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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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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372회 작성일 21-07-0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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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불씨



선종사에서 최대의 행운아를 몇 명 꼽는다면 위산 영우는  당연히 그 안에 든다. 깨달음도 우연히 이루어지며, 또한  스승이 되는 것도 우연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1,500명이 넘는 선객을 가르친 최대의 총림을 이루게 된다.


위산 영우(771 -  853)는 복주 장계출신으로 세속의 성은 조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항주의 용흥사에서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을 깊이 공부하였다.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회의를 다스리지 못하고 23 세 되던 해 행장을 꾸려 백장을 찾아 나서게 된다.

백장은 영우를  보자마자 흡족하여 선원에서 수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어느 겨울  날 그는 정말 뜻밖의 사건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날은  마침 영우가 백장의 시중을 드는 날이어서 찻상을 들고 백장의 방으로 들어 갔다. 마침  화롯가에 앉아 있던 백장이 영우에게 화로에 불씨가 남아 있는지 뒤져보라고 말했다. 영우는 한번  뒤져보고는 불씨가 없다고 하자 백장이 화로에 다가와 몇번이나  뒤적이더니 구석에 숨겨져 있는 조그마한 불씨  하나를 찾아내었다.

백장은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 보고 있는 영우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불씨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 말에 영우는 크게 깨쳤다. 정말 영우는 선의 천재였다.

공부할 때  보면 머리좋은 친구는 놀면서해도  백점을 맞는데, 머리가 둔한  친구는 죽으라고 해도 80점인  것이다. 머리좋은 친구와 머리가  나쁜 친구가 똑같이 노력을  한다면 머리좋은 친구가 머리가 나쁜 친구보다 쉽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엄밀하게 머리와 가슴은 둘이 아닌 것이다.

위산 영우에서 앙산 혜적으로 이어지는 위앙종은 선문 5가 중에서 가장 단명하였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선의 천재들의 집단이라는 점이다.  주어진 단순한 계기에 깨달음을 성취 할만큼 최상근기가 있을 때는  맥이 이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단절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는 때리는 것도 없으며,  할! 도 없었다. 그냥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이 조용하게 사건을 관조할 계기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모두 견성하여  자신의 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잠시후 영우가 정신을 차리자 백장은 말을 계속했다.

'깨달음이란 두 갈래 갈림길 중에서  잘 보이지 않는  길이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쪽길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에 이르고자 할때는  시절 인연을 잘 관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때가 되면 미혹했던 것이 홀연히 밝아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부터 자기가 갖고 있었던 것이었지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므로 깨닫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도 깨닫기 전과 같은 것이고 마음도  법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제 자네는 그렇게 되었으니 잘 간직하도록 하여라.'


다음 날 영우는 운력시간에  산에 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백장이 살며시 뒤에  다가와서 물었다.

'불을 가져올 수 있느냐?'

영우가 괭이를 옆에 세우더니 말했다.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럼, 어디 가져와 보아라.'

그러자 영우는 저쪽 옆에 떨어져 있는 나무토막 하나를 줏어  입으로 두 번 훅훅 불고는 스승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자 백장은 씁스레하게 되씹고는 산을 내려가 버렸다.

'이것은 벌레 쫓는 막대기로구나.'

이 감추어진 불씨  찾는 것이 위산 영우의  평생 과업이 되었고, 결국에는 제자  앙산과 선가오종의 하나인 위앙종을 창시하게  되었다. 감추어진 불씨를 찾는 정신은 위산의   전 생애에 일관되었다.

위산이 스승으로 있을때 석상이 찾아와 법을 청하여  위산 밑에서 수행정진을 하였다. 석상은 쌀을 관장하는 미두소임을 맡게 되었다. 하루는 키로  쌀을 까부르고 있는데 위산이 법당으로 가면서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일하고 있는 석상을 보고 위산이 먼저 말했다.

'시주물은 생명과 같은 것. 쌀 한 톨이라도 흘려버리지 말게.'

석상이 자신 있게 말했다.

'쌀 한 톨도 흘려버리지 않았습니다.'

위산은 그 주위를 몇 번이나 면밀히 살펴보더니 쌀 한 톨을 주워 올렸다.

'그대는 흘려버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석상이 어쩔줄 몰라 아무 말이 없자 위산이 말했다.

'이 한 톨의 쌀을 가볍게 여기지 말게. 모든 곡식이 이 한 톨의 쌀에서 나오는 것이네.'

'모든 곡식이 이 한 톨의 쌀에서 나온다면, 이 한 톨의 쌀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위산은 주장자를 한번 쿵!하고 땅바닥을 치고는 백장스승이  불씨를 찾아 자기에게 보이던 그모습을 되새기면서 껄껄 웃으면서 방장실로 돌아갔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모든 곡식이 한 톨의 쌀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 당시 불씨를 보고 깨달은 위산의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앙산에게도 불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으로 보아 백장과 있었던  불씨에 관한 사건은 위산에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하루는 앙산이 이렇게 물었다.

'참부처가 있는 곳이 어디 입니까?'

위산이 대답했다.

'걸림이 없는 생각으로 항상  묘한 그곳을 생각하고 거룩한 불씨의 무궁무진한  힘을 깊이 생각하여라. 생각이 다  하면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법. 그곳에서는  본질과 형상이 영구불변하며 현상과  본체가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참부처의 세계이다.'

어느 날 풍수에  뛰어난 사마두타가 호남으로 행각을 하고 돌아와  백장에게 인사드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호남을 행각하다가 대위산에 올라가  보니 터는 넓고 산의 기상은 웅장하여  그 산에는 1500명의 선지식을 모을 수 있는 대도량이 들어설 자리입니다.'

그러자 백장이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넌지시 물었다.

'내가 거기에 가서 살면 어떻겠는가?'

'스승께서는 거처할 곳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스승님은 뼈로 된 사람인데, 그 산은 근육으로 된  산 입니다. 스승님하고는 인연이 맞지 않습니다. 설사 스승님이 거처한다 해도 대중이 1000 명 이상 모여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장이 의자를 당기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면 나의 제자 가운데 그 산에 거처할 인물이 있겠는가?'

'한번 세밀히 살펴보겠습니다.'

그 당시 화림 선각이 수좌들 중에서 서열이 1 번  이었다. 백장은 시자를 시켜 화림을 데리고 오라 해서  사마두타에게 보였다. 화림이 나가고  나자 사마두타는 마른 기침을  한번 하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번에는 백장이 시자에게 전좌  소임을 보고 있는 영우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영우가  방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마두타의 두 눈은 호랑이  눈처럼 번쩍거리더니 감격에 넘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대위산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백장은 영우를 불러 법을 전하고 대위산으로  떠나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공양이 끝나고 백장이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화림이 반대하고 일어섰다.

'외람되지만 제가 지금 대중의  우두머리로 있는데 영우스님이 그 산의 주지로  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장은 옆에 놓여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대중들 앞에서 본성을 떠나지 않는 한 마디를  한다면 당장 자네를 주지로 보내도록 하겠네.'

화림은 물병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말뚝이라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백장은 인정하지 않고, 저 밑에 끝자리에 앉아 있는  음식에 관한 소임을 보고있는 전좌인 영우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영우는 일어나 앞으로 나가더니 물병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백장이 웃으면서 대중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제 1 좌인 화림이 전좌인 영우에게 지고 말았구나.'

화림도 물병을 물병으로 볼만큼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상을 형상으로 보는분별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영우는 물병을 발로 차서 깨뜨려 버림으로 형상이  곧 공인 진리의 세계를 바로 열어 보이고 있다.

백장은 드디어 영우를 대위산으로 보냈다. 이 대위산의  이름을 따서 위산 영우로 불리워지게된 것이다. 산이 험준하고 인적이 없었으므로 위산은  원숭이와 다른 짐승들을 벗하여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으며 살았다. 5,6 년이 지났는데도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본래 주지를 한 목적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었는데 사람은 자취도 없으니  내 혼자 수행하기에는 좋지만 누구를 구제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마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암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행장을 꾸렸다. 위산이 산 입구에 이르자  뱀, 호랑이, 이리, 원숭이들이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위산이 짐승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 나의 길을 막지 말아라. 내가 이 산에  인연이 있다면 너희들은 흩어지고, 만약 인연이 없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려할 때 너희들 마음대로 잡아먹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자 짐승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위산은 다시 발길을 돌려 암자로  되돌아 왔다. 이런 일이 있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공부하는 수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천하의 선객들이 대위산에 모여 이마를 맞대고 법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위산의 선종에 대한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는 돈오(頓梧, 순간적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와 점수(漸修, 점점 수행을 거쳐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돈오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점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하루는 한 스님이 찾아와 불법을 물으니 위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를 닦는 사람의 마음은 거짓이 없어야 하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도 없어야 한다. 듣고 보는 일상생활에 버리고  취함이 없어야 하며, 그렇다고 눈과 귀를  막고 다니라는 얘기가 아니니 잘 들어라. 다만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쁜 생각과 분별심의 습기가 없어지면 자연히 맑고 고요한 가을 하늘처럼   깨끗할 것이다. 맑고 깨끗하여 아무 할일도 없으며 막힐 것도 없으니 이런 사람을 도인이라  하며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후에도 수행을 계속하여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위산의  대답은 <돈오와 점수의 조화>에 관한 법문이  되었으며, 이후 선가에서 대부분 돈오와 점수에 대한 위산의 설을 정설로 받아 들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인연이 닿아 그 자리에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꺼기가 베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의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특별히 엄격한 방법을 따라 수행할 필요는 없다. 우선 육식(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을 맡는 것, 혀로 맛을 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합리적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섬세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원숙하고 밝아져 의혹이나 사리에 어두운 미망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오묘한 가르침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진정 슬기로운 생활인으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 되면 만 가지의 생각이나 행위가 모두 법에 어긋나지  않아 하나도 버릴 것이 없게 되며, 실제의 궁극적 이치는  한 점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군말 다 집어치우고  단칼에 돌입할 수 있다면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대의 존재는 본래면목을 들어낼  것이니,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인  사물이 둘이 아닌  경지, 바로<있는 그대로의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위산이 스승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자 한번은 덕산 선감이 찾아왔다. 바로  법당으로 올라가더 니 좌복을 옆에 끼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큰 소리로 방장실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위산이 앉은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자 덕산은 '아무도  없구나, 아무도 없어!'하면서 그냥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시 방장실로 올라갔다. 덕산이 좌구를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스님'하고 위산을 부르니, 위산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주장자를 잡으려고 하자 덕산이 먼저 '악!'하고 고함을 치고는 소맷자락을 날리며 그냥 나가버렸다.


또 한번은 사숙(세속적인  관계로 삼촌에 해당함)이 되는 등은봉이 위산을  찾아왔다. 등은봉은 대위산에 도착하자마자  큰방으로 들어가 의발을 풀어 놓았다. 위산은  사숙되는 등은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큰 방으로 내려왔다. 등은봉은  위산이 오는 것을 보자 벌렁 눕더니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위산은 방장실로 그냥 돌아갔고, 등은봉도  일어나더니 그냥 떠나 버렸다. 조금 있다가 위산이 시자에게 물었다.

'사숙님은 아직 계시느냐?'

'이미 떠나셨습니다.'

'가실 때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냐?'

'아무 말씀도 없이 떠났습니다.'

그러자 위산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하지 말라.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느니라.'


향엄은 재기가 번뜩이고 분석력이 뛰어났고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경, 율, 논에는 매우 밝았다. 그러나 여전히 선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향엄이 깨닫지 못해 매우 초조해하는 것을 보고 위산이 하루는 조용히 향엄을 불렀다.

'듣건데 백장스승 밑에  있을 때 너는 한 가지  질문에 열 가지로 대답하고, 열  가지 질문에 백 가지로 대답하였다 하니,  이것은 자네가 여러 이치를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바로보는 총명함과 재주를 가졌기 때문인 줄 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 어떤 것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그래서 묻노니,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 너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향엄은 그만  가슴이 탁 막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평소  즐겨 읽던 경전들을 다 뒤적여 보았지만  시원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옛말에  그림의 떡이 주린 배를 채워 주지  못한다더니....'하고 탄식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향엄은 그 답을 가르쳐 달라고  몇번이나 위산에게 졸랐지만 그럴때 마다 위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그것을 가르쳐주면 너는 분명히 나중에 나를  욕할 것이다. 어쨌거나 무엇을 말하든 내 말은 어디까지나 내 말이지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낙심한 향엄은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이렇게 결심했다.

'이번 생에는 더 이상 나는 불법을 공부하지 않으리라.  차라리 발 닿는대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거지 중이나 되겠다.'

그리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승과 작별했다. 어느  날 남양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남양 혜충국사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남양국사를 참배하고는 그곳에서 얼마간 머물기로 했다.

어느 날 무덤의 잡초를 깎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잡초사이에 깨어진 기왓장이 있어 멀리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묘하게도 맞은편  대나무에 맞아 딱 하는 맑은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에 그는 문득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인 <참나>를 깨우쳤다.  그는 암자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위산이 있는 곳을 향하여 세번 절을 올리고는 감격에 북받쳐 말을 더듬었다.

'스승이시여! 당신의 큰 은혜는  정말 부모보다도 큽니다. 만일 당신이 그때  이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면 오늘의 이 놀라운 일을 어찌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입에서 저절로 게송이 흘러 나왔다.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하는 소리에

문득 나와 우주가 하나 되고 보니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옛길을 넘나드니

내가 걷는 이 길과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옛 길이 둘이 아니네

가는 곳마다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빛과 소리를 벗어난 몸짓이네

천하의 도를 아는 이들은

그냥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네.


이것을 보면 위산은 뛰어난  교육자였다. 위산은 해야할 말과 하면 안되는  말을 알고 있었으며 말해 주어야 할  사람과 말 해주지 않아야 할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향엄에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떠나 보냄으로써 깨닫게 했으며,  앙산은 옆에 두고 말을 하여 깨달음의깊이를 더욱 깊게 했다.

어느 날 아직 철저하게 깨치지 못한 앙산과 차잎을 따고 있을 때 문득 위산이 말했다.

'우리가 온 종일 함께  차잎을 따고 있으면서도 나는 너의 말 소리만 들었을  뿐 모습은 보지못했다. 어디 너의 참 모습을 좀 보여주게.'

그러자 앙산은 차나무를 잡고 소리내어 흔들었다. 이에 스승은 다시 말했다.

'너는 다만 작용을 깨달았을 뿐 그 본체는 깨닫지 못했다.'

앙산도 지지않고 말했다.

'그러면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위산이 대답을 않고 한 동안 침묵하자 마침내 앙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본체만 깨달았지 그 작용은 깨닫지 못하셨군요.'

그러자 위산이 성난 표정을 하며 말했다.

'뭉둥이 삼십대는 맞아야겠군.'

앙산이 반박했다.

'스승님의 몽둥이는 달게 맞겠습니다만, 저의 몽둥이는 누구를 때려야 합니까?'

그러자 위산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맞을 삼십대를 나에게 되돌려 주면 되지.'

여기서 또 위산의 교육자다운  인자함과 참을성을 볼 수 있다. 작용에는  본체가 포함될 수도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본체에는 작용이 항상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작용은  본체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위산은 앙산을 나에게 되돌려 주면  되지 하면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있으며 또한 앙산이 깨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산은 아버지같이 온화하면서도 맹렬한 인습타파주의자였다.

하루는 위산이 좌선하고 있는데 앙산이 불쑥 들어왔다. 그러자 위산이 말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에 바른 말 한마디를 해보아라.'

앙산은 지체하지 않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저는 신앙조차도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너는 표현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신앙이라도 갖고 있느냐, 아니면 아무런  신앙도 갖고 있지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표현할 게 없는 것이냐?'

'저의 <속안의 나>외에 또 다른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너는 선에나 매달리는 소인배에 불과하구나.'

그러자 앙산이 말했다.

'저는 부처님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참 있다가 위산이 다시 물었다.

'열반경 40 권 중에 얼마만큼이 부처님 말씀이고 또 얼마만큼이 마귀의 말인가?'

그러자 앙산이 당당하게 말했다.

'전부가 마귀의 말 장난입니다.'

이 대답에 위산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후로는 아무도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한번은 앙산이 빨래를 하고 있는데 위산이 지나가자 앙산이 불쑥 물었다.

'지금과 같이 이러할 때에 스승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러할 때에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앙산이 빨래를 밟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본체는 있어도 작용이 없습니다.'

위산은 잠자코 말 없이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대는 이러할 때 어떻게 하겠는가?'

앙산은 빨래를 밟으면서 말했다.

'바로 이러할 때 스승께서는 이것을 보셨습니까?'

'그대는 작용은 있어도 본체는 없구나.'

그러하고는 갑자기 앙산에게 물었다.

'그대가 지난 봄에 한 말은 완전하질 못했으니 지금 다시 말해 보아라.'

앙산은 계속 빨래를 밟으면서 말했다.

'바로 이런 때에 간절한 것을 말하는 것은 금물 입니다.'

'감옥살이 하는 동안 꾀가 제법 늘었구나.'

하시며 크게 웃으면서 방장실로 돌아갔다.


하루는 앙산과 점심공양을 하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길  옆에 서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옆에 있는 저것이 무엇이냐?'

'잣나무입니다.'

조금 걸어가니까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위산은 농부를 부르더니  저기 있는 저나무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농부가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잣나무입니다.'

그러자 위산은 웃으면서 김매고 있는 농부도 뒤에 오백  명 정도 대중을 거느리겠구나 하시고는 주장자로 땅을 딱! 딱! 치면서 걸어갔다.


하루는 위산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앙산이 들어 왔다.  앙산이 들어오자 위산은 벽을 향해 돌아 누웠다. 그러자 앙산이 말했다.

'스승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주무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위산은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마침 신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얘기해 줄까?'

그러자 앙산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 스승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스승님, 세수나 하십시오.'

위산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향엄이 들어왔다.  그러자 위산이 또 향엄에게도 낮잠을 자다가 신나는 꿈을 꾸었는데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향엄도 아무 말 없이 밖에 나가더니 차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했다.

'스승님, 차나 한 잔 드십시오.'

그러자 위산은 차를 마시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네들의 견해가 목련존자보다 신통하구나.'

위산은 꿈으로서 현실의 허망함을 나타내어 공의 진리를 보일려고 하였으며, 돌아 누움으로 삶과 죽음, 현실과 공의 세계도 몸의 앞과  뒤에 불과한 동체임을 보일려고 했는데, 앙산은 자고 일어났으니까  세수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로서 세수물을  떠옴으로 <평상심이곧 도>임을 보이고  있다. 뒤이어 들어온 향엄도  차를 한잔 가지고 들어와  세수했으니까 차한잔 하십시오하고 차를 내밈으로 <평상심이 곧 도>임을 다시  한번 확인 시키면서 아울러 깨달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질서까지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위산은  부처님의 제자중에서 신통이 제일인 목련존자보다 제자들의 신통이 더 뛰어났다고 제자들을 칭찬하고 있다.


하루는 앙산과 향엄과 위산이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위산이 먼저 말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는 다 같은 길이며 그 길을 따르는 사람마다  모두 해탈의 길을 얻었다.'

그러자 앙산이 물었다.

'무엇이 사람마다 얻은 해탈의 길입니까?'

위산은 향엄을 쳐다보며 말했다.

'앙산이 지금 묻고 있는데 자네는 무엇하고 있는가? 빨리 그것을 말해주게.'

그러자 향엄이 위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위산이 말했다.

'어디 한번 대답해 보게.'

그러자 향엄은  '안녕히 계십시오.'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위산은 다시  앙산에게 물었다.

'향엄이 대답한 것을 앙산 너는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러자 앙산도 '안녕히  계십시오.'하고는 나가 버렸다. 위산은 혼자 남아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나가고 있는 앙산의 뒤퉁수를 쳤다.

'물과 우유가 잘도 섞이는구나.'


앙산과 향엄은 좋은 도반이면서도 서로가 경쟁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위앙종이 선종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 중에 하나는 여래선과 조사선을  구분한 점이다. 하루는 산책을 하다가 앙산과 향엄이 마주치게 되었다. 앙산이 먼저 물었다.

'그래 요즈음 어떻게 지내나?'

그러자 향엄이 얼른 대답했다.

'무엇이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시나 한 수 읊어 보겠습니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로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는데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이것을 듣고 있던 앙산이 잔잔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여래선은 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은 꿈에도 볼 생각을 못했구려.'

그러자 향엄이 다시 게송을 하나 지어 읊었다.


내게도 마음이 하나 있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누구든지 이 이치를 모르면

선사라고 부르지마오.


이를 듣고 있던 앙산이 말했다.

'향엄사제가 조사선도 아는구려.'

이 시에서 계율과 경전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명상을 하며 고행을 하고 있는  그 진지한삶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여래선>이라고 하고 있으며,  자신의 <참나>인 자신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생명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로 참나와의 교감을 <조사선>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루는 위산과 앙산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늦가을이라 논  밭에는 아무 것도 없이 황량했다.

위산이 앙산에게 말했다.

'이 밭뙤기는 이쪽이 높고 저쪽이 낮군.'

'아닙니다. 이쪽이 낮고 저쪽이 높지요.'

이에 위산이 말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으면  중간 지점에 가서 양쪽을 보도록  하자. 그러면 어느 쪽이 높고 낮은지 자연히 알게 되겠지.'

'중간 지점에 설 필요도 없고 양쪽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앙산의 대답에 위산이 또 제안했다.

'그러면 물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으니까 수평계를 갖고 와서 재어보자.'

'물에도 일정한 기준이 없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높고  낮은 곳에서는 낮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제자의 대답에 위산은 더 할 말을 잃었다.

어느 해 여름 앙산이  행각을 나갔다가 돌아와 위산에게 문안을 드렸다.  그러자 스승이 물었다.

'한 여름 동안 너를 보지 못했구나.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

'예, 밭뙤기 하나를 갈아 씨 한 바구니를 뿌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이 여름을 한가롭게 보내지 못하였겠구나.'

이번에는 앙산이 스승에게 여름을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자 위산이 대답했다.

'낮에는 밥을 먹고 밤에는 잠을 잤지.'

'그러셨다면 스승께서도 이 여름을 한적하게 보내진 못하셨군요!'

이렇게 말해놓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든지  앙산은 혀를 쑥 내밀었다.  제자의 당황하는모습을 바라보면서 위산은 이렇게 나무랬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아무리 수행자라 하더라도 가슴 밑바닥에는 인간적인 향수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깊이 묻어두면 둘수록 더욱  뜨겁게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그 향수를  해학으로 풀기도 하고 법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선사들의 일생은 맑은 바람처럼 흔적이  없으면서도 역사깊숙한 곳에서 끈적끈적하게 묻어 나오는 것이다.

853 년 정월 9 일 83 세의 나이로 편안히 앉은 채로 돌아가셨다.


허깨비 몸, 꿈속의 집이여

허공에 핀 꽃이어라

지나온 길 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하고

다달아야 할 목적지는 안개 속에 있네.


잊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매는 이 몸이여

절뚝거리는 터벅 걸음 지칠대로 지쳤도다

한 생각 쉬고나면 그대로 고향인데

그래도 일어나는 수만가지 생각들이여!


애욕을 탐하고 그리워하여

무명으로 이 몸뚱이 이루었으니

태어나서 늙어지도록

하나도 이룬 것이 없구나.


근본 자리가 그 때문에 미혹되고 말았으니

시간이 아깝구나

찰라도 헤아리기 어렵거늘

금생을 부질없이 보내면 다음 생인들 다를까.


미혹에서 미혹으로

탐심 진심 치심이 씨앗되어

인간에서 아귀 축생으로

3계를 다람쥐 챗바퀴 돌듯 하네.


일찌기 눈 밝은 스승 찾고

굳건한 도반을 가까이 하여

몸과 마음으로 맹세하여

애욕의 사슬을 모두 끊어라.


세상은 본디 들뜨고 비었는데

뭇 인연이 어찌 그대를 얽어매랴.

법을 구하려거든

깨닫겠다는 확신을 가져라.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분별심

지혜의 칼로 끊어버려라.

6 근이 고요하면 하는 일마다 고요하고

한 마음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법 저절로 쉬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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