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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깨뜨려야 할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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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508회 작성일 21-07-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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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뜨려야 할 허상




1. 깨달음의 길이 하나뿐 이라는 허상


먼저 깨달음의 길이 하나뿐 이라는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

 단기 4325년 음력 4월 8일 석탄절 기념으로 서울 마음사라는 절에서 오전 10시부터{인류의 나아갈 길}에 대한 불교 공개 토론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어 꼭 참석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대구 정명원이다.

서울로 가는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자.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으며, 새마을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갈 수 도 있으며, 걸어서 갈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도 우리 인간의  수 만큼이나 많으며,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고, 걸어서 가는 것은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고속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으며, 걸어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자신에게만 최선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최선의 길이 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벗어던져야 할 편견은  스님의 길을 걸어가니까 깨달을 수 있고,  장사를 하면서 사니까 깨닫기가 어렵고, 더욱이  여자로서 집에서 살림을 살고 있으니까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고 하는 고정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물건을 많이 팔아 집안 식구들을 편안하게 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물건을 사므로서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  겠다는 지극한 마음으로  장사를 한다면, 깨달음과  장사하는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행위 속에  깨달음이 깊이 들어 앉아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는  나의 지극한 정성으로 만든 이 밥과 반찬을 집안  식구들이 기쁜 마음으로 먹고 건강하게  지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고, 집을 지킨다면 여자들이 하는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행위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성탄절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이고 어느 달이고  다 주님의 날이다. 따라서 똑같이 아름다운  날들이다. 오늘로 나는 벌써 여든  두 살이다. 이 해를 과연 넘길  수 있을까? 어느 날이고 다 태어나기  딱 좋은 날이고, 어느 날이고 다 죽기 딱 좋은 날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전날 슬퍼하며 울고 있는 친구들에게 '힘을 내! 지금은 눈물  흘릴 때가 아닐세. 지금은 기뻐하고 찬미할  순간이야.' 하면서 옆에서 있는 주치의 선생에게 '박사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먼 거리 여행  가방은 벌써 꾸려 놓았습니다.  떠날 순간이 오면 머뭇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젊고 총명한 아르키메데스가  갖고 있었던 화두는 {황금왕관을 깨뜨리지 않고  황금왕관에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지를 알아내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수 개월을 생각하였지만 문제를 해결할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밥 먹을 때도  그 생각, 화장실에 가서도 그 생각, 걸어 갈  때도 그 생각, 잠자리에 들 때도 그 생각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중 목욕탕에 갔다.

탕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몸이 물 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들어간 만큼 물이 밖으로 넘쳐 흘렀다. 순간 수십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면서 번개가 내리치고 꽉  막혔던 무명의 뚝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르키메데스 이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목격했고 아르키메데스 자신도 그때까지 여러번 탕에서 물이 넘쳐 흘러  나오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물이 탕밖으로 넘쳐 흘러 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홀연히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된 것이다. 탕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물속에 황금왕관을 넣으면 왕관의 부피와  꼭 같은 부피의 물이 흘러나온다.  흘러나온 물의 부피는 황금왕관의 무게와 같은  황금덩어리를 물속에 넣을 때 흘러나온 물의  부피와 같아야 한다. 황금왕관을 깨뜨리지 않고도  왕관에 사용된 황금의 양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여 알 몸으로 탕에서  뛰쳐나와 '유레카(발견했다), 유레카' 외치면서 왕궁으로 뛰어 갔던 것이다.

깨달음이란 것은 스님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 소유라는 인식이 앞서야 한다.

서울에 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듯이, 어떤 삶을 살아 가든지간에  모두  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一切衆生悉有佛性} 이라하여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어 성불할 수 있다. 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대전제이다.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서는 다음 조건을 충족시켜야 가능하다.

첫째, 자신의 생명을 내 던질 만큼 지극하고 절실해야 한다.

절실함에 대한 예를 붓다 석가의 수행시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석가는 숲속에 고요히 앉아 선정을 닦으며 하루 쌀 한  숟가락과 참깨 한 숟가락을 먹거나 또 어떤 날은 그냥 굶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한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고행을 하였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자  살과 피는 다 말라 버리고 몸은  종잇장 같이 되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기를 다섯번이나 하였고, 마침 육 년째 되는 봄 날 석가는  몸이 마르고 기력이 다하여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땅에 쓰러진채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쓰러진채 찾아온 우다인에게 한 말은 용수철처럼 끊임없이 튀어 오를려고 하는 인간의 영원한 귀감이다.

'우다인이여, 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될지라도  내가 맹세한 마음은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

만일 내가 도를 이루지  못하고 죽거든 그대는 내 시체를 매고 가비라성으로 돌아가서  이 사람은 처음 먹었던 마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정진하던 사람이며 큰 서원을 세웠고  바른 마음 바른 뜻을 지닌이의 시체라고 전해주오.' 하여 주위에 몰려든마을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또 지극함의 본보기로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살고 있는 가난한  여인의 빈녀일등의 얘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느 날 성에  나갔더니 온 성이 떠들썩하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석 달 동안 왕의 공양을 받고 있으며  오늘밤에는  수 만개의 등불을 켜 연등회를 연다고 하였다. 여인도 작은 등불을 하나 만들어 수  많은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부처님 처소로 가서 부처님이 다니시는 길목에 등불을 걸어 두고 '보잘것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부처가 되어지이다. '하면서  지극한 마음

으로 기도하였다. 밤이 깊어 모든 등불은 다 꺼졌지만  이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어 아난이 아무리 껄려고 애를 써도 꺼지지 않았다. 이를 보고 부처님께서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다.  그 여인은 이 등불의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다.'

아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부처님께 나아가 석달  동안 공양 올리고 수 많은 보시를 했으니까 자기에게도 수기를 달라고 하였다.

'대왕이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오.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시오.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으며 스스로 겸손하여 남을 존경해야 하오. 그러나 절대로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되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닦으면 뒷날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오.'

이와같이 절실하고 지극함이 없이는 깨달음에 한 발자욱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장사를 하더라도 생명을 걸고 성실하게 하여야 하며, 여자가  집안 일을 할 때도 지극한 마음으로 한다면 그 속에서 깨달음의 씨앗은 저절로 싹을 틔우는 것이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두번째 문은 자신도 잊을 만큼 무심해야 한다.

6바라밀을 실천함으로서 우리는 무심의 강에 이를 수 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가지 실천의 도를 의미한다.

자신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보시라 하며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저절로 보시가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잘 지키는 것을 지계라 이름하며 귀의 도적을  막으면 소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므로 스스로 구속 속에 있으나 구속에서 자유로운 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인욕이라 이름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향기로운 좋은 냄새와 악취가 나는 나쁜 냄새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길들여지므로 저절로 인욕이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을 정진이라 하며 혀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저절로 정진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을 선정이라 이름하며 몸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여 요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므로 항상 선정 속에 머물게 된다.

생명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을 지혜라 이름하며 뜻의 도적을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생각이 깨어 있어 행하는 모든 행위가 법에  맞으며, 모든 공덕을 즐겨 닦으므로 지혜의 빛이 항상 밝게 비출 뿐이다.

이 여섯가지 중에서 단 한가지의 실천이 부족하더라도  깨달음과는 십만리나 멀어짐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원만히 다 이루어지면 깨달음에 들어가는 세번째 문이 열리게 된다.

이 문은 자신과 우주가 하나가 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태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명현상이다.

정신과 육신이 일체가 되는 것이며, 나와 너가 합일하는  것이며, 자신과 우주가 계합하는 현상이다.

발음체가 외부  음파에 자극되어 이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것을  공명이라 하는데, 그러므로 공명은 주파수가  딱 들어맞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기자신을  내세우는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주파수와 상대방의 주파수는 틀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버리고 마음을 쉬게 할때  세상의  모든 일과 우주의 모든 현상에서 일어나는 주파수와 자신의  주파수가 확실하게 일치하여 공명현상을 일어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주파수를 갖고 잊지만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주파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지가  오면 거지와 계합하고, 장사꾼이 오면   장사꾼과 계합하고, 수행자가 오면 수행자와 계합하고, 자연과 더불어 있으면 자연과 계합하고,  홀로 있을 때는 가장 철저하게 자신과 계합하는 것이다.

진묵대사가 읊은 깨달음의 노래를 한번 살펴보자.


나는 이제 자유 얻어

천지간을 소요하네

생사란 웬 말이며

열반 또한 무슨 말인가

알고 나면 둘 아닌데

미혹하여 헤매누나.


한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이 곧 도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도, 깨달음이란 알고 모르고의 문제를 떠난 자리이다. 존재에  대한 온 몸과 마음의 공명으로 흠뻑 젖는 체험일 뿐이다.



2. 화두가 정해져 있다는 허상


두번째로 화두가 정해져 있다는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

화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울에 가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듯이 인간이 열어 놓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 많은 방법 중에서 가장 쉽고 보편적인 방법이 선불교이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화두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허상을 깨뜨려야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

내가 대구 정명원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대구 정명원에서 출발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단지 나 혼자만이 내가 있는 곳, 정명원에서 출발할 뿐이다.

박은 부산에서 출발할  것이며, 이는 광주에서 출발할 것이며, 홍은  전주에서 권은 수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서울까지 간다는 인식은 선불교의 진수인 화두에 나아가는 첫 걸음인 것이다.

서울에 가는 모든 사람들을  대구로 데리고 와서 서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있는 곳에서 목적지 서울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각자가 처해 있는 그 상황을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계도하는 것이 화두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는  묻고 대답하는 사람의 수 만큼  수만가지에 이르는것이며, 오늘 날까지 계속 위용을 떨치고 있는 화두도 수백 가지나 된다.

몇가지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남악 회양은 열 다섯에  출가하여 율종을 공부하였고 그후 숭산 혜안선사 밑에서 몇  년을 수행 정진하였지만 <깨달음>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육조 혜능을 찾아갔다. 혜능이 회양에게 먼저 물었다.

'한 곳에 틀어박혀 수행이나 할 것이지, 그래 어디서 왔느냐?'

'숭산 안화상 밑에서 수행을 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왔느냐?'

혜능의 이 물음에 회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묻고 싶었던 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어금니를 깨물며 물러  나왔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혜능에게서 들은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왔느냐?'하는 물음이 한 시도 회양을 떠나지 않았다.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 날 회양은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길로 바로 혜능을 찾아 갔다.

'저는 깨달은 것이 있어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래.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야단스러우냐? 깨달아으면 그만이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아직 더 닦고 얻을 것이 있는가?'

'닦고 얻음이 끝이 없지마는 때 묻거나 더럽혀질 수는 없습니다.'


한번은 조주가 머물고  있는 관음원에 왕이 들렸는데 조주는 선상에  단정히 앉아 일어나지도 않았다. 한참 서서 기다리던 왕이 조주에게 물었다.

'인왕이 존귀합니까, 법왕이 존귀합니까?'

'인왕의 자리에 있다면  인왕 중에서 높을 것이며,  법왕의 자리에 있다면 법왕  중에서 높을 것입니다.'

 이에 왕은 조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히 인사하면서 물러갔다. 다음  날 왕의 신하가 조주가 왕을 맞이하면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듣고  왕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힐책하려고 아침 일찍 조주를  찾아 갔다. 조주는 친히 나가서 신하를 맞아 들였다.  신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제 왕께서 오셨을 적에는  일어나지도 않다가 오늘은 신하인 제가 왔는데  어째서 친히 맞 아들이십니까?'

'당신이 대왕과 같았다면 노승 역시 일어나서 마중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하는 이 말을 듣고 세번 절을 하고 관음원을 떠났다.


용담은 천황문하에서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정진하였으나  별로 전진이 없었다. 하루는  스승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여쭙는다.

'제가 여기 온 뒤로 여지껏 불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온 뒤로 설법하지 않은 때가 없었느니라.'

'어디서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대가 차를 끓여 오면  나는 받아 기쁘게 마셨고, 밥을 갖다 주면 받아  즐겁게 먹었고, 그 대가 인사하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마음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인가.'

스승의 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자, 천황이 다시 덧붙였다.

'볼려면 당장 보아야지 생각해서 하면 벌써 어긋나느니라.'

천황의 이 말에 용담은 문득 깨닫고 한점의 의심도 남지 않았다.


결국 깨달음이란 '물  맛이 어떻다' 하고 설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을 마시고 물 맛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절실한  깨달음에 관한 문제를 스승에게 묻는다면 스승이 하는 역할이란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찰랑  일으키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붓다 석가께서도 49  년 동안 수 많은  제자들을 깨달음에 인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던진 것이 아니라 제자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물어 오면 그 의문에 대한 깨달음의 소리로 응답하였던 것이다.

평생 유일한 예외의  가르침이 최초의 설법으로 오교진녀를 향하여 던진  연기와 사성제의 사상체계였다.

연기를 깨닫게 하는 붓다의 방편이 사성제였던 것이다.

인생과 삶에  대한 과제의 제시가 '인생은  괴로움이다'하는 {고,苦}이며, 이  고가 발생하는 이유는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  하여 {집,執} 이라 하였으며 이 집착에  의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긴다  하였다. 이 상황이 극복된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가 {멸,滅}이며, 이 멸에 이르는 실천 방법으로 팔정도(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고집멸도}를  반복하여 실천하고 이해하므로써 연기의  도리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었고, 최초의  설법 이후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의 테두리에서  맴돌면서 화살의 끝은 연기로 향하게 시위를 당기게 연습시켰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 선불교에서도 달마의 유일한 대기설법은  제2조 혜가와의 문답에서 {마음}이라는 대전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뒤 그 깨달음을 이해시킬  대상을 찾는데 보름이나 걸어서 같이 수행하던 오교진녀를 찾아  사성제로서 연기의 도리를 이해시킨 역사적 상황에  비해, 선불교에서 달마가 혜가에게 마음을 전수한 상황은 한편의 소설처럼 극적이다.

달마가 소림굴에서 면벽 참선하고  있을 때, 어느 겨울 날 신광이라는  유학과 도교에도 정통하고  교학에 뛰어난 스님이 달마를 찾는다.

달마가 면벽 참선중인 굴 앞에서 몇번이나 큰 소리로  찾아왔음을 알렸으나 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저녁 나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밤새도록 내려 신광의 온 몸이 다  묻혔다. 그래도 신광은 밤을 지새우며 꼼짝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때 갑자기 달마의 목소리가 굴에서 울려 나온다.

'무엇을 구하러 왔느냐?'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전에만 매달려도 아니되며,  수행에만 얽매여도 안되는 것이며, 한량없는 긴 세월에 걸쳐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며,  행하기 어려움을 능히 참고 견디며 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광은 오직 법을 구하겠다는 한마음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호신용 작은 칼을 꺼내어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이를 본 달마는 신광의  구법의지를 확인하고 제자로 받아들여 이름을 혜가라 하였다.

그 후 혜가는 목숨을 걸고 수행정진하였으나 좀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없이 그냥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달마에게 묻는다.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쫓아 온 정성으로 노력하고  있사오나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저의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네가 편안하지 않다는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면 너를  위하여 그 마음을 편안케 해 주리라.'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마는 말했다.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이 대답을 듣는 순간 혜가는 홀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붓다에게서 { 연기}로  출발한 깨달음의 세계가 대승불교에서는 {공}으로  표현되더니 드디어 중국화 되는 과정에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공을  구체화하는 것이며, 연기의 도리를 체득하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이 우주를  온통 마음으로 가득 체웠던 것이며, 이  마음을 밝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상황과 성품에 맞는 {화두}을 던짐으로 깨달음을  체득하게 했던 것이다.




3. 화두를 시대와 지역에 따른 문화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허상

셋번째로 깨뜨려야할 허상은 문화와 지역성과 역사성이다.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떤 사건의 표현에 대한 이해에서 표기된  그 언어를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다.

더하기, 빼기, 곱셈, 나눗셈  정도 알고 있는 아이에게 미적분의 문제를  주고 풀어라고 한다든가, 미적분 푸는 과정을  아이가 멍청하게 쳐다보는 것은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적 풍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선불교의 화두를 이해한다는  것은 소 발의 쥐잡기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먼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보편화 되어 있는 중국사상의 뿌리인  유교와 노장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화두를 알려고 하는 것은  눈 먼 봉사가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져보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숨막히는 대전환, 눈부시게  반짝이는 언어의 정수, 언어의 반전, 귀를  찢는 고함소리, 이해 할 수 없는 몽둥이의  두들김, 경악할 돌발사, 신비로운 수수께기, 입가에  미소가 보일듯 말듯한 유우머, 기이한 행동, 우주를 사고 파는 우주적 농담등이 화두의 내용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노장사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도덕경의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것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요,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만물의 어머니>

본체에 있어서는 형태없는 공이지만

현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갖는다.

본체와 현상이 이름은 다르나 본래는 어떤 물건의 안과 밖의 다른 표현이다.

진실을 꿰뚫어 이것을 바로보면

궁극의 합일이 그 속에 있네.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고 보니

온갖 신비한 세계가 곳곳에 펼쳐지네.


도는 근본적으로 표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발산적 사고인 명상에  의한 직관을 통해서만 체험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사인 현상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 도가 있고 도가 현상으로 표현되는 손의 앞면과 뒤면에 불과한 것이다.

도덕경에서 보듯이 도는 진리자체와 현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도교에  불교의 껍질을 덮어 씌워놓고 조금만 손질하면  불교가 되는 것이다.

붓다에서 출발한 깨달음이  이상적이며, 귀족적이며, 어떤 특수상황에 매여 있었다면, 중국선불교에서는 평상심이 곧  도라는 현실적이며, 서민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로  탈바꿈하게 되는데서 선불교의 위대성이 깃들여 있다.

한번은 어떤 구도자가 노자를 찾아왔다. 노자가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그대가 데리고 온 이 많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이 말에 구도자는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자 당황하였다.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는가?'

현상에만 얽매여 있던 구도자는 큰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노자는 구도자에게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구도자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모르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알고나면 그 앎이 나를 번뇌케 합니다.

좋은 일을 행하지 않으면 남을 해치게 되고

좋은 일을 행하면 내 자신이 해를 입습니다.

주어진 일을 다하지 못하면 일에 소홀해지고

그 일을 다하자니 기진맥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선생님을 찾은 이유입니다.


그 구도자는 노자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 성품을 닦기 위해 독방에서  명상에 잠겼다.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하고 부정적이고 나쁜 생각은  끊으려고 하였다. 그렇게 열흘을 보냈지만 실망 뿐이었다. 다시 스승을 찾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련하다. 그대여!

가느 곳마다 막히고

가는 곳마다 묶이니

한번 풀도록 힘써 보게

만일 그대의 장애물이 외부에 있다면

하나 하나 처치하는 건 불가능한 일

차라리 한꺼번에 내던져 버리게

안되네!

그것들을 내던져 버리게

혹시 그대의 장애물이 내부에 있다면

하나 하나 깨뜨리기는 불가능한 일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을 내던져 버림으로

그 작용을 멈추게 하는 것 뿐

만일 그대의 장애물이 안 팎에 다 있다면

그대가 도를 지키려 하지 말고

도 속에 그대를 던져 버리게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불교의 화두의 모든 요소들이  이미 중국사상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중국의식에 단지 불교의 옷을 입혀 놓은 것 뿐 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불교 수용은 실로 적극적이었다.

A.D.67년에 후한  명제는 사신을 서역에 파견하여  승려 2인과 불상을 모셔와  낙양 백마사에 안치한 것을 필두로 하여 세계 역사상 전후후무한  대국가적인 사업으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된 인도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대역경사업이  백여년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교종의 황금시기를 맞게 되며,  중국인들의 뼈속까지 불교가 침투하여 토착화가 되면서  중국화된 불교가 의식 깊이 침잠해 있는 원래의 중국식으로 불교의 옷을 재단하기에 이른다.

중국인들이 재단하여 만들어 내  놓은 불교의 옷이 바로 선불교이다. 중국적인  정신과  생활속에서 피어난 찬란한 이 꽃은 중국에서 밖에 피지 못할 역사적 상황이었다.

도를 구하고자 혼자 찾아온  구도자에게 노자가 던진 첫 말 '그대가 데리고 온  이 많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하는  이 말에는 이미 진리를  꿰뚫어 바로 진리로 들어가게하는  수 천의 화두의 태동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제자중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 미트레야(미륵)처럼 중국사상의 밑바닥을  들춰보면 공자와 젊고 뛰어난 제자  안회와의 대화를 만날 수 있다.

안회는 위나라의 왕이  포악하여 백성들이 독재에 시달리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왕의 마음을 바로 잡아  백성들을 구제할 뜻을 품고 천하주유를 떠날 결심을 하고  하직 인사차스승 공자에게 떠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일찌기 제자들은 스승님의 가르침 중에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는 그만 떠날 것이요, 혼란한 나라가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구하라.  이는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이치다. 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가르침에 따라 떠나고자  합니다. 가서 위나라의 혼란을 치료하고자 합니다.'

공자는 이러한 안회의 열의에 냅다 찬물을 끼얹는 독설을 내 뱉는다.

'그래. 그렇게 가 봤자  다치기 십상이다. 병을 치료하든 나라을 다스리든  모두가 도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인데, 무릇 도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되네.

복잡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혼란이 일며, 혼란스러우면  걱정과 불안만 늘어나네. 이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잔뜩 억눌려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도 구제하기  힘드는데 남까지 어떻게 편안하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도를  깨친 사람은 우선 자신을 닦은  후에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자신이 철저히 도를  깨치지도 못하고서 어찌 다른  사람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안회는 수그러들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만일 제가  밖으로는 올바르게 행동하고 안으로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며 시종일관 한결같은 마음으로 뜻하는 바를 밀고 나간다면 괜찮을까요?'

그러나 공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되네! 자네는 아직도  수단과 방법에 마음을 두고 있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바로잡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자네는 아직도 자신의 얕은 마음을 길잡이로 삼으려 한다.'

그러자 안회는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공자가 말했다.

'우선 마음을 맑게 하게. 그러면 내 자네에게 방법을 일러주지.'

'마음을 맑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네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기운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네.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고 있네. 도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안회는 크게 깨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마음을 맑게  하는 수련을 해 왔지만  문제는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비로소 마음을 맑게  했을 때 저는 <나>라는  작은 존재가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텅 빈 상태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네. 그러면 이제 자네에게 그 방법을 일러주겠다.

우선 자네의 노래를 들어줄 귀가 있을 때에만 노래를  부르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침묵을 지키게.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게. 그렇게 하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걷는  일은 쉬울지 몰라. 하지만 땅을 밟지 않고 걷는  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사람의 전도사는 섣불리 사람의 계략과  속임수에 빠지기 쉬우나 하늘의 전도사는 그런 인위적인 방법이 전혀 필요가 없다.

자네는 날개로 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날개 없이 난다는 소리는 못 들었을 걸세.

지식이 많은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텅 빈 사람이 유식하다는 얘기는 못 들었을 것이다.

텅 비어 있음의 효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자네가 진정코 귀와 눈을  마음 속으로 돌리고 나아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찬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쓸어낸다면 그때는 귀신조차도 감동되어 자네의 마음에 감복할 것이다.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세상  만물이 자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태어날것이다.'

그 후 안회는 깊은 명상에 잠겼다. 하루는 안회가 공자에게 말했다.

'저에게 요즈음 정신적 발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저는 인(仁)과 의(義)를 잊게 되었습니다.'

'괜찮군.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네.'

며칠 뒤  안회는 다시 예(禮)와 악(樂)을  잊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머리를 저었다. 안회는 더욱 발심하여 일체 모든 것을 잊고 자신에게로 침잠하였다.

세번 째 만난 날 안회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잊은 좌망(坐忘)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놀라 그것이 어떤 경지냐고 물었다.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체험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무한과 하나가  되었다니 더 이상 어떤  편견도 없어졌겠군. 그토록  철저히 탈바꿈하였다니

더 이상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겠구나.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네. 이렇게 해서 자네는 나를 앞질렀군. 내 이제 자네한테 배워야 하겠네.'

이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 주저함 없이 공자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와 안회와의 이 대화는 이러한 인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공자가 제자들을 도에이르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독설적이며, 부정적인 대화법은 화두를 방불케  한다.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서로 진리와  마주치는 것 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도에 이르는데 있어서 스승과 주고 받는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도 동시에 일깨워 준다.

안회를 쳐다보며 '내 이제 자네한테 배워야 하겠네'하며 토해내는  공자의 말은 모든  명예와 집착을 벗어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진솔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어 요즈음 우리들의 삶에 많은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가장  평범한 삶의 진리를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다. 구도자에게 있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진리를  함께 추구하는 가장 좋은 도반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 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찬란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제자 아난이 '붓다여, 우정은 도에  이르는 절반이라 해도 되겠습니다.'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아니다. 우정은 도의  전부다.'라고 말씀하셨다.



4. 화두가 경전을 공부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는 허상


넷째,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서 경전을 공부하는 것과  계율을 지키며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관계가 없다고 하는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미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전제  조건을 습득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불교를  방편 삼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할때는 불교의내용을 이루고 있는 경전을 습득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말과 글을 배우는 것과 같은것이다.

중국에서 선불교가 융성할 때 대부분의  선사들도 그  당시 보편적이었던 교종을 거치면서 경전에도 정통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되새겨야 한다.

육조단경에서 일자무식꾼인 육조  혜능이 견성하는 것은 선불교의 뿌리와  지향점을 선명하게 나타내며 소설과도 같은 선불교의 역사를 창출하고 있다.

오조 홍인을 찾아가서 나눈 대화는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다. 홍인은 혜능을 보자 대뜸 이렇게 묻는다.

'너는 어디 사람이며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는가?'

'미천한 이 몸은 영남 신주에 사는 백성이온데 이렇게  먼길을 달려와 스님을 찾아 뵙는 것은 오로지 부처되고자 하는 한 생각 뿐 입니다.'

'남쪽에서 왔다면 너는 오랑캐가 아닌가! 그런 주제에 어찌 감히 부처가 되고자 하는가.'

'사람이야 남과 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 오랑캐의 몸과 스님의 몸이야 다르겠지만 우리가 지닌 불성이야 어찌 다를 수가 있습니까?'

불성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성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홍인과의  대화에서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불성은 모든 지식과 분별을  떠난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무식꾼 까지도  견성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식이라는 것이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식해도 견성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은  무식해야만 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이  경전에 정통한 사람보다 더 쉽게  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경전을 모르는 무식한 자가  견성할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면, 많은  경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더 많은 계기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깨달을 확률이 그 만큼 더 큰 것이다.

경전을 보기도 전에 묶어 놓을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많은 경전을 보고서도 경전에 얽매이지않고, 보고 난 뒤에는 강을 건너고 난 뒤 배를  버리는 것처럼 비워 버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서 깨뜨려야할 또 하나의 허상이다.

선불교를 화려하게 꽃 피운 다음 선사들은 경전과 수행에  대한 우리들의 허상을 깨뜨리는 좋은 귀감이 된다.


남악 회양은 육조 혜능이  조계에 들어간 677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10세에 불경을  즐겨 읽었으며 사서삼경에도 능숙하였다.  684년 15세에 형주(지금은 호북성) 옥천사  홍경율사 한테출가하여 697년에 수계하고 율장을 배웠다. 5년 동안  열심히 수행정진 하고 계율을 배웠지만 참다운 진리와 계합하였다고 생각되지  않아 숭산 혜안선사를 찾기에 이른다. 그  뒤 몇년 후조계의 혜능을 찾아 뵙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백장 회해는 복주 장락현  출생으로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더니 불상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처님이시다.'

'생김새가 사람 같아서 나와 다름이 없군요. 뒷날 나도 부처가 되겠습니다.'

그 후 15세에 출가하여 경, 율, 논 삼장을 익혀  통달하였고 마조가 남강에서 크게 선풍을 드날리자 찾아가서 법을 묻고 제자가 되었다.


위산 영우는 복주 장계에서 태어났고 15세에 출가하여  고향땅의 건선사 법상율사에게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다. 스님이 된 후 대소승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23세 때 강서지방으로 만행하며 백장을 찾아 뵈었다.

오랫동안 백장을 모시다가  그후 대위산에서 40여년을 머물면서 선교를 널리  폈으며 스승 백장이 제정한 백장청규를 충실히 이행하여 당대에 가장 규모가  큰 총림을 개설하였고 많은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천황 도오는 무주 동양 사람으로 속성은 장씨이며,  생김새가 특이했으며 어렸을때 부터 신동으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14세에 출가의 뜻을  부모에게 사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하루 한끼만 먹어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다. 마침내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명주 대덕스님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깍았다.

25세가 되자 항주 죽림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6바라밀을 닦았으며 다른스님들이 <용맹>이라 불렀다.

어느 날 여항에 갔다가  우두종 경산 도흠을 뵙고 다섯 해 동안 모시면서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그 후 다시  마조에게 나아가 두 해 동안 머물면서 더 열심히  수행정진 하였으며 그리고나서 석두를 찾아 나선다.

'지혜를 떠나서 어떠한 법으로 사람들을 제도하십니까?'

'노승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지 않은 데 무엇을 떠나겠는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바람을 붙잡을 수 있는가?'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야 어제 오늘 시작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대는 언제 거기서 왔는가?'

'저는 거기서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벌써 그대가 온 곳을 알고 있다.'

'어째서 증거도 없이 사람을 속이십니까?'

'그대의 몸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러하오나, 끝내 무엇으로 뒷 사람에게 보이십니까?'

'그대는 누구를 뒷 사람이라 하는가?'

천황은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후 10년 간 석두를 모셨으며, 스승이 입적하자  형주의 시자산에 소실된 천황사라는 폐사를 복구하여 머물렀다.


법안 문익은 여항  출신으로 속성은 노씨이다. 일곱살에 지통원의 전위선사에게  출가하여 월주의 개원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명주  육왕사의 희각율사 문하에서 경, 율, 논 삼장을 익혔으며 유학과 문학도 함께 익혔다.


덕산 선감은 780년  사천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동진 출가하여 율종 계통에서  공부하여 경전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특히 금강경에 정통하였으며, 청룡법사가  쓴 <금강경 해설>을 바탕으로 깊이 연구하였다. 별명이 <주금강>으로 불릴정도로 금강경에 빠져  있었다. 남쪽 지방에서 선이 크게 유행한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이렇게 외쳤다.

'수 많은  출가자들이 천겁만겁을 다 바쳐  부처의 의식을 배우고 계율을  지키느라 몸부림을 쳤지만 부처가 되지 못했거늘 남방의 순 도깨비 같은  놈들이 감히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하며  허풍을 떨고 있으니 놈들의 소굴로 쳐들어가  그 종자들을 없애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하리라.'

 장대에 금강경 해설집을 두  보따리나 꿰어 짊어지고 자기가 있던 사천을  떠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점심 때가 지나 배도 고프고 피곤하여  떡으로 점심식사를 하려고 떡집에 들렸다.

그런데 떡집 주인  노파가 보따리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는다. 덕산이  금강경 해설집이라고 대답하자 노파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내 물음에 대답을 잘 해  주시면 떡을 그냥 드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데 가서  드십시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마음에 점을  찍어 점심을 들고자하시는지요?'

덕산은 그만 말이 꽉 막혔다. 점심도 굶은 채 용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법당에 이르자 그는 큰 소리로 떠들었다.

'내 오래 전부터 용담에 와  보고 싶었던 차에 이제 와서 보니 연못도 안 보이고  용도 안 보이는구나.'

이때 용담이 나오면서 말을 받는다.

'아니다. 그대는 제대로 용담에 온 것이다.'

이 말에 덕산은 또 말문이 막혔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어느날 밤 용담이 덕산에게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그만 물러가 쉬게.'

덕산은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밖이 너무 어둡습니다.'

용담은 촛불을 켜서 건네  주었다. 덕산이 받는 순간 용담은 갑자기 불을 훅  꺼버렸다. 순간덕산은 깨달았다. 기뻐 큰 절을 하자 용담이 물었다.

'무엇을 보았길래 이리 절을 하고 야단이냐.'

'이제부터는 천하의 노승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덕산은 금강경 해설집을 법당 앞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며 말했다.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자 끝없이 넓은 이 우주에   털 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견성하고  난 다음 법을 펼칠  때까지 15년 동안의 공백은  예수의 10년 동안의 행적이 감추어진 만큼 큰 비중으로 선불교를 승화시키고 있다.

깨달음은 불교의 전용 소유물이 아니라 온 우주의  공동 소유이다. 불교적인 방법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배를 강물에 띄워  놓으면 언젠가는 어느 곳에  닿기 마련이듯이, 깨달음의 방법은 스스로 과정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경전을  통하여 깨달음이 표출될 때 먹물 옷을 입고 승단을  이루고 있는 현상론적인 불교가 되는 것이다.

혜능이 가르쳤던 그  당시 대부분의 법문이 반야경과 금강경에 의거하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깨달음이란 행복과  자유가 무한대인 상태라면,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자유는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을 방편으로 하여 얻어지는  목적인 동시에 과정인 것이다.  과정을 통하여 목적이 이루어지듯이 과정이 방편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목적이 되는 것이다.

경전도 바로  그렇다. 경전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편인 동시에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모든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경전을 충분히  습득하였던 상황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평생 수행정진으로 일관된 삶임을 되새겨야 한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였듯이, <매일 매일 좋은 날>이라 하였듯이,  깨달음이란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면서도 순간에  얽매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삶 자체가 깨달음임을  선사들의 수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깨치신 다음 49년 동안 한점 허트러짐 없이  모든 제자들과 더불어 수행정진 하였던 것에 대한 대답을 선불교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과  깨달음을 획득하기 위한 6바라밀의 수행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지 그 이

상의 것도 아니며,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하니까 경전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  의 언어에  불과한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 네가지의 허상을 모두 깨뜨릴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로  바로 들어가는 선의 문으로 들어갈수 있는 것이다.



5. 화두의 특성


화두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가?>하는 화두는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일어 나는 보편적 상황이며, 이 화두에 대한 붓다 석가가 깨친 보편적 진리가 {연기}이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의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둘째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서 특수적 진리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부처는 무엇인가?>,  <지혜의 본체는무엇인가?>와 같이 물음 자체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보편적 상황에 대한 물음을 던져 놓고, 거기에 응하는 답은 묻는 자와 대답자의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답이 얻어진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간시궐(똥막대기)'

한 스님이 동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삼근'

법상이 마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즉심시불(마음이 곧 부처)'


이와같이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보편적 물음에 대한 답이 전부 다르게 표현된다.

묻는 자와 대답자의 상황에 어울리는 특수적 진리로 표현되는 경우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똑같은 보물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적, 역사적,  지역적, 인간관계적 모든 상황이 고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똥막대기라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마삼근, 혹은  즉심시불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는 특수상황에 대한 물음으로서 특수적 진리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달마께서 동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 잣나무를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도 잣나무를 말한 것이 아닐세.'

'어떤 것이 달마께서 동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가 머물고 있었던 관음원의 법당 앞에는 잣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던 것이다. 밖을 내다보는 조주의 눈에 언뜻 보인 잣나무가 스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된 것이다.

지금 만약 우리가 해인사 선방에서 화두를 나누고 있다면  '법당 앞에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구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 보자.

어느 날 조주를 찾아온 두 선객이 있었다.

'그대는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던가?'

'온 적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들게.'

이번에는 다른 한 명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가.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었나.'

'예.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 차나 한 잔 들게.'

곁에서 지켜보던 절의 살림을 사는 원주스님이 끼어 들었다.

'스님, 전에 온 일이  없는 스님에게 차를 들라하고, 전에 온 적이 있는  스님에게도 차나 한잔 들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원주를 불렀다.

'원주!'

'예.'

'차나 한 잔 들게나.'

중국에서 차는  생활의 한 부분이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 이와같은 상황에서  화두를 나누고있다면 '여보게, 밥이나 한술 떠게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화두의 대부분은 묻는 자와 대답자의 특수상황에 대한 특수한 대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매달릴 수  있는 절실한 문제라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의 전부를 침투시키는 폭발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화두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방이 철판으로 막혀져 있는 답답한 방에 들어 앉아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을  통하여 철판 안에 갇혀 있는  나 자신과 밖의 우주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두의 깨우침이란  양 사방 막혀져 있는 철판의  어느 한 곳이 뚫어져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불과한 것이다.

깨달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스승이란 철판을 두드려 보기만 해도  얇은 곳과 두꺼운 곳을 아는 것처럼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하여 가장 쉽게  뚫어질 위치를 찾아주는 역할를  하는 것이며, 뚫는 것은 스스로 뚫어야만 하는 과제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화두는 하나뿐이다.

결국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명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화두가 되는 것이다. 조주의 '무', 운문의  '똥막대기', 동산의 '마삼근', 법상의 ' 즉심시불'등은 '이 뭣꼬?'에 대한 대답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x -6x +11x -6 = 0 이라는 방정식을 푼다고 하자.

인수분해를 하거나 숫자를 대입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방정식을 푸는 것은 '이 뭣꼬?'

라는 존재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되며, 위의 방정식을 풀면 답은 x = 1, 2, 3 이 된다. 우리가  조주는 왜 '무'라 했는가?, 운문은 왜 '똥막대기'라고 했는가?  하는 것을 화두로 드는  것은  위의 방정식을  풀면 왜 답이 1이 되는가?, 혹은 2가 되는가?, 혹은 3이 되는가? 하고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두를 잘못 챙기면 평생  헛고생만 하게  되고, 화두 하나 잘 챙기면  화두에 투자한 것만큼 성숙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생에서 '이 뭣꼬?'하는 화두 하나 자기 것으로 챙겨간다면 평생 삶이 헛되지 않으리라.


누가 있어 이 소식 묻는다면

부처꽃은 홀로 피었다 홀로 질뿐이라며

미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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