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국에서의 불교 전개 52. 근대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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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선사시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불교 중흥은 계속되는 억불정책에 의해 그리고 실학사상에 밀려 거의 1700년대 이후에는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18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민 속에 파고 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면서 그들의 복을 기원해주는 극히 원시적인 종교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실정이었다. 선이라는 용어조차도 불교에서 희미해져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0년대 말에 경허의 탄생은 근대 한국불교의 새로운 태동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의 근세 선맥은 경허선사의 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과 20여세에 동학사에서 대강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경허선사는 경에 막힘이 없었으며 유교, 도교 등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사방에서 구름 같이 몰려드는 학인 스님들로 강원은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강사가 된지 8년에 30대에 접어든 경허선사는 은사 계허스님을 뵙고자 1897년 여름 해제를 맞아 경기도 안양 청계사로 향했다.
길가던 중 천안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퍼부어 어느 초가 밑으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얼마 후 집주인이 나타나서 ‘송장 치우기에 진력이 났는데 누가 또 와 있담. 죽더라도 내집에서 나가서 죽으시오.’ 하며 힘껏 스님을 내밀었다.
비를 피할려고 다른 집에 들렀지만 마찬가지로 내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마을에 전염병인 콜레라가 돌아 집집마다 시체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경허선사는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머리 속에는 수 만가지 생각들이 일렁거렸다.
‘나 또한 전염병에 걸리면 죽지 않을 수 없다. 저 송장들과 다를 바 없는 나 역시 생사의 낭떠러지에 와 있지 않은가. 살고 죽는 문제하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며 철없이 중노릇이나 한다고 앉아 있었으니, 생사의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서 부처님의 길로 중생을 인도한다 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강원으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선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 앉아 일체 외부와 단절한 채 참선에 몰두하였다.
스님은 영운선사의 화두 “나귀의 일, 말의 일”이 마음에 맺혀 떠나지 않았다. 좌선 삼매중 졸음을 쫓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을 턱 밑에 세워 놓았다. 정진하다가 깜빡 졸면 이마에 선혈이 흘렀고 살이 찔리고 피가 엉켜 붙어 얼굴은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학명스님과 사미승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이진사로부터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이야기를 듣고 절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니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마침 혼자 참선하고 계시는 경허선사께 여쭙게 되었는데, 선사께서는 이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라는 그 한마디에 문득 활연 대오 하시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이 가슴에 맺히더니 몰間人語無鼻孔
한순간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이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六月鷰巖山下路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옛 부처 나기 이전의 소식이 활연히 눈앞에 열리고 대지가 몰록 빠지고 우주와 내가 함께 공하여 옛 조사들이 깨친 경지에 도달하였다. 백천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하고 번뇌에 덮혀 꽉꽉 막혔던 것이 저절로 풀려났다.
고종 16년 기묘년 1897년 동짓달 보름이었다.
그 후 수덕사를 중심으로 경허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만공선사, 스승의 만년 발자취를 따라 만주로 가 또 하나의 별이 된 수월선사, 남방으로 내려와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 확장한 천진도인 혜월선사, 종계정 종정을 지내시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한국 선불교를 한 단계 승화시킨 한암선사, 역경사업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선농일치를 부르짖으며 생활선불교를 정착화시킨 용성선사, ‘불교유신론’으로 불교의 현대화를 부르짖으며, ‘님의 침묵’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린 만해 한용운 등이 법을 이어 근대 한국불교를 활짝 열었던 것이다.
다음은 너무나 유명한 만해의 “군말”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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