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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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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322회 작성일 21-07-09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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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참사람



  임제 의현( ? - 867)은 철저하고도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고, 남달리 뜨거운 진리에의 정열을 지녔던 사람이다. 그는  산동성 조주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형씨였다.어려서는 남달리 영특하였고 자라나면서 효성이 지극하였다.  뜻한 바가 있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강원(경전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곳)에 있으면서 율종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론에도 해박하였다. 하루는 경전을 읽다가  갑자기 '이것은 세상 사람을 구하는  약의 처방전일 뿐, 처방전으로 어찌병이 낫겠는가!'하며 탄식하고는 선사를 찾아  행각을 나섰다. 맨 먼저 황벽을 찾았다. 깊은구도열로 남달리 열심히 수행정진하였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그 당시 황벽의 수제자는 목주

도명이었다. 목주는 임제의 맑은  성품과 순수함과 열정적인 구도에 감명을 받고서 오랫동안관심있게 지켜보다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자 임제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는가?'

  '3 년 되었습니다.'

  '황벽 스승을 찾아가 법을 물은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아직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가서 불법의 골수가 무엇인가 물어 보게.'

  목주의 권유를 받은 임제는 그 길로 황벽 스승의 방을 찾았다.

  '불법의 골수가 무엇입니까?'

  임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은 냅다 임제의 뺨을 후려 갈겼다. 그래서 임제는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임제가 상기된 얼굴로 돌아오자기다리고 있던 목주가 물었다.

  '황벽 스승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던가?'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그리고는 스승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여 말했다. 목주는 임제에게 다시 한번 가서 물어  보라고 격려하였다. 임제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지면서 다시 황벽스승을 찾아갔다.

  '불법의 골수가 무엇입니까?'

  이번에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의 주먹이 사정없이 임제를 후려쳤다. 임제는 정신이아득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여전히 두들겨 맞고 돌아온

  임제에게 목주는 또 권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가서 물어보게. 틀림없이 이번엔 무슨 말씀이 있을 걸세.'

  임제도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지 생각하고 세번째로 황벽의 방으로 들어갔다.

  '불법의 골수가 무엇입니까?'

  입이 닫히기도 전에 황벽의 주먹이  임제의 뺨을 때렸다. 임제는 쫓기다시피 하여 방을 빠져 나왔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이런 쓸데없는 짓을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당장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렇다고 임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

다. 그날 저녁 그는 목주를 찾아가 자기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불법의 골수를 물어보도록 격려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전 황벽 스승님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황송스럽게도 스승께선 세번  씩이나 매질로써 저를 거듭 일깨워주셨지만 불행히 저는 전생의 업장이  두터워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게 여길 따름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어서 여기를 떠나는 길인 것 같습니다.'

  목주도 그 말을 듣고 심각해졌다.

  '할 수 없군. 그렇다면 떠나기 전에 스승님께 간다고 인사라도 드리고 떠나게.'

  임제는 목주에게 그 동안의 보살핌에  감사의 절을 올리고 물러 나왔다. 한편 목주는 짐을 챙기고 있는 임제를 앞질러 스승한테로 달려 갔다.

  '조금 전에 불법의 골수를 물으려  왔던 그 수좌는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비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지금 떠나겠다고 짐을 싸고 있습니다. 하직 인사하러 오거든 잘 받아 주십시요. 틀림없이 뒷날 많은 중생들에게 유익한 그늘을 드리워 줄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황벽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다 알고 있으니 염려말게.'

  잠시 후 임제가 작별 인사를 하러 오자 황벽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데 갈 것 없이 곧장 강을 따라 고안으로 가서 대우선사를 만나라. 분명히 너를 위해매사에 잘 가르쳐 줄 것이다.'

  이 말대로 임제는 황벽을 떠나 곧 바로 대우를 찾았다. 대우에게 이르러 절을 올리자 대우는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임제가 황벽선사에게서 왔다고 대답하자 대우는 다시 물었다.

  '황벽스님께서 무슨 가르침이 있었는가?'

  대우의 말에 임제는 화풀이 비슷하게 황벽스승과 있었던 일을 아뢰었다.

  '글쎄 들어 보십시오. 불법의 골수를 물었는데 세 번 다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임제의 푸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대우는 임제를 보며 고함치듯 큰 소리로 말했다.

  '황벽이 너를 위해  그토록 간절히 불법을 일러 주었는데  뭣이 어째? 아무 잘못도 없는데황벽이 너를 때렸다고.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고 없고를 묻느냐.'

  임제는 이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황벽의 불법도 별게 아니로군.'

  임제의 이 말에 대우는 멱살을 움켜잡고 말했다.

  '이런 오줌싸개 같은 놈,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다시 황벽의 불법이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라, 빨리말해!'

  임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우의 옆구리를 세번 쿡쿡 찔렀다. 대우는 임제의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황벽에게로 가거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고무풍선을 부는  원리와 같다. 몇번 불고나면 풍선이 어느 정도 커진다. 커질만큼 커져 최대의 크기가 되었을때는 한번만 더 불면 풍선은 터져버린다.

  황벽이 임제에게 따귀를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린 것은 풍선을 최대의 크기로 불어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임제로 하여금 '불법이란 무엇일까?'하는 생각 하나만으로 꽉 차버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임제가 황벽에게 맞았던 것을 푸념하는 순간 임제는 황벽에게 뺨을 한대 더 맞았던 것이다. 그 순간 최대로 크진 풍선에 한번만 더 불면 터지는 것처럼, 내면에 쌓여있던 <참나>가 거짓의 나를 깨뜨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임제는 곧장 황벽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 황벽은 말했다.

  '이놈, 어디를 그렇게 왔다갔다 하느냐. 불법의 골수는 커녕 개똥도 모를 거다.'

  '오직 스승님의 간절하신 노파심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임제는  이번 행각에서 대우와 있었던  일을 자치자종 황벽에게 말했다. 다듣고 난 황벽이 말했다.

  '이 수다스런 대우 놈, 오기만 해 봐라. 내 당장 묵사발 내리라.'

  이에 임제가 말했다.

  '오도록 기다릴 거 뭐 있습니까. 지금 당장 묵사발 내십시오.'

  말을 끝내자 마자 전번의 보복처럼 임제는 황벽의 뺨을 힘껏 쳤다.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이런 미친 놈 보았나, 감히 범의 수염을 잡다니!'

  황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제의 악! 하는 벼락치는 듯한 고함소리가 황벽의 귀를 찢었다. 황벽은 급히 아랫사람을 불러 임제를 좌선하는 방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선종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가장  유명한 설법중에는 덕산 방(방망이로 때림)과 임제 할(큰 소리를 침)이  있다. 방망이로 때리고 악! 하고  고함을 쳐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옭아 매고 있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방망이의 때림이 직접적인 방법이라면 할의 고함은 직접적이면서도  울림에 의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저 깊은 내부세계를 열리게 한다.

  하루는 황벽이 부엌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밥을 짓는 공양주 스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스님들의 저녁 공양을 지으려고 쌀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 절의 스님들은 하루에 얼마나 먹느냐?'

  '두 섬 닷 말을 먹습니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대중의 수에 비하여 적게 먹고 있습니다.'

  그러자 황벽이 공양주를 때렸다. 이유도 모르고 느닷없이 얻어 맞은 공양주는 요즈음 절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 임제에게 이 일을 말했다. 그랬더니 임제가 왜 스승님께서 자네를 때렸는지 이유를 알아 보겠다고 공양주에게  말하고는 스승을 만나 뵈러  방장실로 들어갔다. 황벽이 사건을 대충 짐작하고 먼저  부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임제가 '공양주가 아직 신출내기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스승님께서 딱 깨치도록 한마디 대신해 주십시오.' 하면서 조금전에 황벽이 공양주에게 물었던 질문을 임제가 되물었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내일 한번 더 먹는다고 왜 말하지 못하느냐?'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무슨 내일까지 미루려고 하십니까? 지금 잡수십시오.'

  말을 마치고 황벽의 뺨을 올려 붙이니, 황벽이 말했다.

  '이 미친 놈이 또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구나.'

  그러자 임제는 악! 하고 고함을 치고 나가버렸다.

  불법은 어제의 일을 회상하거나 내일의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하는 전부를 침투시키는 것이다.


  하루는 임제가 소나무를 심고 있는데 황벽이 다가와서 물었다.

  '깊은 산 속에 그 많은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을 할려고 하느냐.'

  '첫째는 절의 경치를  가꾸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뒷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임제가 말을 마치고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치니 황벽이 말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자네는 이미 나에게 30방을 얻어맞았다.'

  임제는 다시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 치고 나서 '허허!'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니 황벽이말했다.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세상에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30 방 얻어 맞았을 것을 다시 괭이로 땅을 세번 내리침으로서 30 방을 황벽에게 되돌려 주었다.

  하루는 대중운력을 하는데  황벽도 손에 괭이를 들고  나왔다. 문득 뒤돌아보니 임제가 빈손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자네는 괭이를 어디에 두었는가?'

  '어떤 사람이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자네와 의논할 일이 있네.'

  임제가 가까이 오자 황벽은 괭이를 땅에다 세워놓고 말했다.

  '이것은 혼자 서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이것을 움직일 수도 들어 올릴 수도 없네.'

  분명 스승은 위대한  법을 전하는 전등의 암시로  괭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임제는 재빨리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당장에 괭이를 낚아채 스승이 한 것과 똑같이 괭이를 땅에 세우고 말했다.

  '보십시오, 스승님. 괭이가 저의 손 안에 들어왔지 않습니까?'

  이 상징적인 대화를 통해 법의 등불이 이미 임제의 손에 쥐어졌음이 드러났다.

  그러자 황벽은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절로 돌아가 버렸다.

  '오늘 이미 대중들을 이끌고 들에 나가 일할 사람이 정해졌다.'

  임제는 다른 대중들과  함께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괭이로 땅을 파고 있다가 황벽이다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일손을 멈추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랬더니 황벽은 다시금 넌지시 제자를 시험했다.

  '자네, 벌써부터 지쳤군.'

  임제가 대답했다.

  '괭이를 든 적도 없는데 지치다니요?'

  이 말에 황벽은 주장자를 들어  임제를 내리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주장자 끝을 잡고 어찌나 세게  밀쳤던지 황벽은 그만 땅바닥에  나둥그라지고 말았다. 황벽은 다른 제자를 불러 자기를 일으켜 세우게 했다. 그를 부축한 다른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어째서 이런 미친 놈의 무례함을 그냥 참으십니까?'

  그러자 황벽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제자를 한대 갈겼다. 임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다시 괭이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화장당하고 있는데 나만 여기서 산 채로 매장 당하는구나.'

  이것은 정말 기상천외한 발언으로 젊은 사자의 첫 포효였다. 지금까지 나인줄 착각하고 있었던 현상적인 <껍데기 나>는 죽어 땅에 묻히고, 의식 깊숙히 침잠해 있던 진실한 <참 나>가살아 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껍데기 나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훨씬 앞서 일어날 수 있으며, 그리고 응당  일어나야 한다는, 또한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야만 우리의 삶은 영원히 죽지 않는 <참 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큰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황벽은 임제가 철저히 깨쳤으며  선의 등불을 밝혀 나갈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임제는 황벽 밑에서  오랜 기간을  머문 뒤 하북지방의 임제사로 가 그 곳의 스승이 되었다. 임제의 할!은 벌써 중국천하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임제를 찾아왔다. 먼저 임제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임제의 이 말에 그 스님이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임제는 두 손을 모으고 읍을 하여 인사하고 난 뒤 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때 그 스님이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자 임제가 그대로후려쳤다.

  제자 보화와 주고 받은 기상천외한 선문답들과 거침없는 몽둥이 세례는 필연적으로 들어가야할 <참 나>의 문이 험하고 높기만 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루는 임제가 보화를 불러 놓고 은근히 말했다.

  '내가 황벽스승 밑에 있을 때 스승의 심부름으로 편지를 전하려고 위산에 도착했을때,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먼저 여기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대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내 이제 스승 황벽의 법을 널리 펴고자 하니,

그대는 나의 모자라는 점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보화는 아무 말 없이 인사만 드리고 내려가버렸다.

  뒤이어 극부가 들어 오자, 임제는 극부에게도 보화에게 한 말을 그대로 하였다. 그러자 극부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인사만 드리고 나가버렸다.

  사흘 후에 보화가 다시 올라와서 문안드리며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전날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임제는 몽둥이를 들어 바로 내리쳤다. 그런 일이 있은지 사흘 뒤에 극부가 역시 올라와서 문안드리며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전날 보화를 때리셨다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임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몽둥이를 들어 내리쳤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일 후 마침 어떤 신도가  스님을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다. 임제와 보화는 함께 참석하여 즐겁게 공양을 하다가 임제가 보화에게 물었다.

  '터럭 하나가 온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한 알에 수미산을 담는다  고 하는데 이는 신통하고 묘한 작용인가, 아니면 근본 바탕이 그렇기 때문인가?'

  이 물음에 보화는 먹고 있던  공양상을 발로 걷어차 엎어 버렸다.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 그놈 성깔 하나 몹시 거칠구나!'

  그러자 보화가 성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인데 거칠다 세밀하다 하십니까?'

  신도가 마음을 내어 잘 차려  올린 공양상인데 보화의 거친 행동 때문에 재대로 먹지도 못하고 절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공양을 하면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보

화를 보니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임제는 보화에게 다시 물었다.

  '오늘 공양은 어제에 비해 어떤가?'

  보화는 전 날과 마찬가지로 공양상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옳기는 하다만 몹시 거칠구나!'

  이에 보화는 울화통이 터져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눈 먼 작자야! 불법을 무슨 거칠다느니 세밀하다느니 하는가?'

  괜히 보화에게 말을  걸었다가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도  먹지 못한 임제는 혀를 내두러며나가버렸다.

  어느 날 임제는 마침 하양장로, 목탑장로와   큰 방의 화로 앞에 둘러 앉아 법담을 나누고 있었다. 임제가 넌즈시 먼저 물었다.

  '보화가 매일 거리에서 미치광이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그는 범부인가요, 성인인가요?'

  임제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화가 들어 왔다. 그러자 임제는 좀 멋적은 표정을 하면서 보화에게 바로 물었다.

  '그대는 범부인가, 성인인가.'

  그러자 보화가 되물었다.

  '스님이 먼저 말씀해 보시오. 내가 범부요, 성인이요?'

  이에 임제가 악! 하고 고함을 치자  보화는  앞에 앉아 있는 세 어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양은 새색시 선, 목탑은 노파선인데, 꼬마 임제가 그래도 한쪽 눈을 갖추었다.'

  임제가 보화를 노려보면서 '이 도적놈아!' 하고 외치자, 보화는 '도적놈아, 도적놈아!' 하면서 나가버렸다.

  하루는 보화가 큰 방 앞에서 어거적거리며 생채를 먹고 있는 것을 임제가 지나가다가 보게되었다. 임제가 그 먹는 모습을 보고 한 마디 하였다.

  '먹는 꼴이 꼭 한 마리 나귀 같구나!'

  이에 보화는 엎드려서 나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임제가 '이 도적놈아!' 하고 소리치니, 보화는 '도적놈아 , 도적놈아!' 하면서 나가버렸다.

  보화는 항상 미친듯이 거리를 돌아 다니며 요령을 흔들어 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둠으로 오면 어둠으로 치며, 사방팔면으로 오면 회오리바람 처럼 치고, 허공으로 오면 도리깨질로 연거푸 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임제는 제자를 보내어 그렇게 말할 때 바로 멱살을 움켜잡고 '앞의 어느 것처럼도 오지 않을  때는 어찌하십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보화가 나타나자  제자는 임제가 시키는대로 하였다.  그렇게 하자 보화는 그 스님을 밀쳐버리면서 '내일 대비원에서 재(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가지고 행위를 삼가하고 마음을 경건하게 가지는 것. 죽은 자를 천도하는 것)가 있느니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돌아와 임제에게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임제가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웃으면서 말했다.

  '내 전에 부터 보화의 깨침을 깊이 인정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역시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보화는 거리에 나가 요령을 흔들면서 사람들에게 장삼(상의와 하의를 합해서 만든 법복)을  달라고 하였다.  기이한 보화의 행동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렇게 할 때 마다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는 그때마다 필요없다고 하였다.  임제는 절의 살림살이를 맞아보는 원주를 시켜서 관 하나를 사오게 하고, 보화가 돌아오자 불러 놓고 옆에 놓여 있는 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 그대를 위해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는 그 관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아 다니며 외쳐댔다.

  '임제스님이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보화의 기이한 말에 많은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보화를 따라 다녔다. 그러자 보화가 말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다음 날도 많은 사람들이 남문에 모였으나 보화는 같은 말을 하였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서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사흘을 이렇게 하니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혼자 성 밖 북문으로 나가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 가는 행인 더러 뚜껑의 못을 치게 하였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서 마을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어 보니 몸은 빠져 나가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소리만이 은은히 울릴뿐이었다.

  보화는 기이한 행동속에서 삶과 죽음의 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화는 상대방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 자신을 거기에 계합시켜  도적놈이라 하면 자신이 도적놈이 되고 나귀라고 하면 자신이 나귀가 되었던 것이다.

  밝음과 어둠으로  분별과 무분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면팔방과 허공으로 현상과공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이 분별로 다가오면 분별로서 대응하고, 무분별로 다가오면 무분별로서 대응하고, 현상으로  다가오면 현상으로서 대응하고, 공으로 다가오면 공으로서 대응하여 상대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비원에서 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현상적인 죽음을 나타내고 있다. 삶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속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동서남북은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죽어야하는 우주의 질서를 보이고 있으면서도,흔적도없는 그 모습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쩌면 남전에게서 조주처럼 보화는 임제에게 있어서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보화의 기이한 행위들은 임제로 하여금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로 비약하게 하여 임제종이 가장 밝은 불꽃으로 피어나  오랫 동안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어느 해 여름 수행기간 도중에 임제는 스승을 만나고자 황벽산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경전을 읽고 있는 스승을 보고 임제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사람을 만나러 올라왔더니 눈 먼 늙은 중 뿐이로군.'

  사흘을 묵은 뒤 임제는 수행기간을 지키기 위해 돌아갈려고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이미 수행기간 지키기는 틀렸는데 여기서 여름 한 철을 보내지 그래.'

  '그냥 스승님을 잠깐 뵈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자 황벽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 쫓아버렸다. 수십리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떠나온 자신의 행동이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 싶어 다시 되돌아가 여름을 스승과 함께 보냈다.

  한 철을 잘 보내고 임제가 다시 떠나려 하자 황벽이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하북이 아니면 하남이지요.'

  이 말에 황벽이 몽둥이를 들어 한 대 치려 하자 임제가 그것을 잡아 도리어 스승을 밀쳐버렸다. 스승은 껄껄 웃으며 시자를  불러 자신의 스승이었던 백장이 쓰던 몽둥이와 방석을 가져 오게 하였다. 이제는 임제의  법이 무르익어 임제에게 법을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임제는 시자를 불러 세워 '불까지 함께 가져오라'고 말했다. 황벽이 말했다.

  '그럴 것 없네. 앞으로 그것들을 갖고 천하에 늘려있는 위선자와 부정한 자들의 혀를 끊어버리게.'


  깨닫기 전의 임제는 빈틈없이  지극정성으로 수행에 임하는 매우 조용한 구도자였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는 쾌활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으로 선사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행각중에 달마의 기념탑을 참배하러  갔다. 탑을 지키고 있는 스님이 임제를 보자 물었다.

  '부처님께 먼저 절을 하시겠소, 아니면 달마조사께 먼저 절을 하시겠소?'

  '나는 아무에게도 절을 하고 싶지 않네.'

  이 말에 기분이 상한 스님이 다시 물었다.

  ' 스님께선 부처님과 조사님들과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습니까?'

  임제는 소매를 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 버렸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깊은 뿌리에 접목된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임제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도를 이루려고 몸부림치는 수행자들이여! 우리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한 것은 진리를 깨치기 위해서였다. 나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처음에 나는 엄격한 계율이 전부인 줄 알고 계율 지키기에만 전념하였고, 또한 경전과 그 주석서들을 열심히 뒤적이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다 훗날에야 나는 모든 계율과 종교의식, 경전들은 병자를 고치는 약 처방전처럼 단지 속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 방편들을 모두 다 던져버리고 직접 진리와 맞부딪쳤다. 다행히 나는 위대한 선지식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비로소 눈이 뜨였고, 스승들이 깨달은 바를 이해하여 쉽게 참과 거짓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자는 없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해야 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것,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언제어디서나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한시 바삐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 대해탈을  이룰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옭아 매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철저하게 벗어나야 한다. 조그마한  부스러기라도 남아 있는 한 진리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참본성을 바로 보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간에 무우  자르듯이 철저하고 냉정하게 잘라야 한다. 그에게 투영된인간의 문제는 오로지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이 열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고정관념에 따른 종교의식의 타파를 반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종교정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할!하면서 고함을 치는 임제 사상의 촛점은 <무위진인(無位眞人)---차별없는 참사람>에 있다. 그는 설법을  할 때마다 <차별없는 참사람>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강을 건너는 배가되어 누구든지  실어 나르는 목적지는 <차별없는  참사람>이라는 지점이었다.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우연에 지배를  받는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나가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도의 물결과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영원한 나가 바로 임제가 이야기 하는 <차별없는 참사람>이다.

  하루는 지금의 도지사쯤 되는  부주 왕상시가 방문하여 큰방 앞에서 임제를 뵙고 물었다.

  '큰방에서 참선하고 있는 스님들은 경을 보십니까?'

  '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선을 배웁니까?'

  '선도 배우지 않습니다'

  '경도 보지 않고 선도 배우지 않는다면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저들은 모두 다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려고 하루하루를 보낼 뿐입니다.'

  '금가루가 귀하긴 하나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대를 그저 속인으로만 여겼더니.'

     가장 평범한 진리, 참 나를  본 마음이 열린 자에게는 똥막대기라도 <차별없는 참사람>

인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치는 사물마다 <차별없는 참사람>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하루는 정기 설법에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의 몸뚱이 속에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차별없는 참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대들 면전에서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체험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펴야 한다.'

  그러자 한 스님이 앞으로 나아와 물었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임제는 법단에서 내려와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말해 봐, 말해 봐!'

  그 스님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멈칫거리고 있을 때 임제는 그를 밀쳐 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별없는 참사람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란 말인가!'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책이나 솥뚜껑같이 <차별없는 참사람>을 하나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얽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이 멀기만 하다.

  도라든가 참 나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것을 우리는 선가의 전용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진실한  삶을 추구하며 늘 깨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차별없는 참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우물에 빠져 자신 밖에볼 수 없는 것도 또한 슬픈 일이다. 여기서 에머슨의 말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선의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신뢰의 이유를 알아야만 모든 근본적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관계를 설명할 수있다. 우주적 신뢰의 바탕이 되는 이 <본래의 나>란 무엇인가? 제멋대로 위치를 바꾸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자로 정확하게 잴  수도 없는 수없이 많은 별들은, 최소한의 존재가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쓸모없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빛을 비춰준다. 과학의 힘으로도 불가해한 저 별들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

오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자연히 우리가 본능  또는 천성이라 부르는 생명본질의 문제에 까지 연관된다.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을 <학습>이라 부른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고요한 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그러나 어떻게 해서우리의 영혼 속에 떠오르는지 그 방법을 결코 알 수 없는 존재의식은 사물과 시간, 공간, 빛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다.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에머슨이 말하는 <본래의 나>와 임제가 말하는 <차별없는 참사람>이 얼마만큼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말이란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다. 이해를 하고 나면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말이 갖고  있는 그 뜻을 체득하고 나서도 글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내부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와 글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어떤 매체를 통해서나 깊은 고뇌와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임제는 자신이 도와 계합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차별없는 참사람>이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무지와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단한 참을성을 갖고 <껍데기 나>의 껍질을 부술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술려고 하는 대상을 항상 밖으로 향한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직관에 의한 관조에는 등을 돌린채  무가치한 <학습>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헤매고 있었다. 그들이 자기의 집을놔두고 남의 집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이 임제로서는 매우 안타까웠다. 그의 거친 말과 행동뒤에는 뜨거운 자비심이 흐르고 있다.  그의 할과 방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멋진 처방전이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키워 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제가 스승 황벽에 대해 느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임제는 대중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도를 구함에 있어서는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는  스무 해 동안을 돌아가신 황벽스승과 함께 지냈다. 처음에 내가  불법의 골수를 세 번이나 물어 보았는데 스승께서는 세번다 나를 후려쳤다. 어찌나 아팠던지  가시돋힌 나무로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런 몽둥이라면 한번 맞고 싶은데  나를 때려줄 사람이 있는가.'

  그때 한 스님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임제가 몽둥이를 건네 주었으나 그 제자는 받기를 주저하였다. 그러자 임제는 또다시 몽둥이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임제가 자주 몽둥이로 후려치기는 하였지만 후대 사람들은 <덕산 방 임제 할>이라 부르고 있다. 조주가 신출귀몰한 말로써  선의 지평을 열었다면 임제는 고함의 철학을 열어 선을 더욱 보편화 시켰던 것이다.

  한 번은 제자에게 고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때로는 한 외침이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때로는 땅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고, 때로는 풀을 헤치는 잣대와 같고, 때로는 고함이 고함 아닌 것으로도 쓰인다.'

  이런 설명을 한 뒤에 임제는 그 제자에게 물었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제자가 대답할 말을 찾고 있자  임제는 <할>을 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그 제자의 사념을 끊어 버리려고 금강보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또 한번은 임제가 설법하러 법단에  오르자 한 스님이 앞으로 나와 절을 하니 임제가 별안 간 악!하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스님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

  그러자 임제가 물었다.

  '그럼, 네가 말해 보아라. 할이 어디에 떨어졌느냐.'

  그 스님은 대뜸 악!하고는 물러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스님이 앞으로 나오더니 법당이 쩡쩡 울리는 큰소리로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근본 뜻입니까?'

  임제가 악!하고 고함치자, 그 스님은 넙죽 절을 하니 임제가 다시 물었다.

  '말해 보아라. 좋은 할이라고 생각하느냐.'

  '좀도둑이 크게 패하였습니다.'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

  '두번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불법이 아니면 언제라도, 무엇이든지 물어 뜯을려고 웅커리고 있는 사자처럼  임제는 다시 악!하고 고함을 쳤다.


  구저의 제자가 스승의 흉내를 내다가  손가락을 잘린 것처럼 제자들은 뜻도 모르고 스승의 흉내 내기가 쉽다. 임제의 제자들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스승의 흉내를 내어 할을 사용하고 있었다. 임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니 너희들은 나의 할을 무턱대고 모방하고 있는데,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한 사람은 동쪽에서 걸어오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서쪽에서 걸어 오고 있다. 서로 마주치는 순간두 사람은 동시에 할을 했다. 이때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이겠느냐? 너희들이 이것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절대 나의 할을 따라하지 마라. 알겠느냐.'

  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을  통하여 주인과 공명을 일으켜 주인과 계합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 자신의 <차별없는 참사람>  그것말고 또 누가 주인이겠는가. 때로는 풀을 헤치는 잣대로서 풀섶을 헤치고 숨어 있는 <차별없는 참사람>을 찾아내는 방편으로 임제는 할!하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 임제는 군말을 붙이고 있다.

  '그대들이 생사의 세계에  구속받지 않고 해탈하기를 바라거든  지금 당장 내 설법을 듣고있는 <그 사람>을 깨달아라. 그는 모양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형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것이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도 않으며 바탕을 이루는 근원 또한 없어서 집착함이 없다.

그는 매우 활달하고 빈틈이 없어서 어떤 상황에도 막힘없이 잘 대처하고, 누구에게도 구속됨없이 조건에 따라 자신을 나타낸다. 그는 붙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찾으려 하면 사라진다. 어떻게 하여 그와 함께 하겠는가.'

  한번은 노스님이 임제를 찾아와 인사도 나누기 전에  물었다.

  '절을 해야겠습니까, 절을 하지 않아야겠습니까?'

  이 말에 임제가 악!하고 고함을 치자 그 노스님은 절을 하였다. 임제가 말했다.

  '나이만 들었지 정말 좀도둑이로다.'

  그러자 노스님이 '도둑놈아, 도둑놈아!'하고 나가 버렸다.

  이에 임제는 나가고 있는 노스님 뒤에 다 한마디 덧붙였다.

  '일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네.'

  그러자 임제는 옆에 있는 수좌에게 물었다.

  '허물이 있느냐?'

  '있습니다.'

  '있다면, 허물은  손님 쪽에 있느냐, 주인 쪽에 있느냐.'

  '두 쪽에 다 있습니다.'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

  수좌가 그냥 나가버리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차별없는 참사람>을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에게  고함은 이미 고함이 아니다. 그냥 한번 할!하고 고함침으로써 홀로 걷고 있는 깊은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를 깊이 인식할

뿐이다.


  한번은 대각이 행각을 하다가 임제절에 들렸다.

  대각이 인사드리러 임제방에 들어가자 임제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아무 말없이 주장자를 들어 세웠다. 그러자 대각도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선할 때 앉는 좌구를 폈다. 조금 있다가 임제가 주장자를 던져버리자 대각도 좌구(누워 잘 때 밑면에 까는 네모꼴의 방석)를 거두고는 긍정하는 말도 부정하는 말도 없이  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자 많은 스님들이 수근거렸다.

  '저 스님은 스승님의 친구 되시는  분인가 보다. 얻어 맞지도 않고 앉아 있다가 그냥 나오네.'

  임제가 이 말을 듣고 대각을 다시 찾았다. 대각이 들어오자 임제가 말했다.

  '대중들이 그대가 나에게 아직 인사드리지 않았다고 수근거리네.'

  그러자 대각은 '안녕하십니까?'라고 한마디 하고는 대중 속으로 돌아가버렸다.


  또 한번은 조주가 행각하다가 임제절에 들렸다.

  조주가 왔을 때 마침 임제는 발을 씻고 있었는데 조주가 먼저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입니다.'

  조주가 임제 앞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발 씻은 구정물을 덮어 쓰고 싶습니까.'

  그러자 조주는 옷을 털며 내려가버렸다.


  이번엔 마곡이 행각하다가 임제절에 들렸다.

  마곡이 임제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는 좌구를 펴면서 물었다.

  '12 면 관음보살은 어느 얼굴이 진짜 얼굴입니까?'

  그러자 임제는 자리에서 내려와 한 손으로는 좌구를 거두면서 또 한 손으로는 마곡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12 면 관음은 어디로 갔는가?'

  이에 마곡은 몸을 돌려 임제의 자리에 앉으려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주장자를 들어 후려치자, 마곡이 이를 받아쥐고 서로 붙잡고 방장실로 들어갔다.


  조주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가장 기적적이었듯이, 임제에게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인 체하고 억지로 독창적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면목을  잃고 만다.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별적인 독창성을 이해한다면 가장 귀한 보물인  본래면목의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자신 안에서 울려 나오는 공명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수 천년을 헤매도 찾을수 없다. 중요한 인식은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속안에서 조차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찾아져야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어져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독창성의 뿌리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차별없는 참사람>은 항상 주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체일 수가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등으로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서양을  몰랐다고 서양이 없었던 것이 아니듯이,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모른다고 상대성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며, 멘델의 유전법칙을 모른다고 유전법칙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를 모른다고 마음의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육신의 껍질을 통해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친구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받았다면 그대의 얼굴은햐얗게 질리고 온 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릴 것이다. 그 슬픈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은 그대의 마음인데 그것이 당장에 육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마침 가족끼리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부인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게 맛있던 밥맛이 싹 달아날 것이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일은 마음이 하지만 그 영향은 바로 육신을 통하여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다.

  산 꼭대기로 통하는 돌계단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도 진실한 참나를 찾기 위해노력한 만큼 확실한 단계가 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내부 질서까지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서는 속고 속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참 나를 찾아 떠나는 마음의 여행에서는 정성들이고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는 철저한 인과적인 것이다. 임제는 이 마음의 성숙단계를  주체와 객체에 관한 문제로 풀고 있다.

  용수가 옳고 그름의 변증법적  정반합에서 중도로 포섭했듯이 임제는 <차별없는 참사람>에이르는 방법으로 주체와 객체의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

  이 주객의 문제에 대해  임제는 네 가지 방법상의 가능성---사료간(四料簡)을 생각해 내었

다.

  '객체를 버리고 주체를 남겨 두는  경우와,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 두는 경우와,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경우와, 반대로 주체와 객체를 모두 남겨 두는 경우가 있다.'

  첫째 단계의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인  선입견 때문에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되고 안됨을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을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보지도 못한 사람이 정상에대해 열심히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루는 정상좌가 임제를 찾아와 물었다.

  '스님, 무엇이 불법의 근본 뜻입니까?'

  그러자 임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상좌 앞으로 다가가서  멱살을 움켜쥐고 뺨을 한대후려갈기면서 밀쳐버렸다.  정상좌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까 곁에서 있던 스님이 말했다.

  '정상좌여!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상좌는 절하려는 순간 홀연히 크게 깨쳤다.


  둘째 단계의 사람은 산을 산으로  보고 강을 강으로 볼만큼 내면이 익은 정상적인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우리의 미세한 마음 작용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때는 산을 보아도 이미 산이 아니며 강을 보아도 이미 강이 아니다.

  여기서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떠나 존재 자체의 문제로 한 발자욱 더 나아가야 한다. 산의정상에 올라 가면서 우거진 수풀과  지저귀는 새 소리도 들으며 내부에서 울려나오는 자신의 소리에도 흥이 겨워 홀로 춤춘다.

  임제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설법한 적이 있다.

  '수행자들이여! 내가 밖에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안에서 찾을려고 생각을 내어 윗 잇몸에 혀를 찰싹 붙이고 꼼작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다. 그리고 이것을 조사문중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무명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 스승들이 이르기를 <답답하고캄캄한 깊은 구덩이가 참으로 두렵도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한 말임을 명심하여라.'


  셋째 단계의 사람은 주관과 객관의 혼연일체로 공명을 일으켜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하든지 조화를 이루어 거슬리는 것이 없다.  여기서 그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현상계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의 동일한 마음에서 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밑으로 옆으로 더 가까워진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쁨을 만끽하지만,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누구에게 산의 이야기를 해 주겠는가.

  한번은 용아가 찾아와 임제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역으로부터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선판(좌선할 때 몸을 기대는데 쓰는 판자)을 갖다 주게.'

  용아가 바로 선판을 가져다 드리자, 임제는 받아서 그대로 후려치니 태연스럽게 맞더니 용아가 말했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결국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용아가 취미에게 가서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역으로부터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방석을 갖다 주게.'

  용아가 바로 방석을 가져다 드리자, 취미는 방석을 받아서 그대로 후려치니 태연스럽게 맞더니 용아가 말했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결국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용아가 스승이 되고 난 후에 어떤 스님이 용아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는 옛날 있었던일을 물었다.

  '스님께서 행각하실 때 두 스승을 찾아뵈었던 일에 있어서 두 분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기는 깊이 인정하지만 결국 조사의 뜻은 없었네.'


  마지막 단계의 사람은 자신이 <참  나>와 하나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주체와 객체가 다  허물어져 버리고 다시 새롭게  재구성 되어진다. 여기서는 현상계로 돌아와 산을 보더라도 다시 산이고 강을 보더라도 다시 강인 것이다.

  산의 정상에 머물지 않고 설쩍이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세상과 계합하는 것이다.

  임제가 말한 <차별없는 참사람>이며,  이 경지에서는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세상 어디든지갈 수 있는 것이다. 임제의  참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원불멸의 참사람은  무상한 변화속에 있으면서도 무상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영원한 실체가 없는 육신속에  있으면서도 나가 없지 않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정신에 대해서 일찌기 이렇게 말했다.

  '펼치면 우주 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나도 그 위에 서지 못한다. 홀로 밖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를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는 옛 스승의 말 그대로다. 그러니 어찌하겠느냐. 스스로 들여다 보는 수밖에.'


  진정한 구도자는 부처도, 보살도,  나한도,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의 어떠한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의연히 이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천지가 무녀져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천지사방에 부처가 나타나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또 지옥에서 온갖 귀신들이  뛰쳐나오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세상의 모든실체을 이루고 있는 공의 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변화하는 것에 홀려있는 눈에는 실체로 보이지만, 껍데기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지혜의  눈에는 이미 실체가 아니라 단지관계일 뿐인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만 마음의 작용이고, 세상 만물도 다 알음알이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꿈이나 환상, 허공에 핀 한 송이 꽃에 집착하여 무엇 하겠는가.

오직 실제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행위하고 있는 자신일 뿐이다>.

  그는 부처도, 보살도 바라지 않으며, 아귀와 짐승도, 지옥도 마다 하지 않는다. 좋고 싫음이 있다면 그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데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껍데기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만 거두면 단번에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임제는 일생 동안 건강하게 잘 지냈다.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자리를 펴면서 바르게 앉아 제자 삼성을 찾았다. 임제가 말했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깨달음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자 삼성이 말했다.

  '어찌 감히 스승님의 깨달음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이 다음에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너는 무엇이라고 말해주겠느냐.'

  삼성이 악!하고 고함을 치자 임제가 조용히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말을 마치고는 단아하게 앉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867 년 정월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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