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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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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362회 작성일 21-07-0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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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잣나무니라



선불교사에서 가장 업적이 뛰어난 선사를 꼽는다면 달마, 혜능,  마조, 백장, 조주를 꼽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달마가 선불교의 씨앗을 뿌렸고, 혜능이 싹을  틔웠고, 마조가 봄과 같이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백장이 곧게  뻗은 줄기에 울창한 잎을  이루었다면, 조주는선불교라는 그 나무에 꽃을 피운 사람이다.

조용히 한번 관조해보라.  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알려고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주 종심(778-897)를 흔히 선가에서는 조주고불 또는 그냥 조주라고 부른다.

조주의 속성은 학 씨이며 산동성 조주출신이다. 그는  어려서 본주의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행각하다가 남전에 이르렀다. 마침 남전은 침상에서 누워 쉬고  있었다. 나이 어린 승려를 보자

남전은 그냥 누운 채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조주는 서상원이라는 절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전이 다시 물었다.

'서상원이라. 그래. 상서로운 모습은 보았느냐.'

'상서러운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누워서 졸고 있는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어린 승려의 이 뜻밖의 대답에 남전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에겐 스승이 있는가, 없는가?'

'스승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주의 이 대답에 남전은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고, 조주는  대답 대신 절을 넙죽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 봄이라 아직 날씨가 차오니 스승께선 건강을 살피십시오.'

이렇게 해서 조주는 남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남전도  이 뜻밖의 제자를 만나 무척 기뻤다. 무심하게 이루어진  듯한 남전과 조주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마조와 백장  남전 서당의 달맞이 이야기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달이 밝고좋은 때에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마조가 묻자 서당은 공양하기에 좋다고  했고, 백장은 수행하기에 좋다고 했고, 남전은 아무 말 없이 옷깃을  떨치며 가버렸다. 이에 마조가 말하기를경은 서당의 것이고, 선은  백장의 것이고, 오직 남전만이 홀로 물외에  초연하구나  하였다.

여기서 법과 법맥의 문제를 놓고 볼 때 법맥은  백장에게로 돌아갔지만, 법은 남전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불교의 조직과 제도등 승단 문제는  백장의 일이었고, 불법의 꽃을 피우는 것은 남전의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남전과 조주의 만남은 역사적인 필연이었다.

한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엇인지를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의 마음이 곧 도다.'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남전이 조주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한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더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를 뛰어넘어 일체를  다 여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에 조주는 홀연히 깨쳤다.

하루는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은 응당히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러자 남전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에서 논 밭을 일구는 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조주의 반응이었다. 어리둥절해  하기는 커녕 그는 스승에게 철저히 깨닫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전이 말을 받았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문으로 비치었도다.'

여기 두 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주의 정신과 깨달음의 기초가 바로 거기에 있으며, 백 년을  한결같이 구도자의 자세로 수행한 조주의 언행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첫째 대화에서 남전은 선의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는 <평상심이  곧 도>라는 말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도는 알고  모르는 지식적인 문제를 초월해 있는 것이며, 어떤 정해진  곳에 목적이 있어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딪쳐  경계가 일어나는 어디에라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도는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목적지를 둘러보고 그 정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적지의 모든 것을  몸과 마음으로 흠뻑 느낄 뿐이다. 남전은 도를 깨쳐 안 다음의  결과에 대해 '너의 눈은 더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을 뛰어 넘어 일체를 다 여실히  볼 수 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도의 초월성은 모든 욕심스러운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뛰어넘은  집착에 대한 초월이며, 평상심이라는 것은 집착으로 부터 자유롭고 여유있는 그  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는 종교나 어떤 철학적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두번째 대화는 일단 깨치고  난 다음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우주의 존재 실상,  생명의 존재 실상을 깨쳐 도와  계합을 하고 난 다음에는 가는 곳마다 도이며 시간마다  도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조주의 이 물음에 대한 남전의 다음  대답이 어쩌면 불교사에서 조주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조주의 질문에 남전이  <산에 웅크리고 앉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면 아마 조주는 평생을  홀로 산에 머물면서 자연과 우주와 더불어 도를 만끽하며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렇게 말없이 살다가 갔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전은 <산에서 마을로 내려가 한 마리의  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주는 평생 마음 밭을 경작하는 부지런한 한 마리의  소가 되어 더 큰 실체와 공명하기 위하여 60 년 행각이라는 전후후무한 구도행을 창출하였다.

'일곱살짜리 아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나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청할 것이며, 백세의 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보다  못하면 가르쳐야 한다.'라고 항상 스스로 다짐한  조주의 이 말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으며, 나이가  들어 늙었다고 가르침과 깨달음이 포기되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가르침과 깨달음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삶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놀라운 깨달음이 조주의 정신 속에 알알이 피어나 그의  온 몸과 마음을 타고 도도히 흘러 넘쳤다. 남전이 묘사한 대로 교교한 달빛이 그의 영혼의 창문에 비쳐 들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작은 집단인 가정에서 부터  가장 큰 집단인 국가에 이르기 까지 모두 집단 구성원에 대한 나름대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집단이 수직적인 질서 속에서  유지되어 가는데 비해  불교 집단은 철저한 수평적  관계 속에서유지되어 간다. 이  수평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불법이 꽃을 피워  만발할 것이며, 수평관계가 무너지고 수직관계가 이루어 진다면 이 곳에서는 법에 의한  불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인간에 의한 불교가 존재하게 된다.

진실한 법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은 어떤 집단이라도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아마 인류가 만들어 낸  집단 중에서 가장 철저한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은  선종 집단일  것이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철저한 도반(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에 지나지 않는다.

도를 깨치기 전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일 뿐이지만 도를 깨치고  나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형식만 남게 되고 실제로는 가장 좋은 도반의 관계를 이룬다.

제자가 깨치고 난 다음  대부분의 스승들은 제자들의 그 방자한 행동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승들은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또한 스승에게 그렇게  했듯이 제자의 그러한 행동을 보고 향수에 젖어 오히려  즐기고 있다. 황벽이 스승 백장의 뺨을 후려쳤을 때 백장은 껄껄  웃었고, 임제가 스승 황벽의 뺨을 후려쳤을 때도 황벽은 껄껄 웃었다.

한번은 남전이 조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인간의 무리를  떠나서 다른 무리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다.'

하지만 조주는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우선 <다르다>는 문제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도대체 <무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남전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네 발 짐승  흉내를 내었다. 조주는 대뜸 뒤로 돌아가 스승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법당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소리쳤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러워!'

남전은 자기를 쓰러뜨린 행위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면서  조주가 법당으로 가면서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는지 알 수가 없어  다른 제자를 법당에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조주가말했다.

'덤으로 한번 더 밟아 뭉게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이 소리를 듣고 남전은 더욱 더 조주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과 언어에 의해 고정화 되어버린 우리들의 사고의 장벽을 깨뜨리고, 모든 가식과 형식을 넘어   진실한 실체를 바로 보게 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을 보아야 한다.


실제로 남전과 조주는 다른 제자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서로 은밀히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조주가 남전에게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엌에서 불을 때는  화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부엌문을 꼭꼭 닫고 부엌에 연기가  자욱하도록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불이야, 불! 사람 살려!'

이 소리에 놀라 절은 발칵 뒤집히고 모든 대중이 부엌으로 몰려들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바른 말을 하기 전엔 이 문을 열지 않겠다.'

많은 스님들은 더욱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때 남전은  한참 동안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다가 별 다른  움직임이 없자 말없이 부엌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 주었다.

이것이 바로 조주가  심중에 두고 있던 <바른  말>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곧 문을  열고 나왔다.

깨달음이란 결국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바른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말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바른  말>이라는 것은 침묵도 될 수 있고, 몽둥이도 될 수 있고 이 경우처럼 열쇠를 건네주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해보자.

문이란 열릴 수 있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바깥쪽에서  열 때는 열쇠라는 매개체가 필요하지만 안쪽에서 열 때에는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스스로 열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화부 조주는 열쇠 없이도 혼자서  문을 열고 나올 수가 있었다. 스승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사실상 문을  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없다.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남전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조주는 불 속에서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스승은 깨달음의 계기를 주는 것이며,  조주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듯이 깨달음은  스스로 체득해야 하

는 것이다.


남전과 조주사이에 있었던  일화 중에서 지금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화두가 있다. 한번은 절의 동쪽과 서쪽에 거처하는 승려들이 고양이  한마리를 놓고 서로 갖기 위해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남전이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 고양이를  움켜잡고는 그들에게말했다.

'너희들 중 누구든지 바른  말 한 마디를 하면 이 고양이를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대중들이 여러 소리를 하였지만  한 마디는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전은  칼을 빼내어 가차없이 고양이를 두 동강  내었다. 외출 중이었던 조주가 저녁무렵에 돌아와  스승께 인사를 드리려 방장실에 갔더니 스승은  조주에게 낮에 있었던 사건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조주에게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조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스승이 뒤에서 말했다.

'그때 만일 자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남전이 고양이를 죽인 이 사건은 백장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고 한 것과 대별되는 좋은 예이다. 남전이 감정적인 사람이라면 백장은 성실한  사람이다.  견성한 두 거 물을 놓고 마조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법이 없을  때 법은 모든 것에 우선하지만 둘 다 법을 쥐고 있다. 승단이라는 거대 조직을 놓고 볼  때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한 승단 제도를 확립시킬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이 더  적합하다. 결국 백장의 성실성은 선종을 천 년 동안  빛나게 했고, 남전의 감정적인 성격은 선종에서  남전의 위치를 축소시키고 말았다. 마조라면  백장이라면 지장이라면 고양이를  죽였겠는가. 아니다. 단지 그  고양이는

남전이였기에 죽였을 뿐이다.

엄밀히 남전의 이 행동도 이류중행(異類中行)에 속하기는  한다. 불교사전에 이류중행을 다음 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의 깨달음의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버리고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미혹한 세계에 자신을 던져 중생과 일체가 되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

2. 선사가 수행자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는 일.

3. 이(현실적인  것)와 류(이상적인 것)를 모두  초월하여 절대의 경지에  철저하게 안주하는일.

남전의 행위는 충격적이지만 냉정하게 긍정적인 면을 한번  살펴보자. 비록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면서 다툰 행위는 사소한 것이지만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헌신짝 버리듯이 하고 혈육의 정 마저 끊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도를 구하기 위하여 택한 출가의 길이  아닌가. 만약 출가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면 자신보다도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였을 것이며, 모든 소유를  벗어던진 출가자에게 어찌 고양이 한 마리로  온 절이 떠들썩 하게 되었는가.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본 남전의 눈에는 출가한  근본정신이 흐터러져 있는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먼저 모든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려야 한다. 그런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서만이  제자들의 흐터러진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대자유의 길을 초연하게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전이 사용한 방법이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최선의 선택   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어쨋든  제자들에게 정신적 해방을 주기 위한 잊을 수 없는 교훈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저녁이 되어 돌아온 조주의 행위이다. 스승의 이야기를  다 듣고 아무 말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간 조주의 심정은 어떠 하였을까?  스승의 불같은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조주. 만약 그때 자신이 옆에 있었더라면  스승도 구하고 고양이도 구할 수 있었을텐데. 평상심이 곧  도라고 일러주신 스승의 말이 새롭게 되새겨지고,  그러면서도 아무리 스승이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말없이 나가는 그 행위 속에는스승의 경솔한 행위에 대한 준엄한 경책도 포함되어 있다.

'그때 만일 자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절반은 화두이고 절반은 자책인 남전의 독백이 들려오는 것 같다.

깨달음을 증득한 후에도 조주의 유행은 80 세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니면서 서로 법담을 나누고  산과 강을 즐기기도 하였다. 도반들이 이제 그만 절을  세우고 한 곳에 정착하라고 하였지만 조주는 도무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한번은 주유를 방문하였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스님, 이제는 그만 어떤 절에 정착해서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착할 곳이 어디란 말인가.'

'뭐라고요? 그만큼이나 나이를 잡수셨으면서도 정착할 곳도 모른단 말입니까?'

물론 여기서  주유가 말한 정착할 곳이란  바로 본래면목을 가리킨다. 조주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본래면목인 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주유의  물음에 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우스

꽝스럽게 되었다.  조주의 그러한 반문은 스스로를  아주 바보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이렇게 탄식 했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산천을 구경하며 자유롭게 돌아다녔지만 오늘 처음으로  당나귀한테 한대 채였도다!'

그 뒤 조주가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로 갈려고 짐을  꾸리고 있는데 그 절에 있던  한 유식한스님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그를 놀렸다.


청산치고 도량 아닌 곳 없건만

구태여 지팡이 짚고 청량사를 찾다니

구름에서 황금털 사자가 나타난다 해도

바로 보면 길조가 아닐텐테!


그렇게 놀려대도 조주의 만행은 계속되었다. 떠나면서 시를  지은 그 스님에게 조주는 이렇게 되물었다.

'바로 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조주가  만행할 때 지팡이와 함께 <바로 보는눈>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또 한번은 행각하면서 나이가  많은 스님이 계시는 선원으로 갔다. 인사를  드리자 마자 조주가 물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자 그 스님은 주먹을 들어 세웠다. 이에 조주가 다시 말했다.

'물이 얕아서 배가 정박하기가 어렵군요.'

조주는 바로 나가버렸다. 행각하던 중 또 다른 선원에서 그 노스님을 만나게 된다.

만나자마자 조주는 또 물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스님은 역시 전번과 같이 주먹을 들어 세웠다. 그러자 조주가 말했다.

'전번에는 물이 얕아 배가 정박할 수 없더니, 이제는  능히 배가 정박했다 빠져나갔다 하는군요.'

이렇게 말하고는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조주가 하루는 백장산을 찾았다. 인사를 드리니 먼저 백장이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었다.

'남전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자 백장이 다시 물었다.

'남전은 어떤 말로서 사람을 깨우치는가?'

조주가 대답했다.

'언젠가 스승께서 비록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엄연히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장이 큰 소리로 꾸짖었고, 조주는 꾸짖음에 대해  놀란 모습을 하였다. 백장이 말했다.

'정말 엄연한 모습이구나.'

그러자 조주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왔다.


다음은 조주가 행각하면서 문수보살을 만난 일이다.

한번은 조주가 행각하고  있을 때 괴상한 모습을  한 두 스님을 만났다. 한  스님은 정상적인 승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의 모습은 머리를 땋아 올린 어린 총각이었다.  조주가 인사를 하였는 데도  두 스님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이튼 날 아침  일찌기 그머리를 땋아 올린  동자가 한 냄비의 밥을 가지고  와서 땅 위에 놓더니 세  그릇으로 나누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밥상 앞으로 다가가서 동자와  서로 마주 보고 앉았지만 아무도 조주를부르지 않았다.  조금 화가난 조주도 밥상앞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동자가  스님을 훑어보자 스님이 조주에게 말했다.

'아침 일찍 깨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밤중에 길을 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화가 나 있던 조주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찌하여 이 행자는 예의 범절이 없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그는 다른 데 아이란 말이오.'

그러자 조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쳐 보낼 뻔 하였소.'

그러자 동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스님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더니 동자는 산으로 들어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여기서 동자는 문수보살이라도  좋고 보현보살이라도 좋고 혹은 보잘것 없는  행자(승려가 되기 위하여 과정을 이행하고 있는 사람)라도 좋다. 동자가 상징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이것은 동자를 무대에  등장시키면서 평상심이 곧 도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조주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괴상한 두  스님을 만난 순간부터 조주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공양을 차려놓고 조주와 스님이 나눈 대화  중에 '그는 다른 데 아이란 말이오.'라는 이 말은 현실과 대별되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  것이며 이때 비로소 조주는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도란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정식으로 하는  문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만나는 물건마다 다 도인 것이다. 조주가 '하마터면  그냥 지나쳐 보낼 뻔 했소.'하는 말에는 두 스님을 만나는 순간 그 상황과 계합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본

사실을 시인하면서 <평상심이 곧 도>라는 명제를 깊이 되새기고 있다.


80 세가 되어서야  조주는 조주의 동쪽 교외에  있는 관음원에 자리를 정하고  선객들을 맞아 들였다. 평생 일관된 그의  생활 태도는 대단히 검소하였다. 스승 생활 40년 동안  한번도 새

가구를 들여놓은 적이 없었고, 신도에게 시주를 권하는 편지 한 장 쓴 일이 없었다.

화두에 관한 일화도 조주만큼  많은 선사도 드물 것이며, 또한 화두가  갖는 특이성을 조주만큼 확실하게 보인 선사도 없을 것이다.

선가에서 흔히 인용되고 있는  화두 중에 조사가 동쪽으로 온 뜻은? 하는 물음이  있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가 찾아와  질문하는 선객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그 선객의 상황에  맞게 대답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평상심이 곧 도라는 인식은  조주의 평생 삶이 이를 뒷바침 해주고 있으며, 아울러 전 화두의 뿌리는 여기로 귀착되어  있다.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이곧 도이며, 자신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잊고 있는 이  현실적 상황을 환기시켜줌 으로 도에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하루는 정견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렸다.

이에 정견스님은 말했다.

'그것이 그것이군요.'

'나는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하루는 정어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앉아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의자의 다리가 그것이다.'

이에 정어스님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것이군요.'

'그것이라고 한다면 빼내어 가져가거라.'


하루는 정사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동쪽 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동쪽 벽에 표주박을 걸어놓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루는 정업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잘못알아 들은 것처럼 조주가 뭐라고 하자 정업스님이 다시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자네와 내가 네 개의 눈으로 서로 보고 있어. 그  외에 따로 제2의 주인공이란 없는 것이다.

'


하루는 정명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울안에 있던 소가 도망을 갔구나.'


하루는 정정진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그 스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는 왜 절에 와서 나를 욕하는 건가.'

그러자 정정진스님이 되물었다.

'저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 나는 절에서는 그대를 욕할 수가 없다.'


하루는 정념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정념스님의 앞니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네 앞니에 곰팡이가 폈구나.'


하루는 정정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힐껏 법당 앞에 서 있는 잣나무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그러자 그 스님이 달려들  듯이 '뜰 앞의 잣나무를 물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물었

다.

'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 역시 똑같은 대답을 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여기서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화두의 특성을 만날 수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뜻은 무엇입니까?'하는 똑같은 물음에 대한 조주의 대답은 다양하다.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대답이 모두 다르다. 문제를  던진 사람과 조주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특수상황일  뿐이다. 화두란 말과 언어의 논리성을 넘어서 그것이 나타내는 이미지나 개념 자체를  파악하여 그 물음에 대한 적절한 현실상황으로 응답하는  방법론인 것이다. 정정스님과 대화하고 있었을 때  뜰의 잣나무가 특별히 눈에 띄었기  때문에 화두에 대한 대답이 '뜰 앞의 잣나무'가 된  것이다. 만약 지금 상황이라면 조주가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정념스님과 화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때 그 스님의 앞니가  특이해서 조주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앞니에 곰팡이'가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화두에 자신의 전부를 던질  수 있는 폭발적인 작업이라야 화두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는 자신의 가장 절실한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조주는 흔히 <조주고불(趙州古佛)>로  불리운다. 이 이름은 남방의 유명한 선사  설봉 의존이 지은 것이라 한다. 두  선사가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남방에서 조주를 찾아 온 스님이 설봉과 설봉의 제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조주에게 말해주었다.

설봉의 제자가 먼저 설봉에게 물었습니다.

'오래된 연못에서 솟아나는 차가운 샘인 고담한천이란 어떤 것입니까?'

설봉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라도 그 밑바닥은 볼 수가 없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밑바닥을 볼려고 그 물을 다 마시려는 사람에겐 어떻게 하겠습니까?'

설봉이 대답했습니다.

'입으로 마시는 게 아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조주는 그 스님에게 넌즈시 우스개 소리를 했다.

'입으로 마시지 않으면 코로 마시나 보지.'

이야기를 끄집어 내 놓고 조주에게  물어 볼 기회를 찾고 있던 그 스님이 조주의  이 말에 바로 물었다.

'그러면 스님께선 <고담한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물 맛이 아주 쓰다.'

'물을 마시는 사람에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지!'

나중에 그 스님으로부터 조주의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설봉은 찬사를 거듭하면서 소리쳤다.

'고불인데, 정말 고불이야!'

이렇게 해서 조주는 고불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고담한천>이란 다름  아닌 도를 의미한다. 물맛이  쓰다는 것은 도를 닦으려면  세상의 모든 부귀공명도 버려야 하고 더 나아가 부모 형제 친척  까지도 버려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 까지도 완전히 버리는  철저한 자기 부정과 엄격한 수련과정을 거쳐야 도에 이를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과 유행하고 있었을 때  간혹 6 년 고행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고행을 하였고  최상의 고행자였다. 나는  진실로 가난한수행자였고 최상의 가난한  수행자였다.>고 경전에 기록하고 있다. 깊고 깊은  골짜기에서 단물이 흘러 나오듯이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없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위

의 대화에서 조주의 낙관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정신을 만날 수 있으며,아울러 깊은 지혜와 경쾌한 해학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한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수행을 하고 있다가 하루는 물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데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조주가 되물었다.

'아침은 먹었는가.'

'예, 먹었습니다.'

'그럼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조주의 이 말에 제자는 홀연히 깨쳤다.

도라는 것은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는  단순한 질서이면서도 질서를 초월해 있는것이다.


한번은 어떤 스님이 찾아와 조주에게 물었다.

'청정한 사원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말했다.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다.'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사원에서 수행하는 스님이란 어떤 것입니까?'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가 아이를 임신하였다.'

사원이란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처럼 맑고 깨끗한 것이며, 그 소녀가  아이를 임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그러므로 말 이전의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님이란 청정한 수행을 넘어선 깨달음 자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소녀와 아기는  동격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소녀가 아이를 임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조주에서 진부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3백리다.'

'그러면 진부에서 조주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거리가 없다.'

깨달음을 이루기 까지는 사람마다 차별이 있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의 모든 것은 평등하고 동체일 뿐이다.


조주는 항상 과녁의 한가운데만을 맞추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  간혹 살짝 비껴 맞추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다른 위대한  선사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명확하고  오직 하나뿐이라는 상투적인 공식 속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일부러  미끄러운 길로 그들을 데리고 간다.

마조가 석두의 길은 미끄럽다고 하여 석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조주의 길은 완전 빙판 길이다.

한번은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나 밖에 없는 절대 상황에 빠져 있는 제자에게 조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청주에 살 때 무명 옷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이 얼마나 황당한 대답인가!

깨달음의 세계가 그렇듯이 조주에게도 하나와 만물은 한 덩어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이고 그러면서도 만물은 만물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인 것이다. 우리의  몸을 한번 생각해보자. 생각이  일어나 발에 맺히면 발이 움직이고, 손에 맺히면 손이 움직이지만  그 생각 자체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하나뿐인  것처럼, 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이 인간이 되기도  하고 동물이 되기도 하고  우주의 성간물질이되기도 하는 것이다.

조주가 청주에 있을 때  일곱 근 나가는 무명옷을 지어 입었다는 사실보다 더  개인적인 사실은 없다. 그렇지만 이 철저한 개인적인 사건도 결국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별일 뿐이다.


하루는 제자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무(無)'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는 다 불성이 있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창한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완전히 어긋난다.

그래서 제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물었다.

'세상의 모든 것,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했다.

'전생의 업 때문이다.'

여기서 벽에 부딪힌 제자는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또 한번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유(有)'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개로 태어났습니까?'

'잘난체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제자가 조주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그러면 언제 성불 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성불한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엇다.

'그러면 허공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를 가다렸다가 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선불교의 화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조주무자' 화두를 만나게 된다.

부처님께서 생명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조주는 감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무, 없다'라고 대답하여 천  년 동안불성의 존재에 대하여  한 점 의심도 없었던  상황에 일대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좀더 쉽게 접근하기 위하여 그 대화가 있고 몇 일 후에 있었던대화를 계속 보도록 하자.  그 다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유, 있다'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6 년  동안 고행하시며 깨치신 연기법을 한번 회상해보면  '아하'하고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조주가 말한 '무'는 절대적인 무가 아니라 상대적인 상황적인 '무'인 것이다.


또한 조주에게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양자강 남쪽의 여러 유명한 선원에서 설익은 초심자들이 몰려오곤  하였다. 그들은 여러 선사들의 경구와 화두를 배우고 익혀 많이 알고 있었다. 조주를 찾아  와 여러 가지 화두를 내 놓고 유창하게 떠들곤 했지만 그  중 태반은 자기 스승의 말을 상투적으로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 들통났다. 그래서 조주는  그들을 <뜨내기 잡상인>이라고 불렀다. 많은 선객들이  조주를 찾자 조주로 가는 길목에 장사하는 이상한 노파가 한 명 있었다.  이 노파는 늘 길가에 앉아 있다가 조주로 가는  길을 물으면 <똑바로 가시오.>라고  해놓고는 자기가 가르쳐 준대로  걸어가면 등

뒤에서 <역시 저렇게  가는군.> 하고 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주를  찾는 많은 스님들이노파가 틀림없이 선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가 조주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조주는  한번 시험해 볼려고 그 노파에게로 갔다.

조주가 조주가 있는 대로 가자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자 노파는 늘 하던 대로 말했다.

'똑바로 가시오.'

조주가 조주를  물었는데 똑바로 가라니 그러면서도  조주가 가리켜 주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노파는 역시 이렇게 말했다.

'역시 저렇게 가는군.'

다음 날 조주는 동행한 그 스님에게 말했다.

'그 노파가 가짜임을 간파했네.'

선의 문답에 천편일률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주선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방의개별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주어진 조건에서 바로 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도라고 하는 참본성이 어디에 있는지 조주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부처라는  말이다.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도 참본성은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만큼 기적적이고 위대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을 설하면 사악한 법까지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설한다 해도 바른 법까지도 사악해 진다.'

조주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이지만  깨끗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 까지도 더럽게 보인다.

어느 날 아침 여자 출가 수행자인 비구니 한 명이  조주를 찾아와 비밀 중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조주는 비구니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렇게 함으로서 비밀중의 비밀이 너자신 속에 있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구니는 조주의 이상한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

'아니, 스님에게 아직도 속물근성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조주가 바로 되받아 말했다.

'비구니여, 속물근성은 그대가 갖고 있네!'

이런 재치있고 민첩한 대답은 조주의 전 화두에 두루 깔려있음을 볼 수 있다.


조주는 엄격한 수행중에도  한번씩 우스개 소리를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나른한 여름 날, 조주는  제자 문원과 함께 할 일 없이 방안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장난기 많은 노인네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문원아, 우리 한번  자기자신을 가장 천한 것에 비유할 수 있는지 내기를 해보자.'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떡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스승이 먼저 하겠다고  하자 문원이 그렇게 하시라고 응했다.그래서 조주가 먼저 시작했다.

'나는 당나귀다.'

'저는 당나귀 볼기짝 입니다.'

'나는 당나귀 똥이다.'

'저는 똥 속의 벌레 입니다.'

여기까지 오자 조주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조주는 문원에게 물었다.

'너는 그 똥무더기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피서 중입니다.'

조주는 그만 두 손을 들었다.

'네가 이겼다.'

그래서 문원이 떡을 사게 되었다.


조주의 가르침에는 비밀스럽고 별난 데가 전혀 없다. 사방이  열려 있는 성문과 같은 것이다.

평상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 성문을 통해서건 조주의  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열리고 어떤 때는 닫힌다. 내부의 문이 열려 있지 않은  자에게는 온 우주가 힘을 합쳐 열려고 해도 그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

한번은 어떤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물었다.

'조주는 어떻습니까?'

물론 스님이 물은 것은  조주의 지명을 물은 것이 아니라 조주의 선풍이 어떠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는 지명 조주를 빗대어 대답하고 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지.'


845년 행해진 폐불사건으로  사원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경제적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심 깊은 수행자로서 더 활짝 타오르는 구도열을  조주의 12시의 노래를 통해서 느낄수 있다.  아울러 이 노래에서 철저한  가난이 조주를 통하여 해학적이며  그러면서도 달관한삶의 모습으로 승화되고 있다.


* 닭이 울 때(1시 - 3시)

문득 일어나 늙고 초라해진 내몸을 한탄한다

윗옷과 아래 옷도 없으니

가사의 모양만은 그래도 남았구나

잠방이는 허리가 없고, 바지는 아가리가 없다

머리에는 서너말의 검푸른 비듬뿐

전에는 수행하여 중생제도 원했는데

이런 꼴로 변할 줄을 어찌 누가 알았으랴.


* 새벽(3시 - 5시)

서까래도 허물어진 낡은 절에는

아침죽에  셀 밥알도 없고

다만 조용히 앉아 창틈의 먼지를 세고 있는데

참새만이 홀로 즐겨 우는구나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선정을 깨고

사랑과 미움이 그리운 속세의 정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 해가 뜰 때(5시 - 7시)

청정함이 도리어 번뇌가 된다

현상적인 공덕은 먼지에 불과한데

아직도 마음밭을 갈지 않는구나

하루 생활에 눈섭 찌푸리는 일은 많고, 마음에 드는 일은 적은데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동촌의 황노인이네

시주 한번 가져온 일도 없이

절앞의 풀밭에 당나귀까지 풀어 놓는구나.


* 식사할 때(7시 - 9시)

밥하는 연기가 사방에서 나지만, 나는 헛되이 바라만 볼 뿐

만두와 떡을 먹어 본지도 일 년이 넘었구나

오늘 생각하며 공연히 침만 삼킨다

바른 생각은 잠깐이고 한탄만 늘어졌네

시주가 백집이나 되지만, 착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절을 찾는 사람은 그저 차를 마시겠다고 말할 뿐

차가 떨어져 못 마시면 떠날 때는 공연히 화만 내는구나.


* 일과를 시작할 때(9시 - 11시)

머리를 깍고 출가할 때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뜻밖에 청하여져 시골 중이 되고 보니

하루 일과는 굴욕과 굶주림뿐

김서방 이서방 촌사람들 마져도

존경하는 생각 따윈 전혀 없더니

뜻밖에 조금전에 나타나서는

쌀좀 종이좀 빌려달라고 말하는구나.


* 해가 남쪽에 있을 때(11시 - 13시)

차와 밥만 축낼 뿐 정해진 법도가 없구나

두집을 탁발하면 한집은 거절하니

쓰디쓴 소금과 신 냄새나는 보리밥

수수섞인 쌀밥에 상추무친 생채기

박대스런 공양은 아니라고 우기는데

수행심의 견고함은 가난이 최고구나


* 한 낮 때(13시 - 15시)

오늘 탁발 끝났으니 밖에 나갈 일은 없고

한번 포식하면 백번 굶은 일을 잊는다고

지금의 나의 몸이 바로 그렇구나

선을 하지 않고서 어찌 생사일을 논할꼬

한 장의 낡은 포단을 깔고보니 낮잠이 절로 온다

하늘 나라 도솔천에도 등 굽는 즐거움은 없으리라.


* 오후 때(15시 - 17시)

그래도 분향 예배하는 사람은 있구나

다섯 명의 노파중에 세 사람은 혹이 있고

두 사람은 검은 얼굴에 주름이 잡혔구나

유마차를 가져오니 참으로 진귀하다

금강역사여 몸좀 누그려 뜨리시오

내년에 풍년들어 보리가 익으면

나한님께 나도 한 푼 공양할 수 있겠구나.


* 해가 질 때(17시 - 19시)

덕높은 운수승도 끊어져 없어지고

황량함만 짙어지는 오후 해질녁

그래도 간혹 어린 사미승이 문을 두드리는구나

진실한 말들은 입에 오르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석가의 자손이라고 법을 잇는다

한 자루의 주장자는 다듬지 않은 거치른 나무

산을 오르면서 쓰는데 간혹 개도 때린다.


* 저녁 때(19시 - 21시)

빈 방 어두운데 홀로 앉는다

깜박이는 등불 본지도 옛날이구나

눈앞은 오로지 금주의 옻칠처럼 새까맣다

종소리도 못들은채 공연히 하루가 지났구나

늙은 쥐의 나무 깔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고

이 삼매 깨고나면 또 다른 내일

어찌 육바라밀을 행하지 않겠는가.


* 잠들 때(21시 - 23시)

문밖의 밝은 달은 누가 쳐다보는가

절집에서 근심하는 것은 잠자는 문제

옷 한벌 없으니 무엇으로 몸을 덮을 것인가

유나의 유씨, 오계를 지키는 조씨들

입으로만 선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괴롭구나

우리집 절살림 쌀통이 비었어도

이 절이 어려운데 세속이라 다를손가.


* 한밤중(23시 - 1시)

이놈의 마음은 잠시라도 머물지 않는구나

천하의 출가자로 나와같은 주지행세 나말고 또 있을까

맨 흙바닥 좌선 의자, 깨진 대나무로 짠 포단

늙은 느릅나무 목침뿐 덮을 이불은 아예 없으니

부처님 전에 올릴 향마저 없는데

잿더미 속에서는 쇠똥냄새만 나는구나.


조주에게 있어서 놀랄만한 일은 나이가 백세가 넘은 고령에도  마음은 여전히 펄펄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조금도 마음이 늙은 사람이 아니었다.  20대의 젊은 청춘조차도 그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만년에 선의 불꽃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느끼고 이렇게말했다.

'지난 90 년 동안  나는 마조의 선풍을 이은 선사들을 여든 명이나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창조적 정신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근간에 이르러 선의  불꽃은 점점 시들해지고 잡다한 분파만 많이  생겨났다. 최상의 지혜를 지닌 선조들의 창조적  정신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니 날이 갈수록 쇠퇴 풍조가 더 짙어질 것이다.'

조주의 일몰이 가까워진 890  년대 그의 예견은 정확히 들어맞고 있다. 이때 이미  선의 황금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당대 최후의 정신적  거장이었으며, 최후의 대선사였으며 또한가장 중요한 선사이기도 했다.

조주는 이 세상의 마지막 2 년을 진부에서 살았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 화장을 하되 사리를 줍지 말라. 선종의 제자들은 세속의 인간과는 다르다. 더욱 육신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사리같은 것에 얽매이겠는가.'

그리고 또 제자에게 명하여 주장자 하나를 조왕에게 보내며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제가 일생동안 쓰고도 다 쓰지 못한 것입니다.'

조주는 897 년 11 월 10 일에 정좌한 채 입적하였다.


인간은 나이 때문에 죽지 않는다.

삶이 성숙되지 않을 때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살아있으면서도 죽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매일 매일 죽으면서도 사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다.

영원한 진리의 벗, 조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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