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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교리의 구조및 체계 7. 불교의 인생관, 견성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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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1,781회 작성일 21-07-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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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은 그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우리가 한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부처이다. 경전에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불교가 목표는 부처인 것이다. 우리가 절에 다니는 목표도 결국은 부처이다. 먼저 이 목표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도 진리 가치에 어긋나는 부분이 아니라 진리 가치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중생이라는 것은 부처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집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부처고 부처될 수 있는 존재이며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부처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절에 열심히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부처되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지향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부처되는 것이다. 목표가 있는 사람하고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 똑같은 고3을 공부시켜 보면, 일류대학에 가겠다고 목표를 세워놓고 공부하는 학생하고 성적 나오는 대로 맞춰서 가겠다는 학생하고 1년 동안 공부를 시켜놓을 것 같으면 목표가 분명한 학생은 밤잠을 안자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목표가 없는 학생은 성적에 맞추어 가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애를 쓸 필요가 없이 되는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다. 세속의 법을 능가하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삶의 가치의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부처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세 생생 살아가면서 불법 만난 최고의 행운인 부처 되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부처되는데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주부로써 한 생을 사는 사람, 또 사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생을 살 수 있는데 부처되는 목적이 있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어떠한 상황이든 결국은 이 삶의 목표가 부처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는 승복을 입고 어떤 경우에는 세속의 옷을 입기도 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세세생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되는 목적을 망각하지 않고 항상 기억하고 있으면 부처 될 수 있지만,  목적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돈은 얼마나 벌고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 생에서 대구 시내에서 가장 큰 빌딩을 세우겠다고 원을 세웠다면,  그 원이 결국은 씨앗이 되어서 노력하게 되며, 세우게 될 인연들이 생기게 되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세울 사람이 나오게 되고 결국 건물이 세워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처다 하는 것을 인식하는 문제이다. 중생의 속성을 갖고 있지만 내 속에는 부처의 속성도 있어서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이생에서 나는 부처를 이루겠다 이생에서 나의 목표는 바로 부처인 것이다. 

세속 법에서 예를 들어 내가 차선위반을 했다 주차위반을 했다고 하자. 위반하면 불안하게 된다. 세속에서 정해 놓은 법을 우리는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게 된다. 그 다음 좀 더 손해 보는 것은 벌금을 내야한다. 또 내가 차선 위반하면 다른 사람의 차선을 방해해 차를 막히게 하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하여 죄도 짓게 된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히고 나 자신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러니까 법은 안지키는 것 보다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법을 어길 때 불안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세속적인  법을 정해 놓으면 그냥 알아서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달나라에서 태어는 누군가가 지구에 온다면 주차위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 멋대로 차를 몰고 다니면서 무엇이 주차위반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를 운전을 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위반인지 아닌지 잘 알고 있다. 모를 때는 불안하지 않지만 알게 되면 제대로 잘 하지 못할 때는 불안하게 된다. 진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무아와 무상을 모르면 실천하지 않더라도 불안하지 않지만, 알게 되면 불안하게 된다. 

주차위반을 하거나 신호위반을 하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위반을 하게 되지만,  아는 사람은 위반하더라도 다음에는 위반할 가능성도 낮아지고 또 본인이 위반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해 하게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모든 인식, 감정, 속성, 속에서 모른 것에서의 기본적인 속성이 무엇이냐 하면 불안이다.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으로 생기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며, 결국 불안과 두려움이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도 모르고 있다. 모르는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 법을 모른다고 온종일 TV시청해도 괜찮고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착각인 것이다. 오늘 한 시간 노력하는 것은 십년 노력하는 것 보다 더 좋다. 은행에 돈 넣어 놓으면 이자 붙듯이 공부도 똑같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무아와 무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생이 갖고 있는 속성은 불안이라 했는데 그러면 부처되면 우리는 어떤 이득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지금 부처된다고 하면 명(明)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바로 밝게 아는 이 상태가 바로 부처 되는 것이다. 명(明)이라는 것은 밝음이고 광명이다. 불교를 말할 때 ‘자비 충만 하시고’ 라고 한다. 바로 안다는 자체가 끝없는 광명이며 끝없는 빛이 나오는 것이다. 무아와 무상을 알면 내 속에서는 끊임없는 자비가 흘러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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