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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2. 불교교리의 구조및 체계 8. 불교의 진리관, 삼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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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2,210회 작성일 21-07-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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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속성은 무상과 무아이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로 체계화 되면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3가지 진리가 된다.

제행무상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사물의 모습

은 끊임없이 생기고 없어지는 변화하는 실체로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소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로 이루어진 모양이 있는 것은 영원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변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형상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무릇 모양있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것은 고통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 고통인 것, 변화하는 모양을 보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

은 내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것을 본질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파세나디왕은 나랏일로 성 밖에 나가 있었다. 그때 왕의 어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나이로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불행히도 왕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런데 지혜로운 신하 불사밀은 효성스런 왕이 이 불행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염려한 끝에 방편을 써서라도 왕의 슬픔을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백마리의 코끼리와 말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많은 보물들과 기녀들을 실은 뒤 만장을 앞세워 풍악을 울리면서 상여를 둘러싸게 하고 성 밖으로 나갔다. 왕의 일행이 돌아오는 도중에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마침 불사밀의 계획대로 돌아오는 왕과 마주쳤다. 호화로운 상여를 본 왕은 마중나온 불사밀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떤 사람의 장례행렬인가?”

성 안에 사는 어느 부자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저 코끼리와 말과 수레는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그것들을 염라대왕에게 갖다 바치고 죽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한답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이란 멈추게 할 수도 없지만 대신할 수도 없는 것, 한번 악어의 입에 들어가면 구해낼 수 없듯이 일단 염라대왕의 손아귀에 들면 죽음은 면할 수 없다.”

여기 오백명의 기녀들로 죽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녀도 보물도 다 쓸데없는 것이다.”

그러면 바라문의 주술과 덕이 높은 사문의 설법으로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생이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겠는가. 부처님께서도 한 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거늘.”

그러자 불사밀은 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대왕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 법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태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쉬며 한 동안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였다.

착하다 불사밀. 그대는 미묘한 방편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구나. 그대는 참으로 좋은 방편을 알고 있구나.”

파세나디왕은 성으로 들어가 갖가지의 향과 꽃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공양하고 나서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수레를 몰았다. 전에 없이 한낮에 찾아온 왕을 보고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대낮에 웬일이시오?”

부처님,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백살이 가까운 어머님은 매우 노쇠하셨지만 저는 한결 같이 공경해 왔습니다. 만약 왕의 자리로 어머님의 죽음과 바꿀 수 있다면 저는 왕위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말과 수레와 보물과 이 나라까지도 물려주겠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살아있는 모든 목숨은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하는 것,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소. 마치 질그릇은 그대로 구운 것이건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건 언젠가는 부숴지고 마는 것과 같소.

우리의 몸에 4가지 두려움이 닥치면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오. 4가지란 늙음과 질병, 죽음, 무상이오.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이오. 마치 큰산이 무너져 사방에서 덮쳐 오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아예 믿을 것이 못되므로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면 그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천상에 태어나지만, 법아닌 것으로 다스리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참으로 고맙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니 깊은 슬픔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저는 나랏일이 많아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갔다.

무상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며, 이 변화의 시작점이 생이며 변화의 종착점이 멸인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라고 하셨다. 결국 모든 것은 고이므로 일체개고인 것이다.

제법무아라는 것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있다는 것의 부정이며, 나라는 것의 부정

이며, 영원히 존속되는 나의 본체에 대한 부정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해 생겨 존재하다가 없어진다는 진실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

여기에 연관된 재미있는 대화가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케마라는 비구가 병이 들어 코상비의

교외에 있는 고시다정사에 누워 있었다. 다른 비구들이 문병을 와서 주고 받은 대화속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한 비구가 물었다.

'좀 어떤가?'

'어찌나 아프고 괴로운지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말이 오고 간 끝에 한 비구가 고통을 받고 있는 케마를 위로할려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 붓다께서는 <나가 없다>는 가르침을 설하시지 않았는가! 나가 없는데 무엇이 아프겠는

?'

그러자 케마의 반응은 천만 뜻밖이었다.

'아니, 나는 <>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문제가 되어 장로들까지 병상에 나타나 토론이 벌어졌다. 케마가 그들을 설득한 요

지는 꽃을 비유한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었다.

'벗들이여, 내가 <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육체가 <>라는 뜻은 아니다. 또 이 감각작용이나 의식이 <>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떠나서 따로 <>가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벗들이여, 그것은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꽃송이에 향기가 있다고 한

다면 이 말은 옳은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이 줄기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도 옳다

고 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이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향기는 꽃에서 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나 감각이나 의식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떠나서 따로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들의 통일체에 <나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케마의 말에서 우리는 <나가 없다>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것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부처님은 우

리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행위를 가르치고 있다.

'비구들이여, 참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무명이 먼저 있기 때문에 좋지 못한 생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겸손해 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참나를 볼 수 있는 밝은 지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며, 겸손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밝음을 따르는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모습들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정견이 생긴다. 정견이 있으면 바른 생각이 생기고, 바른 생각이 있으면 바른 말이 생기고, 바른 말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생기고, 바른 행위가 있으면 바른 생활이 생기고, 바른 생활이 있으면 바른 정진이 생기고, 바른 정진이 있으면 깨닫기 위하여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는 정념이 생기고, 정념이 있으면 모든 집착과 분별심을 여의고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정정이 생긴다.'

이와 같은 바른 생각과 행위의 반복과 수행에 의해서 모든 탐욕이 없어지고, 노여움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진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있고 없음이 생기며 이것으로부터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에서는 항상 변하지 않아 생기는 것도 없으며, 없어지는 것도 없음으로 나고 죽음이

없다. 또한 밝고 고요하여 일체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깨끗한 본래의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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