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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9. 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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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469회 작성일 21-07-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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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선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  갈때 법안종은 태동하게 된다. 별의 일생을  살펴보면  장년시대를 지나 마지막 꺼져 갈 무렵 가장 화려하게 자신을  불태운다. 우리 인간의 일생을 보더라도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을  활화산처럼 폭발시키고는 서서히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지나 서서히 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밝게 빛을 발하면서 마음을 저 높은 허공에 던진 선사가 법안이다.

법안은 선종  오가(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우고 있다.

조동은 북치고 노래하는 것을 동시에 함으로서 깨달음의  작용의 이중성을 보임으로서 깨달음으로 들게  하였고, 임제는 앞뒤를 뒤바꾸고  긍정과 부정을 뒤바꾸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여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바로  참본성을 보게 하였다. 운문은 하늘과 땅을  덮고 있는 흐름을 적절하게 끊음으로서 중류의 흐름을 막아 중류 속에 있는 참나를  보게 하였고,  위앙은 둥글고 모난 것을 계합한다고 함으로서  현상에서 진실을 진실

에서 현상을 보게 하였다.


법안 문익(885 - 958)은  절강지방 출신으로 속성은 노씨이다. 7살에 머리를  깍고 출가 하였으며, 소년시절에는 영파의  여항사에서 당대의 고승 희각율사 밑에서  공부하였다. 구도열에 불타는 그는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에 까지도 깊이 심취해 있었다.  법안의 타고난 문학적인 재질을 보고 희각이 가끔 자하와 자유(공자 문하의  열 제자 중에 시문학에 뛰어났던 두제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많은 경전들을 보았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항상 무엇을 갈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구도의  욕구를 잠재우지 못한 법안은 남쪽으로 구도행각을 떠나게 된다. 도반들과 함께 장경원에 들렸다가  지장원으로 향했다. 일행은 지장원에

서 폭설을 만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몇일을 묵게 되었다. 지장원은  바로 계침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법안의 인연의 고리는 던지고  나면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처럼 묘하게도 나한 계침에게 걸려 있었던 것이다. 계침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좌는 어디로 가는가?'

'그냥 그저 행각할 뿐 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행각하는가?'

몇 년동안 경전에  파묻혀 깊이 연구하였지만 '불법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없었다. 수 천번이나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하였지만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무엇인가 꽉 막혀있어 어떻게 하면 꿰뚫을 것인가하는 생각만  머리에 꽉차 있던 법안은 피곤한듯이 건성적으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그래도 명답이야.'

계침은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는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인연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연처럼 지나가 버리지만 인연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필연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몇일이 지나 눈이 멎자  법안은 하직 인사를 드렸다. 계침이 문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을 하다가 법당 앞에 있는 큰 돌이 눈에 띄자 무엇인가 잊어버린 사람처럼 법안에게 갑자기 물었다.

'경전에 말하기를 과거 현재 미래가 다만 마음일 뿐이며,  삼라만상이 다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기 저 법당 앞에 있는 저  돌은 그대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 것인가?'

'그거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리저리 행각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저렇게  큰  돌을 넣어 가지고 무거워서 어떻게 다닌단말인가!'

계침의 이 말에 법안은 말문이 막혔다. 한 곳으로  파고드는 집중력이 뛰어난 그로서 이 문제를 그냥 둔 채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일행은 먼저 떠나고 법안만  걸망을 내려놓고 도로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법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매달렸다.

10일 동안 먹고 자는  것도 잊고 '불법이란 무엇인가?'하는 한 생각 뿐이었다. 다음  날 계침을 찾아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불법이란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계침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법안은 가슴을 치며 물러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  10일이 흘렀다. 가슴에 맺히는 생각이 있어 법안은 자신있게 계침의 방문을 두드렸다.

'불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계침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  물러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 10일이 흘렀다.  아무런 결론도 얻어내지 못한채  법안은 계침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계침의 목소리가  천둥소리같이 울렸다. 그렇지만 법안은 안간힘을 다하여 태연한 듯이 하였다.

계침이 먼저 물었다.

'그래, 불법이란 무엇인가?'

법안은 아무 말없이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참 후 계침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또 10일이 흘렀다. 법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계침을 찾아  자신의 심정을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습니다.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라.'

계침의 이 한 마디에 법안은 크게 깨달았다.

계침은 단순한  상황을 극한상황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법안이 몇 년동안  고민하였던 문제인'불법이란 무엇인가?'하는 한 가지  상황만이 우주에 있는 것처럼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채 이 문제에 몰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한 달 전에 계침이 법안에게 이 말을 해  주었더라면 선종사에서 아마 법안의 이름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승의 위대한 점이다.

뛰어난 대장장이가 쇳물을 부어야  할 시간과 두들겨야 할 시간과 두들겨야 할 곳을 잘 알아 멋진 물건을 만들어 내듯이, 정신적인  스승은 해 주어야 할 말과 그 말을 할 시기를 잘 알아 단 하나의 화살로 마음을 꿰뚫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달라지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이 철저하게 달라져 있을  뿐이다.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원래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확장일  뿐이다. 숫자를 100까지 알고 있는 어린이가 공부하여 숫자를 1000까지  익히는 것과 같은 문제이다. 100까지 알고 있을 때는 100이 전부인줄 알고 100보다 작은 숫자로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000까지 알고  난 다음에는 100이라는 숫자는 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조그마한 한 부분임을 알게 된다. 깨닫지 못한 미혹의 세계가 100이라면  깨달은 부처의 세계는 1000인 것

이다. 미혹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인 것이다.


뒷 날 법안이 스승이 되고 난 뒤에 그는 종종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 앞에 있다. 그런대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으로만 볼려고 한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본질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하루는 장경의 제자 자방이  법안을 찾아왔다. 자방이 앉자 법안은 자신도  장경의 게송을 좋아한다면서 먼저 게송 하나를 읊었다.


삼라만상 중에

홀로 법신만이 모습을 드러내도다.


그리고는 자방에게 그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방은 불자를 올렸다가 내렸다. 법안이 다시 물었다.

'그런 방법은 어디서 배웠느냐?'

'그러면 스님의 생각은 어떠 하십니까?'

자방의 물음에 법안은 되물었다.

'삼라만상이란 도대체 뭐지?'

'옛사람은 삼라만상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법안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물었다.

'삼라만상 중에 홀로 법신만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긍정하겠는가?' 이 말에 자방은 확연히 깨달았다. 법안은 뜸드리는 데  명수였다. 많은 수행자들이 법안을 찾아와서는 아무 것도 없구나 생각하고 떠날려고 하면 조용히 다가가 일깨워 주었다. 분자가 들뜬상태에 있을 때 조금만 자극을 주더라도  쉽게 이동 하듯이, 인간의 마음도 흥분상태에 있거나 간절히 원하는 상태에 있을 때는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법안도  스승 계침에게로부터 깨달음이 열릴  때의 그 기억이 강력하게  잠재의식 속에남아 있어, 이것이  도에 들어가게하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으로 확신하였던 것이다.


법안이 사제인 오공과 함께 법당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향로 옆에 있는 향 숟가락을 들면서 오공에게 물었다.

'이것을 향 숟가락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부르겠소?'

오공이 손으로 향 숟가락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향 숟가락입니다.'

법안은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하면서 법당을 나가버렸다.

오공은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참선하러 법당에  들어갔다가 그 향 숟가락을  보고는 법안의뜻을 깨닫게 되었다. 오공은 탁!하고 무릎을 쳤다.

법안이 <향 숟가락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했을 때는  이미 현상을 떠나 근본  진리의 자리를 물었던 것이다.


복주에 있는 영은 청용이  처음 법안을 찾아 왔을 때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법안은 창가에 부서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청용에게 물었다.

'방울방울이 그대 눈 속에 떨어지는구나.'

청용은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몇년 후 청용은 <화엄경>의  다음 구절을 읽다가 법안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주위는 항상 부처로 가득 채워져 있다.

'보이느냐?' 보인다면 '마음으로 보느냐? 너의 눈으로 보느냐?'

알고 보면 마음과 눈은  둘이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부딪쳐  작용이 일어나는 그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못에  찔려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 거기에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눈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로 마음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인 것이다.


인드라의 하늘에는 진주로 만들어진 망이 있는데

만일 하나의 진주를 보면

거기에 반사되는 모든 진주를 볼 수가 있다

거기에 있는 개개의 진주는

낱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진주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러면서도 모든 진주를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느니라.


백장 도항은 부처님  당시 인도사상의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육사외도에 관심이 있었다. 도항은 부처님 당시  외도가 부처님께 물었던 내용에 대하여 법안과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 도항은 법안에게 인사드리고는  바로 말을 꺼냈다.

'말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법안이 손을 흔들며 말문을 막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둬.  그대는 부처님께서 말이 없으셨는데 더 이상  무엇을 헤아릴려고 하느냐?'

이 말에 도항은  바로 깨쳤다. 자신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에 얽매여 있었는지.  말을 넘어선 근본 진리가 법안의 눈을 통하여 백장의 눈에도 반사되어 바로 비치었던 것이다.


항주의 문수는 허망한 마음을 밝혀 참 생각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설한 <능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하루는 법안을 찾아 뵙고 자신이 했던 공부가  경전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법안이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

'능엄경에는 여덟가지 환원하는 이치가 있지?'

'예, 있습니다.'

'밝음은 어디로 환원 되는가?'

'문수가 자신있게 큰소리로 말했다.

'밝음은 해로 환원 됩니다.'

'해는 어디로 환원 되는가?'

문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법안은  문수에게 <능엄경>에 대하여 문수 자신이 주해한 것을 불사르라고 하였다. 문수는 능엄경을 불사르는 순간 깨닫게 되었다.


법안은 법회 석상에서 법문을  할 때에도 대중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후에 어슬렁 거리며 나타나서는 '몸이나 조심하여라.'하며 한마디 하고는  법상을 내려 오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대중들이 몇 시간을 법당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법안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모여 있다가  그냥 흩어지는 그 행위  속에 불법이 있겠는가. 있다면  누구든지 한번 말해 보아라. 없다면 이 바쁘고 귀중한 시간에 여기 와서 무엇을 하는 짓이냐.

만약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에도 있을텐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경만 보고  외우는 것도 불법이 아니며 그렇다고 경을  떠나서도 불법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앞줄에 앉아 있던 한 스님이 물었다.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면 도와 일치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자신을 드러냈는데도 도와 일치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보지.'

그 스님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식을 자신과 별개로 보고 있었다.  법안의 대답에 깨닫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육식이 진리의 미묘한 소리를 듣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법안이 참을성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육식이 모두 자네 집 식구들인걸.'

그 스님을 깨달음의 문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육식이 진리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잘못이 귀에 있느냐, 아니면 눈에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진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육식이 그것을  못 알아본다 해도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옛사람의 말을 따르면  소리와 빛깔을 떠남은 곧 소리와 빛깔에 집착함이요, 이름과 문자를  떠남은 곧 이름과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상천(일체의 마음 작용이 끊어진 경지.  외도들은 이 경지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한다)에 있는 사람이 팔만 억겁의 오랜 세월을 수행하고 고행을  하고서도 단 하루만에 원래의 무지와 미혹 상태로 되돌아간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부족

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서고 나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진리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눈을 법안이라고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이라고 불렀다.


법안은 놀라울 정도로 불교 경전에서부터 유교 경전,  중국의 시문학에 까지 박학다식 하였지만 결코 지식의 노예는  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에 용해시켜  다시 도의 눈으로 재구성된 진리가 법안의 입을 통하여 깨달음의 소리로 흘러나왔다.

그에게 있어서 부처란 한낱  방편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한 제자가  궁극적인 진리의 경지는 어떤 것이냐?  라고 묻자 만약 그것이  어떤 경지라고 한다면 결코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결국 부처란 깨달아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제자들과 수행자들의 마음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인 상태로 돌리는데 최선을 다 했다.

현칙이라는 제자는 법안밑에서 수행한지 3년이 되었는데도 한번도 묻는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법안은 현칙을 불러 물었다.

'너는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

'삼년이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너는 그 동안 한번도 법에 대하여 묻지 않았느냐?'

'여기 오기 전에 청봉선사 밑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너의 깨달음을 한번 나타내 보아라.'

'제가 청봉선사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때, 청봉선사께서는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을 한번 설명해 보아라.'

'오행에서 볼 때  병정은 불에 속하니 병정동자가  의미하는 것은 불의 신입니다.  불의 신이 다른 사람에게 불을  구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본래 부처인  자기가 새삼스럽게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너는 병정동자래구화를 잘못 알고  있다. 불법이 너가 말한 그 정도라면 벌써 이  땅에서 없어졌을 것이다.'

화가 난 현칙은 절을 떠났다.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다. 몇 달동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법안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법안이 말했다.

'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보아라. 분명하게 가르쳐주마.'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현칙이 묻자 법안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병정동자래구화'

그 순간 현칙은 크게 깨달았다.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선이 아니다. 화두를  통하여 <참나>를 체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무엇이 옛 부처의 가르침입니까?'

'어느 곳을 살핀 들 걸리는 것이 없네.'

나와 네가 본래 둘이 아닌데, 근본 진리와 현상사이에  무슨 장애물이 있어 걸리겠는가.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만 보아라.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낙엽 지리라.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수행해야 도와 계합하는 것입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가게.'

도라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도와 계합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도일 뿐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모든 부처의 비밀스런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네 역시 마음 속에 그것을 가지고 있네.'

화두에는 정답이 없다. 다시  말하면 정답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리모든 행위가 전부 정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답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열릴 때 모든 소리와  행위는 정답이 되는 것이다.  부처의 비밀스런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모두가 부처되는  것, 모두가 부처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미륵에게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受記,  부처님으로부터 다음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답을 받는 것)를 준다.  이것은 부처님이 미륵이라는 이름을 빌어 절실하게 수행정진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준 것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온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이 가르침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무엇이 이 가르침입니까?'

'온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들어오는구나.'

깨달음의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볼 때 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인것이다. 성현이 되는 가르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 오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기만하면 되는 것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방편으로 부처라고 부를 뿐이다.'

자신이라는 관념에 빠져 있는,  자신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마음을 지금  여기로 바로 돌리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돌이 그렇게 하면 돌 부처가  되고, 나무가 그렇게 하면 나무 부처가되고, 내가 있는 그대로 하면 온 세상이 모두 부처뿐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부처가 되는 지름길은 없습니까?'

'이보다 나은 길은 없다.'

지름길이라는 것은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쏟는 그 절실함과 지극함이 바로 부처되는 길이 아니겠는가.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상서로운 풀이 시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말이 많구나.'

말은 해서 어디에 쓰겠는가. 있으면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을.


한 제자가 법안에게 물었다.

'무엇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온 우주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다리나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부처가 아니다. 기쁜 일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슬픈 일 있으면 같이 슬퍼하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마다 하지 않으니 부처가 어디 필요할까.


한 제자가 법안에게 말했다.

'그물 같이 얽힌 의심을 단숨에 풀어 주십시오.'

'대중방에서도 헤아려 보고, 법당에서도 헤아려 보게.'

깨달음은 누군가가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만이 열 수 있는  것이며, 자신에 의해서만 열리는 스스로가 열쇠인 것이다.


한 제자가 법안에게 말했다.

'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법안이 이렇게 되묻는 말로 대답했다.

'그대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손가락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제자는 질문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다시 물었다.

'저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법안이 얼른 대답했다.

'달이지.'

그러자 그 제자는 항의라도 하듯이 언성을 높혀 말했다.

'저는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해 물었는데 어째서 달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거야 그대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해 물었으니까 그렇지.'

부처를 방편이라고  말했듯이 법안에게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방편이면서도  그대로 있기만하면 바로 근본 진리이기도 한 것이다. 손의 앞면과 뒷면에 불과한 것이다.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을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이미 달이 존재하는  것이며, 달을 지금 여기서 바로 본다면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법안은 마음이 한가롭고 즐거울 때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깊은 숲속 새들은 피리처럼 지저귀고

수양버들 가지가지 금실처럼 춤추네

구름이 돌아오니 산골짝 더욱 고요하고

살구꽃 향기는 바람에 묻어 오는구나

온종일 그자리에 조용히 앉았으니

마음 맑아지고 모든 근심 사라진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대여 세상일 놓아 두고 이 숲속에 오게나.


이 아름다운 한편의 시가 법안을 가히 왕유같은 대시인의 자리로 올려놓는다.

왕유(701 - 761)는  혜능의 제자 하택 신회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또한 왕유는 충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는 만년에 계율을 지키며 참선으로서  나날을 보냈다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왕유의 시도 그대로가 선사들의 게송이다.


<가을밤>

빈방에 홀로 앉았으면 늙어감이 서럽다

초저녁 밖에서는 찬비가 내리고

어디선지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가 방안에 들어와 운다


<절>

봄풀을 깔고 선정에 들면

솔바람 소리는 그대로 범종소리

티끌 하나 날아들지 못하는 이곳

죽음도 삶도 내 몰라라


법안은 치밀하고 기지가  번쩍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신비주의자였다. 그의  신비는 현상계와 일체 현상을 떠나 있는 실체계를 동일시 하지 않는  초우주적 신비였다. 법안의 눈에 비친 근본적 실체란 곧 모습에 좌우되지 않는 공이었다.

영명 도잠이 처음 법안을 찾아 왔을 때 도잠에게  무슨 경전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도잠이 화엄경을 읽었다고 대답하자 이렇게 물었다.

'육상이라 하여 전체와 개체,  같음과 다름, 생성과 파괴가 있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어느 부분에 나오는가.'

'십지품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볼 때 세간의 법이나  출세간의 법 모두가 육상을 갖추고 있으므로 육상은 가히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자 법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공도 역시 육상을 갖고 있는가.'

이제까지 공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온 도잠은 이러한  질문에  어떨떨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법안이 말했다.

'자네가 나에게 그것을 한번 물어보게. 내가 대답해 주겠네.'

도잠이 물었다.

'공도 역시 육상을 갖고 있습니까?'

'공이지!'

이것이 법안의 번개같은  대답이었다. 이 순간 도잠은 확연히 깨달았다.  기뻐서 소리치며 법안에게 절을 올렸다.  이때 법안은 놓치지 않고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도잠에게 물었다. 도잠이 번개같이 말했다.

'공일 뿐입니다.'

법안과 도잠은 큰 소리로 웃었다.


법안이 활동한 시기는 선종의  쇠퇴기에 속한다. 조직이란 것은 한계도 있지만  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의연히  살아 남게 하는 것도  조직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자유로운 조직인 선불교 승단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선사들은 수행하는 분위기가 잡혀 있을 때는 최상의  삶을 누릴 수 있지만 수행하는 분위기가 희미해지고 나면  가장 허무한 집단으로 전락해 버리기 쉬운 것이다.

선하는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덜렁 남게 되어 선방을 지키는 꼴이 되어버린다.

법안 <종문십규론>을 지어 당시의 선풍토를 준엄하게 경책하고  있다. 서문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문익은 어려서 세속의  속박을 떠났고, 자라서는 30년을 법의 핵심을  듣고 선지식을 두루찾아 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조사의 물줄기가 흘러 넘쳐 남방에서 가장  번창했지만 도를 깨친 사람은 사실 드물었다.

이치로는 단박 깨친다 하겠으나 현실적으로는 평생을  수행하면서 점진적으로 깨치는 것이다.

선문에서는 본디  다양한 방편으로 교화를 세우지만  상대를 지도하고 중생을  이익케 한다는 결론에서는 하나의 법도이다.

경론을 섭렵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기 어렵다. 그들은  바른 생각을 삿된 생각으로  몰아 버리고, 이단을 정통으로  만들어 후학들을 생사윤회 속에서  헤매게 한다.

나는 속으로 깊이 헤아려서 막아보려 하였으나 어찌 해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사마귀의 심정같이  쓸데없는 패기였고, 강물을 마시려는 새앙쥐의 꾀와도  같아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없는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드러내고 법 없는 가운데서 억지로  법을 두어 선가에서 앓고 있는 병통을  열 가지 조목으로 간략히 분류하여 모든 허망한 말을  밝혀 시대의 폐단을 고쳐보려고 조심스럽게 쓴다.


1. 자기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하고 망령되게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을 하지말라.

  마음을 밝히지 못한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주지 자리를 비워두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나 정신적 지도자는 될 수 없는 법이다.


2. 무리를 지어 가풍을 지키느라고 법에 대한 논의가 통하지 않는다.

  부모형제를 뿌리치고 출가한  목적은 견성성불하기 위해서 이다. 700년대  선의 황금시대에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법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거침없이 행해졌다.  토론하지 않고 자신의 것만을 지키다보면 고정된  관념에 빠지게 된다. 개인의 삶이든 역사든지  간에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인 것이다.


3. 강령을 제창하면서 맥락을 모른다.

  선원을 개원하여 법요를 제정할려고 하는 자가 선의 맥락도 모르는 눈봉사들이다.

자신의 말은 하지 않고  조사들의 말을 이리갖다 붙이고 저리 붙이고 하니 어찌 선원에 대중들이 모여들겠는가.


4. 대답에서 경계를 보지 못하고 종파의 가풍도 없다.

  스승이라면 우선 삿됨과 바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경계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법을 바로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바른 법을 펼 수 있겠는가. 삿된 법을  말하면서  속인들을 속이고 성현을 기만하여,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며 현세에서 그 죄의 대가를 필히 받게됨을 명심하라.


5. 이치와 현상을 어그러뜨리고 맑고 더러움을 분간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사해탈도 해결하지  못하여 똥 오줌도 못가리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가. 자신과 상대방을 더  깊은 지옥의 수렁으로 몰고 갈 뿐깨달음의 길은 멀고 멀어라.


6. 수행을 거치지 않고 생각으로 옛 조사의 말씀들을 단정하지 말라.

  깨달음은 철저한 수행에  바탕을 둔 자기관리이다. 생명을 바칠만큼 절실한  수행이 없이는 깨달음의 나무를 보지 못한다. 나무를 보지도 못한 자가  나무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7. 말만을 기억하고 그때 마다 오묘한 작용은 이해하지 못한다.

  화두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다. 화두는 스승과  수행자가 말로 주고 받는 평면 예술이 아니라, 주고 받는 말과 그때의  행위와 표정, 상황등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종합 예술인 것이다.


8. 경전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멋대로 인용하지 말라.

  경전은 깨달음의 눈을 통하여 경전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모르면 아무리 대승 경전이라도 한낱 쓸모없는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도를 모르고 함부로  써면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듯이 경전의 내용도  모르면서  함부로 써면 말 하는자 듣는자 모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뿐이다.


9. 운율도 맞출줄 모르고 이치에도 통달하지 못했으면서 게송 짓기를 좋아한다.

  게송은 새벽에 닭이  울어 밝음을 알리듯이 마음을 깨친자가 알리는 깨달음의 엄숙한 선언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함부로 게송을 짓지 말라.


10. 자기 단점을 변호하면서 승부 다투기를 좋아한다.

  승단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만 하는 생사해탈의 대격전지. 무슨 여유가 있어 남과 다투며, 부와 명예를 어디에  쓸려고 부를 축적하며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법안은 오랫동안 장경 혜릉에게서 수행을 하였다. 뒤에 나한 계침의 법을 잇는다.

하루는 장경의 제자인 자소가  대중을 거느리고 법안을 찾아 왔다. 자소가 법안을 보자 흥분하여 먼저 소리쳤다.

'스님은 누구의 법통을 이었습니까?'

'나한 계침의 법을 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장경스승을 그토록 외롭게 하였습니까?'

'이 법안이 우둔하여  장경스승이 던진 인연을 알아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번 물어 보십시오.'

'만상 가운데 우뚝 몸을 드러낸다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자소가 불자를 세웠다. 법안이 이렇게 꾸짖었다.

'수좌여, 그것은 옛날에 장경스승에게서 배웠던 것이오. 이제는  당신의 소리를 해 보십시오.

'

자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법안이 팔을 휘저어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이 흉내내며 말했다.

'만상 가운데 우뚝이 몸을 들어낸다.'

그리고 법안은 조용히 그러면서도 힘차게 자소와 대중에게 일러 주었다.

'수좌여, 부모를 죽인  죄는 참회가 되지마는 부처를 비방한 죄는  진실로 참회하기가 어려운것이오.'


법안은 958년 윤 7월 5일에 머리를 깍고 목욕하고  대중에게 서로 격려하고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라고 당부하고는 가부좌하고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얼굴과 모습은 오랫동안 평소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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