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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처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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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486회 작성일 21-07-10 09:31

본문

부처가 되는 길



달마가 전한 마음법이 후대  많은 선사들에 의하여 다음 네 귀절의 시로 부처되는  길을 집약 시켰다.


경전 밖에서 따로 전하여           敎外別傳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不立文字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       直指人心

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      見性成佛


이 사구게는 달마 이후 혜능을 거치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확립되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마음이  일으키는 구체적인 상태를 표현하였으며, 여덟 가지의 바른 실천도를 행함으로써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직시하여 욕심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맑고, 깨끗하고  자유로운 진리의 세계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로 유도하였다.

그러던 것이 지역성과 시대성을 거치면서 선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 본성을 꿰뚫고 부처가 된다는 마음의 본래 성품인 본성을 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지만 진리 자체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석가시절의 부처와 선불교 시대의 부처가 다르지 않으며 앞으로  몇 천년이 흐른다 할지라도 부처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대에 따라 부처를  표현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으며, 부처를 이루는 방법도 다양하게 달라질 수는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

제행무상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사물의 모습은 끊임없이  생기고 없어지는 변화하는 실체로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소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로 이루어진 모양이  있는 것은 영원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변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형상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무릇 모양있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것은 고통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 고통인  것, 변화하는 모양을 보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것을 본질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법무아라는 것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있다는 것의 부정이며,  나라는 것의 부정이며, 영원히 존속되는 나의 본체에 대한 부정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해 생겨  존재하다가 없어진다는 진실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

여기에 연관된 재미있는 대화가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케마라는 비구가 병이 들어 코상비의 교외에 있는  고시다정사에 누워 있었다. 다른  비구들이 문병을 와서 주고  받은 대화속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한 비구가 물었다.

'좀 어떤가?'

'어찌나 아프고 괴로운지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말이 오고 간 끝에 한 비구가 고통을 받고 있는 케마를 위로할려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 붓다께서는 <나가 없다>는 가르침을 설하시지 않았는가!  나가 없는데 무엇이 아프겠는가?'

그러자 케마의 반응은 천만뜻밖이었다.

'아니, 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문제가 되어  장로들까지 병상에 나타나 토론이 벌어졌다. 케마가  그들을 설득한 요지는 꽃을 비유한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었다.

'벗들이여, 내가 <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육체가  나라는 뜻은 아니다. 또 이 감각작용이나 의식이 나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떠나서 따로 나가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벗들이여, 그것은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꽃송이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은 옳은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이  줄기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도 옳다고 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이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향기는 꽃에서 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나 감각이나 의식을 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떠나서 따로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들의 통일체에 <나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케마의 이 말에서 우리는 <나가 없다>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것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행위를 가르치고 있다.

'비구들이여, 참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무명이 먼저 있어서 좋지  않는 생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겸손해 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참나를 볼 수 있는 밝은 지혜가 먼저  있어서 좋은 생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미 암아 부끄러워하며, 겸손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밝음을 따르는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모습들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정견이  생기느니라. 정견이 있으면 바른 생각이 생기고, 바른  생각이 있으면 바른 말이 생기고, 바른 말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생기고, 바른 행위가 있으면  바른 생활이 생기고, 바른 생활이 있으면  바른 정진이 생기고, 바른 정진이  있으면 깨닫기 위하여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는 정념이 생기고, 정념이 있으면 모든 집착과 분별심을 여의고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정정이 생기느니라.'

이와같은 바른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모든 탐욕이  없어지고, 노여움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진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있고  없음이 생기며 이것으로부터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에서는 항상 변하지 않아 생기는 것도 없으며,  없어지는 것도 없음으로 나고 죽음이 없다. 또한  밝고 고요하여 일체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깨끗한 본래의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1. 교외별전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다. 선은 가섭에게 교는 아난에게로  그 갈래가 나누어졌다. 말 없음으로서 말 없는데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로써 말 없는데 이르는 것이 교이다.

법이라든가 도라든가 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행위라는 언어를 사용하느냐, 일상 사용하고  있는 말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느냐 하는 차이점인  것이다. 어떤 것을 매체로 하든지 간에 마지막 목적은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서울로 가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서울의 모습을 말로써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 하늘을 쳐다보고 서울 공기를  마시면서 서울을 체험하는 것이 법이나 도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49 년  동안 8만 4천 법문을  설하였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나는  한 마디도 설하지 않았노라'고 한 그 말에서 우리는 교외별전의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붓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둘러 앉아 설법을 하고 있다가   돌연 꽃 한송이를 들어 올렸다. 모든 제자들은 갑작스러운 석가의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그냥 묵묵히 쳐다보고 있는데 한쪽 옆에 앉아 있던 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이것을 석가가 가섭에게  마음법을 전한 것으로 <영산회상 염화미소(靈山會上 占花微笑)>라고 이름한다.

한 번은 붓다 석가가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고 있을 때 비야리성에  있는 다자탑에 이르렀다. 붓다가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벗들이여, 우리들은 먼 길을 걸어왔다. 여기서 잠깐 쉬어도  좋으리라. 모두 편안한 곳에 자유롭게 앉아 마음과 육신을 푹 쉬도록 하자.'

그러면서 붓다는 다자탑  앞에 놓여 있는 큰  돌 위에 걸터 앉았다. 다른  제자들도 끼리끼리 편안한 곳을 찾아 앉았다.  제일 마지막까지 서 있던 가섭이 붓다 앞으로 걸어  갔다. 그러자

붓다가 앉아 있던 자리를 한쪽으로 옮기면서 반 쪽을  가섭에게 내 주었다. 가섭이 거기에 앉자 붓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붓다가 가섭에게  마음법을 전한 것으로 우리는 <다자탑전  반분좌(多子塔前 半分座)>라고 이름한다.

붓다 석가는 80이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유행(수행을 목적으로 전도도 하면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계속하고  있었다.  왕사성에서 마지막 전도의 길을 떠난 붓다는 갠지즈강 건너  북쪽에 있는 베사리 마을 근처에 있는  죽림촌에서 우안거(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을 멈추고 일정  기간동안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것)를 맞았다. 무서운 장마와 습기 때문에 노쇠한  육신은 혹독한 고통을 맞보아야 했다. 우안거가 끝나갈 무렵 오래간만에 건물 밖으로 나가 응달에 앉아 바깥 공기를 쏘이고있을 때 아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붓다가 말했다.

'아난아, 나는 이미  노쇠했다. 나이가  80이  아니냐. 비유하자면 낡은 수레는 가죽 끈으로 얽어맴으로써 겨우  움직일 수 있거니와 내  몸도 또한 가죽  끈으로 얽어 맨  수레와 같으니라.'

그 후 춘다가 올린  공양을 받고 병이 다시 심해져서 마지막 유행을 구시나가라성  밖 발제하 언덕에 있는 사라쌍수 숲에서  멈추었다. 이 세상에 머물 인연이 얼마  없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조그마한 의문이라도  있으면 지금 물으라고 하였다.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에 아무도 말이 없자 붓다가 말했다.

'벗들이여,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라.'

하시면서 조용히  열반(모든 애욕과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난 깨달은 사람의  죽음)에 드시었다.

인도 전역에 포교전도를 떠나 있던 제자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  라쌍수 숲으로 모여 들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지 일주일 후에 가섭이 도착하였다.  가섭이 관 앞에 꿇어앉자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한 발을 내 놓으셨다.

이것을 이름하여 <사라쌍수 유관족출(沙羅雙樹 遺官足出)>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기리켜  붓다가 말없는 마음법을 가섭에게  전한 삼처전심이라 하고  선불교 마음법의 기원이 된다.



2. 불립문자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던 <신학대전>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신학대전>의 집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퀴나스는 더 이상 책을 쓰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있기만 하였다. 옆에서 보다 못한 비서가 집필을  계속하라고 재촉하자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레지널드! 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수 십년 동안 저술한 것들이 모두 휴지에 불과한 것이라네.'

결국 <신학대전>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깨달음은 언어나 문자를  떠난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불립문자라 하는 것도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며 혹은 언어나 문자가 필요  없음을 뜻한다. 입(立)

이라는 글자는  어떤 형태로 못박아 놓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불립문자의 의미는  경전 속의 글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선종 제  6조인 혜능은 <참 본성은 텅  비어 있음>에 관한 설법을 하면서  공이란 말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지금 공을  말한다고 해서 이 공에  집착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면서 거기에 매달린다면 그대들은 결국  죽음과 어둠 뿐인 허공으로 떨어질 것이다.....   무릇 공에 집착하는 사람만이 경전을  비웃고 쓸모가 없다

고 말한다. 만일 정말로 말이나 문자를 버렸다면 <불립문자>란  말도 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말이기 때문이다.'

불립문자란 결국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완전히 부적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말이나 문자로는  깨달음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이나 문자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불립문자에 관한 대표적인 한 예로 신찬과 그의 스승을 들 수 있다.

신찬은 출가하여 초기에는  대중사에서 스승을 모시고 경전에만 빠져 있는  스승을 따라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몇 년 동안이나 경을 읽었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하루는 짐을 꾸려  행각(승려들이 수행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님)을 나섰다. 행각중에 백장을 만나 도를  깨닫고는 다시 원래 있던  절로 되돌아왔다.

그 절에서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도 스승은 옛날처럼 경을  펴 놓고 그냥 읽고만 있었다.

어느날 스승과 함께 목욕을  하는데 스승이 신찬에게 등을 밀어라고 하였다.  신찬이 등을 밀면서 말했다.

'좋은 법당인데 부처가 영험치 못하구나.'

이 말은 들은 스승이 고개를 돌려 신찬을 쳐다보자 신찬이 또 말했다.

'부처는 영험치 못하나 광명은 놓을 줄 아는구나.'

그날 저녁 스승이 창가에서  경을 읽고 있는데 벌레가 한 마리 날아 들어와서  창호지에 부딪치면서 나갈려고 하였다. 이  모습을 스승은 방 안에서 보고 있었고, 신찬은 밖에서  보고 있다가 게송(중요한 느낌이나 생각을 운율에 맞추어 표현한 글귀)을 지어 큰 소리로 말했다.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봉창을 치니 크게 어리석구나

백 년을 그런들 종이가 뚫릴까

어느 날에나 나갈 수 있겠는가.


이 소리를 듣고 이제까지 경전에만 얽매여 있던 스승이 크게 깨쳤다.



3. 직지인심


마음이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추상적인 마음을 나타내야할  때 누구나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마음을 바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선이라는 바다로 나아갈 수가  없다. 바로 마음이 선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는 것이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것은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  마음이라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 마음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마음이 나타내는  본성을 본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철석거리는 파도를 보지 않고 깊숙한 곳에 조용히 있는 바다의 본래 모습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혜능은 조계(광동성 소주부에  있는 쌍봉산에서  동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설법을 했을 때 첫마디를 다음과 같이 장식하고 있다.

'참본성은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부처를 이룰 것이다.'

이 말은 그의 모든  가르침 속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통찰을  아주 간결하게 드러내준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모든 깨달은 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성이다. 혜능은 참본성과  마음을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신하에  비교하였다. 참본성은 마음의 본래바탕이며, 마음은  참본성의 작용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왕이 더없이 완전무결하다고 해도  신하가 항상 충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만일 신하가 스스로  할 일을 다하면 온 나라가 평화로울 것이며, 반대로  왕을 거역하거나 스스로 꾀병을 부리거나 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혜능이 처음 마음을 깨친 것이 금강경의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는 내용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쉽게 혜능에게로 접근할 수가 있다.

혜능은 맑은 마음, 선한 마음, 공평한 마음, 바른  마음, 지혜의 마음, 평온한 마음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흐린  마음, 악한 마음, 공평하지 못한 마음, 삐뚤어진 마음, 번뇌에 빠진 마음, 혼란된 마음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고  있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경사가 없는 평지에서는 조용하고  맑게 흐르며, 급류를 이루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잊고 쏜살같이  나아가며 흙탕물을 이루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사상의 열쇠이다.

군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참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혜능의 다음 게송에서 볼 수 있다.

혜능이 방아를 찍고 있을 시절에  홍인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선언하였다.

'내 너희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무릇 출가 수행자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데도 너희들은 종일토록 복덕 쌓는 일에만 열중하고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은 않는구나. 참본성을  잃고 헛되이 헤매는 한 복을 누린다한들 어찌 삶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제 너희들은 각자 돌아가 마음을 깊이 살펴 스스로 깨우친 바를 게송으로 써서 내게 가져오너라. 누구든지 깨친 사람에게  위로부터 내려오는 옷과 그릇을 전하여 제6조로 삼겠다. 얼른 돌아가 글을 짓되 머뭇거리지 말라. 생각으로 헤아리기 시작하면 방해만 될 뿐이다. 참본성을  본 자라면 모름지기 한 마디 말에서도 볼 수가 있으며 칼을 휘

두르며 싸우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그 당시  첫째 제자였던 신수가 그날 밤 늦게 게송을 지어 복도에 붙여 놓았다.


이 몸이 보리수 나무라면          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틀일세           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時時勤拂拭

먼지 앉고 때 끼지 않도록 하세    勿使惹塵埃


이 게송을 외우면서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방아를  찧고 있던 혜능은 다음의  게송으로 답했다.


보리에 본디 나무가 없고          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明鏡亦非臺

본래로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本來無一物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까.    何處惹塵埃


마음을 바로 가리켜 참본성을 보게 하는 것이 혜능의 평생 과업이었다.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본성을 바로 보리라.'



4. 견성성불


혜능에게 있어서 견성은 곧 성불이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우리의 본성이 바로 부처요, 이 본성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

'사람의 참본성은 무한히  커서 만 가지 법을 다 포함하니  따라서 만 가지 법이 다 그 속에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와 모든 경전이 본래 이 참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다.'

혜능에게 있어서 <불성>은  곧 <깨달음>으로, 그가 말하는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부처야말로 참 부처다'라고 한  혜능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과 연결지워진다.

불, 법, 승 삼보에  관한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다. 불교 교리에서는  깨달은 부처님(불)과 그의 가르침(법)과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수행자(승)의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그러나 혜능은 깨달음(각)과 올바름(정),  그리고 깨끗함(정)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혜능의 의식속에는 형식적인 삼보를 뛰어  넘어 진실한 삼보를 바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은 법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승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진실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이 생각은 3조 승찬에게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하루는 나이가 40이 넘어 보이는 한 거사(3조 승찬)가 2조 혜가를 찾아와서 불쑥 말했다.

'저는 평소에 갖고 있는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혜가가 손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그 죄를 이리 갖고 오너라. 그러면 참회시켜 주겠다.'

거사는 무엇을 찾는듯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죄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는 손을 거두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의 죄는 이미 다 참회되었느니라. 앞으로는 마땅히 불,  법, 승 삼보에 의지해서 머물지니라.'

'지금 스님을 뵈옵고 승보가 무엇인지는 알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불보이며, 법보입니까?'

'이 마음이 곧 부처요, 이 마음이 곧 법이다. 부처와  법이 둘이 아니며 승보 또한 그와 같느니라.'

혜가로부터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터득한 승찬의 생각이 혜능에  이르러 좀더 구체화되고 확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혜능은 마음의 마술사였다.  삼보에 대한 생각도 혁명적이지만 삼신(법신, 보신,  화신)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역시 혁명적 이었다. 우리 자신의 몸  속에 모든 부처의 몸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참본성이 본래 맑고 깨끗하다는 뜻에서, 그리고  모든 존재가 그 원천을 참본성안에 두고 있다는 뜻에서 이 몸이 바로 깨끗한  법신불이다. 둘째, 참본성에서 나오는 지혜의 빛에 의해 모든 어리석음과  욕망이 깨끗이 쓸려 사라질때 우리의 참본성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난다. 이것이 원만한  보신불이다. 셋째,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고,  마음 속에서 착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곧 극락이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독사같이 되고 자비와 연민을 품으면 보살이 된다. 이 마음을 맑고 밝은 쪽으로  돌리는 순간 당장 지혜가 나타나 화신

불이 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물을 한번 생각해보자.

물의 본질이 법신불이라면, 물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따뜻한 물이나 차가운  물과 같이 물자체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보신불이며, 이 물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되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난  모양으로 되며, 이 물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  물이 상황에 따라 이와같이 여러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화신불이다.


이 삼보와 삼신에 대한  혁명적인 혜능의 해석은 불교 신자들에게 국한 되어 있던  불교를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확산되게 하였던 것이다.

중종 황제가 특사로  보낸 설간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혜능은  <참본성의 절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밝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비치지만 지혜 있는 이는 그것들이 본래 둘이 아님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이 차별 없는 본성이 바로  참본성이다. 참 본성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라  해서 적게 갖지도 않았고 현자라 해서  많이 갖지도 않았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깊은 삼매 속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껍데기로 나타남이 이같이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경지에 있으며 영원불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도>라고 부른다.'


혜능에 의해  불교 교리는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진실된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수행자와 속세인, 성인과 범인, 황제와 백성, 불교와 다른 사상과의  장벽이 혜능에 의해 무너졌다. 혜능이 읊은 다음의 게송은 누구를 향한 게송인가. 여기를 빠져나갈 무리들은 아무도 없다.


마음이 바르다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다면 참선이 무슨 필요한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들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니

참으로 나쁜 일들 흔적없이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되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혼란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데 시주돈도 필요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들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극락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혜능은 제자들에게 베푼  마지막 가르침에서 36가지나 되는 대립사건을  나열하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있음과 없음, 현상과 텅 빔, 움직임과  정지, 맑음과 흐림,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승려와 세속인,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올바름과 그릇됨, 어리석음과 지혜, 번뇌와 평안, 자비와 악의, 영원함과  무상함, 허와 실, 기쁨과 분노, 나아감과  물러남, 삶과 죽음, 화신과 보신 등의 상대적인 것들을 나열하며 이에 대해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이 36대를  잘 알아서 적절히 쓸 줄만 안다면 모든 경전의 진리를 꿰뚫어 상대적인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참본성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남과의 대화에서도 밖으로는 현상에 초연하며 안으로는 공 가운데  있어도 공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만일 현상에 집착하면  어리석은 생각만 늘어날 것이고,  공에 집착하면 어둠의 나락으로  더 깊이 빠져들 따름이다.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아 지리라.

누가 어둠을 물으면<밝음은 어둠의 원인이요, 어둠은  밝음의 원인이다.>라고 대답하라.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은 오는  것.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 둘의 상호관계 속에서 비로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의미가 밝혀 진다.'


견성성불에 대한 또 하나의 절정을 우리는 구저의 손가락에서 만나게 된다.

불법을 묻는 자에게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 깨닫게  하는 유명한 선사로 구저가 있었다. 그에게는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마침 어느 날 스승이 볼 일이 있어 절을 비운 사이에 선객이 한 명 찾아 왔다. 제자는 그 선객이  법을 묻자 스승이 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저녁 때가 되어 돌아온 스승에게  제자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구저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옆에  있던 칼로 '이 앵무새 같은 놈, 그것도 불법이냐.'하면서 제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제자는 아프고 억울하기도  하여 엉엉울면서 뒤돌아 나갔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천둥쳐 온다.

'동자야, 불법이 무엇이냐?'

제자는 무의식중에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서 뒤돌아 보았다. 스승의 손에는  손가락이 있는데 자신의 손에는 손가락이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제자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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