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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7. 마침내 티벳을 넘어 37. 마침내 티벳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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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8,279회 작성일 21-07-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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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시카코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 대회에서 흰두교 성인의 연두 연설 중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A라는 개구리는 어떤 우물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거기에 오랫 동안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살던 다른 개구리 B가 육지에 기어올라 왔다가 그 우물에 빠졌다.

 A:[너는 어디로부터 왔지?]

 B:[바다에서.]

 A:[바다는 얼마나 크냐? 이 우물과 같으냐?]

 B:[이런 좁은 우물과 어떻게 비교한단 말이냐.]

 A:[이 우물보다 더 큰 곳이 있을 턱이 없다. 이 거짓말쟁이 녀석. 어서 썩 나가지 못해!]

 오늘 우리 불교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우물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우물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불교는 선불교대로 민간신앙과 결부된 기복불교는 기복불교대로 현실참여에 민감한 민중불교는 민중불교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터널을 뚫어 새 불교를 열어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불교는 마침내 인도를 벗어나 이민족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정점을 이룬 시기는 700년경으로 이 무렵 거의 동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인도지나, 라오스, 베트남, 자바, 티베트, 서역, 중국, 한국, 일본 등 이들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불교를 알게 되었으며 불교에 대한 전파와 구법의 정열에 의해 이 지역의 문화를 연결, 접촉, 흡수, 토착화되는 “동아문화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구법승으로 먼저 현장(600-654)를 들 수 있으며 그가 장안을 떠난 것은 정관 3년, 629년의 일이었다. 서역의 북쪽 길을 지나 중앙아시아,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이르러 나란다 사원에서 시라바드에게 배우고 인도 각지의 불교 유적들을 찾은 다음 파미르를 넘어 서역 남쪽 길을 거쳐 정관 19년 645년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그의 저서로는 “대당서역기”가 있다. 또 의정(635-713)은 671년에 광주에서 배로 떠나 바다를 건너 인도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수마트라의 슈리비쟈에 들러 갠지스강가 타무루쿠에 상륙하여 나란다 사원에서 불교를 연구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바다를 거쳐 수마트라에 잠시 머문 다음 695년에 낙양에 도착하였으며 그의 저서 “남해기귀내법전”이 전하고 있다. 이런 구법 승려들의 발자취를 가만히 눈을 감고 한 번 회상해 보라. 교통수단이 없어 거의 걸어다녔던 1300년 전의 일이다. 행동반경이 넓은 국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동아시아 전지역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며 이 문화권의 중심지는 7세기초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당의 수도 장안이었다. 또한 꿈과 이상에 도전하는 우리 인간들의 끊임없는 정열에 의한 것으로 종교적 열정의 광범한 앙양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종교는 교육, 예술, 정치, 문화 등 생활자체로써 생활의 전부였던 것이다. 지역별로 토착화된 종교적 신앙생활에 불교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서쪽으로는 스리랑카에서부터 동으로는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역을 연결시키며 고대국가 확립기에 있어서 정치윤리 신앙으로 불교의 물결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불교 전래에 대한 전설은 매우 다양하여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 수가 없지만 역사적인 상황으로 추측해보면 전설은 모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전한 무제시대(B.C. 140 - A.D. 87)에 벌써 중국은 서역의 여러 민족과 교섭을 가졌다. 군사적인 행동이 앞섰지만 동시에 문물의 교역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 서역의 유력한 민족은 굽타나 코탄을 중심으로 한 아리아계였다. 아리아계는 일찍부터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특히 불교문화에 친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과 교통이 열리게 되면서 중국으로 불교 유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수나라 비장방이 지은 “역대삼보기”에 진 시황제 4년(B.C. 243년)에 사문 석리방등 18명의 사문이 불경을 가져왔으나 시황제가 이것을 금지시켜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전한 애제 때 경려가 대월지국의 사자인 이존으로부터 불교경전을 구술로 전해 받았다(B.C. 2 세기)는 기록이 있다. 

또 후한의 명제가 꿈에 금인을 만난 일로 해서 사자를 대월지국에 보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왔으며 가섭마등, 축법란 두 승려를 데리고 와서(A.D. 67년) 낙양에 백마사를 짓고 “사십이장경”을 번역하게 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후한 명제의 동생인 초왕영이 낙양의 동쪽 팽성에서 불교를 믿었다고 되어 있다(A.D. 65년경). 

이러한 전설들을 종합해보면 1세기 중엽 무렵에 왕족등 상류사회 뿐만 아니라 민간에 까지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서역과 교역에 종사한 관리나 사자들을 통하여 상류사회 쪽으로 불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며, 상인들을 통하여 민간 쪽으로 불교가 신앙으로 서서히 정착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자생한 종교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전래된 종교가 광활한 중국 대륙에 정착하여 신앙화 하는 과정은 부처님의 출현, 용수에 의한 대승불교 체계와 더불어 새로운 불교의 사활을 건 불교사의 최대 사건중의 하나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라. 광활한 중국 대륙, 불교전래부터 약 500년간의 세월, 그 당시에 직접 중국에 태어나 살았다 하더라도 빙산의 일각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은 매력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엄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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