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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불교의 역사

2. 불교교리의 구조및 체계 11. 불교의 교육관, 사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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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0,404회 작성일 21-07-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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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열역학 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개념의 하나로 “엔트로피”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고전역학에서 자연현상의 진행 방향을 나타내는 양으로, 예를 들면 뜨거운 물은 결국에는 식는다는 것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주목할 만한 개념이다.

 1900년대에 이르러 양자통계가 등장함으로써 “엔트로피”는 보다 중요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 “엔트로피”는 어느 정도로 막연한가를 나타내는 양으로, 막연하면 할수록, 많은 가능성이 있으면 있을수록 “엔트로피”는 크다고 한다. 

 “엔트로피”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그 하나는 자연현상의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할 수도 없고, 노인을 젊은 사람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엔트로피”는 자연의 흐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살펴보면, 물이 들어 있는 컵 속에 붉은 색 잉크를 한방울 떨어 뜨린다 하자. 그러면 잉크 물방울은 전 컵으로 확산되어 온통 붉은 물이 되는 것이다. 그후 이 변화의 반대 현상, 즉 다시 한 방울의 잉크로 되돌아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때 이 현상의 비가역성을 나타내는 양이 “엔트로피”이다.

 자연은 보다 확률이 큰 곳으로 옮겨진다. 즉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을 따른다. 

 세상은 계속 엔트로피가 증가되는 방향, 무질서의 정도가 커지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 인간은 이 순간에도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올바름에 대한 좌표 설정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역사를 이루고, 엔트로피는 커져만 간다.

 결국 종교라는 것도 엔트로피가 0인 태초의 상태로 되돌려 가지는 못할 것이다. 무질서와 혼란의 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다만 엔트로피의 증대를 억제하는 역할을 종교의 소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는 이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기도와 수행으로 우리의 삶을 맑고 밝게 빚어가는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친 연기법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느냐가 문제이다. 나에게 값진 보배가 있어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면, 먼저 부모형제, 스승, 친구들을 생각 할 것이다. 붓다가 이해시킬 대상으로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은 처음 출가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이었을 것이다. “스승이라면 나의 깨달은 바를 이해해주실 것이며 따뜻하게 맞아 주리라!” 그렇지만 세월은 흘러 스승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없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6 년 동안 함께 고행한 다섯 비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다섯 비구들에게 가서 나의 깨달은 바를 이해시키자. 수소문을 해보니 다섯 비구들은 바라나의 녹야원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있는 곳은 마갈타, 마갈타에서 바라나까지는 거의 300km나 되었다. 붓다는 10여일이나 걸어서 바라나에 도착하여 다섯 비구를 겨우 찾았다. 그렇지만 다섯 비구들은 냉정하기만 하였다. 고행을 버리고 떠난 붓다를 용서해 주지 않은 것이다. “벗들이여 나의 얼굴을 보라. 예전의 나의 얼굴이 이렇게 밝은 적이 있더냐? 나는 깨달았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좋다.” 이렇게 사정사정하여 다섯 비구는 마침내 붓다의 얘기를 듣기 시작하였다. 

연기법을 어떻게 현상에,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마갈타에서 바라나까지 걸으면서 시종 이 문제로 고민했으리라. 눈에 보이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궁핍과 질병뿐이고, 계급제도에 의한 비참한 노예생활 뿐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고”다. 먼저 현실적으로 “고”다라고 인식을 해야만 본질적인 문제에서 “고”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苦)"인 근본적인 이유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 본질을 바라보면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제행무상이며, 공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본질을 바라보면 모든 존재와 현상에 나라고 하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제법무아이다. 바로 이와 같이 시공간적으로 존재 본질을 꿰뚫어보니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기에 “고”다고 갈파한 것이다. 

그러면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로 나아가는 삶을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실천하여 생활화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남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명에서 연기로 나아가는 삶을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실천하여 생활화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붓다께서 10여일을 걸으면서 조용히 선정에 들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이 바로 사성제(四聖啼)였던 것이다.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이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과제의 제시이며, 집은 고가 발생한 이유이다. 즉 왜 고가 생겼는지 근본 이유를 밝히는 것이며, 멸은 고가 극복된 상태이며, 도는 집을 소멸하여 멸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에서 연기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인 것이다. 고, 집, 멸, 도 사성제는 다음과 같이 경전에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은 고다. 노는 고다. 병은 고다. 죽음은 고다. 시름, 근심, 슬픔, 불행, 번민은 고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가 그것이다. 그것에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서 아무 집착도 없는데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의 도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니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연기법이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




(예1) 

붓다 : 

고행을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느냐?

비구 :

얻지 못했다. 

붓다 :

무엇 때문에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비구 :

잘 모르겠다. 

붓다 :

너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라. 

집착에는 세 가지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이 그것이다. 

너의 마음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아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그렇지 않다. 

붓다 :

너의 마음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 

너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의 상태를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느냐?

비구 :

그렇지 못하다. 

붓다 : 

그렇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나 평안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하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근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집”의 성제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너는 고행하여 천당에 태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래 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비구 :

그렇다.

붓다 :

우리가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 천당에 

태어나려고,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이다. 바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인 것이다. 

비구 :

붓다 :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그것은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상대방은 틀린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화내는 마음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수행자로서 모든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화내는 마음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우리들은 저절로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문제가 해결된 상태, 생각의 자유로움과 마음의 평안을 얻은 상태가 “멸”의 성제이다. 

이 “멸”에 성제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가 최선의 방법일까?를 생각하고 결정하여 실천하는 것이 “도”의 성제이다. 제대로 실천을 하려고 하면 일어난 현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이러한 능력이 내 속에서 성숙되어야 올바른 실천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행위하면 된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며,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며,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비구 : 

그런 것 같다. 이해가 된다.  



   

(예2)

붓다 :

너희들 둘은 어제 다투고 화를 내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 

비구 :

내가 탁발하여 온 공양을 상대방이 더 많이 먹으려고 하였다. 

붓다 :

6년을 함께 고행한 벗들인데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었으면 다투었겠는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조금 더 먹으려고 할까? 하는 자비심이 너의 마음에서 

일어났다면 너의 공양을 한술 더 떠 주었을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인 “자비심”은 수행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비심이 없으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이 된다. 

수행자에게 “자비심”이 충만 되어 있으면 저절로 “도”의 성제는 이루어지지만, 

“자비심”이 없으면 천년을 다리 틀고 앉아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옥에 갈 죄만 더 하는 것이다.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관조하여 “일어난 근본 이유”를 찾는 것도 “최선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자비심” 속에는 이미 “고의성제”와 “집의 성제”가 해결되어 상대방을 100 % 위하는 “실천의 도”가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나면 최선의 해결책이 

생기게 되며, 또한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 알겠느냐? 

이것이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예3)

법사 :

보살님 댁에 큰애가 지난 해 고 3이라 했는데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까?

신도 :

아닙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지금 재수하고 있습니다. 

법사 :

절마다 다니면서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왜 시험에 떨어졌습니까? 

신도 :

얼굴을 숙이며 아무 말이 없다. 

법사 : 

왜 시험에 떨어졌는지 한번 공부해 볼까요? 

불교인이라면 먼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부처가 되는 방법인 “사성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본인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고”의 성제입니다. 왜 떨어졌는가? “떨어진 근본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이 “집”의 성제입니다. 학생은 착하고 공부도 잘 하였는데 한번씩 마음이 흔들릴 때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것이 떨어진 이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상대방에게 감동을 줍니다. 보살님께서는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를 했지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여 기도를 못했습니다. 올해 일년 동안 아이를 위하여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일년 동안 모임을 모두 끊고 오로지 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보살님 댁의 거사님께서 사업이 아무리 중요하지              만 일요일 아침은 아이와 함께 공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속극이나 영화등을 본다고 밤 늦게까지 TV을 켜 놓지 맙시다. 어떤 일이 일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주도록 합시다. 학생이 밤 늦도록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거실에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시다(TV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학생은 감동하게 됩니다. 아! 어머니께서도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한번 감동을 받게되면 학생은 저절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당연히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됩니다. 여기서 “멸”의 성제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고, “도”의 성제는 기도의 조건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연습도 하지 않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습니까? “사성제”는 일상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사성제”를 실천하면서 살다보면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녹야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이야기 한 것이 바로 “사성제”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설명에서 다섯 비구가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부경전 二六의 기록에 의하면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에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 명의 비구를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얻어온 것으로 여섯이서 생활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콘단냐가 붓다의 사상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콘단냐의 깨달음은 본인에게도 큰 기쁨이지만 본인보다 더 좋아한 것은 붓다였으리라.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그때의 붓다의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반복법으로 전하고 있으며,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남에게 이해 시켰을 때의 감개무량함이 가슴에 와 닿는 듯하다. 마침내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불교의 성립을 의미하는 일대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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