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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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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551회 작성일 21-07-0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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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부처


육조 혜능은 어느 날 스승인 오조 홍인으로부터 들은 비밀 하나를 회양에게 털어 놓았다.

'인도의 제 27대 조사인  반야다라께서 < 그대의 발 아래서 망아지 한마리가 나와  온 천하를 밟아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

말을 나타내는 한자어가  <마(馬)>이며, 이것은 마조의 속성이었고, 마조는  회양문하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선종 역사상 혜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조의 평생 가르침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혜능의 기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조 도일(709-788)은 한주 시방현 출신으로 성은 마씨이며  그 마을에 있는 나한사에서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후 그는 남악산 전법원에서  홀로 참선 수행을하고 있었다. 이때  남악 회양은 천태종의 2조 혜사선사가 창건한  남악산에 있는 반야사에서법을 펼치고 있었다. 반야사에서 4 km 쯤 떨어진 조그마한  암자에서 젊은 승려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는 소문이  회양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하루는 회양이  젊은 승려가 수행하고 있는 그 암자에  들렸다. 젊은 수행자 의 맑은 눈빛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성숙된 성품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회양이 암자에 도착하여  몇 시간동안 지켜보고 있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좌선(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몇 시간  동안 욕심스러운 마음과 화내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등 일체의 생각을 쉬며  바른 자세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 참선이라고도 함)을 하고 있었다.  누가 찾아 온것도 몰랐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변소에 갈려고 깨어났다. 회양이 먼저 물었다.

'젊은 수좌여, 무엇이 될려고 그렇게 열심히 좌선을 하는가?'

'오직 한가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회양은 벽돌 하나를  집어다가 마조 앞에서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그 스님이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변소에 가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동안을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어디에 쓸려고 하십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이 말을 듣은 마조는 웃으면서 반문했다.

'스님, 벽돌을 아무리 잘 간다고 해도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회양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하듯이, 좌선만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좌선만 하면 부처가  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이제까지의 생각이  소리없이 무너져 내렸다. 순간적인 충격에 정신을 잃을뻔한 마조가 조금 후 정신을 차려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 하는가, 소를 채찍질 하는가?'

마조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회양이 계속해서 말했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좌선을  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내려는 것이냐? 좌선을 하려는 것이라면 선이란 앉고 눕는 따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앉은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생각이 깨어 있어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무시해서도 안 된다. 앉아서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좌선이라는 형상에 집착해서는 도를 볼 수가 없다.'

마조는 이 말을 듣고  난 후 시원한 잣죽을 마신 것처럼 마음이 확  뚫렸다. 마조는 공손하게절을 올리고 다시 물었다.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모든  것이 허물어진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지혜를 가꾸는 것은  씨를 뿌림과 같고, 내가 너에게 법의 이치를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와 같다. 다행히 너는 인연이 성숙하였으니 곧 도를 보게 될 것이다.'

'도는 형상을 초월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네가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우주가 철저하게 하나가 되는 무상삼매에 드는 일이다.'

'거기에도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생성이나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의 게송을 듣거라.'


마음 밭에는 여러 종류의 씨앗이 뿌려져 있으니

적당한 때에 비를 맞으면 모두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모습이 없나니

어찌 피고 짐이 있으랴.


이 순간 마조는  확실히 깨쳐 자신과 우주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마음은 이현상세계에서 걸릴 것이 없었다.

검은 고무신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흰 고무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벽돌을 아무리 열심히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거울일때는 아무리 먼지가 덮여  더럽더라도 잘 닦음으로서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처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는 부처라는 목적지를 깊이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될려고 한다는 생각은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와 달구지는 나와 우주일  뿐이다. 그대는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를 치겠는가, 달구지를 치겠는가?

소를 친다면 자신에게  빠지게 되고, 달구지를 친다면 대상에게 빠지게  된다. 이것이 둘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한 분별심에서 볼  때는 소만 치면 달구지는 저절로 가게 된다. 화두는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소와 달구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 소를  치는 것은 달구지도 치는 것이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소와 달구지를 함께 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움직일때까지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후 마조는 10년 동안  회양을 모시면서 그 경지가  날로 더했다. 스승 곁을 떠나 강서로 가서 법을 펴니 수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들었다.


  마조가 가르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법을 절실하게 추구하는 제자들의  특성에 맞게 절묘한 방법으로 화두를  던지고, 물음에 대한 깨달음을 유도하여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

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여,  각자 자신의 세계를 펼치게 하였다. 한 스승 밑에서  수 십명이 깨달았다고 해서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제각기 독특한 개성과 깊이를 지녔던 것이다.

  마조에게는 특별히 아끼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서당  지장, 백장 회해, 남전 보원이 그들이다. 어느 날 밤 이들 세 제자는 스승과 함께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달이 좋은 밤에는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하고 마조가 물었다.

  서당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공양하기에  딱 좋은 때 입니다.'

   백장이 이어 대답했다.

   '수행하기에 적당한 때 입니다.'

  그러자  남전은 아무 말도 없이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렸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경은 지장에게 맞고,   선은 회해로 돌아갈  것이요, 오직  보원만이 홀로  물외에 초연해있구나.'

  이 대화는 앞으로 전개될  마조 승단의 체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혜능으로 부터 흥기한 선불교가 이제는  체제가 정립되고, 확립되어야 할 시점이었다. 경을  논한 지장은 나무의 가지에 비유할 수 있고,  선을 논한 회해는 나무의 줄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본성  자체을 논한 보원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지에서  와룡선생 제갈 공명의 출정을 두고 사마휘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아! 와룡선생, 그 주군을 얻기는 하였으되 애석하게도 그  때를 얻지 못하였구나. 그 때를 얻지 못하였구나.'

  혜능에 의하여  굳게 뻗어내린 뿌리를 바탕으로  이젠 기둥을 세울 때였다.  남전이 마조의 가장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마조의 법통은 강인한  기질과 관리능력에 뛰어난 회해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장은 선방 승려들이 지켜야할 규율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방랑벽으로 떠돌이 생활을  좋아하는 선승들에게 규율을 지키며 정착된  수행생활로 유도하여 수백년 선불교사에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하루는 백장이 마조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근본 뜻은 무엇입니까?'

  '지금 그대가 흥겹게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도 아니고, 우리가 죽어서 다시  극락세계에 태어 나는 내세에 대한 희구도  아니다. 단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한 가르침으로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며, 때에 따르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화살이 현재로 응집될 때, 정확하게 현재를 맞출  때 그 속에서 과거도 미래도 우주 삼라만상도 다 피어나는 것이다.

  화살로 꿰뚤어야 할 과녁은 자신 뿐이다. 이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지향하는 목적이었으며, 선을 포함한 모든 삶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대주 혜해가 처음 마조를  찾아 인사를 드리자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구할려고 여기에 왔느냐?'

  '불법을 구할려고 왔습니다.'

  '너는 어째서 자기의 보배 창고는 살피지도  않고   다른 곳을 찾아 방황하며 다니느냐? 도대체 너를 떠나 무슨  불법을 구하겠다고 찾아 왔느냐?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대주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무엇이 이 혜해의 보배 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말에 대주는 더 이상 의심함이 없이 직관으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 후 6년 동안 마조  곁에서 수행을 한 뒤에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  1권을 지었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나침반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내면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배창고를 보게 된다. 이때는 우리의 육신도 주위의  현상세계도 내면으로부터 울리는 자기 소리의 인식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마조는  매우 거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늑담 법회가  마조를 찾아와물음을 던졌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마조는 법회의 귀를 잡아당기며 나즉히 속삭였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가 마조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날이 밝거든 다시 찾아오게'  법회는 밤새도록 궁리하다가  다음 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하였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돌아가서 기다리다가  내가 법문하러 법상에 올라갈 때 다시  나오게. 그러면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는 이 순간 깨달았다.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마조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따귀를 한 대 때리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참나>를 보게하는데 있어서 따귀를 한 대 때리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방법도  없다. 산 속 깊숙히 보물이 묻혀 있다

면 그 보물을 어떻게 하면 끄집어내어 볼 수 있을까?

  밖에서는 아무리 볼려고 하여도 볼 수가 없다.  다이나마이트로 직접 산을 깨뜨리고 들어가 보물을 보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한번만에  안되면 여러번 깨뜨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냥  말로 이해시켜서는 육신에 쌓여  마음 깊숙히 숨어있는  <참나>를 끄집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따귀를  한 대 때리고, 내일 다시 찾아오게 하고, 또  기다리다가 다시 오 도록 하는 것은  다이나마이트로 산을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감싸고 있는 육신을 뒤흔들어 놓아 현상세계 넘어 있는 <참나>를 바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따귀를  때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것은 육신에 강력한 자극을 줌으로서 마음으로 통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확율을 가장 높게 하는 것이다.


  또 한번은 수로가 찾아와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서 공손히 절을 하였다. 그러자 마조가 대뜸 달려들어 그를 짓밟아  버렸다. 이상하게도 수로는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일어나 손뼉치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기하고 신기하다! 수천 가지의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바로 털끝 하나 사이에 있음을 내 몰랐구나.'

  그는 다시 한번 절을 드리고 물러갔다. 그 후에도 수로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조스승이 나를 짓밟은 후 나는 지금까지 줄곧 웃고 있다.'

  아마 수로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웃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막혀 있고, 맺혀  있는 곳을 쉽게 찾아 풀어주는 것이  스승이며,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  던진 구도자에게 있어서 형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늑담 유건이 하루는 법당 뒤에서 홀로 좌선을 하고  있었다. 마조가 이 모습을 보고그의 귀에 입을 대고 두 차례 훅하고 불자 유건은 선정에서  깨어나 마조임을 알고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마조는 방장실로 돌아가  시자에게 차 한 잔을 갖다 주라고  하였는데, 시자(나이가 많은 스님 곁에  있으면서 시중을 드는 스님)가  차를 갖고 오자 유건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큰 방으로 가버렸다.


  마조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이 얼마나 능하였던가는 석공 혜장과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혜장은 원래 승려들의 꼴도 보기 싫어하는 사냥꾼이었다. 어느 날 사슴을 쫓다가 그는 우연히 마조가 머물고 있는 암자(큰  절에 딸린 조그마한 절)를 지나가게 되었다. 혜장이 사슴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자 마조가 되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냥꾼입니다.'

  '활을 쏠 줄 아는가?'

  '쏠 줄 압니다'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느냐?'

  '하나로 한 마리를 잡습니다. '

  '그 정도라면 솜씨가 시원찮군.'

  '그러면 스님께선 활을 쏠 줄 아십니까?'

  '물론이지.'

  '스님께서는 화살 하나로 몇 마리를 잡으십니까?'

  '화살 하나로 한 무리를 다 잡는다네.'

  이 말에 혜장이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짐승들도 생명이 있기는 당신과 마찬가진데 어찌 그렇게 많이 죽인단 말입니까?

  승려의 옷을 입고서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까?'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그대는 자기 자신을 쏘지 않는가?'

  이 말에 혜장은  이제까지의 건방진 태도를 싹 버리고 엄숙해지더니  마조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나 자신을 쏘려고 해도 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마조는 호통을 쳤다.

  '이놈! 수 억년의  오랜 시간 동안 모르는 것이  원인이 되어 쌓아 왔던 번뇌를  오늘 단박쉬도록 하라.'

  이에 그는 그  자리에서 활과 화살을 꺽어버리고 스스로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마조의 제자가 되었다.

  하루는 혜장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마조가 지나가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 소를 칩니다.'

  '어떻게 치느냐?'

  '그 놈이 풀밭으로 들어가면 바로 콧구멍을 꿰어 끌고 옵니다.'

  '그대는 정말 소를 잘 먹이는구나.'

  승려집단이 도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한지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한편으로는 승려생활을 처음  시작한 초심자가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을 보고  유쾌하고 해학에 넘친 대화로 한껏 사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수행이 깊은  고참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중물이 덜  묻은 풋나기 제자들을 데리고 들길을 가면서 들오리를 구경하고 있는데, 한 제자가 물었다.

  '사구(四句, 불교의 변증법)와 백비(百非, 부정법)를 쓰지 말고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장 지적해 주십시오.'

  '나는 오늘은 너무 피곤하여 얘기를 할 수 없으니  지장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는 서당 지장에게 가서 물었더니 서당이 되물었다.

  '어째서 스승님께 묻질 않았느냐?'

  '스승님께서 저더러 스님께 가서 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지장은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말하였다.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이야기를 못하겠으니,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물어보게.'

  그래서 그는 다시 백장 회해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결국 그는 마조에게로  되돌아가서 두 사람의 얘기를  전했다. 다 듣고 난 뒤  마조가 말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구나.'

  <흰 모자>와 <검은 모자>에 얽힌 두 도둑에 관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한 도둑은 흰 모자를 쓰고 또  한 도둑은 검은 모자를 썼는데, 검은 모자를 쓴 도둑이 꾀가 많아 흰 모자를 쓴 도둑이  훔친 물건까지 몽땅 갖고 도망을 쳤다. 도둑의 물건까지 훔쳐 달아난 검은  모자를  쓴 도둑은 흰 모자를 쓴 도둑보다  더 인정사정 없는철저한 도둑이다.  지장이 머리 아픔을 핑계로 대답을  회피한 것은 머리 아픔만 나으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는 반면, 회해는 모른다고 딱 잡아 뗀다.  깨달음의 문제는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 있으며, 대답으로 불가능한 세계이다.

  말로 표현 될 수  있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 행위와 체험에  의해서 철저하게 자신에게로 침잠할때 도는 성숙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매 법상(785 - 805)을 만날 수 있다.  여러 해동안 홀로 참선을 하면서 오로지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한 생각뿐이었다. 몸은 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온갖 망상꽃이 피고  지고 하였다. 만발한 망상꽃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승을 찾아 나섰다. 법상은 마조를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묻고 있는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 말에   법상은 그 자리에서 깨닫았다.  그렇게 복잡했던 마음이 이 말  한마디에 하나가 되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분명하게 알았다. 그 후로  그는 대매산에서 30년을 머물렀다. 겨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토굴이었다.  비가 오면 짐슴들이 몰려 들었고,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지면 토굴은 낙엽에 묻히고 없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마조는 한 제자를 대매산으로 보내어 법상을 시험하게 했다.

  '스님께선 마조스승에게  무엇을 얻었기에  이 산에서  30년 동안을 머물렀습니까?'

  법상이 조용히 말했다.

  '마조스승께서 나에게 <이 마음이 부처다>라고 하였다네. 그래서  그 말대로 여기서 머무르고 있다네.'

  '요즈음에는 스승님께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즈음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 늙은이가 한없이  사람을 혼돈되게 하는 군.  비록 스승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한다해도 나는 오로지 <이 마음이 곧 부처다>일 뿐이네.'

  제자가 돌아와 마조에게 이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마조는 이렇게 말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매실이 익었다는 말은 대매의 이름과 연관시켜 표현한  중의법이다. 법상의 도가 익을 만큼다 익었다는 뜻이다.

  오조 홍인이 육조 혜능에게 의발(衣鉢, 가사와 밥그릇,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징표로 스승의 가사나 밥그릇을  제자에게 줌)을 전하고 떠나 보낼때, 배를 타고 홍인이  직접 노를 저으며 '너를 건네 주는 것은 내 책임이다.'라고 말하자, 혜능이 노를 받으며  '아니올시다.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깨닫기 전에는 스승을  의지해야 하지만 깨닫고 난 뒤에는 자신의  길을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대매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내보였고 이에 스승은 한없이 기뻤던 것이다. 분명히 깨달음은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난 분명한 자신의 길인 것이다.

  분주 무업(761 - 823)은 본래 계율을 중요시하는  율종(부처님의 가르침을 경이라 하고, 부처님께서 수행생활을 위하여 제정한  규율을 율이라 하며, 경과 율에 대한  설명및 해석을 논이라한다. 행동규범인 계율을 중요시하는 종파를 율종이라  한다.)에서 승려생활을 하였고 경전에도 매우 밝았다. 무업이  처음 마조를 찾아 왔을때  그의 훤출한 용모와  종소리 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마조는  이렇게 말했다.

  '그 법당 한번 웅장하구나. 다만 그 안에 부처가 안 계시는군.'

  그러자 무업이 공손히  절하고 꿇어 앉아서 물었다.

  '여러 경전들을 공부하여 약간 이해한 바가 있으나   선문에서 말하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얘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이지 따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무업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쪽에서 오신 달마 조사께서 비밀리에 전해준 법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아직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해 마음이 바쁘군.  물러가 있다가 뒷날에 다시 오너라.

'

  무업이 일어나 물러가려 하는 순간 마조는 그의 등에 대고 고함을 쳤다.

  '어이! 수좌(선원에서 참선 수행하는 승려).'

  무업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가 재차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是甚摩)?'

  이 질문에 무업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

  무업이 절하자 마조는 한 대 때렸다.

  '이 둔한 놈아 !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마조 제자중에 호기심이 유난히 강했던 오대 은봉이라는 수좌가 있었다.

  그는 과연 석두가  어떤 경지에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어서 마조께  인사드리고 석두를 찾아 나선다.

  '어디로 가려느냐?'

  '석두스님에게 가렵니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네.'

  '장대나무를 짚고 가다가 장터를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겠습니다.'

  곧 바로 떠나  석두가 머물고 있는 절에 도착하자마자  절을 한 바퀴 돌고는 지팡이를 한번 내려치고 석두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떤 도리입니까?'

  그러자 석두는 아픈 시늉을 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은봉은 이에 아무 말도 못했다. 마조에게 되돌아와서  석두와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마조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다시 한번 가보게 .  석두가  아이고 아이고 하거든, '허. 허' 하고  두번 소리를 내도록 하게.'

  은봉은 다시 석두에게로  갔다. 전번과 같이 이것은 어떤 도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석두가 느닷없이 '허, 허'하고 큰 숨을 내 쉬는게 아닌가.  섬짓 놀란 은봉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마조가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다 하지 않았더냐.' 하면서 은봉을 위로하였다.

  또 하루는 일하는 시간에 은봉이   흙을  나르는 수레를 밀고 있는데 마조가  다리를 쭉 펴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스승님 다리 좀 오무리십시요.'

  '이미 폈으니 오무릴 수 없네.'

  '수레도 이미 가고 있으니 물러나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수레를 멈추지 않고 지나가  스승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 잠시 후 법당으로 돌아 온 마조는 도끼를 집어들고 소리쳤다.

  '조금 전에 수레로 내 다리를 다치게 한 놈은 썩 나와라.'

  은봉은 서슴없이 앞으로 나와 스승 앞에 목을 내  밀었다. 그러자 마조는 도끼로 바닥을 치고 말았다.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하여  거기에 몰두해 있을 때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 문제를 푸는 계기가  된다. 화두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자신에 내재하고 있는  '이 뭐꼬'하는 화두 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맞이하는 자연의 새  소리에서 잠자리에 들때 마지막 전등을 끄는 그 순간 까지, 심지어 지나가다가 들리는 백정의  고기 써는 소리까지도 '이 뭐꼬'일 뿐인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면  발에 걸리는 돌부리 하나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일에 집약되는  것이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을 때는 아무리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하더라도  공염불일 뿐이다. 마음 깨치는  방법이 마조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확립되고 있다. 마조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소리에 맞추어  자신의 울림을 내 뱉을 뿐이다.

  하루는 양좌주가 마조를 찾아왔다. 마조가 먼저 물었다.

  '좌주는 경전들을 휼륭하게 강의한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부끄럽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하는가?'

  '마음으로 합니다.'

  '마음은 재주부리는 광대와 같고, 의식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는 어릿광대라고 하는데,어떻게 마음이 경을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양좌주는 언성을 높혀 말했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합니까?'

  '그렇지. 허공은 강의할 수가 있지.'

  양좌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긍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돌연  마조가 '좌주!'하고 뒤에서 불렀다.  머리를 돌리는 순간  양좌주는 철저하게 깨달았다. 기쁨에 넘쳐 마조에게 넙죽 큰 절을 올렸다.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얼 하느냐.'

  양좌주는 절로 되돌아가 대중들을 모아 놓고 '내 강의만은  남이 따를 수 없다고 자부 하였는데 오늘 마조선사로부터 한 질문을 받고 보니 평생했던  그 공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이제 알았네.'

  말을 마치고는 곧 서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소식도, 종적도 없이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렇게 한 평생을 보냈다.

  출가 수행자가 아닌 세속에 있는 수행자로서 불교 역사에  길이 회자되고 있는 사람으로 인도의 유마와 중국의  방온이 유명하다. 유마는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수행과 깨달음이 결코 먹물 옷에만  있지 않음을 보임으로 허상에 빠져 진실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유마가 사리불(부처님의 제자. 지혜가  제일 뛰어남)과 주고 받은 다음의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유마를 알 수 있다.

  '아! 사리불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니다. 대체 좌선이란 삶과  죽음을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몸이나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을 때, 이것을  좌선이라 하는 것이다. 또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에 갇히어 정적에 잠기는 것도  아니고 밖을 향해 어지러워지지도 않는 것이  좌선이며, 많은 그릇된 생각을 그대로 지닌  채 수행하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은 채  궁극적인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다.'

  유마는 좌선이 앉아 있는  형식에 있지 않고, 깨끗이 정제된 생각과  행위가 마음에 자유로울 때 바로 궁극의 세계에 계합(서로 조금도 틀림이 없이 꼭 맞음)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방온이 어떻게 해서  깨닫게 되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그는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고 먼저 석두 희천을 찾아 간다. 인사를 드리고 방온이 이렇게 물었다.

  '우주 만물과 벗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때 석두는 즉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마조를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마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한 입에 황하강의 물을 다 마시면 그때 가서 말해주겠다.'

  이 말에 방온은 철저히 깨쳤다. 다시 방온이 물었다.

  '본래인을 어둡게 하지 말고 스님께서는 눈을 높이 뜨십시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조는 눈을 아래로 홀깃 내려 뜨자 방온이 말했다.

  '최상품의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오묘하게 뜯는군요.'

  이 말에 마조가 눈을 위로 홀깃 올려 뜨자 방온은 절을 하며 덧붙였다.

  '조금전에 잘난 체 하다가 창피만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물은 근육도 뼈도 없으나 만 섬 실은 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치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가 있겠는가.'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으로써의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까지도 겸비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승께서는 왜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말하겠네.'

  '둘 다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건 더 쉽지.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면 되지.'

  '뜻밖에 이미 깨달은 사람이 찾아오면 스승께선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건 더 간단해. 서로 바라 보기만 하면 되니까.'

  이 대화에서 마조가 휼륭한 가르침의 비결을 가지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면 다시 긍정법을 쓰기도  한다. 이 두가지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제자의  공부와 인식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한  것을 상기한다면, 또한제자로 하여금 옭아매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임을 인식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진다. 물론 이 두 방법이 깨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마조가 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은 상태를 지속해 나가라는 눈짓 뿐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때와 장소를 떠나지 않는  선사들의 행위 속에 이미 불법이있음을 마조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단하 천연이 두번째 마조를 찾아 뵈러 왔을 때였다.   그는 마조에게 인사드리기도 전에 바로 큰  방으로 들어가 나한상(아라한을 조각한  것.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자를 아라한이라 한다)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많은 스님들이 크게 놀라서  급히 마조께 아뢰었다.  마조는 몸소 큰 방으로 들어가 그가 하는 짓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역시 그대는 내 아들, 천연스럽기 그지없구나.'

  단하는 즉시 나한상에서  내려와 절하며 '대사께서 법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였다. 이인연으로 그는 '천연'이라 이름하였다.

  또 하루는 어떤 스님이 법을 구하러 찾아 왔다. 마조가 먼저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호남에서 왔습니다.'

  '동정호에는 물이 가득찼더냐?'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많이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깨달음에 이르도록 때맞은 법비가 그렇게 내렸는데도,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말을 일러 주었는데도 그대는 어찌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법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과 다투고  있을 때 졌다고 시인함으로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감복되게 할 수도 있다.

  탐원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젊은 스님이 행각하고 다니다가  마조를 찾아 뵙더니 마조 앞에원의 모양을 그리고는 그 위에다 절하고 일어나자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부처가 되고 싶지 않은가?'

  '저는 눈을 비빌 줄 모릅니다.'

  마조의 눈에 젊은 수행자가 얼마나 뿌듯하게 보였겠는가.  회양과 처음 만났던 자신의 젊은 수행시절을 한번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으리라. 마조는 말했다.

  '내가 졌다.'

  젊은 스님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마조와 석두가 '천하를 둘로  쪼갰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는 터럭만큼도 적대관계가 없었다. 한 제자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 했다. 요즈음 처럼 자신의 집안 일 밖에 모르는 승단에 좋은 경책도  되며, 진리는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약산 유엄이 그  좋은 예다. 약산은 처음 율종에  출가하여 경전에 능하고 계율 지키는 데  철저하였다. 그러나 차츰 이것이 수도 생활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깨닫고 참된 자유와  순수성을 찾고자 율종을 떠나 행각하였다. 목적지는  석두였다. 마침 석두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했다.

  '저는 여러 경전들이 가르치는  바는 대략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방에서  <마음을  바로 보아 참본성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가르침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승께선 자비를 베푸시어  이 점을 깨우쳐 주십시요.'

  석두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음  둘 다 안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두가 말했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질 않으니 그만 마조대사를 찾아 가 보게.'

  석두의 권유대로 그는 마조를 찾아가 절을 하고 나서  석두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마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느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이게 하며, 어느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이지  못하게 한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순간 약산은 마조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는 스승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을 올렸다. 마조는 다시 물었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느냐?'

  '제가 석두스승과 함께 있었을 때는 무쇠소 등에 달라붙은 모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었다면 잘 간직하게.'

  참본성은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현상적인 형상 일체를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며  그러면 서도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며, 현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부정과 긍정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인 것이다.

  석두는 부정함으로서 진리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으며, 마조는 긍정함으로서  진리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약산에게는 마조와의 인연이 더 깊었던 것이다.

  그 뒤 3년 동안 약산은 마조를 모시고 수행정진하였다. 어느 날 마조가 다시 물었다.

  '요즈음은 깨쳐 안 바가 무엇인가?'

  '껍데기는 다  벗겨지고 알맹이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터득한 바는 이제 마음의 가장 깊은 속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몸뚱아리로 베어 나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산으로 가서 법을 펼쳐라.'

  약산이 대답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산에 살면서 스승 노릇을 하겠습니까?'

  마조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다.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안주하기만 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수 없는 것을 행하여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영원히 이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이래서 그는 석두 밑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통 약산을  석두의 제자로 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석두와 마조를 잇는 다리이다.

  약산이 스승이 되었을 때  도오와 운암이라는 두 제자가 있었다. 하루는  두 제자가 스승을모시고 산책을 하는데 약산이 문득 산 위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그루는 무성하였고 다른 한 그루는 시들어 있었다. 그는 도오에게 물었다.

  '저기 보아라. 너는 저 두 나무중에 시든 것이 좋으냐, 무성한 것이 좋으냐?'

  '무성한 나무가 좋습니다.'

  도오의 대답에 약산은 이렇게 말했다.

  '휼륭하다! 그 찬란한 빛으로 세상 만물을 고루 비추어라.'

  그리고 나서 똑같은 질문을 운암에게도 던졌다.

  '시든 나무가 좋습니다.'

  그러자 약산은 다시 말했다.

  '휼륭하다! 모든 것이 시들어 모습 없는 순수성을 되찾게 하라.'

  바로 이때 우연히 한 스님이 그 앞을 지나갔다. 약산은 그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무성한 나무는 무성해서 좋고, 시든 나무는 시들어서 좋습니다.'

  그러자 약산은 도오와 운암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것은 마조가 약산에게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안주하기만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가르친 그 말투의 여운이다.

  마조에 대한 감동적이며,  인간적인 일화가 또 있다. 현상계에 대한  모든 집착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도는 인간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이며, 인간적인 것의 배제가  아니라 가장 지극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순수한 것이다.

  그가 잠시 고향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이때 고향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 바로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와서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청소부 마씨의 아들 녀석 이 왔구먼!'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반은 장난, 반은 감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즉흥시를 지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나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마조는 제자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마술사였다. 형상에 얽매여  있는 제자에게는  초월의 세계을  보여주고, 절대적인 것에 얽매여 있는 제자에게는  상대적인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  수수께끼 같은 방법들을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마조는 788년 정월에 건창  석문산을 오르던 중 골짜기의 평탄한 숲속을  보더니 동행한 제자에게 '썩어 없어질 이 몸 다음 달에 저 곳으로 돌아가는구나' 하였다.

  산에서 돌아와 병이 깊어졌다. 하루는 제자가 요즈음  건강이 어떠냐고 묻자 마조는 이렇게답했다.

  '해같은 모습의 부처님, 달같은 모습의 부처님(日面佛 月面佛)'

  <일면불 월면불>에  대한 이야기는 <불명경> 제 7권에 언급되어 있다.

  '지금부터 수 겁이  지나면 한 부처가 나타나는데 이름을 승성이라고  한다. 승성불의 수명은 백억 년이다. 이  승성불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또 한 부처가 나타나는데  그 이름이 월면이다.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  낮 하루 밤이다. 월면불을 지나면 또 한 부처가  나타나는데 그이름이 일면이다. 이 일면불의 수명은 천 팔백 년에 이른다. ...'

  해와 달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해가 밝음과 움직임과  영원을 뜻한다면 달은 어둠과 고요와순간적인 개념이다.

  참본성은 영원하면서도 육신의 한계성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음으로  현상을 떠나지 않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2월 1일 목욕하고 가부좌(다리을 틀고 앉는 것)로 선정에 든채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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