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 6. 연기, 깨달음을 성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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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득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 위에 떠 있는 빙산과 같다. 보이지 않는 아홉 보다는 보이는 하나에 의해서 판단되고 결정되는 것이 상례이며, 우리는 또한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아홉에 진실이 숨어 있으며, 세상의 온갖 보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아홉의 주머니를 처음 풀어헤친 진리의 문을 연 붓다의 다음 얘기를 귀기울여 들어보자.
“이 세상의 위대한 일치고 정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갈파한 헤겔의 말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이 세상의 빛나는 삶은 모두 정열에서 비롯된다. 공자가 천하를 철환한 것도, 예수가 황야를 방황한 것도 모두 문제 제기에 대한 해결을 위한 정열이었던 것처럼 붓다의 설산에서 6 년 고행 또한 노병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값진 시간이었던 것이다. 노병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온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걸어온 6 년이란 수행과 명상과 함께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그 눈과 마음은 열린 것이다. 캄캄한 어둠을 빛이 밝히듯 드디어 노병사의 문제가 환하게 밝아진 것이다.
“무엇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일까?”
“무엇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일까?”
“생이 있음으로 노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를 잉태하게 되는 위대한 태동 연기법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의 긴긴 고행은 드디어 인간의 존재,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환하게 밝힌 것이다. 아마도 그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라는 용어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좀더 뒷날에 그 내용이 정리되고 거의 체계가 선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붓다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으로서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
“연기(Paticcasamuppada)란 재미있는 말이다. 그것은 말미암아(綠, Paticca, grounded on)라는 말과 일어나는 것(起, Samuppada, arising)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서 붓다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그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이었으므로 결국 연기란 붓다의 존재론을 말하며, 즉 긴긴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 앉아 “진지하게 사유한” 결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그 후 붓다는 계속 명상에 잠겨 생노병사가 생기게 되는 더 근원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관조하여 ‘12연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왜 늙고 죽음이 있는가? 태어남 때문에
왜 태어나는가? 업의 생성력 때문에
업의 생성력은 왜 생기는가? 집착 때문에
집착은 왜 생기는가? 갈애(애욕) 때문에
갈애는 왜 생기는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은 왜 생기는가? 접촉 때문에
접촉은 왜 생기는가? 6식(눈귀코혀몸뜻)이 있기 때문에
6식은 왜 생기는가? 영혼과 육체의 결합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왜 생기는가? 재생의 식 때문에
재생의 식은 왜 생기는가? 모든 행위는 형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성력은 왜 생기는가? 무명 때문에
(무명)무명에 의해서 형성력이 생기고
(행)형성력에 의해서 재생의 식이 생기고
(식)재생의 식에 의해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생기고
(명색)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의해서 6식이 생기고
(육입)6식에 의해서 접촉이 생기고
(촉)접촉에 의해서 느낌이 생기고
(수)느낌에 의해서 갈애가 생기고
(애)갈애에 의해서 집착이 생기고
(취)집착에 의해서 생성력이 생기고
(유)생성력에 의해서 태어남이 있고
(생)태어남에 의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노사)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무명이 축적되고,
끝없이 생멸을 되풀이 한다.
좀더 알기 쉽게 그림으로 도식화 해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우리 인간 존재의 생주이멸이 그렇고 우주의 존재법칙 성주괴공이 바로 이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에서부터 무생물까지 모두 이 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연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면 인과응보가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속담은 모두 연기법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식이 없는 사랑으로 중세 전역을 흑사병으로 몰고 간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전쟁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수행은 미혹으로 몰고갈 것이며, 수행이 없는 삶은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12 연기의 처음인 무명에 의하여 결국에는 삶과 죽음이 있게 되며, 이 무명이 해결된 상태가 연기인 것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관계는 무명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불교란 “무명과 연기”의 끊임없는 반복 성찰 확산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나와 남과의 관계인 것이다.
불교인들이여!
불자는 부처님과 같이 견성성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믿으며 오계를 지키면서 진지하게 수행하여 우리의 가슴 깊숙히 흐르고 있는 욕심 내는 마음과 성 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줄기인 중류의 물줄기를 끊어버릴 때 모든 집착과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행에 의하여 집착을 없애가는 방법으로 수행하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나아가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고 결국에는 스스로 화두를 들게 되며 화두를 들게 되어 무명을 타파하고 견성성불하여 부처를 이루게 된다.
선불교에서 참선으로 성취되는 견성성불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이뭣고?’의 화두에 목숨을 걸고 몰두함으로써 근본 무명을 타파하여 견성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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