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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교리의 구조및 체계 12. 불교의 실천관,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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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32,644회 작성일 21-07-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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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를 보면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멸, 정정진, 정념, 정정 여덟 개다.  이 팔정도는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 

사성제는 불교의 사고방식이며, 교육방법이다.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사성제의 가장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여덟 개의 덕목인 팔정도이다.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삶이 팔정도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팔정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정견이다. 정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는 정견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정견이라는 것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생기는 견해이다. 정견의 의미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것을 바탕으로 사성제와 연기법의 도리를 바로 이해하며 선악을 구별하고 모든 것이 인연따라 나타나는 법을 보는 것이고, 정법을 지키는 것이며 정견을 가지는 것이다. 진리와 진실을 바탕으로 한 보편타당하고 편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연기를 이해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함께 일어나는 그 생각이 정견인 것이다. 불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견이며, 평생 사는 동안 정견이 생기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정견이란 우리가 끊임없이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연기를 터득한 데서 나오는 소리가 바로 정견이다. 마음을 깨친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바른 생각, 바른 견해가 다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사”인데 정견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정사인 바르게 생각하다. 무엇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면 “번뇌, 망상과 삼독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관이나 편견에 치우지지 않고 진심과 원한이 없는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정사이다. 이 정사가 되면 삶 자체가 바르게 연결 될 수가 있듯이 정사가 되면 그 다음은 자연히 이루어지게 된다. 

그 다음 “정어” 바르게 말하면 “정업” 바르게 행위 하는 것이 똑같이 이루어지게 된다. 정어란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바른말,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욕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말 이간질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다” 이다. 

이 정업이 되고 나면 그 다음 행위가 지속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바른 행위의 연속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정업이 되면 정명인 바른 삶이 된다.  정명의 뜻을 보면 “십악업을 멀리하며 또한 남에게 이익이 되는 바른일로 직업을 삼아 바른생활을 영위”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진하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30분씩 공부하는것이 정진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하루 1시간 참선을 하겠다 하루에 절을 500배 하겠다. 이렇게 하고서 어떤 때에는 오전 10시에 했다가 어떤 때는 오후 8시에 했다가, 새벽에 했다가 시간을 멋대로 바꾸어가면서 하는 것은 정진이 아니다. 간단하고 쉬운 것이지만 평생을 살아도 하기 어려운 것이 정진이다. 부처님의 모든 법은 인연법이다. 견성성불 하는 인연만 지어 놓으면 그 인연을 짓는 힘이 정진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

백일만 제대로 할 것 같으면 습이 바뀌고 따라서 업을 바꾸게 된다. 백일만 참선할 수 있으면 평생을 할 수 있으며, 습니다. 평생하다 보면 세세생생 할 수 있게 된다. 정진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정진을 보면 “이미 생긴 악을 제거하며 수 억겁 동안 살아오면서 내게 생겨있는 나쁜 마음 탐진치를 제거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내가 정진을 하여 내속의 악한 세포가 자라날 수 없으며 탐진치가 생겨날 수가 없고, 이미 일어난 선한 생각은 더욱 확대해 키워 나가도록 하며 나한테 선한 업들이 정진을 하니까 점점 커지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한 생각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한테 있는 선한 업들이 정진을 하면 선항 업들이 나타나고 자라나서 온통 결국에 부처가 된다. 

정진하는 내용이 그 다음에 오는 정념과 정정이다. 바르게 념하고 바르게 인정하는 것이다. 즉 위빠사나와 사마타이다. 

정념하는 것은 위빠사나이고 정정하는 것은 사마타이다. 

위빠사나는 “관” 관조 하는 것 관찰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바른 지혜를 일으켜서 일체 대상의 실상을 그대로 관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서 일체의 외부대상이나 내부의 산란한 마음 상념에 동하지 않고 특정한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며, 한 생각을 집중시켜서 아예 그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마타이다. 

예를 들어 친구와 부딪치면서 성내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왜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원인을 찾고 관찰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관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성제를 제대로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위빠사나이다. 

결국 불교의 수행은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두개의 기둥으로써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기둥에 하나로는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념은 위빠사나의 관이고 정정은 사마타의 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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