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리의 바다, 진지한 삶을 위하여 46. 화두
페이지 정보
본문
화두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써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가?>하는 화두는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일어 나는 보편적 상황이며, 이 화두에 대한 붓다 석가가 깨친 보편적 진리(법신)가 {연기}이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의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둘째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써 특수적 진리(보신)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부처는 무엇인가?>, <지혜의 본체는 무엇인가?>와 같이 물음 자체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을 던져
놓고, 거기에 응하는 답은 묻는 자와 대답자의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답이 얻어진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간시궐(똥막대기)'
한 스님이 동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삼근'
법상이 마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즉심시불(마음이 곧 부처)'
이와 같이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보편적 물음에 대한 답이 전부 다르게 표현된다.
묻는 자와 대답자의 상황에 어울리는 특수적 진리로 표현되는 경우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똑같은 보물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적, 역사적, 지역적, 인간관계적 모든 상황이 고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
는 똥막대기라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마삼근, 혹은 즉심시불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는 특수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써 특수적 진리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달마께서 동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 잣나무를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도 잣나무를 말한 것이 아닐세.'
'어떤 것이 달마께서 동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가 머물고 있었던 관음원의 법당 앞에는 잣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던 것이다. 밖을 내다
보는 조주의 눈에 언뜻 보인 잣나무가 스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된 것이다.
지금 만약 우리가 해인사 선방에서 화두를 나누고 있다면 '법당 앞에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
구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 보자.
어느 날 조주를 찾아온 두 선객이 있었다.
'그대는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던가?'
'온 적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들게.'
이번에는 다른 한 명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가.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었나.'
'예.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 차나 한 잔 들게.'
곁에서 지켜보던 절의 살림을 사는 원주스님이 끼어 들었다.
'스님, 전에 온 일이 없는 스님에게 차를 들라하고, 전에 온 적이 있는 스님에게도 차나 한잔 들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원주를 불렀다.
'원주!'
'예.'
'차나 한 잔 들게나.'
중국에서 차는 생활의 한 부분이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화두를 나누고 있다면 '여보게, 밥이나 한술 떠게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의 대부분은 묻는 자와 대답자의 특수 상황에 대한 특수한 대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매달릴 수 있는 절실한 문제라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의 전부를 침투시키는 폭발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화두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방이 철판으로 막혀져 있는 답답한 방에 들어 앉아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을 통하여 철판 안에 갇혀 있는 나 자신과 밖의 우주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두의 깨우침이란 양 사방 막혀져 있는 철판의 어느 한 곳이 뚫어져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불과한 것이다.
깨달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스승이란 철판을 두드려 보기만 해도 얇은 곳과 두꺼운 곳을 아는 것처럼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하여 가장 쉽게 뚫어질 위치를 찾아주는 역할를 하는 것이며, 뚫는 것은 스스로 뚫어야만 하는 과제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화두는 하나뿐이다.
결국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명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화두가 되는 것이다. 조주의 '무', 운문의 '똥막대기', 동산의 '마삼근', 법상의 ' 즉심시불'등은 '이 뭣꼬?'에 대한 대답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x -6x +11x -6 = 0 이라는 방정식을 푼다고 하자.
인수분해를 하거나 숫자를 대입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정식을 푸는 것은 '이 뭣꼬?' 라는 존재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되며, 위의 방정식을 풀면 답은 x = 1, 2, 3 이 된다. 우리가 조주는 왜 '무'라 했는가?, 운문은 왜 '똥막대기'라고 했는가? 하는 것을 화두로 드는 것은 위의 방정식을 풀면 왜 답이 1이 되는가?, 혹은 2가 되는가?, 혹은 3이 되는가? 하고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두를 잘못 챙기면 평생 헛고생만 하게 되고, 화두 하나 잘 챙기면 화두에 투자한 것만큼 성숙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생에서 '이 뭣꼬?'하는 화두 하나 자기 것으로 챙겨간다면 평생 삶이 헛되지 않으리라.
누가 있어 이 소식 묻는다면
부처꽃은 홀로 피었다 홀로 질뿐이라며
미소하리라.
- 이전글47. 깨달음 21.07.09
- 다음글45. 종교의 벽을 넘어서 21.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