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강 죄악과 의지의 문제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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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12강 죄악과 의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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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271회 작성일 21-07-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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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에서 연기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인 12처와 18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불교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불교는 12처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6근과 6경이 12처였고, 부딪쳐 안식이 생기고 이식이 생기고 비식이 생기고 설식이 생기고 신식이 생기고 의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6식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6식을 더하여 18계입니다. 


창조주와 의지 

텔레비전을 보면 김태희의 잘 생긴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보는 작용만 할 수 있고 듣지는 못합니다. 귀는 듣는 작용만 하고 눈은 보는 작용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각자 자기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내용으로 12처와 18계를 공부 했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고 했을 때 모든 존재를 부정해도 ‘나’는 있습니다. ‘나는 있다’에서 출발한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6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6근이었고 나 외에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6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대상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에서 6식이 생깁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의를 설정하셨습니다. 이 의지가 앞으로 불교를 전개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죄를 지으면 과보를 받느냐 안 받는냐 하는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했을 때 지은 죄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만약 하느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한다면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은 각자의 뜻대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만들어졌으며 창조주의 뜻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내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간에 모든 책임은 창조주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나가 있다’에서 출발했을 때는 ‘의’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의지로부터 출발했을 때 죄의 유무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떤 행위를 했다면 그 행위는 나의 6근과 대상이 되는 6경이 부딪쳐서 나의 의식이 결정합니다. 의식이 결정한 그 행위에 대한 과보의 책임은 결정한 ’의‘한테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에게 인과가 있느냐 없느냐? 죄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즉 죄의 유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에 따라서 죄의 유무가 달라집니다. 창조주가 만들었을 때는 죄의 유무가 창조주에게 있게 됩니다. 나의 의지에서 출발했을 때 죄의 유무는 나에게 있습니다. 나의 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의지에 의해서 내가 어떤 행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보석가게를 지나가면서 보석을 보았을 때 보석이 너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그 보석을 내 것으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그 보석을 슬쩍 가지고 오면 그것은 도둑질입니다. 도둑질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나 자신이고 훔치는 것도 나 자신이 한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는 내가 받는 것입니다.


육사외도의 생각 

인도에서는 육사외도라는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육사외도는 죄가 누구에게 있느냐 했을 때 운명론 혹은 숙명론 혹은 인과가 있다 없다 이 모든 것에 의해서 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한 연기에서는 6근과 6경에 의해서 어떤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의 주체는 ‘의’입니다. 의에 의해서 아무리 보석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내가 돈이 없으면 사지 못하고 눈으로만 내 것으로 하면 됩니다. 눈으로 열심히 보고 보석이 아름답구나, 좋구나, 하면서 눈에 넣어 내 것으로 하면 됩니다. 손으로 슬쩍 하지 않으면 도둑질이 아닙니다. 이 결정은 내 의지가 합니다. 결국 죄의 유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의에서 출발했을 때 죄의 유무는 의로 돌아옵니다. 나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착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그 착한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내가 악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그 악한 행위를 한 과보도 나에게 돌아옵니다. 


과보는 더 긴 시간 동안을 통하여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 좀 더 연결되면 삼세인과설 즉 인과가 이 생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이 행위에 대한 과보는 이생에서 그대로 받을 수도 있지만, 다음 생으로 넘어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볼 떄 분명히 이생에 착한 행위를 하면서 살았는데 그 과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음 생 그 다음 생에 다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예를 들어 이 생에서 악한 행위를 했는데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생에 복을 지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이생에서 잘 사는 것이며, 이생에서 한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과보가 익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이생에서 잘 사는 것 같지만, 다음 생에 가면 그 과보를 그대로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이 행위에 대한 과보는 결국 한 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세인과설에 의해서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에 돌아가면서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유무도 결국은 의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죄의 출발과 모든 죄의 책임은 나한테 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삼세에 윤회하면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내가 착한 행위를 하면 언젠가는 착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고 악한 행위를 했으면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언젠가는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과의 유무 

 불교에서는 눈감아 주는 것이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인과문제는 정확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과를 알면 받고 인과를 모르면 안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과는 모른다고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도 받아야 할 것은 받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 순간을 모르고 그냥 넘어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가르칠 때 학원에 보냅니다. 학원에 아이를 보내면 공부 잘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학원에 보낸 만큼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대로 공부한 부모라면 70~80%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하면 편합니다. 혼자 떨어지는 것보다 묻혀 가면 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데 혼자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냥 따라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고 있을 때는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증권투자를 할 때 돈 잃는 것을 100% 안다면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하면 돌을 벌 것 같으니까 혹은 잘못하면 잃고 잘하면 돈을 버니까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과보도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왜 하겠어요?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받는 이 과보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그냥 묻혀갈 것 같으면 받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군중심리입니다. 함께 같이 따라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맞는 것은 맞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받아야 될 것은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같이 묻혀 가면 안 받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군중심리 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모든 것이 똑같이 작용합니다. 죄악의 유무를 분명히 안다면 이러한 군중심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분명한 판단으로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분명히 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죄악의 유무는 분명하게 의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죄악의 유무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과 의지의 문제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모든 것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모든 책임은 신에게 있습니다. 나에게 의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나의 의지에 있게 됩니다. 이 의지는 안이비설신의의 의입니다. 


의의 존재 

존재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인지가 태동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의 중에서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물질은 눈이 있습니까? 코가 있습니까? 혀가 있습니까?  몸뚱이 밖에 없습니다. 물질이란 것은 몸뚱이인 신만 있습니다. 생명체는 안이비설신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명체는 눈이 없는 것도 있고, 소리를 못 듣는 생명체도 있을 것이고, 어떤 생명체는 냄새를 못 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발달된 생명체는 안이비설신의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발달된 생명체는 안이비설신을 관장하는 의를 갖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5근을 통섭하는 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육신 부분은 안이비설신으로 설명되고 정신 부분은 육신을 조정하고 판단하는 의로써 설명됩니다. 부처님께서 의로써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불교가 출발할 때 태초에 인식이 있다고 했으며 존재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의가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사고의 대전환이며, 일대 혁명입니다. 비로소 인간중심의 모든 사고가  전개됩니다. 나에게 의가 있다, 의지가 있다하는 부처님의 모든 출발은 의지로 인해서 인식론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면 ‘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구체화 되어가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생명체의 욕망_탐진치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심에는 탐진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탐심이라 했을 때 이 욕심은 능력도 안되면서 능력밖에 있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심은 화 내는 것으로  탐심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강하다면 진심은 우리의 감정적인 정신작용에 의해 화 내는 것입니다. 화가 왜 납니까?  탐심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만들어냅니다. 

‘진’ 화내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이 움직여 줄 때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만 달라지면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화가 몹시 나면 물건들을 던져가면서 싸우게 됩니다. 화내는 감정의 뿌리는   아집이며 아만입니다. 나 자신은 바르고 상대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 맞다는 생각에서부터 화가 납니다. 모든 감정의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맞서는 것, 고민하는 것, 나와 다른 것에 대해 화가 납니다.  안 좋을 때 화가 납니다. 좋지 않은데서 자꾸 욕심이 생깁니다.  

‘치’는 어리석음으로 탐심, 진심이 치심으로부터 나옵니다. 앞에서 무명을 배웠습니다. 모르는 것이 무명이며 ‘치’입니다. 여기서 탐심과 진심이 나옵니다. 생명들이 갖고 있는 속성은 먹고 자고 번식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행위의 속성은 배고프면 먹습니다. 피곤하면 잠을 자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서 생식을 합니다. 생명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속성이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속성에 의해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먹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내가 항상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욕심이 생깁니까?.  인간만이 현재 먹고 자고 생식하는데 여기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탐심 진심 치심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배가 고플 때 먹을 수 있으면 항상 먹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먹어야 할 때 먹을 것이 없다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 내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다른 동물과 똑같습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동면할 때 먹을 것을 저장합니다. 처음부터 저장했겠습니까? 분명히 엄청나게 많은 생명체가 죽었습니다. 대응을 못했기 때문에 죽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배가 고플 때 먹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똑같습니다. 먹는다는 자체가 자유로울 때는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욕망의 시작 

만약 기후변화에 의해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아! 여기에 대해서 새롭게 대응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서 먹는데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욕심이란 것을 동물에 비교했을 때 동물은 욕심이 없고 우리 인간만이 있을 때 인간이 동물보다 못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탐심과 진심이라 것이 인간을 급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또 이것 때문에 인간은 부패하고 멸하게 됩니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데 만약 기후의 변화로 오랫동안 흉년이 들었다거나 혹은 홍수가 계속되어 장기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진다면 무의식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욕구는 끊임없이 솟구치게 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을 마련해 놓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이 생기는 출발점입니다. 이런 욕심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은 눈덩이와 같습니다. 처음 산꼭대기에서 눈덩이를 굴릴 때 주먹만 한데서 시작해서 산 밑에 오면 어마어마하게 커지는데 이것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능력이 정진하고 수행하고 정정하고 정념함으로써 절제가 되고 조절이 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먹는데 이것을 조절하기 위해서 의지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탐심과 진심의 뿌리 (그림2)

탐심은 내 것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탐심의 뿌리입니다. 물질을 내 것으로 해야겠다는 생각과 감정을 내 것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 근본적으로 탐심의 뿌리가 되어 근본 성품을 잘못되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탐심과 욕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먹고 자는 것은 결국 우리를 나태하게 하는 치심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 다음 생식 작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만히 있으면 생식이 이루어집니까? 생식이 되려면 부딪쳐야 합니다. 6근과 6경과 6식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촉입니다. 촉에 대한 이해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생식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는 촉입니다. 생명체가 암컷이나 수컷, 남자와 여자는 무엇인가 부딪쳐야만 생식이 이루어집니다. 부딪치는 과정에서 촉이 필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육육법연기에서 6근과 6경과 6식 다음에 오는 것이 촉입니다.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애욕이 생기는 것도 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식을 하는 과정에서 촉으로부터 무조건 부딪쳐야 하는데 이 때 3가지의 감정인 좋고 나쁘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지금 옆에 계시는 분과 부딪쳐 보세요. 서로 기분 좋게 부딪치면 좋은 감정이 생기고 미운 사람이 살짝만 부딪쳐도 기분이 나쁩니다, 좋다. 기분이 좋지 않다. 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부딪쳐서 촉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좋구나 좋지 않구나 하는 감정이 무조건 일어나게 됩니다. 촉으로 수반되는 감정으로부터 애욕이 생기며 이것으로 인하여 마음에 들고 즐거운 감정과 마음에 들지 않아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 이것이 바로 애욕입니다. 즐거운 감정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은 어떻게 됩니까. 지속적으로 부딪쳐 자기 것으로 하고 싶지만 나쁜 감정도 일어납니다. 좋은 것은 일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고 좋은 감정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옆에 두고 싶어 합니다. 자신만이 소유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한테 부딪쳐서 좋은 감정이 일어나는 대상이 다른 사람과 부딪쳐 좋은 감정이 일어난다 했을 떄 다른 사람에게 주기가 싫고 자기만 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좋은 감정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은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감정의 소유욕에 대한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물질의 소유욕으로부터 탐심이 생겼고 감정의 소유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진심입니다. 그래서 자기한테 맞으면 좋아서 헤헤거리고 맞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뿌리는 생식입니다. 이 뿌리는 촉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생명체의 기본적인 행위인 먹고 생식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치심의 뿌리

수면에 대한 것을 보면 탐심과 진심으로 끝없이 이 육신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탐심과 진심이 나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이 육신이 끝없이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육신을 편안하게 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으로부터 치심이 생깁니다. 결국 이 탐진치의 치심을 분류하는 것은 먹고 자고 생식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치심의 뿌리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무상과 무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었고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잘못된 생각이 치심이라 했습니다. 무상과 무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어나 욕심의 덩어리가 되고 애욕의 덩어리가 됩니다. 이 몸뚱이는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45%정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것인가 또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 진실 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계, 정, 혜가 55% 차지하기 때문에 적당하게 이런 몸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 몸뚱이는 지옥부터 부처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는 탐진치가 0%입니다. 탐진치가 99%이면 지옥입니다. 탐진치가 45% 정도인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심의식 

탐진치의 일차적인 뿌리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에서 출발한 것이 안이비설신의입니다. 오온에는 이런 것들이 왜 일어나는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안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체를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탐심을 만들어내고 진심을 만들어내고 치심을 만들어내어 생명체를 만들어 냅니다. 지금까지 안이비설신의의 의에 대한 안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본능으로부터 출발해서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8계를 배우고 나면 마음 심, 의지의 의, 식별의 식, 세 가지가 구분됩니다. 구분해서 보니 마음과 의지와 식별이 어떻게 작용하였습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했을 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로 의를 밝힌 종교입니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불교는 의를 밝히는 종교입니다. 마음은 주어진 상태에 대해서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수만 가지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이율배반적인 온갖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 다음 의지는 선택된 방향을 유지하려는 정신적인 노력이나 활동입니다.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을 몰고  가려고 하는 의지와 활동이 의지입니다. 이 마음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능력이 의입니다. 식별의 식은 의지의 끝이 결국에는 변화로 종결되고 마는 것을 보고 달라졌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똑같이 인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이 법당 앞에 걸려있는 부처님의 탱화를 보았을 때 보는 순간 전부 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내 자신이 부처님을 볼 때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근이 경계와 부딪칠 때 보는 상황이 항상 다르게 식별됩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식별입니다. 마음은 끝없는 생각을 일으키는 능력이며 그렇게 일어나는 능력의 실체가 바로 식입니다. 그 생각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인식하려고 하는 능력이 의입니다. 


죄의 유무가 누구에게 있느냐 (그림)

 죄를 지으면 죄값은 누가 받느냐? 의를 공부했기 때문에 죄값은 누구 받느냐에 대한 대답이 명확해 집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 죄를 받는다. 신이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좌지우지 한다. 혹은 죄를 지었는데 누가 죄 값을 받는가? 결국 누가 죄를 짓느냐에 대한 과보는 죄를 짓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죄를 지은 주체가 과보를 받게 됩니다.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죄를 지었을 때 죄 값은 본인이 받게 됩니다. 나에게 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의로부터 출발합니다. 결국 의지에 의해서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내가 결정합니다. 의가 모든 것을 출발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의지가 있는 곳에는 법이 존재합니다. 의의 대상이 되는 법이 존재합니다. 결국은 색성향미촉법에 의해서 법은 수많은 생각속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면 그 결정은 의가 됩니다. 의지가 있으므로 법이 존재하게 됩니다.

죄의 유무가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이 내용은 6근과 6경에서 다시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의는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법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생각의 의를 일으키게 하는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법입니다. 그래서 의지를 일으킴으로 해서 법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대상들은 내 의지에 의해서 존재되는 것이지 대상이 있어서 의지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있어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어서 ‘색’이 보이는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의 주체는 6근입니다.


주체와 비주체

 6근이 주체가 되는 것은 연기법입니다. 인연과의 법칙이지요. 그러면 6근이 주체라면 인이 되고 6경은 연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인연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이란 나 자신이고 나 외에 대상은 연이 됩니다. 나 자신이 변하기 쉽습니까? 연인 대상이 변하기 쉽습니까? 자기 자신이 변하기 쉽지요. 상대방은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바뀌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뀌어 버리면 대상은 바뀌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연과의 법칙인 6근이 주체가 되는 인이 바뀌면 연은 따라서 바뀌게 됩니다. 눈으로 볼 때, 부처님이 보면 모든 대상이 부처처럼 보이고 다른 대상이 볼 때 모든 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상은 똑같은데 누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달라집니다. 주체가 더 중요하므로 눈이 있어 색이 있는 것입니다. 주체인 눈이 있기 때문에 비주체가 인에 보이는 색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있어서 대상이 있노라 이가 있어서 성이 있느니라. 의가 있어서 법이 있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법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법이고 규칙이고, 규율이라고 합니다. 법이라 했을 때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이라 했습니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했을 때 법은 무아와 무상과 연기입니다.  


인과율

안이비설신의의 의는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색성향미촉법을 말했을 때 법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필연적으로 지니고 지킨다는 뜻을 갖게 되어 진리라고 하고 인과율이 성립됩니다. 

여기서 필연성 규칙성, 법칙성이 있기 때문에 인과율이 성립됩니다. 인과율이 성립되면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고 착한 일을 했을 때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근본적으로 연기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합니다. 전생을 믿느냐 안 믿느냐 이 문제를 생각했을 때 착한 일을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꼭 그렇게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부처입니다. 꼭 그렇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앞으로 구체적으로 배움으로써 좀더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인과를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문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생을 거쳐 나오므로 막연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에 국한시켜 볼 떄 당장 문제되는 것은 죄를 누가 짓고 누가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착한 일은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이것의 기본적인 뿌리는 인과율입니다. 인과율은 인과법칙의 인과율입니다. 인과란 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으로 착한 일을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인과율입니다. 이 인과율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가 이해되고 인과에 대해서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을 좀더 체계적으로 알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에서 이 인과를 알게 됩니다. 지금 하는 이 공부들이 절대 쉽지가 않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도 또한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뿌리에 접근하고 바탕에 가까이 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세생생 살면서 불교에 대한 확신이 들게 되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애쓰게 되며 이 공부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은 죄악의 유무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그다음 이 죄는 누가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6근, 6경, 6식이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지는가? 촉에서 이루어지고 탐진치를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이 죄악의 주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죄악의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존재는 의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죄악을 결정하는 의지는 나 자신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죄악을 결정하는 주체가 나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죄를 짓고 행위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므로 그 주체가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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