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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10. 한국에서의 불교 전개 48. 삼국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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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7,603회 작성일 21-07-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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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대할 때에는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객관적일 수 있지만 그 문제가 자신의 것일 경우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받아 들이기는 쉽지 않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300-400 여년이 지난 후 중국화로 재정립이 된다. 이 시기에 중국불교가 삼국으로 전래되기에 이른다. 당시 역사적 상황은 중국에서는 고대국가의 확립에 의한 최전성기를 이룰 때이며, 한반도에서는 겨우 고대국가의 태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불교문화가 이 땅에 전래될 무렵 종교적 상황은 자연 숭배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로 문화접촉의 불균형형에 의한 불교수용이 이루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도에 의해서 처음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을 때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자. 육지와 바다를 통한 문화접촉의 길목에 자리한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중국 선진 문물을 부담 없이 받아들여 쉽게 뿌리 내렸을 것이다. 그에 반해 신라사회는 지역적으로 폐쇄된 공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교문화가 수용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의식의 고정화와 폐쇄성 때문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서야 비로소 신라사회에 인정되기에 이른다.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은 곧 동진 함안 2년이며, 효 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경이 사신 및 중 순도를 시켜서 불상과 불경을 보냈고 또 4년 갑술(374)년에는 아도가 진에서 왔다. 이듬해(375년) 2월에 초무사를 세워 순도를 거기에 두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두었으니,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이다.”

또한 <백제본기>에는 백제 불교수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로 공경했다. 그 이듬해 을유(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인도승 10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이다.”

<신라본기>에서는

“제 19대(417-457) 눌지왕 때 중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오자, 그 고을 사람 모례가 집 안에 굴을 파고 방을 만들어 편안히 거처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신라에서의 불교흥기는 원화(당 현종)연간에 남간사(경북 경주군 내남면에 있던 절)의 중 “일념”이 “촉향분례불결삽문을 지어 법흥왕과 이차돈 순교에 대한 사실을 잘 전하고 있다.

법흥왕이 자극전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 동쪽 지역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니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씻을 곳을 마련한다’하였을 때,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이차돈이라는 신하가 왕의 뜻을 알고 왕에게 아뢰기를 ‘나라를 위해서 제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된 사람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으로서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 말씀을 올렸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신다면, 모든 백성들이 굴복해서 감히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 입니다.’하고 아뢰니 왕은 이차돈의 뜻을 헤아려 위의를 정제하고 신하들에게 묻기를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일을 지체시킨 것이 아니냐?’하며, 사인을 불러 꾸짖으니 사인(이차돈)의 얼굴빛이 변하자 임금이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을 내리니 유사는 이차돈을 묶어 관청으로 데리고 갔다. 사인이 맹세를 하자 옥사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사방이 어두워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이것을 보고 왕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표를 적시고, 감천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나오고, 곧은 가지가 저절로 부러지고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 태자의 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태자와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사인과의 이별을 창자가 끊어질 듯 애석해 하며 관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는 마치 부모을 잃은 것 같았다. 위의 사실들을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한 불교수용인데 비하여 신라에서의 불교수용은 눌지왕 때 묵호자가 모례라는 서민의 집에 머무른 사실은 그 사회의 폐쇄성에 의한 배타성 때문이다. 그리고 또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가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 대 국가로 불교가 전래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민간 쪽으로 전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렇게 전래된 불교는 국가와는 무관하게 사회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서민들에게로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신하 이차돈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의지로써 순교하여 홍법의 문을 연 사실은 모례네 집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어 1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서민으로부터 차츰차츰 확산되어 사회의 상부조직에 까지 불교가 침투해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비로소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로 국가가 인정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힘으로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사상적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비로소 원효에 이르러 철학적인 사상을 확립하게 되며 고대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이념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출가하여 처음 10년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경전을 연구하고 수행정진 하였지만 견성성불이 되지 않아 중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몇 년이 지난 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낮에는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고 밤에는 산 속에서 노숙을 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원효와 의상은 비를 피하여 묘지 속으로 들어갔다. 굶주림과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요동의 어느 묘지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이때 밤중에 목이 말라 손을 더듬어 물을 한 사발 마셨다. 모르고 먹었을 때는 꿀 맛 같았던 물이 자고 일어나보니 해골물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토할 것 같고 오장육부가 다 비틀렸다. 여기서 원효는 크게 깨닫게 된다. 낙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화엄종주 원효의 무애행은 한반도를 누비고 나뎠던 것이다. 원효에 의하여 민중의식은 성숙되었으며, 불교를 통한 전 국민의 신앙화가 이루어졌다. 전 국토의 구석구석까지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원효는 신라 땅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까지 전 한반도를 누비면서 유행을 하였고, 불법전파에 전력을 하였던 것이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의 참모습을 알고자 

우주의 진실한 성품을 꿰뚫어 보니 

모든 것이 한마음으로부터 이루어졌네.


사회학자 “뒤르껭”은 사회가 신을 만든 것이며 신은 바로 인성화, 인격화된 사회의 표현으로 이름없이 확산된 이 사회적 힘에 대한 집단의 지지를 종교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의 힘은 밑으로부터의 염원에 의하여,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타파하기 위한 제반 문제들이 신앙적인 힘으로 승화됨으로써 집단의 큰 지지를 얻어 비로소 그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종교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신라 불교수용은 불교가 전파된 지역 중에서 유일하게 밑으로부터 승화된 수용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하여 불교의 새로운 기운을 신라에서 찾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머지않아 남쪽 바다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리라. 

경주 남산이 눈앞에 선한데, 언제쯤 한 번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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