시내를 ‘이뭣고?’하며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이먹고’ 노장으로 알려졌다. 편양의 법맥이 가장 번성하였다. 

소요 태능(1562 - 1649)은 13세에 백양사 선수에게 출가하여 휴정에게 심인을 얻어 소요파를 열었다. 소요는 선시에 뛰어났다. 


소리없고 냄새없고 이름마저 없음이여       無聲無嗅又無名

가는 곳마다 분명치만 밝혀내긴 어렵다.      到處相從不可明

미생전의 이 소식 알고싶은가               欲識空王眞面目

기러기 가을 빛 끌고 강성을 지난다.         鴈포秋色過江城


정관 일선(1533 - 1608)은 연산 출신으로 15세에 출가하여 선운에게서 법화경을 배웠으며, 휴정으로부터 심인을 얻어 정관파를 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수 천년의 역사를 걸어온 불교 속의 모든 요소들도 결국은 다람쥐 체바퀴 돌 듯, 지은대로 받고, 또 연을 맺으며 새로운 틀을 만들면서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또 며칠만 있으면 석가탄신일을 맞게 된다. 

 불탄절을 맞아 불자들은 불자대로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 볼 것이며, 승단은 승단 대로 승단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붓다가 나투었듯이 맑고 투명한 삶의 모습을 나투소서. 

 하여 지상에서 가장 우뚝한 불탑을 세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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