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삼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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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무상, 무아, 연기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쳤던 연기와 2600년 후 김성규가 깨친 연기는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연기는 누가 깨치던 간에 같은 것입니다. 인도에서 깨치던, 한국에서 깨치던, 미국에서 깨치던, 2600년 전에 부처님이 깨치던, 오늘 김성규가 깨치던, 1000년 후 누군가가 깨치던 같은 것입니다.
무상, 무아, 연기는 불교만의 교리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깨치면 깨친 내용이 무상이고 무아이고 연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깨치게 되면 공통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무아, 무상, 연기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부처님께서는 불교라는 종교를 성립하신 것입니다.
무상, 무아, 연기가 불교의 진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이 되며,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일체개고이며, 무아는 제법무아가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불교의 진리인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인 삼법인이 성립됩니다.
연기의 내용이 삼법인이며, 이 연기를 체득하기 위하여 사성제라는 거룩한 가르침이 체계화됩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 사성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존재의 본질은 무아이고 무상입니다.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무명이며 무상과 무아를 아는 상태는 명이고 명은 연기입니다. 즉 이것에 대한 인식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존재 입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상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적인 속성은 삼법인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신지 한번 상상해봅시다.
존재는 인식이다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존재란 무엇인가?
나도 존재입니다. 또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도 다 존재입니다. 이 우주에 존재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씀이 “너는 있느냐? 없느냐?” 였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그러면 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합니다.
불자님들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너는 내가 보이느냐?” “예, 눈이 있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으며, 인식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란 인식이다.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존재는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첫출발이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으므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경, 12처
인식이란 어디서부터 옵니까? 우리는 안, 이, 비, 설, 신, 의를 갖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안, 이, 비, 설, 신 에서 ‘의’는 완전히 따로 전개되는데 지금 우리는 6근인 안이비설신의로 존재를 분석해 보니 눈, 귀, 코, 혀, 몸뚱이, 뜻이 전부입니다.
먼저 ‘안’ 눈을 생각해 봅시다. ‘안’ 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을 가려 봅니다. 눈이 없다고 하면 대상이 보이겠습니까? 대상을 못 봅니다. 눈 때문에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6경의 색성향미촉법에서 색인 것입니다. 색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입니다.
안이비설신의에 대응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 눈에 보이는 색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인 6근과 6경이 나옵니다. 6근과 6경 중에서 안, 눈이 있기 때문에 형상, 모양인 색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볼 수 있고 내 눈을 통해서 대상을 봄으로써 보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보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눈으로써 보고 판단합니까? 판단은 ‘의’가 합니다. 그래서 안, 눈과 색이 부딪치면 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총괄하는 의가 작용하여 분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의식이 생깁니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볼 수 있는 보는 작용에 의해서 안식이 생기고 눈으로 보는 작용은 안식에서 일어납니다. 안식에 의해서 의식과 결부되어 판단하고 분멸하는 의식이 생깁니다. 6근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은 안이비설신의입니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의’를 회복하고 ‘의’에 의해서 구체화 시키고 ‘의’로써 불교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냅니다. 불교는 바로 ‘의’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하느님의 종교라 한다면 불교는 ‘의’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마음 심. 그 다음 의식인 ‘식’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불교의 반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인지 의인지 식인지, 구별은 안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다르고 내용이 다 틀립니다.
6근은 의지적 작용의 속성이 있다
안이비설신의 6근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무엇입니까? 눈은 볼려고 하고, 귀는 들을려고 합니다. 즉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대상인 색을 보면 필연적으로 눈을 통해서 보는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면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이 세상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눈으로 보면 그 대상은 눈에 대한 반응의 속성작용을 합니다. 안은 의지적 작용을 합니다.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진 것이 색입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더하기 빼기를 가르칠 때 그 개념은 안 가르칩니다. 그저 5+7=12 식으로 더하고 빼고 곱하기는 다 잘합니다. 그것에 대한 기본개념을 안 가르치다 보니 어릴 때는 공부를 잘하는데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너무 처집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기본개념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든지 그 문제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왜 이렇게 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지 대한 기본원리에 부딪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금 불교가 어렵고 잘 모르는 이유도 바로 불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전혀 안 배우기 때문입니다. 선불교가 어려운 것은 불교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보면 선불교는 말 장난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한 기본개념을 알고 보면 그 기본개념의 흐름에 의해서 똑같이 전개됩니다.
6근이 나를 이루는 주체가 됩니다. 연기의 법칙을 말할 때 6근은 인이 되는 성분이고 6경은 연이 되는 성분입니다. 내가 주체가 될 때 대상은 연이 되며 또 누군가가 인이 될 때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연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연과의 법칙의 출발점은 6근과 6경으로부터입니다.
6경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안과 색에서 볼 때 안은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색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과 색이 부딪치면 식이 일어나는데 식은 판단, 분별을 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속성을 바로 모든 것은 삼법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은 의지적 속성은 가지고 있고 색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6근과 6경, 6식 모두가 삼법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에 대한 이해
눈을 통해 어떤 대상을 보면 인식을 합니다. 인식하는 것을 식이라 합니다. 불교의 가장 기본은 6근과 6경과 6식입니다.
제자들이 부처님께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부처님께서 6경과 6근의 12처가 불교니라 했습니다. 또 6경과 6경, 6식의 18계가 불교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법당에 들어갔을 때 부처님을 봅니다. 우리는 눈을 갖고 있으며 이 안이 눈입니다. 부처님을 봤을 때 식이 생깁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부처님을 보았을 때 부처님은 색이며, 눈이 색을 봄으로써 안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부처를 보고나서 머릿속에 생기는 식이 전부 다 똑같습니까? 여기에 백 명, 천 명이 있다면 모두 다 부처님을 보고 생각하는 것은 다 다르지요. 지구상에 인간은 60억이 넘습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이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을 보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식은 다 다릅니다. 똑같이 판단하는 식은 없습니다. 참 묘하지요. 여기에 있는 모든 분도 다 틀리게 생각합니다. 식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에 따라 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2연기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인 식이 됩니다. 식은 모든 것을 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그림)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어느 종교든지 진리를 바로 본다면 인식하는 내용은 다 같습니다.
연기는 이 우주의 본질적인 법칙성입니다. 깨친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인식하는 내용은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은 같다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고 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속성인 인식은 삼법인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삼법인의 속성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입니다. 제행무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입니다. 제행무상,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부처님께서 끊임없이 변화는 것이 ‘고’이겠느냐?, ‘낙’이겠느냐? 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지 않고 허물어지는 것은 ‘고’라고 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생이고 변화의 끝은 멸이 됩니다. 무상한 모든 것은 생멸하는 것입니다. 생멸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기본적인 속성이 제행무상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고’인 일체개고입니다.
나라고 내세울 어떤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바른 눈으로 존재의 본질을 보니 없습니다. 그래서 제법무아입니다.
눈으로 보는 대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변화는 것은 고입니다. 그러면 ‘고’라는 것에 ‘나’라는 대상. 즉 ‘나’ 라는 부재성, 주재성이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인 것입니다. 무상이고 무아고 고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삼법인을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라 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나라고 내세울 실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를 하느냐하는 문제는 2600년 불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상태를 흩어 놓으면 무아이고 모아 놓으면 우리 몸뚱이가 됩니다. 이것이 무아입니다. 원래 무아인데 이 몸뚱이가 생기면서 아치 때문에 나라고 착각을 하며 나가 있다고 고집을 하는 아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부처님 경전에서 무아를 표현한 멋진 말이 있습니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들판에 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볏짚을 들판에 풀어 놓으면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바로 들판일 뿐인데 볏짚을 끌어다 얽어 놓으니 한 칸의 초가집이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색수상행식을 끌어다 모으니 몸뚱이가 생깁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 무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존재했던 사상들과의 관계는 부처님이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김성규도 뭔가 진리를 가르치고 박씨도 가르치고 이씨도 뭔가를 가르칩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 것이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이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바르고 진실하다면 상대의 가르침을 다 타파해야만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육사외도라는 뛰어난 여섯 명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이 육사외도들의 사상을 부처님께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에 대해서 6근, 6경, 6식을 설명하시면서 육사외도의 주장들을 타파하시고, 또 무상이고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지 설명해야 합니다.
케마비구의 꽃에 대한 비유
부처님 당시에 케마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비구 케마가 아파서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마침 다른 수행자들이 케마를 찾아와 병문안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라 했는데 왜 아프냐고 농담을 합니다. 그때 케마는 ‘아니다’ 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부처님께서도 무아라고 가르치신 상태인데 케마의 ‘나는 나가 있다’고 한 말에 대해서 많은 장로 비구들이 모여서 어떤 말이 맞는지 가리기 위해서 케마가 병들어 누워 있는 수행공간으로 모여 듭니다. 장로들이 모여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그럴 때 케마가 ‘나가 있다’고 한 근거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꽃에서 향기가 난다 하면 우리는 분명히 꽃 향기를 맡고 그 향기를 믿습니다. 꽃 향기를 맡았는데 그 향기가 꽃술에 있느냐, 꽃대에 있느냐, 꽃밑에 있느냐, 꽃잎에서 나는가? 분명히 꽃향기는 나는데 꽃대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꽃잎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꽃술에서 나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꽃향기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케마가 이야기 한 무아라고 하는 것은 바로 꽃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꽃이 없는데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꽃이 있기 때문에 향기가 납니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케마는 장로들을 설득합니다. 무아를 설명할 때 가장 좋은 예로써 바로 ‘나가 있다’ 고 한 이 말 한마디로 인해서 논쟁이 일어났고 그 논쟁으로 인하여 무아를 꽃향기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꽃향기는 꽃에서 나지만 꽃대도 아니고 꽃술도 아니고 꽃잎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향기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와 같이 케마의 이야기로 분명히 무아를 설명했습니다.
꽃에는 꽃대도 있고, 꽃술도 있고, 꽃잎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여 관계성을 가지면 꽃이 생기게 됩니다. 관계성이 없어지면 꽃은 없습니다. 그래서 원래 없는 무아인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6근, 6경, 6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노병사를 합니다. 태어나서 젊은 시절이 있고 그러다 늙어 병들어 죽습니다. 예를 들어 천 년을 사는 누군가가 지켜 본다면 우리 인간이 생노병사 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백 년을 사는 동안 본인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죽을 때도 의식이 가물가물 합니다.
그렇지만 십 년이나 이 십년을 사는 개를 집에서 키운다고 합시다. 개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생노병사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짧게 사는 생명체를 보면 생노병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태양의 수명은 약 150억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태양의 나이는 70억 년 되었다고 합니다.
이 우주의 모든 만물은 성, 주 괴, 공을 합니다. ‘성’ 이 우주에 존재하는 성간물질을 모아서 지구나, 혹성, 별들을 만들어 냅니다. 태양은 지금 약 70억년이 되었으니 한창 활발할 때입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백색왜성처럼 폭발직전에 한번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왜성들이 있습니다. 파괴되고 나면 이 우주의 모든 성간물질은 흩어지거나 공이 되던지 블랙홀이 되겠지요. 바로 성주괴공을 합니다.
우리는 생노병사를 하고 정신작용은 생주이멸을 합니다. 어떤 사물을 보면 의식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이 우주의 생명체들은 정신작용을 하여 생주이멸을 합니다. 그래서 제행무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경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한 번은 깃자쿠우타산에 계실 때 유명한 수행자들이 삿비아 호숫가 정사에 모여서 수행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를 토론합니다. 이때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생명체로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그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신 무명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받아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체로 생겨납니다. 오욕 (재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무상한 것이며 괴로운 것입니다. 또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도 ‘나’와 ‘나의 것’은 없다고 하신 무상, 무아, 연기을 말씀하셨습니다.
재상 불사밀의 지혜
부처님을 신봉하고 불교에 귀의한 파세나디왕의 모후가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입니다.
왕에게는 불사밀이라는 뛰어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왕은 전국 순행을 나갑니다. 왕의 모후는 100살이 되도록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모후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전국 순행을 나섭니다. 파세나디왕은 효심이 지극하여 평생 어머니를 잘 모셨습니다.
왕이 돌아올 때 쯤 모후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불사밀 재상은 왕의 효성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소식을 들으면 누구보다 슬퍼하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통에 빠져 견디지 못하는 왕을 생각하고 불사밀이 꾀를 냅니다. 왕이 순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목에 불사밀은 어느 장자의 집에 어른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지내는 것처럼 장례 행렬을 떠납니다. 그때 불사밀이 왕과 마주치게 됩니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왕이 불사밀을 보고 반가워 묻습니다. 누구의 장례이기에 이처럼 거창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오백 마리 코끼리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따르고 같이 묻어질 사람들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순장하는 관습이 있어서 장자를 모시던 노예도 같이 묻을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불사밀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데 왜 쓸데없이 거창하게 장례를 치르느냐고 하면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불사밀이 왕에게 “왕이시여, 다름이 아니라 모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장례행렬은 바로 모후의 장례라고 이야기 합니다. 임금은 한참 동안 침묵에 빠집니다. 침묵에 빠져서 깨어난 왕은 불사밀에게 “현명한 신하가 있어서 너무나 고맙다” 라고 합니다.
장례 행렬을 보고 임금은 죽음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본인은 충격에 빠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슬픔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불사밀의 지혜 덕분입니다. 왕은 말을 몰아 부처님의 처소로 갑니다. “부처님이여 이제 모후가 돌아가셨지만 오늘 불사밀이 저를 위로해주었고 장례도 치루어 주었기 때문에 큰 슬픔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파세나디왕에게 한 말씀이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소. 마치 질그릇을 구울 때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든 아니든 간에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소. 우리의 몸에 4가지 두려움이 닥치면 그것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오. 그 4가지란, 늙음과 질병, 죽음, 무상이오.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이오. 마치 큰 산이 무너져 사방에서 덮쳐오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아예 믿을 것이 못되므로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면 그 몸이 무너지고 목슴이 끝난 뒤에는 천상에 태어나지만 법 아닌 것으로 다스리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하면서 부처님께서는 파세나디왕을 위로합니다.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정치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다 겪는 무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행무상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무상이며 제행무상입니다.
밀라레빠
밀라레빠는 티벳의 최고의 스님으로 부처님에 버금 갈 만큼 존경받는 분입니다. 밀라레빠가 공부하고 수행했던 심정을 시로 남겼는데 우리가 지금 제행무상을 공부하는데이 무상을 얼마나 절묘하게 잘 표현했는지, 아마 밀라레빠의 시만큼 무상을 잘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것 덧없고 무상하여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내 나이 어렸고
내가 성인되니 그 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하리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나는 집을 떠나 있어었고
나 이제 돌아오니 그 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했네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경전이 있을 때 공부할 사람 없었고
공부할 사람 돌아오니 경전은 낡고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했네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기름진 밭 있을 때 농부 떠나 없었고
농부 돌아오니 밭은 잡초만 무성하네
둘이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했네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좋은 집 있을 때 주인은 떠나 없었고
주인 돌아오니 집은 이미 폐허되었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한것
나는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나는 불굴의 귀의자 이세상 모든것 무상을 알았으니
불멸의 행복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묘한 것이 있습니다. 현상론적으로 볼 때는 모두가 무아고 무상이고 연기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을 보면 불생불멸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교의 현상론은 연기이지만 불교의 실상론에 들어가면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불생불멸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연기의 현상론적인 입장에서는 태어나고 죽지만 연기의 실상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로써 죽음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현상적인 속성은 생멸이지만, 상상적인 본질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분명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습니다.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생한 것은 언젠가는 멸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라고 하셨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인 일체개고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사법인이라 할 때 열반적정을 넣을 수 있습니다.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내 마음의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입니다. 그래서 열반적정은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바로 적정이므로 무명에서 벗어나면 바로 적정이 됩니다.
불교의 기본용어를 모를 때는 선불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특별한 것이지만 기본개념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선불교의 화두가 쉬워집니다.
선불교의 모든 화두도 삼법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법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성질을 살펴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진리를 깨치고 나면 무아이고 무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아와 무상은 우주의 본질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교리가 체계화 되는 과정에서 부처님은 제일 먼저 삼법인을 설명하였습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고 일체개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삼법인이 됩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그 때의 인식이 열반적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법인을 바로 알아 고를 벗어나 열반적정, 극락을 이루어 살자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고통은 소멸하고 즐거움이 생기는 이고득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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