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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13강 시간연기_육육법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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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217회 작성일 21-07-0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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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기의 발생 양식 

연기는 교리의 기초이면서 전부이기도 하며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되면 불교 공부가 쉬워집니다. 바다에 떠 있는 빙산은 10분의 1은 떠 있고 10분의 9는 물속에 잠겨 있습니다. 10분의 9의 잠겨 있는 부분을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떠 있는 10분의 1은 항상 무상과 무아와 연기에 대한 현상론적 부분입니다. 왜 무상이며 무아이며 연기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어려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먼저 12처를 공부했고 그 다음 18계를 공부했고 죄악의 유무를 공부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비로소 연기공부에 들어갑니다. 연기를 설명하기 전에 무아, 무상을 설명했습니다. 이때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인식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 할 수 있는 방법과 공간적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즉 시간적 관점에 의한 방법과 공간적 관점에 의한 방법으로 시공간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또 시공간이 통합된 관점에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육육법 연기는 시간적 관점에서 연기를 공부하는 것이며 오온 연기는 공간적 관점에서 연기를 공부하는 것이며 12연기는 시간적 관점과 공간적 관점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연기에 대한 인식 단계는  

육육법연기에 대해서는 금강경 제18장 일체동관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부처는 육안이 있느냐? 예 육안이 있습니다. 부처에게는 천안이 있느냐? 예 부처에게는 천안이 있습니다.” 혜안이 있느냐? 법안이 있느냐? 불안이 있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서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2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인 6근과 6식의 이해가 바로 육안에 대한 인식입니다. 또, 앞에서 배운 삼법인의 속성이 이해 되면 천안이 열렸다고 합니다. 부처의 혜안은 육육법연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되면 혜안이 있다고 합니다. 법안이란 오온연기에 대한 인식의 이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안은 부처의 눈입니다. 다시 말해서 12연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바로 불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서 부처란 12연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될 때 불안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란 오온연기를 이해하면 바로 법을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열려서 육육법 연기를 인식하고 이해하면 혜안이 있다고 합니다. 수십억 겁을 수행해야만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지요. 그 어렵고 힘든 수행과정을 거쳐 부처되고 나를 아는 것이 바로 12연기에 대한 인식과 이해입니다. 오온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육육법연기에 대한 이해가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내용을 보니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은 6근과 6경에 대한 이해, 삼법인에 대한 이해, 시간연기에 대한 이해, 공간연기에 대한 이해, 12연기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연기를 이해하면 아라한이며,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육육법연기 (그림)

 육육법 연기를 산스크리트어로 표현하면 ‘프라티아트야 우뜨파다’ 입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기대어 일어남 연하여 일어남, 연생” 한문으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연생(緣生)입니다. 

기대어 일어나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 육육법연기의 발생양식입니다. 육육법연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바로 연생입니다. 

”프라티는 ~ 에 대하여 ~을 향하여 이며 “아”는 가다. “트야”는 ~하여, ~향하여 가서 이고 “우뜨”는 위로, 위로는 일어남을 뜻하고 “파다”는 가다의 뜻입니다. 

즉 육육법연기의 발생양식은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연생이란 뜻입니다.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내가 눈을 통해서 부처님을 봅니다. 눈을 통하여 그 대상을 보면 대상에 대한 어떤 식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다른 것이 뒤이어 일어납니다. 뒤에 오는 행위가 이어서 일어날려고 하며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에 의해서 그 다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하여 일어난다. 기대어 일어난 다는 것은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앞에 것이 없으면 뒤에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뜻은 앞에 것에 의지하여 뒤에 것이 따라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보니 연기라는 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육법을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통해서 이제까지 공부했던 부분들에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본이 되는 안이비설신의가 있습니다. 이 6근에 대한 대상이 항상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눈이 있어야만 대구불교방송국의 건물이 보입니다. 지금 강의를 듣는 것은 귀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귀가 있어야만 들을 수가 있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코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맛는 것만 가능합니다. 짭다 맵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가 있어 일어납니다. 누가 손을 만졌을 때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것은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총체적으로 대상에 대한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6근에 대한 대상은 6경으로 이루어집니다. 6경은 색성향미촉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6근과 6경이 합해서 12처가 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12처니라‘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때 12처로 표현합니다. 6근과 6경이 합해지니까 6식이 생겼지요. 눈으로 인해서 대상을 보는 작용인 안식이 생기고 소리를 듣는 것으로 인해서 이식이 생기고 안이비설신의까지 6식이 생겼습니다. 근본적인 12처를 바탕으로 6식이 생겼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이 몸뚱이는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무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없습니다. 대구불교방송국도 몇 백 년이 지나면 다 허물어집니다.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몇 백 년, 몇 천 년, 몇 만 년이 지나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허물어져 버립니다. 우리 몸뚱이도 백 년을 쓰고 나면 허물어져 버립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고 변해가는 끝은 멸이며 죽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6근을 무상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마지막은 멸로 끝나고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라고 하였습니다. 왜 “고”냐고 했을 때 고인 이유는 마지막 종착역이 멸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6근은 무상이고 고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변해가는 끝은 멸하므로 무상이며 고라고 했습니다. 나라고 주장할 만한 주재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6근은 무아이기도 합니다. 나라고 주장할 만한 독립된 주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나라고 주장하는 독립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6근은 기본적으로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상은 모든 변화의 끝은 죽음이고 멸이기 때문에 고라고 했습니다. 왜 고냐 했을 때 무상한 것의 종착역은 멸이고 죽음입니다. 그래서 무상이고 고입니다. 상일성과 주재성이 없어 항상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없으며 나라고 주장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에 무상이고, 무아라고 합니다.


육육법 연기의 전개

6근은 기본적으로 삼법인의 속성과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6경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인 6경도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6근의 대상인 6경도 똑같이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집니다. 일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몸뚱이가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듯이 대상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6경도 결국은 무상입니다. 대구불교방송국도 동화사도  어떤 것도 항상 일정한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건물을 지었다 할 때 천 년이 지나고 나면 허물어져 버립니다. 목조건물을 예를 들어 1000년이 지나면 보물이 되고 국보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귀하게 되어서 잘 보존 합니다. 그러나 만 년이 지나고 나면 다 허물어져 버리고 없습니다. 허물어지고 난 끝이 멸이기 때문에 고입니다. 그러므로 6경도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입니다. 


술과 식초의 관계 

6근과 6경이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삼법인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6경은 필연적인 반응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무상의 기본인 속성은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놔두면 식초가 됩니다. A술이 B식초로 변했습니다. 술을 놔두었더니 시간이 지나서 보니 식초가 되었다. 우리가 볼 때 A인 술이 B인 식초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A는 없어져도 B는 남아있습니다. 

처음에는 술이었다가 뒤에 식초가 되었다면 앞에 것은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식초입니다. 존재는 인식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술이 발효되어서 식초가 되었습니다. 변화된 상태에서 인식하는 것은 식초밖에 없습니다. 변화의 끝인 식초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B는 존재하지만 A는 없습니다. 여기서 A는 없어졌으므로 A는 멸했다고 합니다. 없던 B는 어떤 시간을 기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볼 때 A는 멸했고 B는 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배웠던 연기로써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합니다. 이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A가 B로 변했습니다. 즉 술이 식초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변화 속에서 술은 없어져 버리고 식초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6근과 6경이 부딪쳐서 생긴 6식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입니다. 우리가 인식할 것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는 다는 것을 지금 받아들인다면 즉 내일 죽는다면 오늘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죽음을 인정한다면 현재의 삶이 훨씬 더 진지하고 긍정적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의 내가 다르고 자랄 때 내가 다르고 나이 들어서 내가 다르듯이 성장함에 따라서 내 모습이 변해갑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통일체이지만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변화의 기본적인 속성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6근과 6경에서 보았듯이 무상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입니다. 이것이 부딛칠 때 6식이 생기고 이 식을 의지가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식’의 기본적인 속성이 바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식입니다.

만약 TV 사극에 나오는 정도전을 볼 때 보는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인식합니까?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산스크리스트어로 식은 뷔즌야나로 표현합니다. ‘즌야’는 알다. ‘뷔’는 다르게 알다 입니다. 다르게 아는 것이 식입니다. 인식의 식의 기본적인 속성은 전부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부딪칠 때 항상 똑같이 보는 것은 없고 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식의 기본적인 속성은 전부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가 B로 변하고 A와 B가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이 식입니다. 순간순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어떤 상황이 부딪쳤을 때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식의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삼사 화합_6근과 6경과 6식 

6식을 바탕으로 한 육육법연기는 연하여 일어나므로 6식은 6촉으로 연하여 일어납니다. 촉은 일반적으로 육육법연기에서 설명한 탐진치로 인하여 생깁니다. 이제 다르게 인식하는 6식까지 왔습니다. 대상을 인식하면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6근을 통해서 대상을 판단합니다. 대상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6식입니다. 이 6식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촉입니다. 판단이 끝난 다음에  행동인 촉이 일어납니다. 6촉은 눈으로 부딪칠 때, 소리로 부딪칠 때, 냄새로 부딪칠 때 맛으로 부딪칠 때, 몸으로 부딪칠 때, 뜻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6촉에서 충돌, 부딪침, 접촉 등을 만들어냅니다. 촉을 보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촉에는 안과 색이 연하여 안식이 발생하고 또 안과 색과 식의 화합으로 촉이 됩니다. 이 삼사 화합이 이루어져 촉이 되고 또 6근과 6경과 6식이 부딪쳐 촉이 이루어집니다. 


촉은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스파사 즉 충돌입니다.  부딪치는 것입니다. 6근· 6경· 6식이 결합하여 부딪쳐 촉이 이루어집니다. A에서 B로 변했을 때 변하기 전 A가 나 자신입니까? 변하고 난 후의 B가 나입니까?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충돌이 일어난 후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여기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하는 기본의 바탕은 충돌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의식의 저변에는 분명히 충돌이 일어나기 전을 나라고 했는데, 이 충돌이 일어난 후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촉에서 변화를 바탕으로 갈등이 생깁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충돌하기 전과 충돌하고 난 후의 가장 극한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충돌 전의 나의 가장 극한 상황은 분명히 살아있었는데 충돌 후의 나는 죽었단 말입니다. 죽음 전의 상황과 죽음 후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많은 상황 중에 가장 극한 상황은 충돌 전후입니다. 충돌 전에는 살아있었으며 충돌 후에는 죽어버렸습니다. 이 문제에서 분명히 충돌전의 나를 인식하면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어제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충돌이 일어난 후 오늘의 상황도 생각해 봅니다. 충돌전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충돌전의 어제는 오늘 생각해 보면 어제의 일입니다. 어제 일어난 일은 대부분 기억합니다. 나는 어제가 있었던 것을 인식합니다. 충돌 전후를 생각해 보니 충돌 전이 어제였다면 충돌 후는 오늘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을 생각해보니 아! 어제는 있었다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이 하루하루가 조금씩 흘러가서 바로 죽음 직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죽음 직전은 살아있을 때의 어제이고 죽고 난 다음이 오늘입니다. 


상태의 변화인 촉에 대한 이해 

충돌 후의 나는 죽었고 충돌 전의 나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충돌 후 내가 충돌 전을 인식한다면 분명히 내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분명히 어제를 인식했었는데 만약 마지막 충돌의 극한 상황인 죽음을 사이에 두고 생각해보면 충돌 전의 어제가 있었다고 인식한다면 전생이 있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내가 분명히 살아있는 삶을 안다면 그것은 전생입니다. 충돌 전의 이 어마어마한 극한 상황에 의해서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급격한 충돌 상황에 의해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는 기억합니다. 10년 전도 기억합니다. 이 몸뚱이를 받아서 살았던 오래 전은 어느 정도 기억합니다. 충돌의 극한 상황이었던 죽음에서 생각해 보세요. 죽음을 경계로 해서 그 전에 있었던 것을 만약 기억한다면 전생을 기억하는 것 입니다. 이 충돌의 문제는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까지 가게 됩니다. 


전생 기억의 사례 

간혹 전생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티븐슨 박사는 1975년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전생을 기억하는 1300명의 사례를 모았습니다. 우리는 본래 전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인 스티븐슨 박사는 1300명의 사례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스마일이라는 아이는 태어난 마을에서 3~4살이 될 때까지 마을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 자꾸만 자기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겁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서 자기집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태어나서 집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도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까지 대면서 우깁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알아보니 약 50리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 실제적인 지명의 마을이 존재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그 마을로 갑니다. 그 마을에 있는 어떤 큰 집에 들어가서 자기집이라고 합니다. 기록에 보면 이스마일은 전생의 빚을 이생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전생에 빌려준 돈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바꾸기 전에 그 마을에 사는 박씨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박씨는 이 사람이 죽어버리자 돈을 갚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찾아와서 어느 때 자기한테서 돈을 빌려 가지 않았느냐 하면서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왜 돈을 갚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전생에 빌려준 돈을 이스마일은 받아 냅니다. 이런 사례를 볼 때 전생이 있다 할 것인지 없다 할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림포체신앙 

티벳에서는 유명한 림포체 신앙이 있습니다. 뛰어난 수도승들은 자기가 죽었을 때 다시 환생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것이 림포체 신앙입니다. 현재 티벳의 법왕인 달라이 라마도 이 림포체 중에 한사람입니다. 달라이라마 같은 림포체가 10명 정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달라이라마가 16세이니까 죽고 죽기를 16번 하여 환생한다고 합니다. 1984년에 예시 림포체라는 분은 미국LA에서 열반하였는데 이듬해 스페인에서 오셀히타라는 아이로 환생을 합니다. 아이는 2살이 되던 해에 다람살라로 데려가서 키워지는데 이때 달라이 라마는 “이 아이가 예시림포체의 환생이라는 것은 96%정도 분명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1985년에 태어났으니 현재 31살로 림포체로 티벳에서 교육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달라이라마가 돌아가시면 법왕이 될 사람입니다.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사진을 보면 예시 림포체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습니다. 당시 그 사진이 신문에 실렸었는데 아이를 임신하였던 엄마도 예시를 닮았다고 했으며, 아이는 다람살라로 데려와서 키워졌습니다.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자신만 아는 어떤 비밀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경전을 혼자만 아는 곳에 숨겨 놓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숨겨 두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즉 환생하여 그 보물을 찾아냅니다. 전생에 자신이 숨겨둔 것을 다음 생에 태어나서 찾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림포체가 됩니다. 


육육법연기 

 광주 비엔나레에서 북한의 천재화가인 네 살 된 오은별의 그림을 전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그림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대체 전생이 없다면 그림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림을 어떻게 그렸겠습니까?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해서 전생이 없는 것일까요? 분명히 전생이 있는데 우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바로 6촉의 가장  극한 상황인 죽음 즉 죽음과 삶의 경계가 6촉의 극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촉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이 강하게 부딪쳐서 일어나는 세계는 바로 어제 일어난 것과 10년 전의 것은 기억하지만 극한 상황인 죽음. 다시 태어나기 전의 상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촉의 극한상황에서 나의 모든 의식이 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기억을 못합니다. 식이 맑은 사람은 잘 기억합니다. 식이 맑은 사람은 그 식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6촉은 기본적으로 부딪침입니다. 감정의 부딪침, 육신의 부딪침, 모든 것의 부딪침에 의해서 촉이 일어나고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  6수입니다. 부딪친 다음에 느낌이 옵니다. 그 느낌은 우리에게 상을 만들어 애욕으로 저장됩니다. 항상 촉은 느낌을 동반합니다. 이 느낌에 의해서 촉에 대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합니다. 어떤 촉이든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좋은 촉은 지속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나쁜 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로 6애입니다. 이 6애는 갈애로 느낌에 의해서 항상 좋은 감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뚱이를, 의식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애욕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됩니다. 애욕이 어떻게 생깁니까? 바로 6근으로 부터 시작한 갈애는 다른 것이 아니라 3개의 속성인 탐진치입니다. 

그런데 육육법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앞에 것에 연하여 뒤에 것이 일어납니다. 역으로 앞에 것이 없으면 연하여 뒤에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앞에 것에 연하여 뒤에 것이 따라서 일어납니다. 6촉에 연하여 6수가 생깁니다. 6수가 일어나면 6수에 연하여 6애가 일어납니다. 느낌에 의해서 6애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느낌에는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고 좋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갈애가 생깁니다. 애욕이 생깁니다. 애욕의 덩어리가 ‘진’이고 치이고 탐이니라. 탐진치가 애욕의 덩어리입니다. 물질적인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로 하여금 탐욕을 만들어냅니다. 감정적인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진애 즉 화내는 마음인 진심을 만들어 냅니다. 두 개를 합하여 모르는 것이 치심을 만들어 냅니다. 

앞에 것에 연하여 일어나는 육육법연기는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 육애까지 입니다. 6경의 기본적인 속성인 무상이 6수에 의해서 변했는데 이 변화에서 6식이 6촉으로 변화합니다. 촉은 앞의 것이 낫느냐 뒤의 것이 낫느냐 하는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갈등의 끝은 삶과 죽음의 가장 극한 충돌입니다. 이 충돌의 끝인 갈등의 가장 복잡한 형태에서 앞의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 깨트려버려요. 그래서 이 몸을 받아서 다시 태어났을 때 대부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극한 상황의 충돌 때문입니다. 거꾸로 전생을 기억하려면 6촉에서 식이 맑으면 됩니다. 식이 맑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제를 잘 기억하고 10년 전을 잘 기억하고 어릴 때를 잘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극한 상황인 태어나기 전 모태속의 나와 그것을 넘어선 것까지 기억해 나가면 바로 전생이 기억됩니다. 혹 최면을 걸어서 전생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상, 시간의 속성은 일단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바로 무상입니다. 무상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입니다. 식은 끊임없는 변화를 바탕으로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인식하는 식에서 충돌이 일어났는데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갈애가 생겨납니다. 부딪침 다음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에 의해서 갈애가 생깁니다. 육육법 연기의 흐름에 의해서 무상을 인식하고 나면 갈애는 자연히 소멸하게 되겠지요. 


육육법 연기는 무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무상을 인식하면 갈애가 소멸되고 이것이 바르게 변하게 됩니다. 갈애가 변해버리면 계정혜가 되겠지요. 갈애가 좋은 쪽으로 제대로 변해버리면 탐진치가 계가 되고 정이 되고 혜가 됩니다. 계가 따로 있고 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탐을 바르게 잘 써면 바로 계가 됩니다. 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을 잘 써고 잘 절제하면 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캄캄한 방에 촛불을 가지고 와서 불을 밝히면 어둠이 없어져 버립니다. 바로 이 원리와 똑같습니다. 육육법연기의 속성과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시간적 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속성과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육육법 연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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