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국에서의 불교 전개 50. 고려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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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트의 4월 보다 더 잔인한 3월이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온 우주에 움트고 따스한 봄의 향연이 온통 대지를 뒤흔드는 데도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고통과 좌절만이 인생을 성숙시킨다는 명제는 먼훗날 깨달은 진실이었고, 지금도 가끔 그 때를 회상하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가장 절실한 것은 꼭 이루어진다는 확신으로 생명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는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된 불교는 원효에 이르러 교종에 있어서 탈중국을 하면서 한국사상의 초석을 놓았으며, 법랑과 신행(704-779)에 의하여 처음으로 선종이 전래되었고 도의(821년, 헌덕왕13년)에 의하여 혜능의 선이 전래되어 선과 교의 발전으로 5교 9산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통일신라의 말기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이제까지 정신적 지주가 된 교종도 사회와 더불어 병들어 갔으며 이 무렵 선종이 전래되었으나 국가의 문란과 사회의 소요등에 대하여 민심을 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시 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국가창건의 이념적 지주로써 국민광제의 신앙의 대상으로써 지금까지의 불교를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태조이래로 큰 비중을 차지한 지리도참설의 민간신앙과 결부되면서 기복불교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한편 승과제를 설치하여 교단의 부흥과 승려들의 질적 향상, 사회적 지위 확보 등을 꾀하였으며, 의천과 지눌은 고려 불교의 선교 양대 산맥을 이루고 고려 불교의 핵심을 이루면서 “불립문자”로 표현되는 중국 선종의 가풍을 벗어나 지눌에 이르러서는 “정혜쌍수”라는 새로운 한국 선종의 가풍을 정립함으로써 원효의 교종에 이어 선종에 있어서도 이 땅에 토착화된 선불교의 맥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제4왕자로서 문종9년(1055)에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의 왕사 난원에게 득도하고 화엄교관을 수학하였다. 문종이 여러 왕자에게 “누가 출가하여 복전을 짓겠느냐?”고 했을 때 11세인 그가 스스로 출가하기를 원한 것이 승려가 된 동기였다고 한다. 출가 후 그는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해외의 사정과 견문을 넓히고자 송나라에 건너갈 결심을 하였으나 부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형인 선종이 즉위하였을때도 도송 유학을 간청하였으나 끝내 허락치 않았다. 결국 공식적이 도송이 불가능함을 알고 선종2년(1085) 4월에 왕과 모후에게 글을 남기고 제자 두명을 데리고 평복으로 남몰래 송나라의 상선을 타고 송으로 들어갔다. 14개월 동안 송에 머물면서 고승대덕을 방문하고 명승고적을 두루 찾았다. 귀국 후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요, 송, 일본 등에서 4천여권의 장소를 수집하여 국내의 고서를 모아 그곳에 교정도감을 두고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 목록으로써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편집하여 교종사상의 신기원을 세웠던 것이다. 선종 6년(1089년)에 태후 의 발원으로 송산 서남 기슭에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국청사가 창건되었다. 40 대로 접어든 의천은 이 때 부터 국청사에서 천태의 교관을 강의했다. 의천의 뒤를 이어 요세는 만덕사에 50년을 은거하면서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르는 제자가 38명이었고, 입사한 수행자들이 300 명에 이르렀다.
선의 한국화 내지 토착화는 지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지눌(1158-1210)은 속성이 정씨이며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8세에 출가하여 조계후손 종휘에게 득도하고 수학하였다. 명종 12년 25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창평 청원사에 머물렀다. 여기서 “육조단경”을 읽고 특히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육근에 들어 비록 깨달음을 얻더라도 망상에 물들지 않아 진여자성은 항상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동 15년에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원돈관문”에 두게 되었다. 마침 법우 득재가 공산 거조사에서 초청하므로 그곳에 가서 이에 정혜사를 조직하고 제종의 승려들을 널리 맞아들여 정혜를 닦으니 따르는 자가 많았다. 거조사는 좁고 대중의 수도처로는 적합하지 않아 순천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정혜결사운동”를 옮기기로 하여 신종 3년에 그곳으로 옮겨 수행정진에 들어갔다. 여기서 11 년 동안 청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선을 닦게 하니 사방에서 모여드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여말에 활동한 선승으로는 태고 보우와 나옹 혜근이 있다. 보우(1301 - 1382)는 충남 홍주 출신이며, 13세 때 회암사 광지에게로 출가하여 여러 총림을 편력하였다. 37세에 개성 전단원에 안거하면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대오하였다. 삼각산 중흥사 동편의 태고암에 머물면서 ‘태고암가’를 지었다. 46세에 원으로 건너가 석옥청공에게 입실하여 인가를 받았다. 왕의 부름으로 왕사에 봉해졌지만 가능하면 사의하고 소설산에 은거하면서 수행정진으로 일관하였다. 보우의 최대 업적은 임제의 간화선을 고려에 보급하여 정착화 시켰으며, 현 한국 불교의 뿌리를 제공하였는 것이다.
혜근(1320 - 1376)은 20세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정감하고 공덕산 묘적암 요연에게 출가하였다. 여러 곳을 유행하다가 양주 회암사에서 개오하였다. 28세에 원으로 들어가 인도에서 온 지공(서천 108조)에게 인가을 받았으며, 임제의 법맥을 이은 평산 처림에게도 인가를 받았다. 원나라의 황제 순제의 뜻에 따라 스님은 광제사의 주지가 되셨다. 개당 법회의 첫 법문을 하는 날 많은 벼슬아치, 이 산 저 산의 많은 스님들이 모여 들었다. 나옹은 황제가 보낸 금란가사를 받아들고 그들에게 물었다.
“푸른 산 , 흐르는 강, 누런 땅, 그리고 나무와 풀잎 우주의 모두가 부처님 몸인데, 이 가사를 어디에 입혀야 합니까?”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스님께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가리키면서말씀하셨다.
“여기다 입혀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고려시대의 최대의 역작은 고려대장경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에서 국력의 총체로 이루어진 최대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고려대장경의 간행에 앞서 간행되었던 대장경과 속장경을 궁중에 안치하고 장경도량을 개설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몽고군에 의하여 소실되었다. 고려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하여 전 국민의 염원으로 고종 23년(1236년)에서 38년(1251년) 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경판을 조각하는 기관으로 대장도감이 강화도에 설치되었고, 분원에 해당하는 분사대장도감이 남해지역과 강화도에 설치되어 대장경판 조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대장경과 속장경에 이어 이 때 만들어진 재조대장경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는 경판의 수가 8 만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불교는 일반적으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답적이고 산간 불교적인 성격과 궁정 및 일반 부녀자 신도대중의 기복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답적인 산간불교는 선종의 경우나 교종의 경우 다 대중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있었고 대중의 절실한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본의 아니게 양재초복의 의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성격은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융화되지 못하였던 것이 해가 거듭할수록 고질화되어 고려사회를 온통 주술적이요 기만적인 의례에 대한 미신의 풍조 속으로 몰아넣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의천의 불교운동이 학문적이요 귀족적이라는 한계성 속에서 선교의 융합에 미흡하였던 부분을 지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겹 벗겨낸 하나의 선을 그으면서 승단 자체의 정화 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원효가 교종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불교의 씨를 뿌리고 민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불교를 창출하였다면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자체 수행을 통한 승단의 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정혜쌍수”라는 한국적인 토착화된 선의 방법론과 구도에 대한 더 높은 차원를 부르짖으며 한반도에 있어서 새로운 불교의 장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지눌의 정혜결사가 더욱 더 절실한 현실인데.
토굴과 선방과 강원에 들어앉아 자체정화와 불교정화, 나아가 우주정화에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이여!
풀냄새 싱그러운 또 다른 3월이 오면 더 높고 더 뜨겁게 발샘, 정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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