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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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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413회 작성일 21-07-0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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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백장 회해)



처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물이 마침내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부지런함 앞에는 불가능이 없는 것이다. 선종 천 년의 역사가 백장의 성실하고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더 한층 빛을 발하게 된다.


백장 회해 (749~814)는 복주 장락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왕씨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경전과 계율과 논장의 삼학을 두루 닦았다.

그 때 마조가 강서에서 널리 불법을 펴고 있었으므로 찾아가 진심으로 마음을 쏟아 의지하였다.

절 뒷편에 있는 숲은 수행을 하다가 힘겨울 때 한 번씩 들러 푸념하는 곳이다. ‘불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생각을 집중하여 좌선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엉뚱한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벼슬길에 올라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았으며, 옆집에 살고 있던 소꼽친구 순이의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수만 가지 생각과 더불어 '불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간신히 움켜쥐고 있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면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불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풀지 않고는 못배길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스승 마조와 산책을 하다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들오리 떼를 보고 마조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날아가고 있는 저것이 무엇인가?”

회해는 보이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들오리 입니다.”

마조의 무심한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날았는가?”

회해의 아무 생각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서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마조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느닷없이 회해의 코를 세게 비틀었다.

회해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날아가 버렸다고, 어디 다시 한 번 말해 봐!”

마조의 이 말에 이르러서야 회해는 상황의 절박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무관심하게 내뱉은 말을 문득 깨닫고 보니 날아가 버린 들오리가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있는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수행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느 것 하나라도 관계없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마조가 날아가고 있는 들오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회해에게 물은 것은 아니다. 한가로운 마음으로 산책하고 있는 회해에게 열려 있어야 할 마음의 문이 분별심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조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는 들오리를 통하여 참나에 대한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회해는 참나에게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그냥 분별의 세계를 보였던 것이다.

마조는 친절하게도 ‘어디로 날아갔는가?’ 하고 다시 한 번 참나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해의 대답은 계속 과녁을 빗나가고 있었다.

화가 난 마조는 몸을 뒤로 돌려 따라오고 있는 회해의 코를 세게 비틀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코의 비틀림에 앞에 참을 수 없었던 회해는 ‘아야’ 하며 소리를 쳤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러면 지금 ‘아야’하고 소리치는 놈은 누구냐?” 하고 마조는 쏘아 대었다.

그 순간 회해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분별심을 떨치고 보니 진실한 대생명과 하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거처하고 있는 방으로 돌아온 회해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함께 수행하고 있던 스님들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회해를 보고는 궁금하여 물었다.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렇게 우는가?”

회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는가?”

아무 말 없이 계속 울기만 하는 회해를 보고 스님들이 몹시 궁금해 하자 회해는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내 코를 얼마나 심하게 비틀었는지 아직도 아파 죽겠다.”

“어쩌다가 그랬나?”

“스승께 직접 물어봐!”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서 회해의 일을 여쭈었다. 그러자 마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자신이 잘 알 것이니 회해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

그래서 그들은 회해에게 되돌아와 말했다.

“스승께서는 자네가 잘 안다면서 자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자 회해는 한바탕 웃기 시작했다. 같이 수행하는 도반들은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는 기가 차서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는 울더니 지금은 왜 웃는가?”

“그 때는 울었고 지금은 웃는다.”

회해의 대답에 도반들은 얼떨떨해졌다.

다음 날 법회가 있어 마조가 법문을 하려고 법당에 올라갔다. 대중들이 모이자마자 회해가 나와서 스승 마조가 앉을 방석을 돌돌 말아버리자 마조는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스승이 방장실로 들어가자 회해도 뒤를 따라 방장실로 들어갔다.


마조가 시치미 뚝 떼고 묻는다.

“어째서 내가 설법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 방석을 말아치웠는가?”

“어제는 스승께서 제 코를 힘껏 비틀어 아파 혼났습니다.”

“그래, 그때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이제는 코가 더 이상 아프질 않습니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그대는 어제 일을 깊이 밝혔구나.”


다리가 없는 불쌍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느꼈다면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고 그 측은한 마음은 가슴 깊숙이 남아 있어서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다시 그 마음이 되살아난다.

깨달음의 일은 어제의 일, 상황에 따라 인식은 형성될 뿐, 어제 깨달음의 일에 얽매여 지금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제는 아팠지만 지금은 아프지 않는 것이다.

회해는 큰 절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며칠 후 법당에서 마조가 법상 모서리에 놓여 있는 법을 상징하는 막대기인 육환장을 보고 있었다.

회해가 다가서며 물었다.

“ 법은 이 육환장을 통해서 작용합니까, 아니면 이 육환장을 떠나서 작용합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뒷날 설법을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겠는가?”

회해가 육환장을 잡아 세웠더니 마조가 말했다.

“법은 이것을 통해서 작용하느냐, 이것을 떠나서 작용하느냐?”

그러자 회해가 육환장을 원래 있는 자리에 세워 두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조가 있는 힘을 다 하여 악! 하고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회해는 사흘이나 귀가 먹었다.

오솔길은 얼마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면 낙엽에 묻혀 길을 찾기가 어렵다. 대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물줄기가 가늘게 흐를 때에는 이끼가 끼고 낙엽이 떨어져 물길이 막힐 수가 있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낙엽이 떨어지더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더라도 줄기차게 흐를 뿐이다.

마조는 회해에게 마지막으로 ‘악!’ 하고 고함을 쳐서 대생명으로 가늘게 흐르고 있는 물줄기를 도도하게 흐르는 큰 물줄기로 뜷어 놓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회해의 명성은 중국 천지에 진동하였다. 신도들이 청하여 홍주의 신오 국경지대인 대웅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의 바위와 묏부리가 깎아지른 듯이 높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따서 백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불교가 하나의 종파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불교 흐름을 주도하는 주류가 되는데 가장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아마도 백장일 것이다.

선사들이 대부분 율종 계통에 뛰어난 것은 그 당시 선종의 절이 따로 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종 사찰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백장이 선승들의 규범을 제정한 <백장청규>에 의하여 이때부터 선사찰이 독립적으로 세워졌으며, 청규에 의지하여 떠돌이 방랑 생활에서 정착 수도 생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집단을 이루고 제도가 제정되어 선불교라는 거대한 태동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설법당만 세우고 부처님을 모신 불전이 없는 절이나, 선방의 큰방에 모여 모두 공동 수행 생활을 하는 것은 청규에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청규의 내용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계를 받는 의식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누구든지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의무를 기록하고 있다. 백장 이전에는 승려들이 전혀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전래된 데로 밥을 빌러 다니는 탁발과 신도들이 절에 갖다 바치는 희사에 의존하였으며, 왕실과 관계가 좋을 때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의 차원에서 사원의 유지를 위하여 절에 희사한 전답의 소출에 의존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승려들의 노동으로 거둬들인 수확량에 대해서도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종교 집단의 경제가 국가로부터 특별히 혜택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백장의 이러한 건전하고 혁명적인 생각은 중국 불교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갈림길에서 선종만 살아남게 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백장이 세상을 떠나고 약 30년 후 814년에 불교는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814년에서 847년까지 집권한 당 무종의 불교 탄압사건이 그것이다. 이 재난으로 파괴된 승단은 그 이후 다시는 원래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이 무시무시한 탄압의 주된 원인은 사원경제의 비대에 있었다. 사찰의 경제적 윤택은 민심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또한 왕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845년 무종이 내린 칙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경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굶게 되고 한 여자가 길삼을 짜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옷을 입지 못한다. 현재 나라 안에는 비구(남자 승려)와 비구니(여자 승려)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 모두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놓은 곡식으로 먹고 다른 사람이 짜 놓은 베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또한 무수한 사찰들은 한결같이 웅장하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어 그 사치스러움은 궁궐에 못지 않다. 바로 이것이 진, 송, 제, 양 등의 나라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쇠약해진 원인이다,”


무종의 불교탄압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4천6백 군데가 넘는 절과 4만여 곳이 넘는 불당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26만여 명의 승려가 강제 환속당하고 16만 명에 달하는 절 머슴들이 나라에 귀속되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역사 속에서도 유독 선종만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의 실천으로 기적적으로 계속 발전하여 중국 불교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면 누구나 다음의 열 가지 계율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키겠다고 부처님께 맹세를 하여야 한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생명 있는 것은 모두 소중히 다루어 생명을 살려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아 항상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라).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순간적인 쾌락에 집작하여 자신을 버리지 말고 바르게 행동하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조그마한 이익에 얽매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신에게 철저하게 솔직하라.)

술을 먹지 말라(술과 오락 등 중독성 있는 것을 멀리하여 항상 바른 생각을 하라)

높고 넓은 좋은 침상에 앉거나 눕지 말라(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말며 항상 어려운 이웃들을 행각하라).

머리나 몸에 장식품을 달지 말고 몸에 향수를 바르지 말라(육신은 수행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명심하여 몸에 장식품을 달거나 향수를 바르는 사치를 하지 말라).

광대처럼 노래하고 춤추지 말 것이며 가서 구경도 하지 말라(항상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는 맑고 밝고 깨끗함 속에 자신을 머물게 하라).

금은 따위의 보물을 모으지 말라(현상을 바로 알아 철저하게 무소유로 살아라).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먹는 것은 후각과 촉각과 몸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행하기 위해서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


출가정신과 깨달음이란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을 자신과 같이 생각하여 더불어 존재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황벽이 백장 밑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백장을 찾아 뵙고 하직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마조 스승을 찾아 뵙고 오겠습니다.”

무엇인가 열릴 듯 말 듯 하면서도 도무지 잡히는 것이 없어서 마조스승을 뵙고 물어보면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백장의 말은 황벽에게 맑은 날 벼락처럼 큰 실망만 안겨 주었다.

“스승께서는 벌써 돌아가셨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황벽은 백장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그렇다면 마조 스승께서 어떤 법문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백장은 마조 스승과 있을 때 받았던 가장 감동적인 사건을 말해 주었다,

산보를 나갔다가 있었던 들오리 사건과 다시 스승을 찾아가 법당에서 있었던 육환장 이야기를 해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불법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때 내가 마조 스승의 고함을 듣고 난 뒤에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

황벽은 백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조 스승의 고함 소리에 빨려 들었다. 우주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백장이 체험한 깨달음의 세계를 전해들은 황벽은 몇 년 전 백장과 같은 상태를 체험하게 되었다.

황벽은 무상삼매에 들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혀를 밖으로 늘어뜨렸다. 이제까지 수천 번도 더 되씹었던 고민들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신세계의 위대함과 오묘함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에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에는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고, 지구 안에는 대한민국이 있고, 중국이 있다.

즉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고, 공간적으로 지역성이 있다,

그러나 생명까지도 내던질 만큼 지극함 앞에는 시간과 공간이 무너져 버린다. 분별을 떠난 오직 한 마음일 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에 있었던 일이 지금 이 순간에 재현될 수 있으며, 미래에 일어날 일이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백장이 깨달음을 성취하였던 그 상황을 듣고 있었던 황벽은 백장을 통해 마조와 마주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황벽은 백장이 되었으며 마조의 고함 소리에 백장이 깨달은 것과 같이 깨달음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황벽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장이 말했다,

“자네는 이제부터 마조 스승의 법을 잇지 않으려는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 스승님의 법문으로 마조 스승의 큰 기틀에서 나온 작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조 스승을 모릅니다. 만일 마조 스승의 법을 잇는다면 앞으로 저의 법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그래, 깨달은 바가 스승과 같다면 도는 반쯤밖에 안 되는 것이고, 깨달은 바가 자신의 것일 때 법을 물려받을 만한 것이다. 그대는 스승과는 또 다른 그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갈 만한 바탕은 되어 있네.”


그 뒤에 위산이 앙산 혜적에게 물었다.

“백장 스승이 마조 스승을 두 번 째 찾아뵈었을 때 육환장을 세웠던 인연에서 두 분의 경지가 어떠하였겠는가?”

앙산이 대답하였다.

“큰 기틀의 작용을 환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마조 스승은 138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는데, 몇 사람이 큰 기틀을 얻고 몇 사람이 큰 작용을 얻었겠는가?”

“백장 스님은 기틀을 얻었고, 황벽 스님은 그 작용을 얻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말로 떠드는 무리일 뿐입니다.”

“그래, 그렇지”


달이 중요한 것인지 달을 가리키는 손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간혹 착각을 일으킨다. 법이 중요한 것인지 법맥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 위산과 앙산의 대화는 법맥의 정통성을 나타내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물음과 대답임을 간파할 수 있다.

황벽과 주고받은 또 다른 이야기를 보면, 하루는 백장이 황벽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

“산 아래 가서 버섯을 따옵니다.”

“산 아래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는 데 버섯을 따면서 보았느냐?”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벽이 엎드리며 ‘어헝’하고 호랑이 소리를 내자 백장이 허리춤에서 도끼를 집어 들고 찍을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황벽이 얼른 일어나 백장을 잡아 세우더니 따귀를 후려쳤다.

그날 백장은 느즈막하게 설법하러 법당에 올라 말했다.

“대중들아, 산 아래 호랑이 한 마리가 있으니 그대들은 드나들면서 물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라. 노승도 오늘 아침에 한 입 물렸다.”


백장이 황벽과 주고받은 대화를 하나 더 보면, 어느 날 황벽이 먼저 물었다.

“옛 스님들은 어떤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까?”

이 말에 백장은 그냥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황벽이 다시 물었다.

“뒷날 법손들에게 무엇으로써 법을 전해야 합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장이 바로 말했다,

“자네가 바로 그런 사람인 줄 알았더니……” 하면서 방장실로 돌아갔다.


엄밀하게 법과 법맥은 초월과 현실이다. 백장은 초월과 현실이 실체를 통하여 하나임을 깊이 통찰하였다. 초월의 세계에 살면서도 현실에 적극적이었고, 현실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초월을 넘나들었다. 이러한 문제를 좀 더 구체화시켜 주는 늙은 여우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백장이 단상에 올라 설법을 행할 때마다 한 낯선 노인이 승려들을 따라 법당에 들어와 법문을 들었다.


어느 날 대중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노인은 남아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백장이 그에게 다가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사실은 인간이 아닙니다. 과거 가섭불(석가가 부처를 이루기 전 시대의 부처님) 시대 때 이 산에서 수행하던 승려였습니다. 그 때 한 승려가 수행을 많이 산 사람도 인과의 법칙에 지배를 받느냐고 묻길래 ‘그런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죄로 여우 몸을 받아 오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청컨대 저로 하여금 여우의 탈을 벗도록 스님께서 올바른 대답을 해 주십시오.”

백장이 말했다.

“그럼 나에게 다시 물어 보게.”

그러자 노인은 옛날 했던 그 질문을 반복하였다.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는 백장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의 몸을 벗었습니다. 저는 이 산 뒤에 살고 있으니 원컨대 저를 승려의 장례 의식대로 화장해 주십시오.”

다음 날 아침 백장은 절의 총무 일을 보는 스님을 불러 점심 공양(식사) 후에 곧 장례식을 거행할 테니 전 대중에게 알리라고 일렀다. 병중에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점심 공양이 끝난 후 백장은 그들을 데리고 뒷산의 한 동굴로 갔다. 거기에는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백장은 격식대로 화장하라고 일렀다.

그날 저녁 모임에서 백장은 제자들에게 여우를 화장하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황벽이 앞으로 나와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의 경우엔 대답 한 번 잘못한 이유로 여우의 몸으로 오백년을 살았는데, 모든 질문에 바른 대답만 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백장이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말해 줄 테니.”

황벽이 백장 앞으로 다가서면서 느닷없이 스승의 뺨을 쳤다.

이러한 행동에도 백장은 오히려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나는 네 놈이 수염만 붉은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붉은 수염을 단 오랑캐였구나.”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도는 이 둘을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둘 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질문에 바른 대답만 하였던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라는 황벽의 질문에 또 하나의 핵심이 숨어 있다.


백장이 황벽을 가까이 오라고 했을 때는 궁극적인 문제인 ‘참나’를 인식하는 것이 어떻게 말로 되겠는가? 하고 호되게 한대 때리려고 생각했었는데, 황벽이 먼저 알고 백장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백장이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깨달음의 경계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 제자가 이미 깨달음의 문안에 들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말이 ‘네 놈이 수염만 붉은 줄 알았더니 붉은 수염을 단 오랑캐였구나!’이다. 현상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붉은 초월에 계합한 채 현실에 고고히 서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 중에서 기적은 어떤 것일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도 기적이고, 암환자와 같이 살 가망이 없는 사람이 병이 나아 건강하게 사는 것도 기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장 평범한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지는 인식하지 못한다. 이 끝도 없는 광활한 우주에 수억 겁의 시간 속에서 그것도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이 순간 여기에 내가 있는 것만큼 기적적인 것이 또 있을까?

하루는 어떤 스님이 백장을 찾아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백장이 말했다.

“지금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백장은 그대로 후려쳤다.


스님 마조와 함께 있었던 수행시절의 얘기다. 하루는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여기 갔다가 오느냐?”

“뒷산에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만났는가?”

“만나지 못했습니다.”

“못 만날 이유가 없는데 왜 못 만났을까?”

“만났더라면 스승님께 벌써 말씀드렸습니다.”

“어디서 그런 소식을 얻었는가?”

백장이 고개 숙이며 말했다.

“우둔한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자 마조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내 잘못이다.”


서양에서는 시들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실을 나타낼 때 소금으로 비유하지만 동양에서는 간장으로 비유하고 있다.

백장산에서 법을 펴고 있을 때 하루는 스승께서 다른 제자를 시켜 편지와 장이 든 항아리 세 개를 보내왔다.

백장은 법당에 올라 법문할 준비를 끝내고 조금 전에 마조가 보내온 장 항아리를 법당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장을 가지고 온 사람과 많은 승려들이 모이자 백장은 주장자로 장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든지 바로 말을 한다면 장 항아리를 부수지 않겠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하면 이 주장자로 장 항아리를 부수겠다. 빨리 일러라.”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하자 백장은 스승이 보내온 장 항아리를 그 자리에서 주장자로 깨버리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청규에 따라 농사일을 하는 대중 노동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 번은 대중 울력으로 김을 매고 있는데 점심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그 북소리를 듣더니 갑자기 한 스님이 호미를 들고 일어서면서 한바탕 크게 웃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백장이 말했다.

“정말 좋구나. 이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 그리고 껄껄거리는 웃음 소리, 관음보살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것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하겟는가!”

백장은 점심을 먹고 난 후 그 스님을 불러 물었다.

“그대는 오늘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저는 오늘 아침에 죽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소리를 듣고 돌아가 밥을 먹었습니다.”

백장은 그 스님이 북소리를 듣고 했던 것처럼 껄껄거리면서 크게 웃었다.

저녁을 먹고 백장은 제자들과 함께 대중방에 있었다. 한 제자가 물었다.

“지금 계를 받아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온갖 착한 법을 다 갖추면 해탈을 얻겠습니까?”

“조금은 해탈을 할 수 있으나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해탈은 얻지 못한다.”

그러자 그 제자가 다그쳐 물었다.

“무엇을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까?”

백장은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뒤쪽에 앉아 있는 그 제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부처도 구하지 않고, 알음알이도 구하지 않아서 더러운 생각과 깨끗한 생각이 다한 뒤엔 이 구함이 없는 경지도 옳다고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다한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고 지옥의 속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극락의 즐거움도 좋아하지 않고 일체 법에 구애되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의 해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대들은 계율을 지키거나 착한 행위를 행한다고 해서 해탈을 이룰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항하수 모래만큼이나 많은 계율과 바름과 지혜를 알고 있는사람이라도 전혀 쓸모가 없으니 열심히 용맹 정진하라. 귀 먹고 눈 어두운 늙음의 고통이 닥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은 두려움에 떨며 갈 곳이 없으니 이 지경이 되면 손발을 쓰려 해도 소용이 없다. 알겠느냐.“


백장은 《백장광록》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데 옆길로 가지 않고 오직 바른 길을 택하여 견성하는 지표를 삼게 하였다.


선지식을 찾아뵙고 한 가지씩 알기를 구한다면 말과 견해에 얽매여 선지식 마군이에 빠지게 된다.


모든 중생을 제도한 뒤에 부처가 되겠다고 발원하면 서원에 집착하여 보살의 마군이에 빠지게 된다.


계를 지키고 선을 닦으며 지혜를 배우는 것은 다함이 있는 선근이다. 그들은 비록 맑고 깨끗한 수행처에 앉아 부처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수많은 사람을 깨달음에 인도했다 하더라도 벽지불(꽃이 피고 잎이 떨어지는 자연의 현상을 보고 혼자 깨달은 사람)을 이룰 뿐이니, 이는 선근의 마군이로서 착한 것에 탐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탐착하지 않으면 신령한 이치만이 오롯이 남아 매우 깊은 선정에 들어앉아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삼매의 마군이니, 삼매의 허상에 빠지게 된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공부는 때 묻은 옷을 빠는 것과 같아서 옷은 본래 있는 것이나 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있고 없음 등 모든 소리와 색은 기름때와도 같은 것이니 아예 마음에 두지 말라.

그러니 이제 있고 없음과 모든 현상의 허물을 끊고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한 생각이 있고 없음과 같은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이기도 하니, 정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부처인 이 몸을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마음의 작용이 나쁜 악에 부딪혀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착한 선에 부딪혀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과 악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옳다고 여기는 자를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과 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 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의 깨달음’이라 하니, 마치 ‘부처가 부처에 머물지 않아야 진실한 복전이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고요히 마음이 가라앉히고 살펴볼 때, 소리·색·냄새·맛·있음·없음 등 모든 법의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을 보시 받아도 된다.

그러나 있고 없고 등 모든 법을 대할 때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의 작용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티끌만끔의 탐욕과 애착이 있어도 살 한 톨의 시주물(베품을 받은 물건)이라도 축생의 과보를 받게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부처를 등지게 되는 짓이다.

무엇보다도 그대는 지금 모든 인연을 쉬고 만 가지 일을 그만 두어라. 착함, 착하지 않음, 세간, 출세간 등 일체 모든 법을 다 놓아 버리고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곳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을 제치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백장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대중들보다 솔선하였다. 대중들이 민망하여 삽이나 괭이 등 도구를 감추고 그만두시라고 청하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덕이 없어서 그러니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느냐.”

그러시면서 도구를 찾다가 찾지 못하면 밥을 굶었다. 여기에 연유하여 그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밀이 세상이 퍼지게 되었다.

스님께서 당 원화 9년 814년 정월17일에 열반에 들었다.


진리의 밝은 빛이 마음을 비추니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의 실상들이 그대로 드러나네.

문자와 형상에 매이지 않으니

깨끗한 마음자리

무엇에 물들겠는가

허망한 인연 바로 보기만하면

그대로가 한결같이 부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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