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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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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319회 작성일 21-07-1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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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



운문 문언( ?  - 949)은 소주 가흥에서  진왕경동조참군 장한의 13세손으로 태어났다. 일곱살에 유학을 습득하였고, 이미 이 때 속세의 부귀영화에는  뜻이 없었다. 이즈음 공왕사의 지징율사에게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타고난 지혜로 한번 본 경전은 막힘이  없이 줄줄 외웠고 천부적인  달변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계율에 관한경전을 깊이 공부하고 강의하였으며, 또한 청정계율을 지키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느 날스승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행각을 나서게 된다. 제일 먼저 황벽의  제자로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행정진하고 있는 목주를 찾았다. 바로 임제로  하여금 깨달음을 열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그 목주였다. 그러나 목주는 운문을 보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이 문을 두드리자 목 주는 안에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름을 말하자 목주는 또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운문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 참본성이라는 근본 문제를 깨닫지 못했기에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목주는 문을 열었다가 그를 흘낏 보고는 닫아 버렸다.  그후 이틀 동안 운문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목주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목주가 흘낏 문을 열자마자 운문은 재빨리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목주는 그를 움켜잡고 소리쳤다.

'말해 봐! 빨리 말해 봐!'

운문이 할 말을 찾고 있자 목주는 그를 사정없이  밀쳐 내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어찌나 세게 문을 닫았던지 운문은 그만  한쪽 발을 다치고 말았다. 이 순간 운문은 크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선을 만나게 되었다.

극한상황에 다달아야 마음의 실체를 보게 된다. 극한상황은  모든 분별심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처방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절대절명적인 지극한 마음 하나 뿐이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이어야 한다. 오로지 아들을 살려야 되겠다는 한 마음 뿐이어야 한다.

태풍이 불어닥쳐 산더미만한  파도가 자신을 덮치려고 할 때 아무런  대책없이 다가오고 있는 그 파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상황이어야  한다. 오로지 한 생각뿐인  그러한 상황속에서는 일 초에도 수 만가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그러한 분별심이 잠재워진다. 그러한 극한상황에 자신을  올려놓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계상황 속에서 분별심으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한계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철저하게 자신을 직시한다 하더라도 참나를 볼 수가 없다.

목주는 반복되는 단순한  행위를 되풀이 하므로서 운문을 그러한 극한상황으로  올려 놓고 있다. 운문에게는 삶과 죽음도  초월하여 오로지 문을 밀치고 안에 들어가야  되겠다는 한 생각 뿐이다. 목주가 밀쳐내면서 문을 닫았을 때 운문의 발이  그 문짝에 끼는 순간 운문은 자신과우주가 원래 하나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목주곁에  있으면서 그윽하고 묘한 데에 깊이 들어갔다.  하루는 목주가 운문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이제 설봉 의존선사를 찾아가도록 하라. 여기에는  더 이상 머 물지 말라.'

설봉이 사는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한 운문은 절로 올라가는 길목에 털석 주저 앉았다.

한참 있으니 한 스님이 그 곳을 지나가자 운문이 그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선 오늘 산으로 올라가십니까?'

그 스님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설봉스승을 만나거든 자신의  말인 것처럼 몇 마디  말을 건네 보겠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운문은 절대로 딴  사람이 시켰다는 말은 하지 말라면서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절에 가시거든 스승이 설법을  하기 위해 법당으로 들어오는 즉시 앞으로  나가 합장을 하고 스승 앞에 똑바로 서서 <불쌍한 늙은이여! 어찌하여 목에  걸린 칼을 벗지 않으시오!> 라고만 말하십시오.'

그 스님은 절에 이르러 운문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설봉은 법상에서 뛰어 내려와 그 스님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말해 봐! 말해 봐!'

그가 무엇을 말하라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자 설봉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방금 한 말은 너 자신의 말이 아니지.'

그 스님은  처음에는 자신의 말이라고 완강히  버티다가 설봉이 냉혹하게  제자더러 몽둥이와 밧줄을 가져오라고 이르자 질겁하고 산 밑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했다.

'실은 제 말이  아니고 산 아래 마을에서  만난 절강에서 온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설봉은 대중에게 일렀다.

'어서 모두들 산 아래로 내려가 장차 5백 사람을 거느리는  큰 스승이 될 그분을 찾아 공손히절을 하고 이리로 모셔오너라.'

이렇게 해서 운문은 다음 날 절로 올라왔다. 그를 보자 대뜸 설봉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운문은 아무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바로 이 순간 그는 당장에 스승과 계합했던  것이다. 그 후 운문은 수년 간 설봉 밑에 머물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더욱 깊은 선의 구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운문은 설봉의 법을 잇게 되었다.

그 뒤 운문은 다른 여러 곳의 스승을 찾아 다니면서  행각수행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앞으로 전개될 선불교의 판도가 예고되고 있었다.


운문이 조산을 찾아 인사드리자 조산이 먼저 말했다.

'여러 선원에서는 대부분 선사들이 자신의 소리는 하지 않고  앵무새 같이 옛 스승의 말을 흉내만 내고 있는데 자네는 무엇을 하며 돌아 다녔느냐?'

그러자 운문이 물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소리를 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 있는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자기소리를 하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면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그런 곳이라면 만날 수 있지.'

운문이 머리를 숙이면서 '녜, 녜'하고 말했다.

참나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데,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

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대로 참나의 숨결이구나.


운문이 동암을 찾아 인사를 드리자 동암이 물었다.

'이 더운 날에 절이나 지킬 것이지 무엇하러 왔느냐?'

그러자 운문이 다시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친히 뵈러 왔습니다.'

'보면 보는 것이지 그렇게 바쁘게 달려 올 이유가 무엇인가?'

'잠시도 머문 적이 없습니다.'

'허물을 알았으면 되었다. 편히 쉬어라.'

운문이 되물었다.

'스님은 그렇게 바쁘게 달려 와서 무엇하려 하십니까?'

그냥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 볼 뿐이고,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것은 잠시라도 멈춘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건너편에 있는  참나는 죽지 않고 있으니 그냥 바쁠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성이 스승으로  있는 영수원을 찾았다. 그 당시 지성은  그곳에서 20 년간 스승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내 선방의 제  1 수좌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간혹 대중들이 제1 수좌를  임명해 달라고 하면 수좌될 사람이 지금  여러 선방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하면서 뒤로 미루었다.  운문이 영수원에 갈려고 한 그 날 지성은 갑자기  종을 쳐 대중을 모으고는 절문 밖으로 나가 제 1 수좌를  영접하라고 명했다. 모든 대중들이 달려나갔을때 바야흐로 그 곳에 모습을 나타낸 스님이 바로 운문이었다.

곧 바로 운문은  지성스승 밑에서 제 1 수좌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 지성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지성이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면서 지성은 그 스님에게 되물었다.

'누가 갑자기 죽었다하자. 비석에 비문을 새길려면 무슨 말이 적당하겠느냐?'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스님들이  여러 소리를 하였지만 모두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그러자 지성이 옆에 있는 제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대중방으로 가서 운문 수좌를 모셔오너라.'

운문이 법당에 들어와 지성  옆에 앉았다. 지성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운문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이냐?'

'어렵지도 않는 문제이군요.'

'수좌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누군가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저는 그저 묻는 사람을 쳐다보고 <스님>하고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지성은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뒤 혹 군주가 여기를 행차하거던 이 유서를 보여드리도록 하라.'

지성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이 군주에게 전해지자 군주는 몸소 행차하였다. 군주가 도착하자 제자들이 유서를 갖다 바쳤다. 열어보니 거기에는  '인간 천상의 안목은 큰방 수좌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군주는 자사 하희범에게 칙명을 내려  운문을 스승으로 추대하게 했다. 운문이 스승이 되던 날 군주도 친히 참석하여 이렇게 물었다.

'청컨데 이 무지한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운문은 이렇게 말했다.

'눈 앞에 다른 길은 없다.'

운문에게는 깨달음이라는 단 하나의 길만이 있을 뿐 그 외 다른 길은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사들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온건한 선사와 과격한 선사가 그것이다. 선종  오가의 창시자들 가운데 위산, 동산, 법안은 온건한 쪽에 속하고 임제와 운문은 과격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임제와  운문 중에서도 운문이 훨씬 더 과격하다. 임제의 선풍은  번개가 내리치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전쟁터 같은 열기로  적들을 때려눕힌다. 그의 할!하는 고함은  대포 쏘는 것과 같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뭇짐승들은 기를못쓰기 마련이다. 그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난도질을  당하였다. 부처건 보살이건 조사건 누구를 막론하고  우연히 그와 마주치기만 하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세속에서

누리는 부와 권력은 임제의 <차별없는 참사람> 앞에  한 주먹거리도 못된다. 임제만큼 지독한 사람도 더물 것이다. 그런데 임제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바로 운문이다.

임제는 단지 우연히 만나는 사람만을 납작하게 만들지만 운문은  천하 모두를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까지  모조리 그렇게 해치워 버린다. 운문은 <차별없는  참사람>정도는 허깨비라고 여겼기 때문에 굳이 그를 해치울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운문은 방이나 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듯 거친 악담을  주로 썼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설가였으며, 선사들 가운데 으뜸가는 달변가였다.

하루는 어떤 법회석상에서  석가가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앞으로  일곱 걸음을 걷더니 <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네>이라고 말했다는 신화를 들먹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주먹에 그를 죽여  시체를 개 밥으로 던져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공헌했을 것이다.'

한번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을 공자가 한 것인줄  뻔히 알면서도 운문은 이름조차 올리지도 않고 잔뜩 뻐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속인조차  그러하거늘 하물며 수행자인 우리가  종일 무슨 일을 하든지  어찌 생명을 다 바쳐 지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문은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그다지  품위있게 행동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은 말 한마디를 더  보탤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너희들 머리에 똥물을 끼얹는 것 밖에 안 된다.'

비록 스승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의 제자들이  깨닫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해도 결국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킬 수 없다. 운문에게는 세속적으로 아무리  휼륭한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오로지 영원한 도에만 관심이  있었던만큼 말이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설법을 할 때마다 자기의 말에 변명을 늘어  놓았다. 영수원의 스승이 되어 맨 먼저 행한 설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오늘 말로써 그대들을  속이려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사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대들 앞에 서서 말을  해야 하고, 따라서 그대들의 마음 속에 혼란의 씨앗을  심어 놓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이 자리에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가  하는 꼴을보고 무척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운문의 큰 모습이다. 그는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달변가 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말은 신성한 도에 방해물인 것처럼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이런 갈등을 <참 나>의 입장에서 잘 조화시키고 있다.

<참 나>는 비록 하루  종일 지껄였어도 실제로는 입술 한번 움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참 나>는 비록 매일 옷을  입고 밥을 먹어도 실제로는 쌀알 한 톨 씹지  않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이다.

운문은 자신의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수행과 더불어 높은 지성까지도 요구했다. 그래서 선 수행자들  사이에서 그의 선풍은 아주 험난하고 위태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신도 다음과 같은 시로써 자신의 선풍을 묘사했다.


운문산 높고 험해 흰 구름도 산 아래에 머문다

물살이 빨라 물고기마저도 제자리를 못찾구나

문안에 들어서자 이미 그대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니

옛 수레에 낀 묵은 먼지 다시 털어 무엇하랴


길 조차 없는 높고 험한 산이 바로 운문의 선풍이다.  수레에 낀 묵은 먼지를 돌담에 앉아 하루 종일 그냥 바라보고 있을 만큼 한가롭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운문은 해학을 잃지 않고 있다. 한번은 나무로 만든  사자의 입에 손을 집어 넣고는 '사람 살려! 나  물려 죽네!'하며 외치기도 했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 우리는 운문의 입에 손을 깊숙히 넣어야 한다.

지금 선사들이 행하고 있는 설법의 전형을 임제와 운문에게서  볼 수 있다. 운문이 다른 선사들과 차이 점은 설법이 있은 뒤 청중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양상이며 지금 선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할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운문은 법단에 올라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남의 말이나  읊조리고 남의 흉내나 내는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  마디 말 끝에 깨닫는다  해도 그것은 여러 갈래 길인데  하물며 구구한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와 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교는 다시 3 가지 경, 율, 논으로 분류된다. 경은 정학(정학)이며, 율은 계학(계학)이며,  논은 혜학(혜학)이며, 부처님의 일대교설은 5시 8교(5시--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  8교-돈교, 점교, 비밀교, 부정교, 장교, 통교, 별교,  원교)로 나눌 수 있다. 교에서 일승원돈교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비록 그 자리에서 알았다 하더라도 선으로 참나를 찾는 산승과는 하늘과 땅차이 이다.

산승 문하에서는 말 속에  마음을 드러낸다 해도 부질없는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며, 마음 문을 두드리는 방법도  사람에 따라 천자만별이며 마음문을 열어주는 방법도  선사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고 머뭇거린다면 남의  혀 끝으로 풀어낸 말이나 찾으려는 허물에 빠지게 된다. 마음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작용이 일어나기전 참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해야 한다. 옛부터 있어 왔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기에  무슨 원교, 돈교를 말할 수 있으며,  이쪽이다 저쪽이다를 말할 수 있겠느냐. 잘못 알아들어 말에 얽매이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원, 돈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기웃거리는 자는 원,  돈에 빠져 있는 교학승 보다  못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마음을 깨쳐 바로 부처를 이루는 자리, 그런 멍청한 산승은 없어야 하리라.

스승에게서 들은 말이나 그럴듯한  말, 또는 알음알이로 헤아린 말을 가지고  자신의 말인 것처럼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느냐. 대중 앞에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들어내 보아라.'


그 때 주주 하공이라는 사람이 절을 올리며 물었다.

'제게 더 자상한 법문을 베풀어 주십시오.'

운문이 말했다.

'이 자리에는 쓸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군.'


점잖은 관복을 입은 사람이 일어나더니 물었다.

'불법은 물 속에 비치는 달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맑은 물결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다.'

그러자 관리가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서 그것을 깨치셨습니까?'

'잘못 물었구나. 어디서 왔는가를 다시 물어라.'

그러자 관리가 운문이 한 말을 운문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서 왔습니까?'

'관산이 첩첩 산길이로군.'


옆에 있던 다른 관리가 물었다.

'천명의 자식이 빙 둘러 앉아 있는데 이 중에서 누가 적자입니까?'

'당신이 속해 있는 그 곳 주지가 와서 이미 묻고 갔구나.'


한 스님이 물었다.

'오늘 이렇게 법회를 열었으니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온 종풍을 잘 간파해 보아라.'

그러자 스님이 다시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아마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틀렸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스님이 일어나서 물었다.

'옛날 선사들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스승께 청하오니 무엇을 가지고 가르침을 베푸시겠습니까?'

'물으면 대답하겠다.'

'그렇다면 허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묻지 않으면 대답도 안한다. 알겠느냐.'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스님이 일어서서 물었다.

'말은 했다하면 도와 어긋나고 어떻게 해야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도풍에 맞는 한 마디 말은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그 스님은 자리에 털석 주저 앉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하지 말라.'


그러자 신출내기 한 스님이 일어나더니 씩씩하게 물었다.

'무엇이 스승과 제자가 계합하는 인연입니까?'

'메아리 같은 것이다.'

'그러면 감응을 말하는 것입니까?'

계합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기에 감전 된  것과 같은 정신과 육신의 체험이다. 운문이 말했다.

'그렇게 서두러지 말게.'


뒷줄에 앉아 있던 누더기 옷을 입은 깨끗하고 조용한 한 스님이 일어나서 물었다.

'무엇이 수행자의 분명한 일입니까?'

'녀석, 질문 한번 뼈 아프게 하는구나.'

질문과 대답도 뼈 아픈 일이지만 수행은 더욱 뼈를 깍는 작업이다.


그러자 누더기 옷을 입은 스님 옆에 있던 스님이 일어나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교외별전으로 법을 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대중들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그리고 오늘 이 운문이  여러분을 속였다고 말하지 말아라. 부득이 여러분 앞에서 쓸데없이 지껄였으니 눈 밝은 사람이  있어 보았다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겠구나.

이제 다시 여러분에게 묻겠다.  원래 어떤 일이 있었길래 깨달음에 머물지  못하고 번뇌에 빠져 허덕이느냐. 내가 지금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해주어도  진실은 진실일 뿐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말을 쫓아  어지럽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목숨을 받쳐서라도  반드시 이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마음이  열리지 못하면 살아도 죽은  것이요, 마음을 알고 나면  죽어도 사는 것이다. 그대들이 6 근을 통하여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으로 따지고 생각하여 옛 선사들의 마음자리를 헤아릴려고 하니 이 무슨 망칙한 생각에 매여 있느냐?

알고 싶으냐? 무수이 많은 세월 동안 그대 스스로가  익혀온 두터운 망상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바른 말을 듣어도  의심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바른 행위를 보고도 비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밝고  바른 법은 그대에게서 시위를  떠난 화살 만큼이나 빨리  멀어질 뿐이로다.

그렇다고 금이 흙 속에  묻혀 있다고 흙이 되느냐. 참마음은 업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업 때문에 마음을 냈다  하면 어긋나는데, 그러면 이 마음을 내야 하겠느냐? 내지  않음이 옳겠는가?  더 할 말이 있느냐. 공부하는데 건강이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면 몸 조심하여라.'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운문의 곡조입니까?'

'섣달 스무닷새로다.'

'그 곡조를 부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게 서둘지 말게.'

우리가 관념적으로 갖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허상을 깨뜨려 버려라. 깨달음은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밝은 대낮에 산을 본다.'

캄캄한 밤에 산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맑고 화창한 날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을 돌리니 저만치 앞에 서 있는 산을 그냥 볼 뿐이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스님의 가풍은 어떻습니까?'

'오랜 비에 날이 개이지 않는구나.'

'오랜 비에 날이 개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햇빛이 쨍쨍 내리 쬐는구나.'

배는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것이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어디에 쓰겠는가. 깨달음은 깨닫기 전의 문제이지 깨닫고 나면 깨달음도 무의미한데  하물며 가풍은 물어 무엇할려고. 비가오면 오는대로 햇빛이 비치면  비치는 대로, 비가 오면 햇빛이 그립고  햇빛이 따가우면 비가 그리운 법.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깨침을 얻고도 깨달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태스님은 운력을 하고 남악스님은 산을 유람하지.'

천태는 교학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남악은 선종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의  삶에는 행위의끝이 없다. 깨치기 전이나 깨치고 난 후에도 삶에 대한 행위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가 이제까지 했던 행위를  계속 되풀이 할 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물에  대한, 행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항상일로(본래 소식)란 무엇입니까?'

'구구 팔십일이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우리 주위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을 떠나 어디에 본래 소식이 있겠는가. 봄이 오면 여름이  오기 마련이고 낙엽이 떨어지면 천하에 가을이  저무는 소식이고 흰눈이 쌓이면 온돌 방에 다리틀고 앉아 낮잠이나 자야지.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수행자의 본 모습입니까?'

'산이나 강으로 놀러다니는 것이지.'

'그러면 스승님의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침 유나가 없어 다행이구나.'

우리가 산이나 강을 대할 때는 아무런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다. 공부에 들어가는 초심자는 조건이 좋든 나쁘든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수행이 성숙한 유나는  깨달은 자와  무명에 얽매여 있는 자를 구별할 줄 안다. 유나가 있었다면 묻지 않아도 될 것을 괜히 헛말을 하고 있구나.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입니까?'

'꽤나 무례한 사람일세.'

참나에서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당당하며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도 겸손하다. 어디 운문보다 더 무례한 사람이 있겠는가. 있으면 빨리 일러 보아라.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 입니까?'

'무엇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부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가르칠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고통에서 헤매는 자에게는 편안을,자신 밖에 모르는  자에게는 관계의 중요성을, 쾌락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절제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쌓여 어둠 속을 헤매는 자에게는  깨달음을.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법을 보는 바른 안목입니까?'

'넓다(普)'

좋고 나쁨이 있을 때는 이미 법이 아니다. 취하고 버림이  있을 때는 이미 법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있을 때는 이미  법이 아니다. 천상은 천상이라서 자유롭고 여유가  있어 좋고 지옥은 지옥이라서 피땀 흘려가며 참고 일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한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단정히 앉아서 실다운 모습을 생각하는 것 입니까?'

'강물에 돈을 빠트렸다가 다시 건지는 것이다.'

밝음과 어둠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촟불을  켜 밝음이 오면 어둠은 사라지고 촟불을꺼 어두워지면 밝음은 어둠 뒤로 숨을 뿐이다. 본래면목은  무명 덩어리인 이 마음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강물에 빠트린 돈을 찾듯이  이 마음 속에 본래면목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업의 덩어리인 무명은 구름처럼 걷힐 뿐이다.


운문은 이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난 뒤 의문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을 다 받아들여 친절히 토론하였다. 아울러 운문은 한 글자로 관문을 통과하는 일자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운문 사상의 기본적  핵심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선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한 글자의 비합리성을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구태여 선 문답에서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글자 하나가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선은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초월해 있다. 선에서 스승의 대답은 질문자가  갖고 있는 고여 있는 사고를  깨뜨리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 선문답과 같은 특수상황은  스스로 질문자와 대답자가 되어  그 상황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

다. 말을 떠나서  말이 갖고 있는 그 상황의 의미가 자신에게도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이다.


'무엇이 깨달음 입니까?'

'보(普)' ---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


'병아리가 껍질 속에서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닭이 쪼아 주는 것이  놀랍게 일치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향(響)' --- 지극함이 상대방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메아리


'운문의 한 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친(親)' --- 몸소 걸어가며 체험하는 것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님께 참회하는데 부처와 조사를  죽인 사람은 누구한테 참회해야 합니까?'

'노(露)' --- 참 나를 드러내는 것이 해결의 열쇠


'도란 무엇입니까?'

'거(去)' ---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그대의 길을 가라


'돌아가신 영수선사께서 질문을 받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이것을 비문에 어떻게 새길까요?'

'사(師)' --- 깨달음을 열어준 스승이시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고 기어코 말을 해야  할 경우라면 최소한의 말인 한 글자로 자신의 경계를 나타내어  상대의 마음을 열려고 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을 매체로 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운문은 다른  선사들에게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운문 만큼 말을 싫어하는 선사도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운문 만큼  말을 많이 한 선사도 없다. 운문은 많은 선사들과 자유롭게 선문답을 주고 받는다. 부처님과 같이  크게 깨친 사람은 말과 말 아닌 것에 구애  받지 않는다. 부처는 이미 말이 말  아닌 것도 알고 있으며 말이 주는 의미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말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식세계와 공명을 일으키는 하나의 행위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선불교는 말도 행위도 대화도  죽어 버리고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운문은 오늘날의  선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지향해야

할 도반들끼리 주고받는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운문이 온선사 회상에서 수행정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점심  공양후 대중방에 여러 스님들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 스승이 먼저 한마디 던졌다.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법이지만 법은 이러한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을 떠나서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한 스님이 차잔을 놓더니 말했다.

'보는 것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눈 앞에 있는 모든 현상이 다 법이면서도 법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운문도 차잔을  놓더니 손뼉을 쳤다. 온이  머리를 들어 운문을 쳐다  보았다. 운문도 온스승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하나가 부족합니다.'

이에 온스승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나도 이점에 있어서는 더 이상 모르겠다.'

참나는 그림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참나 하나가 빠져  있구나. 참나는 물체가 빚어내는 그림자가 아니다.


운문이 설봉회상에서 수행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설봉스승 방에서  장경, 서원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설봉이 제자들을 둘러 보더니 먼저 한마디 했다.

'온 우주를 움켜쥐었더니 좁쌀만한데 이 좁쌀을 자네들 앞에  던져 주어도 어찌 한 녀석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앉아서  밥이나 축내지말고 밖에 나가 땀흘리며 땅이나 파도록 하여라.'

설봉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원이 운문에게 물었다.

'설봉스승의 말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곳이 있는가?'

운문이 대답했다.

'있지.'

그러자 옆에 있던 장경이 설봉을 쳐다보면서 운문에게 다시 물었다.

'무엇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인가?'

운문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여우같은 망상을 내서는 안되네.'

그리고는 스승과 도반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운문은 신명이 난듯 껄껄거리면서 말했다.

'꽤 어지럽히는군.'

'7 요성(해, 달, 화성, 수성, 금성, 목성, 토성)이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구나.'

'남쪽은 염부제(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 세계를 동서남북으로  나눌 때 남쪽에  있는 세계), 북쪽은 울단월(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세계를 동서남북으로 나눌 때 북쪽에 있는 세계).' 이 우주를  움켜쥐고 좁쌀 속에 넣었는데도  하늘에는 역시 별들이 반짝이고  있고, 남쪽에는 지옥이 북쪽에는 극락이 그대로  있구나. 가장 큰 함정은 자신을 떠난  상대방에 있으니 거기에 빠져서는 참나와는 십만팔천리나 멀어질 뿐이다.


운문이 설봉회상에서 수행정진하고 있을 때 한 행각승이 설봉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물었다.

'어떤 스님이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할 줄 모르면  걸음을 뗀들 어떻게  길을 알겠느냐>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을 듣더니 설봉은 배를 움켜지며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그 행각승은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 멍하니 있다가  그냥 물러 나갔다. 절을 떠나려고 법당에 참배하러 갔다가  여러 스님을 만났다. 그  행각승은 혹시나 하면서 설봉스승과  있었던 일을 여러 스님에게 물었다.

'설봉스승께서 아이고, 아이고 한 뜻은 무엇입니까?'

여러 스님과 같이 앉아 있던 운문이 자신의 승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마 서근, 베 한필이다.'

그래도 그 행각승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운문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석자 되는 대나무 막대기나 들어라.'

나중에 설봉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어찌 배가 아팠겠는가. 마음이 애닯도록 더 아픈것을.  배 속에 들었으니 아이고 아이고이며, 몸에 걸쳤으니 마 서근 베 한 필일 뿐이다.


운문의 참나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주의 질서 안에,  우주의 한복판에,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산 깊숙한 곳에  신비한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다. 그  신비한 보물은 등불을 법당 안으로 들고 들어와 이 절의 세 출입문을 등불 위에 얹어 놓는다. 자, 이 보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대답하는 자가 없자 운문은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의 마음은 사물의 변화에 따라 움직인다.'

한 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그는 다시 말했다.

'구름이 일면 번개가 친다.'

운문의 참나는 세상 어디에도 있으며, 어떤 물건 속에도  있다. 그러나 사물과의 관계를 투명한 눈으로 보지 못하는  옳고 그름이 뒤바뀐 우리들의 눈에는 진리가  진리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운문은 깨달음의 눈을 등불에 비유하고 있다. 세  개의 출입문은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한계속에 빠져 있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을  카리키고 있으며 이 삼승을 일승으로 통합시켜 모두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이  우주와 계합한 부처에게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다. 모두  하나로 통섭된다. 대상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일치하게 되며 대상과

자신은 하나가  되어버린다. 구름이 일면 번개가  치듯이 부처를 이루고 난  뒤에도 매일매일 다가오는 평범한  하루가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 유명한 운문삼구와 만나게 된다.

이 세 귀절은 운문의  제자 덕산 연밀에 의해서 일관성있게 정리되었지만, 그 본래의 사상은 운문의 가르침 속에 암암리에 드러나 있다. 운문삼구는 다음과 같다.


1. 천지를 덮어 흠뻑 적신다.

   (함개건곤, 涵蓋乾坤)

2.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 버린다.

   (절단중류, 截斷衆流)

3. 파도를 따라 함께 흐른다.

   (수파축랑, 수波逐浪)


1. 천지를 덮어 흠뻑 적신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한  <마음이 곧 부처다> 하는 내용을 너무나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온 우주와 우주의 모든 부분들을  흠뻑 적시면서 곳곳에 가득차 있다. 유정  무정의 모든 생명을 도와 깨달음에 이르게 하겠다는 보살의 원은 끝이 없다.  이렇게 이 생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 지극한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탐욕스러움이  있어 내 것과 너의 것의 구별이 있겠는가.

운문은 설봉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가 불길을 넘어 대법륜을  굴린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오히려 불길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에게 설법을 하고 있고  부처들은 지상에서 이를 조심스럽게 듣고 있다.'

운문은 불길 속에서, 모래알  속에서, 심지어 아주 작은 한 티끌 속에서 까지  부처를 보았으며, 또 가까이는  자신 속에서,  멀리는 북두칠성 속에서도 부처를 보았던  것이다. 부처가 온통 천지를 흠뻑 적시고 있는 것이다.


2.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 버린다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은 어지간한 노력으로도  잘 끊어지지 않는다. 흐르고  있는 강물의 물줄기를 끊어 버리면 흘러  넘치게 되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더러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진 분별심과 번뇌의  흐름인 중류의 물줄기를  끊어 버리면 단번에 부처가 된다.

흐름을 끊기 위해서는 신광이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랐듯이 가슴에 사무치는 절대 적인 확신이 없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시간도 공간도 멎어버리는 초월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이 초월의 세계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무심의  세계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확신에 찬  그 마음이 부처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성냄이 있어 나와  너의 구별이 있겠는가.

어느 날 운문은 궁중에서  열린 채식공양에 초대를 받았다. 그때 궁중의  한 관리가 운문에게 물었다.

'영수의 과일은 잘 익었습니까?'

'당신이 보기에 이제까지 영수의 과일이 한 해라도 익지 않은 적이 있었소.'

이것은 아주 재치있고 품격높은  그의 대답 중에서도 유명한 것에 속한다.  그 관리가 알고자 한 것은 영수원의 스승으로 있는 운문의 작업이 잘  진행되어 깨달음을 증득한 제자들이 많이 있는지 어떤지의 물음이었다. 운문은 그 질문의 내용을  빤히 알면서도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 질문을 뜀틀로  삼아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신령한 나무의 과일을 <영원한  도>에 견 주어 대답한 것이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태어남, 성장, 늙음, 죽음이  문제가 되지만 초월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태어남, 성장, 늙음,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운문은 이와 같이 현상에서 초월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마술사였다.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함축성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체로금풍(體露金風)--- 나무가 가을 바람에 몸을 드러내는구나.' 이다.  어떤 제자가 '나무가 시들어 잎이 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하고 물었을  때 말이 떨어지자 마자  내뱉은 대답이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우주의  질서. 낙엽이 떨어지고 몸을  드러내니 <참나>가 바로 드러나는구나.

모든 흐름이 한 순간에 끊어져 버리는 그 자리에 부처라는 불멸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3. 파도를 따라 함께 흐른다

우리는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줄곧 정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왔다.  그렇게도 갈구하던 산의 정상에 올라갔다고 하자. 올라가보니 아무것도  아니라서 산밑으로 내려와서는  밥도 먹지 않고 잠만  잘 것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것보다 더  큰 성취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개를 만나면 개하고 친구되고,  거지를 만나면 거지하고 친구되고, 수행자를 만나면 수행자와  더불어 도담을 나누고, 나무  곁에 서 있으면 나무가  된다. 여기에는 따로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가 바로 부처인 것이다. 먹고 배설하고  자는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평상심, 즉 항심이 바로 부처인데 따로 이룰 부처가 어디 있는가.

한 스님이 운문을 찾아와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이 주장자로 그 스님을 툭치며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

가장 더러운 똥막대기를 들어  가장 깨끗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진흙 속에 피어 나는 연꽃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똥막대기 까지도  부처인데 부처가 아닌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번뇌가 바로 '보리'라는 것을  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바로 이 현실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산의 정상이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산의 정상까지 올라갔어도  산밑으로 내려오는 행위를 통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을 깨달음의 세계라고  한다면 산밑은 깨닫지 못한 무명의 세계가 된다. 결국 우리들의 삶은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변증법적인 차안과 피안의 되풀이일  뿐이다. 파도를 타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 그 속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그대로 부처인데 무슨 부처를  따로 찾을 것인가.


운문은 돌아가시기 전날에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지었다.


엎드려 아뢰옵니다. 유한한  육신이 어떻게 생주이멸의 우주질서를 벗어날  것이며, 모습없는 실상에 누가 흘러가는 세월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미  바람 앞의 등불이요 타오르는 횃불이라 세상에 머물기는 어렵고, 물속에 비친 달 허공에 핀  꽃이라 어디로 갈 곳이 없습니다. 법도대로 살아감에 허물을 피할 길 없어 육신의 껍질을 벗어 버리는 말을 드릴까 하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원래 보잘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적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무상의  이치를 깨달아 불교에 몸을 담았습니다. 간절한  서원을 청정히 세워 오직 경전을 탐구하는데 온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마저  잊은 채 마주 하여 법을 물었고, 늦은 밤 눈 속에 서서 법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17년 세월을 모진 풍상에 시달리며 수천리 넘는 길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서야  비로소 원숭이 같이 날뛰던 마음이 쉬고 말같이 치달리던 생각이  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름 덮힌 소석산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살면서 초산의 신선들 처럼 머리는 백발로  변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영광스럽게도 천자

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파도에 몇 번이나 몸을 담그는 커다란 행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를 따져  묻고 공을 논하면서 하늘  같은 덕에 보답하리라 맹세했고,  어리석음을 열어주고 막힌 데를 트여 주면서 물따라 구름따라 다니는 수행승들을 별똥 튀듯 그렇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중생을  이익케 하리라는 발심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멀리까지 밝으신 천자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한들 죽음 앞에서 천자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리까.  아득한 은하수 길을 멀리 바라보나 겨우  북극성에서 멈추고,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 눈동자를 돌리니 이미 동쪽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천자께서는 긴긴 봄날 처럼 장수를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옵니다. 바위 겁이 다하도록 교화를 펴시고, 하시고자 하는 서원은 겨자씨 겁이 끝날 때까지 길이 견고하소서.

보잘것없는 이  몸은 이제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하직하는 마당에 대궐로  달려가 축수하고 이별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하늘같은 천자의 덕을 우러러  그리워하며 어쩔 줄 모르는 심정만 가득한 채 삼가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수행을 통한  참본성으로 돌아가는데 있는 것이다. 운문이 말하고  있는 수행은 출가자들의 형식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 속가를  막론하고 절실한 삶의 문제에 부딪혀 자신과 생사의 투쟁을 하는 그러한 삶을 말하고 있다.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두려움과 장애에서 해방되어 대자유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아무리 큰 고통도 행복하게 맞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마는 깨닫고나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세계 그대로가 부처이니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바로 삶과 죽음 모두가 행복일 뿐이다.

하루는 운문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십오일 이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는데, 십오일 이후의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해 보아라.'

한참동안 아무도 말이 없자 스스로 대답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구나.'


몇일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는  조용히 열반에 드니 949년  4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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