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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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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262회 작성일 21-07-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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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병들지 않는 사람



깨달음이 추구하는 세계는 영원한 자유다. 구속을 벗어났으면서도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질서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유로운 것이다. 영원히 병들지  않고 깨어있는 건강한 정신으로 자신의 세계를 당당하게 걸어간 동산 양개를 만나게 된다.


동산 양개는 절강 지방출신으로 회계 유씨의 자손으로 어려서 출가하였다.

하루는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을  외우다가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뜻도  없다(無眼耳鼻舌身意)'라는 귀절에 이르자 홀연히 얼굴을  만지며 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이렇게 눈, 귀,  코, 혀 등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 예기치 않았던 질문에  스승은 깜작 놀랐으며, 아울러 이 소년의  사실적인 지적에 감동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누구도 경전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믿고 있다. 어린동산은 어떤 책이든지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 필수품인 자주적인 정신이 동산에게는 성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로 스승을감동시켰으며 스승은 솔직하게 '나는 너의 스승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설산의 묵선사에게로  인도하였다.  정식으로 계를 받기전에 그는  부모님께 하직 편지를 올렸다.


부처님도 세상에 나오실 때는  모두 부모님을 빌어 생명을 받았고, 만물이  생길 때도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덕분이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니면 태어날 수 없고 천지가 아니면 자랄 수 없으니, 다 길러주시는  은혜를 입고 덮어주고 실어주는 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 아, 그러나 모든 중생과 갖가지 만상은 덧없는  것이어서 생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려서 젖을 먹여주신 정이  두텁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으니, 돈을 꾸러미째로  바친다해도 그 은혜 다 갚기 어렵고, 고기로 봉양한다 해도 그것이 어찌 오래오래 사시게 하는 길이겠습니까.

끝없는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출가하는 공덕이 최고 입니다.  출가는 수 억 년 동안 내려오는 삶과 죽음과 애욕의 강물을 끊고 번뇌의 고통바다를  뛰어넘는 길이며, 자애로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세상의  네가지 은혜(부처님, 나라, 부모, 시주)를 다  갚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자식 하나 출가하면 9 족이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양개는 맹세코  이 생의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  티끌같은 몸으로 진실한 지혜를 활짝 깨치려 합니다. 바라옵건대, 부모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시어 속으로 자꾸만 생각지  마시고 거룩한 정반왕(석가의 아버지)과 마야부인(석가의  어머니)을 본받으소서.

뒷날 부처님 회상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우선 헤어지고자 합니다. 양개는 부모봉양 못했다는 5 역죄(아버지를  죽인 죄, 어머니를 죽인 죄, 수행자를  죽인 죄, 부처님 몸에 상처를 낸 죄, 승단의 화합을 깨뜨린 죄)를  꺼려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을 금생에 구제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몇생을 기다려 구제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부모님께서는 저를 잊어주소서.


21 세에 정식으로 계를 받고는 행각을 시작하였다. 묵선사를 떠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 떠나면 인연이 다한 것이니 외로운 학은 둥우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가 맨 처음 찾아간  스승은 남전이었다. 마침 찾아간 날이 마조의 제사 전  날 저녁이었다.

법회에서 남전이 대중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일이 마조 스승의 제삿날인데 스승이 오실런지 모르겠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두가 말이 없는데 동산이 불쑥 일어나 대답했다.

'상대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오실 것입니다.'

이 대답에 반한 남전이 말했다.

'아직 젊어서 잘 갈고 닦으면 큰 인물이 되겠군.'

그러나 동산은 이렇게 대꾸했다.

'스님께서는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기서 동산은 또 한번 자주 정신을 드러내 보였다.  고목에 접목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로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참나>는 갈고 닦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두번째로 동산은 위산을 찾았다. 그는 위산에게 혜충의 이야기를 꺼냈다.

'혜충국사께서는 생명이  없는 물건도 설법을  한다는데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째서 그 설법을 들을 수 없습니까?'

한참 토론을 한 뒤 위산은 불자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위산이 손을 입에다 갖다대며 말했다.

'내 부모가 주신 이 입은 절대로 자네에게 그것을 설명하라고 주신 게 아니네.'

 그러나 동산에게는 와 닿는 것이 없었다. 동산은 다시  행각할 채비를 차리고 위산에게 다른 스승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위산이 동산에게 소개해 준 선사는  운암 담성이었다. 운암을 만나자마자 동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생명없는 물건이 설법을 할 때는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그거야 생명없는 물건이 들을 수 있지.'

그러자 동산이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도 들을 수 있습니까?'

'만약 내가 그 설법을 듣는다면 그대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동산은 생명없는  물건이 설법을 한다는 것에 공감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동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운암이 불쑥 불자를 집어들며 물었다.

'이 소리는 들리느냐?'

'들리지 않습니다.'

'자네는 내 설법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생명없는 물건의 설법을 듣기를 바라느냐?'

그래도 동산은 멈추지 않고 필사적으로 물었다.

'생명없는 물건이 설법한다는 이야기가 어느 경전에 나옵니까?'

'<아미타경>에서 물과 새와 나무, 모두가 부처를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한다는 귀절을 읽지도 못했는가?'

여기에 이르러 동산은 문득 깨쳤다. 우리 인간과 같이  숨쉬고 밥먹고 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고 우리는 착각을 한다.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돌도  돌 나름대로 숨쉬고 물먹고 하면서 살아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그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때 상대방과 나는 이미 둘이 아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우주의 거친 숨소리만 있을 뿐이다. 그는 그 감격을 다음의 시로 표현하였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불가사의한 생명이 없는 물건의 설법이여

귀로 들으면 도무지 들리지 않고

마음눈 열리고 나니 모든 것 저절로 들리네.


한참 후 다시 냉정을 되찾은 동산이 운암에게 물었다.

'저는 아직 옛날 습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운암이 나무라는듯이 되물었다.

'그러면 자네는 이제까지 무엇을 하였느냐?'

'알고 나니 불법인 것을 모르고 닦질 않았습니다.'

'어떤가, 이제는 행복한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쓰레기더미에서 맑은  진주를 주운 것  만큼이나 행복합니다.'

몇 칠을 운암 곁에 머문 동산은 어느 날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니 스승이 물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갈 곳이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동산이 일정한 거처가 정해지면 한번 들린다고 하자 운암이 말했다.

'여기서 일단 헤어지고 나면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네.'

'만나지 않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동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더니 다시 다가서며 물었다.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 세상사람들이 저에게  <운암의 본래면목은 무엇이지?>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운암은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대답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동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운암이 당부했다.

'이 일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니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운암과 작별한 동산은 행각을 계속하면서도 생각은 오로지  <바로 이것>에 매여 있었다. 얼마 후 냇물을 건너다 문득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이것>의 참뜻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어릴 때 얼굴을 만지면서  형상이 분명히 있는데 경전에서는 왜 형상이 없다고 합니까?  하고 질문하여 스승을 당황하게 했던 거기에도  있었으며, 남전을 찾아가 건방지게 굴었던 거기에도 있었으며, 지금 물  속에 떨어져 일럴거리는 자신의 모습에도 있었다.  봇물 터지는 듯한 그 감격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하였다.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이제 나 혼자 스스로 가니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면목과 하나가 된다.


한자어 여여(如如)를  여기서는 <본래면목>으로 번역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의 <진여(眞如), Bhutatathata>와도 같은 뜻이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 <있는  그대로인 것>으로서 도덕경에 나오는 <영원한  도(常道)>, 힌두교의 <범(梵), Brahma>, 구약성서의  <있는 그대로의 나>에 해당한다.

대익이라는 사람이 봄을  찾아 온 중국 천지를  돌아다녔지만 봄을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앞 뜰에  복사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는  것이다.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나가 아닌  나의 그림자를 쫓아 다니게 된다. 진리는 말에 있는 것도  아니며, 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분별심을 끓어  버릴때 내부의 나와 밖의 그가 하나되는 인식의 체험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그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는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다.  나는 형상적인 나를 의미하며 나이면서 나가 아닌  그는 본래면목의 나를 의미하고 있다.

동산은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본래면목>을 움켜 잡았기에 대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가 있었다. 그의 깊은 통찰력은 선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환상과 공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그러면서도 초연했고,  초연하면서도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섰다. 그의 행각은 쉽게 멈추어지지 않았다.


동산이 흥평을 찾아 인사을 드리니 흥평이 말했다.

'늙고 썩은 몸에 절하지 말라.'

'저는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것에다 절을 하였습니다.'

'늙고 썩지 않는 것은 절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을 받고 안 받고에 구애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흥평이 침묵을 지키자 동산이 되물었다.

'무엇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

흥평이 동산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래도 저는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기 있는 저 목각인형에게나 물어보게.'

동산이 하직 인사를 하자 흥평이 말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아직 행각 중입니다. 흐름을 따라 정처없이 가렵니다.'

'법신이 흐름을 따르느냐, 보신이 흐름을 따르느냐?'

'결코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흥평이 손뼉을 치며 좋아 했다.

이때 이미 동산에게는 깨달음에 대한 주체성이 확고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동산이 용산을 찾아 인사를 드렸더니 용산이 먼저 말했다.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그대는 어떻게 왔느냐.'

'길이 없는데 스님께서는 어디로부터 와서 이렇게 앉아 계시는 것입니까?'

'나는 구름과 물을 따라 오지 않았다.'

동산이 용산에게 계속 물었다.

'스님께서 이 산에 머물러 계신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세월은 신경쓰는 것이 아니다.'

'스님께서 먼저 계셨습니까, 이 산이 먼저 있었습니까?'

'모르겠다.'

'어째서 모르십니까?'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어떤 도리를 얻으셨기에 이 산에 머물러 계십니까?'

'나는 진흙소 두 마리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다.'

비로소 동산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다시 절을 하였다.

옳고 그름, 있고  없음, 좋고 나쁨의 이원론적인  현상세계의 모든 분별을 떠나  진리의 바다 본래면목에 들어가 그속에서  고요히 자신을 관조하며 즐기고 있으니 어느  시절에 소식을 전하겠는가?


동산이 행각하다가 늑담에 머물고  있을 때 어느 날 초스님이 대중들을 모아 놓고  큰 소리로게송을 읊고 있는 것을 들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불가사의한 부처와 도의 세계여!'

동산이 대중들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부처와 도의 세계는 그렇다치고, 대체 그것에 대해 떠드는 그 사람은 누구요?'

초가 대답하지 못하자 동산이 다그쳤다.

'왜 빨리 말하지 않는가.'

'빨리 말해도 별것 없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빨리 말해도 별 것 아니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초는 다시 말이  막혔다. 대중들의 모든 눈동자가  초에게로 모아졌다. 한참 동안  초가 말이없자 동산이 다시 말했다.

'부처와 도라는 것은 모두 이름과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대는 참된 가르침에 몸바치지 않는가.'

이에 초가 물었다.

'참된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동산이 대중을 둘러보더니 조용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뜻만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는 병이 됩니다.'

'그러면, 부처와 도의 세계를 설명하는 병은 어느 정도이냐.'

초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다음 날 홀연히 초는  죽어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질문으로 수좌를 죽인 동산 양개'의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동산은 50 대 초반이던  860 년 경에 강서에 있는 동산(洞山)에  머물면서 선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동산의  스승인 운암의 제삿날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  제자가 동산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운암선사 밑에 계실 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내 비록 그 분 밑에 있기는 있었지만 특별한 가르침은 받질 못했네.'

동산의 말에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내 어찌 그 분을 저버리겠는가.'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제일 먼저  찾아뵌 분은 남전선사인데 어째서 남전선사 대신  운암선사의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까?'

동산은 제자의 진지한 태도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단지 운암스승이 나에게  진리를 설명해 주시지 않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네.'

이 말에 제자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운암선사를 위해 제사를 차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분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네.'

'어째서 전부 동의하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끈질긴 질문에 동산은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만약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이것은 운암스승의 뜻을 고스란히 저버리는 것이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동산에게는  자주정신이 빛나고 있었다. 청출어람, 남색은  청색으로부터 나왔지만 청색보다 더 푸르다. 제자는 스승보다 뛰어나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한 스님이 동산을 찾아와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어떻게 피합니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그 곳이 어디입니까?'

'추울 땐 그대를 더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더 덥게 하는 곳이지.'

이 대화에서 우리는 동산이 얼마나 참을성 많고 또한  치밀한 스승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는 어리석은 질문조차도  신비한 지혜의 세계로 뛰어들게 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동산의  성격은 비교적 너그러워 몽둥이나 고함을 사용하지  않고 진리의 바다로 나아가게 하며,  또한 까다롭고 어려운 공안을 가지고 제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가장 평범한 말이 동산을 통하여 걸러지면 공안이 되어 지혜의 눈을 떠게 하였던 것이다.

추위와 더위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의 문제로 바뀌어 버린다.

삶이 절실하지 못할  때는 살아있으면서도 죽는 것이며,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으로 나누어진 분별의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살아있을 때는 철저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오로지 삶의 문제일때 영원히  살아있는 참 생명의 문에  이르게 된다.

삶과 죽음이 없는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말해주었는데도 선객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계속 묻고 있다.  뺨이라도 한대 때려야할 상황인데도 동산은 친절하게도  한번 더 군말을 덧붙이고 있다.

'추울 때는 그대를 더욱 춥게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더욱 덥게 하라.'

삶과 죽음을 떠나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에 더욱 철저해질때 그 속에 참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하루는 위독한 스님 한 분이 동산을 뵙고자 한다는  기별을 받고 동산은 그 스님에게로 갔다.

그 스님이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무엇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대는 어떤 중생이더냐.'

'저는 참회해도 뉘우칠 수 없는 그러한 죄를 지은 중생입니다.'

동산이 한참 동안 조용히 지켜보자 그 스님이 물었다.

'사방에서 죽음의 산이 밀어닥칠 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내가 행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와서 나는 어떤 집 처마 밑으로 지나왔다.'

'갔다가 돌아왔습니까,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저를 어느 곳으로 가라고 하시렵니까?'

'좁쌀 삼태기 속으로 가라.'

그 스님이 '허'하고 소리를  한번 내더니 동산을 쳐다보며 '안녕히 계십시오.'하고는 앉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자 동산은 주장자로 그 스님의 머리를 세 번 치면서 말했다.

'그대는 그렇게 갈 줄만 알았을 뿐 이렇게 올 줄은 몰랐구나.'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이다. 삶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으면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없으며, 죽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멋진 삶을 즐길 수가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확고한 인식뿐이다.


동산은 제자들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에 따라 <오위군신(五位君臣), 다섯 단계의 왕과 신하>이라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수행자의 정신 단계를 파악하여 적절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다.


1. 정중편(正中偏)---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2. 편중정(偏中正)--- 본체로 돌아감

3. 정중래(正中來)--- 본체로부터 돌아옴

4. 겸중지(兼中至)--- 본체와 현상이 함께 함

5. 겸중도(兼中到)---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됨


하루는 동산이 법당 뒤로 산보를 하고 있는데 한 제자가 다가와서 동산에게 물었다.

'싱싱하게 푸른 대나무가 항상 진리요, 빽빽한 국화는 지극한  지혜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두루하지 않는 빛이다.'                   ------- 1. 정중편


'어째서 두루하지 않는 빛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항상 진리도 아니고 지극한 지혜도 없다.'

'드러나기는 합니까?'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 2. 편중정


'어째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습니까?'

'세상이 아니다.'                          ------- 3. 정중래


'어째서 저는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까?'

'그대는 어째서 남의 말에 걸리는가.'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없지 않느니라.'                     ------- 4. 겸중지


'드러낼 말이 없는데 어째서 아니라고 하십니까?'

'말없는 것이 아니다.'                     ------- 5. 겸중도


1. 정중편 --- 이  단계에서는 수행자들이 자기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체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현상에만 얽매여 있다. 자신이 본래 주인인줄도 모르고  손님 노릇만 하는 것이다. 비록 현상에만 얽매여 관심을 집중하여 현상의 법칙이나  상호관계를 열심히 탐구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면의 세계로 깊이  빠져드는 필수적인 준비 단계가 되는 것이다.  현상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질서와 마주치게 된다. 현상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질서는 다름아닌 자아의  발견인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이나  관습에 젖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것에 경험이 쌓여 지혜가  성숙함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당연한

것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게  된다. 의심에 막혀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거기에  빠진다. 우연한 계기로 그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질서를 찾고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깊은 환희에 빠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잠시 혼란을 일으키다가  본래의 나로 돌아와 이성과 양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가게 되며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며 사랑하고 찬탄하게 된다.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필연으로 접목되는 것이다.


본체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푸른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빽빽한 국화는 국화대로 각자 자기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산은 이 단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는

달도 뜨기 전인 야밤 삼경의 모습이어서

서로 만나 알아보지 못해도 이상할 리 없건만

그대는 옛 생각에 의심을 품고 슬며시 그것에 다가가고 있구나.


2. 편중정 --- 이  단계에서 우리는 현상에서 본체로 다가간다. 오래 동안 버려두었던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와 불빛을  밝히니 모든 존재의 상호관계를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알고 보니 이제까지 친구로 여겼던  권력과 명예와 부는 적이며, 적으로 여겼던  보시와 지계와 인욕은 진실한 친구였네. 이제는  거짓 세계를 꿰뚫고 진실하고 불멸하는 본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세상 그대로가 진리인 것을.  그러나 거짓된 눈으로 아무리  보려고 하여도 드러나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에 달이 걸려 밝게  비추고 맑은 바람이 부니 더욱 좋구나.

동산은 이 단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어느듯 본체로 돌아가고 보니

새벽녘 거울 보고 놀라는 한 노파

그 속에 비친 얼굴 그렸던 모습과는 너무나 딴판이네

이제는 머리 그만 어지럽히고 그림자나 믿어야지


3. 정중래 --- 두번 째 단계에서 이미 참본성을  보았으므로 자유인이고 주인이며 왕이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참본성은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 갔다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산밑으로 내려오는 단계이다. 이때는 이미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본체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사들은  부정적인 방법을 쓰며, 새롭고 충격적인 말을  던지며, 심지어는 고함과 몽둥이까지도 동원하는  것이다. 스승에게는 제자들을 본체로 돌아가게 하는  단 하나

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과  세상이 둘이 아니다. 이미  세상은 세상이아닌 것이다.

동산은 이 단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본체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보니

티끌 속에서 티끌없는 비밀의 길을 가면서

지금은 꺼리는 일 능히 말하지 않지만

지난 날 뛰어난 말재주를 능가하고 있구나


4. 겸중지 --- 깨달은  사람이 현상계로 돌아오면 그 전 단계 때보다 더욱  자유 자재함을 느끼며, 마침내 번뇌가 곧 열반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현상과 본체가 하나라는 사실을 이 단계에서 직접  체험한다. 그리고 그는 현상과 본체가 둘다  절대적 영역이 아니라상대적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는 것과 행위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현상과 본체가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히 터득하고, 또 나와  현상이 분리될 수 없는 동체라는 사실도 깊이 인식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아직 서툴기만 하다. 어떤 경우는  제자를 바로 깨달음에 인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모든 현상과 공명을 일으키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단계를 동산은 <말이 없지는 않다>라는  부분 긍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과 계합하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산은 이 단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본체와 현상이 함께 온다

교차된 두 칼날은 피할 필요가 없나니

잘 훈련된 병사들은 마치 불 속에 피어나는 신비한 연꽃처럼

그 기백 완연하여 하늘을 찌르네


5. 겸중도 ---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본체와 현상이 서로 용해되어 구별할 수  없는 한 덩어리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여기서는 평상심이 곧 도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 나는 가장 평범한 일들이  모두 기적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상대방과 항상  계합하여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며, 자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공간과 아득한 우주 끝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대상과도 항상 계합하여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이 단계를 동산은 말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완전 긍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산은 이 단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되니

있음과 없음을 벗어난 그의 경계를 누가 따를 수 있으랴

남들은 모두 기이한 것 찾아 헤매는데

그 사람 홀로 집으로 돌아와 나무하며 불 때고 앉아 즐기고 있네


부처를 이루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버려둔 옛집에 돌아와보니 잡초만 무성하네. 호미로 잡초를 뽑고  뒷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저녁 밥 짓느라고  불때고 앉아 있으니 지붕 위로 지나 가던 구름도 부러워 잠시 갈  길을 잊고 멈추어 섰네.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는가.


동산은 제자들을 알뜰히  보살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는  사심없는 스승으로 자신을 지켰다. 임종시의 일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869년 봄에  그는 병으로 앓아 누웠다. 그때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병환이 드셨는데 그래도 병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지.'

'그 병들지 않는 사람이 지금 스승님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네.'

제자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그를 보십니까?'

'이 늙은 산승이 볼 때에는 병이란 아무 곳에도 없네.'

이것은 <병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동산은 이 세상의 인연이  다함을 알고 삭발 목욕하고 장삼을 걸친 뒤 종을  쳐서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자 동산은 다시 눈을 뜨고는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출가 수행자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삶의  진실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하겠느냐.'

동산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중들에게  <우치재(愚癡齊,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위하여 행하는 재)>를 올리라고 명했다.

대중들은 재를 올리고 나면 스승과는 영영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젯밥을 장만하는 데 7일이 걸렸다. 동산은 이  생에서의 마지막 공양을 제자들과 다른 대중들과 함께 하였다. 다 먹고 난뒤 그는 대중들을 보고 말했다.

'나 때문에 법석떨지  마라. 수행자답게 침착하라. 누구라도 임종때는 소란을  피우는게 아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열반에 들었다. 869년 10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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