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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10. 한국에서의 불교 전개 53. 21세기 불교의 전개와 실천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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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2,990회 작성일 21-07-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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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이른 천리향의 향기가 방안 가득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속에서도 봄의 기운은 함께 있는 것이다.

 계절은 스스로의 위치에 만족할 줄도 알며 성숙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로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하면 할 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으면 적을수록 붓다의 가르침인 무집착과 무소유 정신은 더욱 절실하게 이 세상과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진실일 것이다.

 종교는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구도자와 신도들의 집단이다. 종교는 초자연적이며 전세계적인 성격을 지닌 불멸의 이념으로 인간이 이 땅에 이룩한 최선의 제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잠시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최선의 땅이 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다. 최선의 땅을 약속하기 위해 많은 사회체제가 있었고, 풍부한 사상을 배경으로 한 종교가 있었다.

인간의 사유와 지식이 겨우 싹트기 시작했을 무렵의 원시시대에는 자연의 압박과 공포에 대하여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미약했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개척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어떤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매우 짙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상 속에 흔히 제사의 형식을 취하였다. 제사는 자기와 자기 부족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자연현상의 재화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또 자기와 자기 부족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어떤 힘(신)에 대한 예배와 찬양으로써 가장 장엄하고 정성이 가득찬 의식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원시종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한편 사회의 지배적 지위를 획득한 왕족은 도시의 경제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넓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나라의 지배권을 확대하였다. 안으로는 전제적인 행정으로 주민의 이익을 빼앗고, 밖으로는 인접한 작은 나라를 무력으로써 병합하여 갔다. 전제군주가 주민에게 가한 압제는 흉악하고 난폭하였으며, 국왕은 필요할 때마다 세금을 늘려 징수하였고, 농민은 강제노동으로 혹사당하였다.

 혈연중심의 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도시국가의 통폐합에 의한 거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하는 과도기적 혼란기와 고대국가의 완성으로 확립된 사회체제는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대한 사회조직 속에서 인간관계라든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에 대한 재조명은 역사적 상황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인간의 의식 개혁을 부르짖는 내적 혁명이 바로 고등종교의 탄생이다. 

 지금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종교의 정확한 의미도 되새기지 않고 관념적으로 종교를 정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짙다는 것이다.

 원시종교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어떠한 조직을 이루든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종교로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절대자에로의 지향은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복잡성에 의한 인간의 기계화와 인간능력의 한계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원시적 종교의 의미가 더욱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소극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이 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최선의 장소가 되도록 최선의 집단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기 추구를 하며 주위 화쟁을 하는 것이 종교의 적극적인 역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도자적 입장에서 끊임없이 자기 추구를 하며 주위화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승려나 목사라 할지라도 그러한 차원에서 삶을 영위하지 아니할 때는 종교의 허상 속에 갇혀 있는 역사의 잔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원시종교와 고등종교의 의미가 병행되어 사회 속에 구현되고 역사 위에 투영될 때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타종교를 이해하여야 하는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종교의 본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종교가 탄생하게 된 주위배경과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종교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만적이며, 절대성을 갖게 된다. 즉 미신적인 「종교숭배」의 형태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둘째, 종교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그 종교

가 자라기에 가장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문화권과 더불어 열매 맺는 사회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생명력과 설득력은 사회 속에서 역사와 더불어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지는 종교 특유의 모습이다. 즉 종교의 사회성이다.

셋째 종교의 진리는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그 종교가 어떤 틀을 갖고 있고,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진리는 초역사적인 진리로서 이 땅의 어느 곳에서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의미를 갖는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은 과거로 되돌려 놓을 수 없고 역사란 최초의 원시성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며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움은 더해가고 있다.

이 땅이 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회복을 부르짖으며 인간과 주위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는 최선의 곳이 되도록 끝없는 정열로 자기 성찰을 하며 주위화쟁을 함으로써 이 땅을 구할 사명을 종교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회와 역사 속에서 불교가 다시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버림받고 있는 이들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직과 체제에 대한 재정비가 시급한 과제라 생각한다. 


1. 교리에 대한 이해

 

먼저 교리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전개하기로 한다. 바른불교와 포교를 위하여 다시 말하면 불교를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불교의 무엇을 이해시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는 한나라의 운명을 바꾼 불교와 기독교의 대논쟁, 즉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1873년 8월 26일, 28일 스리랑카 파아나두라 마을에서 불교도와 기독교인 사이에 행해진 교리 논쟁이다. 이 논쟁은 아직도 스리랑카가 불교국으로 남아있게 해준 위대한 논쟁이며, 불교와 기독교가 교리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인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세력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기독교를 이 나라 전역에 걸쳐 전파하는 것이었으며, 이 시기가 스리랑카 불교의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함으로서 개종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영국인들의 지배 하에 있을 때는 수도인 콜롬보시에서 불교도는 자신이 불교도라는 걸 말 할 수 없었으며, 콜롬보 시내에서는 승려들이 탁발도 할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 역사적으로도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암흑시대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나난다(1823 - 1890) 스님은 목숨을 걸고 논쟁을 시도하였다. 1871년 6월9일과 10일 감풀라라는 지방의 한 학교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그 후 파아나두라에서 기독교인들과 공개 논쟁을 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개 논쟁이 있었음을 알게 된, 그 당시 대단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인 육군 대령 올코트(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불교신지협회를 조직하였다. 불교학교를 세우고, 석가 탄신일을 국가 공휴일로 제정하도록 영국 정부에 건의하는 등 스리랑카 불교운동의 선구자)와 메덤 브라받스키는 불교에 감명을 받아 불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스리랑카에 입국하여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 파아나두라 대논쟁

이 논쟁에 그 당시 1만명이 넘는 불교도들과 기독교들이 모인 가운데 행해졌으며, 구나난다 스님은 불교를 대표해서, 실바 목사님과 시리만나 전도사님은 기독교를 대표해서 논쟁이 행해졌다. 양측에서 논쟁을 승인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논쟁은 구술로 행해져야 한다. 

2. 논쟁은 양측에서 기록한 다음, 기록자는 자신의 서명을 한 뒤 대담자에게 그 기록문의 인정 서명을 받아야 한다. 

3. 대담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명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4. 한 사람의 대담 시간은 1시간으로 한다. 

5.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 그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필히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론해야 한다. 

6. 이 논쟁은 8월 26일, 28일에 행한다. 

7. 논쟁 시간은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행한다. 

8. 양측 어느 쪽도 논쟁 중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책임져야 한다. 

9.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을 기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10. 파아나두라 팟티야 마을의 돔바 가하왓타라는 곳에 이 논쟁을 위해서 특별히 일층 건물을 지을 것을 인정한다. 


2) 대논쟁의 내용 

위와 같은 10가지 조건을 서로가 지키도록 약속을 하고 논쟁은 이루어졌다. 논쟁에서 기독교인 대담자를 통하여 다루어진 불교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논쟁의 대담자인 실바 목사의 연설에서 다루어진 불교 내용은 

1) 불교에서는 사람들의 영혼이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 할 수 없음.

2) 인간은 오온(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한 이해 할 수 없음. 

3) 중생은 12처로 분류된다고 하면서, 또 다른 경전에서는 인간은 육체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함.  

4) 오온은 모두 괴로움이다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음.           

두 번째 논쟁의 대담자인 실바 목사의 대론에서 다루어진 불교 내용은

1) 연기설에 대하여 

세 번째 논쟁의 대담자인 시리만나 전도사의 대론에서 다루어진 불교 내용은

1) 보시에 대하여 

2) 깨달음에 대하여 

네 번째 논쟁의 대담자인 실바 목사의 대론에서 다루어진 불교 내용은

1) 부처님의 죽음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으시고, 천신들이 보호하는데 어찌 인간 춘다가 올린 음식을 먹고 병에 걸려 죽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내용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내용들은 역으로 우리들이 불교를 이해시키며 포교할 때 무엇을 이해시켜야 할지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해를 하자면 오온과 연기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들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온과 연기를 알아야 하며, 또한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도 상대방에게 오온과 연기를 이해시켜야 한다. 오온과 연기를 불교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다. 먼저 오온을 살펴보기로 하자. 


3) 오온에 대하여  

어떤 제자가 부처님에게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오온이 불교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더라도 오온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기는 오온의 거시적인 현상일 뿐, 구체적으로 오온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연기적 현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온은 인간(생명체)이 찾아낸 최고의 진리다. 진정으로 불교의 꽃은 오온이다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오온(五蘊)의 온은 쌓을 온(蘊)으로 ‘흩어진 것을 한 곳에 합쳐놓다’라는 뜻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요소’라는 뜻으로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구조는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색수상행식을 한 곳에 합쳐 쌓아 놓은 것이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으로 나눌 수 있고, 육신은 색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정신은 수, 상, 행, 식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색은 육신을 가리키며, 육신은 흙, 물, 불, 바람, 공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흙은 뼈, 손톱, 근육 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물은 침, 혈액, 오줌 등 육체 중에서 액체로 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유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불은 체온과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바람은 육체 중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는 움직이는 성질을 이루고 있다. 공은 이 네 가지 요소가 인연의 결합에 의하여 있기도 하고 인연의 소멸에 의하여 없기도 한 것을 의미한다. 

수는 모든 감수작용으로 생기는 감정을 말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눈(眼)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안식이 발생하여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느낀다. 귀(耳)를 통하여 들어오는 소리가 식(識)과 결합하여 이식이 발생하여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다. 코(鼻)를 통하여 들어오는 냄새가 식(識)과 결합하여 비식이 발생하여 향기로운 냄새와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혀(舌)를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설식이 발생하여 맛 좋음과 맛 없음을 느낀다. 몸(身)을 통하여 들어오는 촉감이 식과 결합하여 신식이 발생하여 쾌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뜻(意)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이 식(識)과 결합하여 의식이 발생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모든 감각작용을 통틀어 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는 감수작용이며, 포괄적으로 말하면 괴로운 감정, 즐거운 감정,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감정으로 나눌 수 있다. 

상(想)은 개념과 표상을 만드는 작용과 만들어진 표상을 말한다. 

눈(眼)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안식이 발생하여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귀(耳)를 통하여 들어오는 소리가 식(識)과 결합하여 이식이 발생하여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코(鼻)를 통하여 들어오는 냄새가 식(識)과 결합하여 비식이 발생하여 향기로운 냄새와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혀(舌)를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설식이 발생하여 맛 좋음과 맛 없음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몸(身)을 통하여 들어오는 촉감이 식과 결합하여 신식이 발생하여 쾌감과 불쾌감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뜻(意)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이 식(識)과 결합하여 의식이 발생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이와 같이 대상의 성질을 인식하고 그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인식하는 정신기능과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현상을 통틀어 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상은 표상작용이다. 

행(行)은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일반적인 사고작용이며, 또한 상의 작용과 식의 작용을 유지시키려는 결합작용을 한다. 구체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상의 작용을 지속시키며, 아울러 식의 작용을 귾임없이 활성화시킨다. 정신작용 중에서 표상작용과 분별작용 이외에는 모두 행의 작용에 속한다. 이 행이 원인이 되어 선악의 행위를 하게 되어 업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이 행은 결합 생성작용이다. 

식(識)은 일반적으로 분별능력이나 판단능력이나 인식능력을 말한다. 상의 작용에 의하여 형상화되어 저장되어 있는 것이 식의 작용에 의하여 분별되고 판단되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책을 통하여 참선이라는 내용을 읽었을 때 상의 작용에 의하여 다리는 결가부좌 하고 손은 단전에 가볍게 대고 있는 참선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저장되어 있다가 부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도 이렇게 죽을 수 밖에 없구나. 안되겠다. 참선을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결심을 하게 되는 분별과 판단의 결정작용을 식이라 하며, 식의 작용에 의하여 생각이 결정되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식은 분별작용이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라는 것이 오온설이다. 잡아함경에서는 “마치 여러 가지 재목을 한데 모아 수레라 이름하는 것처럼 이 오음이 모인 것을 중생이라 한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바퀴, 차체, 굴대 등 여러 요소가 모여 수레가 되는 것처럼 오음이 모여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관계 지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의식이 형성된다. 눈은 형상을 만남으로써, 귀는 소리를 만남으로써, 코는 냄새를 만남으로써, 혀는 미각을 만남으로써, 몸은 접촉을 만남으로써, 뜻은 생각을 만남으로써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수성유경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화합하여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눈과 형상이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만큼 매력적이고, 근원적인 종교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계신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을 누가 보았느냐? 그러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존재하느냐? 존재에 대한 인식의 출발에는 우리들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있고, 이들의 대상이 되는 색(물체)와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생각)이 있다. 하여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생각을 본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의지적인 활동에는 필연적인 반응이 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있다’ --->보이기 때문에 --->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는 내용으로 ---> 나의 존재를 인식 ---> 그러므로 ‘나는 보니까 있다’ ‘나는 들으니까 있다’ ---> 이것을 통하여 존재는 인식이다고 하셨고, 무엇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식이 존재’한다고 하신 것이다. 눈귀코혀몸으로는 인식할 수가 없다 그래서 6근의 의(뜻, 의지)을 설정하여 ‘우리에게는 의지(뜻)이 있다‘고 하신 인류가 발견한 최대최고의 인식론을 세우신 것이다.


2. 교육에 대한 이해 


어떤 기관이든 그 기관의 고유 특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승려들의 배출을 위하여 강원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강원제도와 더불어 대학교에 불교전공학과가 개설되어 불교를 종교적으로 학문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좀더 나아가 일반인들이 불교를 종교로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기존에 존재했던 초하루나 보름 법회를 통하여 불교와 접하였으며, 불자가 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제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는 중,고등학교 불교학생회를 거치면서 불교에 대한 기본교육들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와 80년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고등학교 불교학생회가 입시제도가 심각하게 부상함에 따라 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고등학교 불교학생회가 거의 활동을 정지하게 된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부터 시작된 불교교양대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은 자기 절의 신도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절에서 불교교양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를 대중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매우 긍정적인 포교활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종단의 입장에서도 또한 각 사찰의 입장에서도 불교교양대학을 포교사 양성과정으로 인식하고 교육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여기에 당연히 불자가 되기 위한 기본 교육과정은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두 과정사이의 근본정신과 제도에는 많은 괴리가 있을 것이다. 

둘째, 사찰 중심으로 불교교양대학이 운영되기 때문에 교육내용의 다양성이다. 그 절에 주석하고 계시는 스님에 따라 교육내용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지금은 불교교양대학이 20년 정도의 연륜을 가지면서 다른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재를 비교검토하면서 많이 부분들이 통일되어 지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조계종에서 전국의 불교교양대학을 대상으로 단일 교재를 채택하게하면서 전국의 교육내용이 통일되어 지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긍정적이다.

참고로 불교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사찰에서는 근본교리(연기론, 사성제, 오온), 반야심경, 대승불교 사상, 선불교, 불교문화, 비교종교, 불교복지등을 다루고 있으며, B 사찰에서는 불교예법, 부처님의 생애, 근본불교, 대승불교, 불교의 역사, 선불교, 불교복지등을 다루고 있으며, C 사찰에서는 불자의 예절, 사찰의 구조, 불상과 불화, 불교교리(연기, 중도, 삼법인, 사성제와 팔정도, 계율), 부처님의 생애, 불교신행(기도, 절, 참선)등을 다루고 있다. 

셋째, 법문하시는 스님의 법문 내용이 너무 단순하고 일률적이다. 누구누구 스님 법문하면 두세 번만 들으면 거의 같은 내용이다. 이 부분에서도 많은 보충과 노력이 있어야 주제에 맞게 다양하게 법문이 전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 년 법문의 내용을 정해놓고 계획대로 법문을 하게 되면 매번 다른 내용의 법문을 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상황이 현재 불교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불자를 만드는 불교입문 교육제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자와 비불자의 경계가 없는 것이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이 불자의 현주소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불자입문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며, 시행해야 한다. 여기에는 교육제도와 교육내용과 교육자가 우선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 이것은 종단이 시행해야할 최우선 과제이다. 여기서는 불자입문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불자입문 교육기관, 교육기간, 교육내용, 검증된 교육자등을 다루고자 한다.   


1) 불자입문 교육기관

교육기관은 종단 차원에서 중소 도시에 1, 2개 사찰정도, 광역시의 구에 1, 2개 사찰정도를 교육기관으로 지정하였으면 한다. 교육기관의 위치는 직장인 퇴근 후에 간단한 저녁을 먹고 참석하기 편리한 시내에 위치하여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 법당이 아니라 빔 프로젝터등을 이용한 화상교육도 가능한 교육할 수 있는 교육시설을 갖춘 강의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끝난 다음 불자가 되는 불자의식은 교육사찰을 포함하고 있는 본사에 모든 교육사찰들의 교육생이 모여 단체로 불자가 되는 수계식을 받도록 한다. 이러한 수계의식을 거친 자는 공식적으로 불자가 되는 것이다. 


2) 불자입문 교육기간 

교육기간은 3개월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한달 동안 계속해도 매일 참석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6개월 정도 기간을 늘리면 너무 해이해질 것이다. 긴장감도 있으면서 처음 교육을 받으려고 결심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3개월 정도가 적당한 기간이다. 그리고 교육은 주 3회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주 2일을 하면 7일 중 2일 이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어 소홀하게 생각할 것이며, 4일을 교육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 비중이 커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7일 중 3일이면 긴장하면서도 소화할 수 있는 적당한 날 수 이다. 하루 교육 시간은 2시간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90분 강의에 30분 정도 질문및 상담 시간을 갖는다면 좋다. 회수는 년 2회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교육기관의 특성에 따라 교육기간을 달리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예를 들면 대구시 수성구 A사찰은 1차 교육기간은 1월에서 3월, 2차 교육기간은 7월에서 9월로 하고, B사찰은 1차 교육기간은 4월에서 6월, 2차 교육기간은 10월에서 12월로 하고, C사찰은 1차 교육기간은 3월에서 5월, 2차 교육기간은 9월에서 11월로 하면 기간에 따라 교육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자입문 교육내용 

이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불자라면 이 교육과정을 통하여 불자로서의 공통성을 갖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교육을 통하여 같은 목표를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만의 불자들에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천만가지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를 종교로 가진 불자들은 “불성을 믿으며, 부처가 되는 것” 이와 같은 목표를 가져야 하며, 그렇게 되는 기본적인 공통 방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처님의 생애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생애를 통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을 가르쳐야 하며, 부처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 다음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된 다음 부처가 되는 방법과 부처가 되기 위해서 이해해야 하는 가르침 등을 제시해 놓았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이해해야 할 내용은 연기와 중도이며, 무아, 무상, 열반의 삼법인이며, 생멸하는 생명을 가진 구조물에 대한 인식구조가 육육법과 오온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이해해야 할 내용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최상의 방법론이 사성제이며, 부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행위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론이 8정도이며, 오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통한 공통적인 신앙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불교의식을 행해야 하며, 신앙을 지속적으로 고취시키고 불교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절이나 참선과 같은 신앙행위를 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교육내용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생애, 연기와 중도, 삼법인(무아, 무상, 열반), 육육법과 오온, 사성제, 팔정도와 오계, 불교예절과 의식, 신앙생활등 이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조금 부연해보자. 

(1) 불교를 신앙의로 가지게 되는 이유와 목적에 있어서 처음 시작하는 불자에게 “불성을 믿으며, 부처가 되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2)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팔상성도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면 된다.  

전생 이야기, 룸비니동산에서의 탄생, 생노병사를 통하여 무아와 무상을 체험, 출가를 결심하다, 설산에서의 6년 고행, 마침내 부처가 되다, 녹야원에서 법을 펴시다, 사라쌍수 나무아래서 열반에 드시다.  

(3)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속성인 삼법인에 대한 이해이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좀더 근원적으로는 존재하다가 없어지게 된다.(제행무상)

변하는 과정에 어릴 때의 나가 있고, 청년시절의 나가 있고, 지금의 나가 있다. 여기에서 무엇을 나라고 하겠는가? 어린 시절의 나가 나라고 하면 지금의 나는 없으며, 지금의 나가 나라고 하면 지금의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가? 변하고 있는 나 속에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제법무아)

이러한 현상들이 철저하게 인식이 되면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제까지 나가 있다. 나가 있슴으로 돈도 권력도 명예도 모두 내것 이다. 내것으로 해야한다. 하는 소유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존재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상의성)일 뿐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열반적정이다. (열반적정)

존재의 법칙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순간  존재실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정견이 생기며 이것으로부터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불교를 통하여 진리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이다. 

(4) 부처님이 가지신 최대의 고민은 이 우매한 중생들에게 어떻게 연기와 중도를 이해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하시면서 이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하였고, 이 상태를 인식하는 것을 연기라고 하였다. 

무명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과제를 제시(고성제)하고, 이것이 생긴 원인, 발생한 이유(집성제)를 찾아보라고 가르치셨다. 원인을 알게되면 실천방법이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실천함으로서 고가 멸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고민 고민 끝에 고가 발생한 원인을 알게 되고, 원인을 알게되면 그 원인을 소멸시킬 가장 적절한 실천방법(도성제)이 제시되며, 그 실천방법에 따라 행위하다보면 고가 소멸된 연기의 상태(멸성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불교가 2500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오늘날 까지 불교가 성하게 된 불교적 실천방법인 사성제- 고, 집, 멸도- 이다.  이 사성제는 2500년전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교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인식 속에 성성하게 살아있어야 할 불교의 실천적 진리이다. 이 사성제를 끊임없이 되풀이 함으로서 우리의 삶은 불교적이 되는 것이며, 신앙을 갖추게 되면 불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려운 것이 발생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불교적인 접근 방법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의심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엄청스럽게 어려운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은 쉽지만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에 해답을 얻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자로서의 삶의 성숙은 없는 것이다. 국자가 국맛을 모르듯이, 그냥 시계추처럼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지 불자가 아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수행속에서 인식속에서 사성제를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연습할 때 언젠가는 잘 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끊임없이 되풀이 하다보면 연기를 인식하게 되고, 연기를 인식하게되면 참된 성품을 보게되고(견성하게 되고), 부처가 된다. 

(5) 모든 존재는 생멸하며, 생명을 가진 구조물의 생멸에 대한 이해는 오온을 알아야 한다. 어떤 제자가 부처님에게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오온이 불교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더라도 오온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기는 오온의 거시적인 현상일 뿐, 구체적으로 오온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연기적 현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오온은 인간(생명체)이 찾아낸 최고의 진리다. 진정으로 불교의 꽃은 오온이다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6) 수행과 실천에서 바르게 보아라 바르게 생각하라 바르게 억념하라는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깊이 관찰하여 행위하고 생활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실천에 대한 생활 규범으로 부처님께서는 오계를 가르치고 있다. 나의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나의 삶은 청빈하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나의 삶은 바르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나의 삶은 깨끗하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나의 생각은 얼마나 철저하게 깨어있는가? 이다. 

(7) 이러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위를 매일 반복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방법으로 절이나 경전 독송, 참선과 같은 행위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동 수행체가 말썽없이 원만하게 유지되려면 공동 생활에 따른 예절이 필요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부처님의 삶을 따르겠다는 의식이 생겨나게 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위의 교육 과정들을 3개원 정도에 수료하면 불자로서의 삶은 어떻게 해야 되며, 다른 사람에게 불교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친구들과 절을 찾아갔다가 예불시간이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예불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검증된 교육자 

불자가 되는 이러한 기본 불교교육에 대한 불교 자체 내에서의 공통된 교재가 갖추어져야 하며, 나아가 이 내용에 대한 가르침도 가르치는 사람은 다르더라도 내용은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가르쳐져야 한다. 기본 교육자 과정을 이수하고 이수한 사람에 대하여 자격증을 수여하고 이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이 불자를 만드는 기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이 다니는 절에 따라, 만나는 스님에 따라 천차만별의 불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같은 불교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는 불교는 하늘과 땅차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공통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3. 제도에 대한 이해 


먼저 위대한 사상이 나타나면 그 사상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라도 제도화 되지 못하면 단명하게 된다. 불교가 인류와 우주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 하더라도 불교적 이상을 추구하며, 실천하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길을 걸어가게 할 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불교는 너무나 많고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을 흘러오면서 항상 법과 사람이 앞섰기 때문에 제도적인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실적으로도 어느 누구도 감히 승단의 제도적인 문제를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상항이 많이 다르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 상황인데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1) 종단조직   

먼저 종단조직은 승려와 재가신도들의 교육체제와 관련이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지금 한국 불교의 종단조직은 교구본사 중심체제이다. 16개의 교구본사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제안하고자 하는 종단조직은 권역별로 4-5개의 중앙본사 중심체제로의 전환이다. 교구본사 위의 상부조직으로 서울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의 권역별 중앙본사를 두었으면 한다. 중앙본사에서는 필수적으로 대학교육기관을 운영하여야 한다. 지금 종단의 승가대학(강원)과 선방은 현실적인 교육체계와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만약 승가대학을 졸업한 승려가 대학의 학위증을 인정받으려면 사회에서 인정하는 일반대학을 다시 입학하여 졸업하여야 하는 실정이다. 실제적으로 승가대학을 졸업한 많은 승려들이 대학원 과정으로 계속 연구를 하려고 하면 다시 일반 대학에 진학해서 학위증을 받아야만 대학원 진학할 수 있다. 즉 승가대학과 선방체제는 제도외의 체제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와 세계의 교육체제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단의 교육체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잘못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승가대학과 선방체제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정상적인 교육체제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 날 불교가 안고 있는 최대의 사회적 화두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불교의 백년대계는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중앙본사 체제를 도입하자는 이유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다. 중앙본사 정도 되면 대학을 운영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질 것이며, 전국에 5,6개 정도의 불교 대학은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즉 동국대학교와 같은 불교대학을 중앙본사 마다 하나씩 운영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는 승가대학을 대학에 편입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영남지역의 승가대학의 승려수가 300명이라면 동화대학교 자체 승가대학 학생수와 합하여 동화대학교 승가대학의 정원을 350명으로 하여 모집하자는 것이다. 지금 의과대학과 로스쿨은 6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불교대학도 의과대학과 같이 6년제로 운영되었으면 한다. 교양과목을 공부하는 예과 2년 동안은 본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본과 4년 동안은 예과를 마치면서 동화대학교나 해인사 승가대학, 불국사 승가대학, 범어사 승가대학 등 본인이 공부하자고 하는 승가대학에 지원하여 4년을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운영하면 승가대학의 교수들도 교육부에서 인준하는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일반 대학교에서 요구하는 교육조건과 경력은 갖추어야 할 것이며, 교육도 대학에서 충족시켜야 정도의 수준급이 될 것이다. 선방체제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바람직한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선불교의 극치를 잘 묘사하고 있지만 교육은 다수의 보편적인 이해와 연구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는 한 사람의 수행과 깨달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다수의 수행을 바탕으로 최대다수의 깨달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보조 지눌스님은 선종을 중심으로 자체 수행을 통한 승단의 개혁을 이룩함으로서 “정혜쌍수”라는 한반도에 토착화된 선불교의 방법론과 구도에 대한 더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면서 한반도에 있어서 새로운 불교의 장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 선방체제도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묻는 자도 없고 대답하는 자도 없는 지금과 같은 선방체제는 근본적으로 선에 대한 교육과 체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방체제도 두 개 그룹으로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승가대학과 같이 선불교대학에 편입되어 대학으로 운영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승가대학이나 선불교대학을 졸업한 승려들이 수행하는 전문 선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시도 때도 없이 할!이 터져 나와야 할 것이다.        

명심하라. 대학이 없는 한 불교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2) 승단조직

 승단조직에 대해서 승려의 조직은 수행승과 포교승과 사무승과 재가승으로 나누었으면 한다. 수행승은 지금의 승려와 같이 승려의 본질을 갖고 있는 출가자로 승단 조직의 최고 결정권을 갖는다. 포교승은 기독교의 목사와 같이 결혼이 가능한 승려계급으로 포교당에 거주하면서 불교의 교육으로 전도를 담당하는 승려계급이다. 사무승은 결혼이 가능하며 사찰의 재정과 행정을 담당하는 승려계급으로 대학의 일반학과 출신들이 주류들이다. 재가승은 5계를 수지한 불자들로 사찰의 경제적, 사회적 후원을 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행승은 포교승과 사무승의 업무를 할 수 있으며, 본인의 의지에 따라 포교승이나 사무승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포교승이나 사무승은 수행승이 될 수 없다. 수행승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을 정리하고 혼자여야 가능하다. 포교승과 사무승은 서로서로 업무를 바꾸어 할 수도 있으며, 본인의 의지에 따라 포교승에서 사무승으로, 사무승에서 포교승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재가승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사무승이나 포교승도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수행승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포교승이나 사무승이나 재가승은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는 수행승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불교 종단과 교육체제(그림 1)및 승단조직(그림 2)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설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3) 봉직자의 월급제도

 모든 승려들의 월급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출가 원년을 기준으로 기본급을 책정하고 수행 년 수에 따라 일정액씩 증가하는 주지의 직책을 갖고 있거나 승가대학에 다니거나 아무런 직책이 없는 승려이거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분배와 사용은 공산주의보다도 더 철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은 무소유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분배는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사용은 용도에 따라 필요한 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무승의 아들이 하바드대학에 다니면 등록금과 생활비는 사무승의 월급에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공금에서 지급되어야 한다. 만약 사무승의 아들이 같은 지역에 있는 다른 대학에 다닌다면 그에 상당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불해주면 되는 것이다. 


4. 의식과 경전에 대한 이해 


1) 의식에 대한 이해와 한글화 

종교가 종교이게끔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가 의식이다. 특히 불교와 같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종교로 승화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예불의식, 즉 부처님께 올리는 예이다. 예불은 진정 위대한 스승을 향하여 몸과 마음을 그냥 던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대의 예는 우슬착지 합장공경이었다.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예의 전부였다. 45년 동안 유행을 하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바른 삶으로 깨달음으로 인도하면서 80세를 일기로 구시나가라에 있는 사라쌍수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게 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난 다음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결집을 시행하였으며,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추모하며 오랫동안 기리기 위하여 탑을 조성하고,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고, 부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여러 가지 조형물과 건축물들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 붓다의 위대한 삶에 대한 표시이며, 그리움이었다. 차츰 세월이 흘러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제자들이 모두 열반에 들고, 부처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제자들에게서부터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부처님은 신격화되기에 이러른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부처님을 그리며, 부처님의 삶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한 제자들 사이에서 부처님께 바치는 위없는 공경함을 표시하는 예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불의 기원이다. 대웅전에 모셔놓은 부처님의 형상을 향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는 것이다. 이 목숨 거두어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진리의 바다에 이러도록 살겠습니다. 이 목숨 거두어 부처님께서 깨치신 그 가르침을 따라 진리의 바다에 이러도록 살겠습니다. 이 목숨 거두어 부처님처럼 수행하여 사바세계에 연꽃을 피우면서 그렇게 살겠습니다. 엄밀하게 부처님에 대한 예는 이것이 전부이다. 부처님에 대한 예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행의 한 방법으로 내용이 더해지고 그러면서 예술적 승화와 더불어 의식이 복잡하게 되어가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이르러 지금 우리들이 올리는 예불의식에까지 다듬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예배하는 예를 올리고, 낮에는 부처님께서 하루에 한 끼 드신 11시에 시간을 맞추어 공양의식을 올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예불문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던 의식이 더욱 장엄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먼저 들어가는 의식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올바른 마음으로, 지혜로운 마음으로, 무아를 인식한 걸림없는 마음으로 이 우주에 가득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오며, 본론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오며,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오며,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님께 귀의하오며,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더불어 수행한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귀의하오며, 부처님의 법을 이어온 조사님과 종사님께 귀의하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수행하는 스님들께 귀의하오니, 이 예를 올리는 공덕으로 예를 올리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 세계에 들게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예를 마친다. 지극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침에 일어나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어찌 허튼 삶을 살수 있겠는가. 한번 상상해보라. 어둠이 아직 덜 밀려간 어슴푸레한 새벽에 부처님을 모셔 놓은 고요한 법당에서 무릎을 꿇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올리는 예는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에 대한 맹세이며, 서원이기도 한 것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생명을 깨우는 종소리와 목탁소리에 맞추어 엄숙한 찬탄과 맹세가 울대를 통하여 흘러나온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분위기는 엄숙한데 예를 올리면서 읊어대는 말소리가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면 예를 올리고 있는 자신과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공감할 수 없다면 주위의 뭇 생명들과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의식이나 예를 통한 찬탄과 경배가 공감을 통하여 자신과 하나가 될 때 심금을 울리고 주위의 뭇 생명들도 동화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지역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며, 그 시대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불교에서 역사는 신을 믿는 종교에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적인 이해를 배제하고 나면 불교는 혼돈 그 자체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 2,500년의 불교가 혼재해 있어서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명쾌한 정답이 없는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를 표현하고 있는 언어마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되어있다면 더욱더 불교에 대한 이해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인식하고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임으로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부터 새 출발이 가능한 것이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세부분, 즉 의식과 교리와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일정하게 주기적으로 행하는 의식을 통하여, 교리의 이해를 통하여 신앙이 성숙되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먼저 예불, 의식 어떻게 이해해야하며,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예불의식은 우리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예불의식의 한글화는 근대화 물결이 시작될 때 1900년경에부터 1950년경에 이루어져야 했던 작업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다. 지금의 10대, 20대는 한문을 모르는 세대이다. 한글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러한 상태로 10년이 간다면 불교의 입지는 더욱 축소되어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최대의 존폐 위기를 맞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한글화 하되 한문으로 된 예불의식의 운율과 리듬이 있듯이 한글로 된 예불의식에도 운율과 리듬이 있어야 한다. 1500년 동안 행해오던 의식이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지를 갖고 바꾸어야 생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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