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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3. 부처님의 교화와 승단 19. 수행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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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6,767회 작성일 21-07-0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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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주위를 잊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손에 연필을 쥐고 있으면서 연필을 찾아 책상과 서랍속 등을 정신없이 뒤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밤잠도 잊어버리고 새벽을 맞는 경우도 있다.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 뒷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자. 뉴턴은 이십대의 젊은 나이로 런던왕립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왜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는가? 하는 의문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항상 그 의문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던 어느 해 런던에 전염병이 돌아서 고향인 울즈돕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내게 된다. 이 시기가 뉴턴에서 있어서는 황금기로써 강의라든가, 학교행정 등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 “모든 물체는 왜 아래로 떨어질까?”에 전념하게 된다.

 어느 날 오후, 점심을 먹고 나무 그늘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우연히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영감이 스친 것이다. 

 불교로 말하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그 순간 확철대오 한 것이다.

 그 후 런던으로 돌아와 사십년, 평생을 만유인력을 수식화하는데 보내게 된다. 

 진실을 추구하면서 더 많은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노력한 인간의 이상은 종교든, 학문이든, 어떤 분야든 간에 정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붓다와 붓다의 제자들이 어떤 이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고 수행하고 생활하였는지는 오늘 날 승단의 존재의미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영원을 추구하며, 진실한 삶을 가꾸는 구도자의 길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원시불교 교단에서 붓다와 더불어 제자들의 하루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있었나 하는 것을 오늘날 사찰의 양상을 근거로 해서는 추측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는 장례식이나 제사의 의식이 거행되지 않았으며 독경이나 불공이 올려지는 일도 없었다. 즉 그들의 생활은 사제자로서의 하루가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하루였다. 붓다가 설하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생활 속에 구현해 가는 일,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위의를 갖추고 거리나 마을로 찾아가서 탁발을 하는 것이다. 탁발이란 매우 재미있는 말로 ‘탁托’이란 손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발鉢’은 손에 들고 음식을 받는다는 것이므로 탁발이란 걸식이요 밥을 비는 일이다. “만약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발우에 음식을 넣어 주시요”하는 것이 걸식하는 비구들의 심정이다. 한 번은 붓다께서 어떤 마을로 탁발을 하러갔는데 마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축제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붓다에게 공양하지 않았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라(악마)가 모습을 나타내어 붓다에게 말을 걸었다.

“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마을로 돌아가라. 이번에는 공양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해 주겠다”

그러나 붓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음식은 비록 얻지 못한다해도 

보라, 우리들은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 모양

기쁨을 음식 삼아 살아가리라.


여기서 악마의 속삭임은 붓다 내부에서 일어난 식욕의 유혹으로써 지금 다시 마을로 간다면 축제가 끝나 공양을 얻을 수도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붓다의 머리를 스쳤을 것이다. 하지만 탁발이란 그들에게 있어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의연히 지켜야 할 법식이 있고 더 소중한 마음씨가 있는 것이다. 법에 의해 얻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법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을 음식 삼아 살아가리라.”하며 미소 짓고 돌아서는 붓다의 발걸음을 깊이 새겨 볼 일이다. 그런 그들의 생활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포살과 자자”라고 불리는 두 행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중이여, 들어라. 오늘은 15일 포살 날이니 만약 대중들에게 지장이 없다면 교단은 포살을 베풀고, 계본을 외우리라.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고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함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할지어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나서서 드러내라. 또 죄 없는 이는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리라.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니, 이같이 비구는 대중 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 받을 것이며 세 번 질문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를 얻으리라. 고의적인 망어는 도에 장애가 되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라.” 

수행자로서 무리를 이루어 수행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무소유”이다. 포살과 자자는 바로 참회와 기도로써 자기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수행의 하루 일과가 끝나 가는 해질녘 붓다를 비롯한 여러 비구들이 둘러 앉아 다른 비구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며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서원과 결심을 말하는 것이다. 조용히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진지한 삶을 위하여 토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겸허한 마음과 좋은 것이 모아지듯, 걸어가는 길이 같은 방향인 무리들이 모여 진실을 나누는 그 우정이 그들 생활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도 어느 날 아난이 “붓다여, 도에 이르는데 있어서 우정이 절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을 때 붓다께서는 “아난아. 아니다. 우정은 도의 전부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인연의 매듭으로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럽다 하더라도 변하지도 않아야 하며, 퇴색되어서도 안 되는 것은 바로 인류의 “이상”일 것이다. 이상은 종교, 학문, 예술 등 세상의 모든 분야에 존재하고 있으며 역사 속에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작업들은 끊임없는 정열과 성찰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기존 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에서 이루어진다. 수행자란 먹물 옷을 입고 있다고 하여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도와 수행으로 일관되게 하며,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더 큰 복된 땅을 가꾸려는 그런 소박한 모든 삶에게 수행자라는 지상에서 가장 지고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다.

자! 우리 모두 삶을 옭아매고 있는 군더기를 털어 버리고 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 

더 넓은 마음의 문으로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수행자의 길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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