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강 오온연기의 발생양식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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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15강 오온연기의 발생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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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801회 작성일 21-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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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은 산스크리트어로 ‘루파’ 였습니다. 어떤 것이 A에서 B상태로 변했을 때 B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을 집착 혹은 아집이라 했습니다. 이 아집이 바로 루파입니다. 즉 색입니다. 색수상행식에서 색은 우리의 육신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볼 때 아집이 색입니다. A라는 상태에서 B가 되었을 때 이 B가 자기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집입니다. 그런데 B라는 것은 변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합니다. 변해가고 바뀌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연기라 했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연기였습니다. 여기서 B라는 상태를 연기로 인식하는 것은 정견입니다. 바뀌고 변화되는 현상을 바뀌고 변화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견이고, 바뀌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고집하여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집입니다. 무상과 무아를 바로 보는 것은 정견이 되고 변해서는 안된다 하는 자기상태를 고집하는 것은 아집이 됩니다. 여기서 A에서 B로 변했을 때 B로 된 이 상태가 변하지 않아야 된다하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아집이고 B도 변할 수 있고 다른 것도 바뀐다고 바로 이해하는 것이 정견입니다. 팔정도를 배울 때 정견이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바르게 보는 것이 바로 무아와 무상을 보는 것입니다. 육육법 연기는 시간에 대한 것이고 오온연기는 공간에 대한 연기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 문제에서 왜 태어났으며 이 몸뚱이가 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생겨났고 왜 죽어야 하는가에 답은 오온입니다. 오온 때문에 이 몸뚱이가 생겨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오온연기의 발생양식 

육육법연기와 오온연기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을 보면 육육법연기는 연고관계가 성립한다고 했습니다. 앞에 사건이 전제되어야 만이 뒤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육육법연기입니다. 오온연기의 기본적인 발생 양식은 삼우드아야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온을 설명할 때 삼우드아야 라고 설명했습니다. 오온의 기본 발생양식인 삼우드아야는 함께 올라감, 또는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집멸도의 집입니다. 집이라는 것이 왜 발생하는지, 발생 원인을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집이 삼우드아야에서는 함께 올라갑니다. 육육법연기에서는 함께 못 올라갔습니다. 앞에 것과 뒤에 것이 있으면 앞에 것에 의해서 뒤에 것이 생기고 또 항상 앞에 것은 없어지고 마지막 상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온연기는 함께 올라갑니다. 색수상행식이 육육법연기에서는 육근에서 출발해서 마지막 남아 있는 것은 육애였습니다. 앞에 것은 과정으로 거치고 마지막에는 육애만 남지만 오온에서는 색수상행식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만 있다면 형체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한꺼번에 다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몸뚱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연기는 이 몸뚱이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원인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우드아야에서 삼은 함께, 우드아야는 올라감, 오온의 발생양식은 'A법과 B법이 함께 올라가지만 기대지는 않는다. 서로 평등하게 올라간다.'입니다.  A법과 B법이 색과 수와 상과 행과 식이 각자 따로따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적 연기에는 순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공간적 연기에는 예를 들어서 김불자님이 있다고 뒤에 이불자님이 없는 것은 아니죠?  김과 이는 관계가 없습니다. 앞에 김불자님이 있어도 뒤에 이불자님이 있듯이 아무 상관없이 이 공간에는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공간연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전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전부 한꺼번에 올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은 한꺼번에 올라옵니다. 여기서 이해하기 쉽게 팔식에서 오온의 작용을 색수상행식으로 표현하고, 칠식과 육식에서의 오온의 작용을 색_물질작용, 수_감수작용, 상_표상작용, 행_행위작용, 식_분별작용으로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색(色), Rupa (그림)

색은 루파Rupa라고 했습니다. A에서 B상태로 변했을 때 변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연기이며 정견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변하지 않아야 된다고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을 아집이라고 했습니다. 아집의 상태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색, 루파입니다.

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고 변하지 못하도록,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 바로 아집입니다. 이 몸뚱이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고 변하지 않는다고, 변하지 못하도록 집착하는 것이 색으로 루파입니다. 기본적으로 A상태에서 B상태로 변했을 때 아집이 생깁니다. 이 아집의 기본적인 속성은  불안입니다. 변해야 되는 데 변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속성으로 생기는 것이 불안입니다. 어떤 상태가 A에서 B에서 C에서 D에서 E에서 F에서 K에서 G등에서 여러 가지 상태로 변화 됩니다. 우주에는 수만 가지 상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A에서 B상태로 되고 난 다음 B는 자기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딱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 변합니다. 젊은이는 늙기도 하고 있던 것이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주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주위는 모두 변해가는데 자기는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했지만 자기도 변할 지 어떻지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변하는 것을 수라고 하며 뒤바뀌려는 느낌인 감수작용이 바로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베다로 표현합니다. 위와 아래가 뒤바뀌려는 느낌이 바로 수이고 A와 B의 관계 속에서, C와 D의 관계 속에서 자기는 안 바뀌려고 고집하고 있는데 옆에서 바뀌니까 자기도 바뀌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서 오는 불안, 느낌이 바로 수입니다. 


수(受), vedana 

수라는 것은 뒤바뀌려는 느낌입니다. 일반적으로 색수상행식 할 때 수는 감수작용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수에서 불안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상입니다. 상은 산스크리트어로 상즌냐라고 표현합니다. 상즌냐의 뜻은 합쳐서 판단한다, 혹은 하나로 판단한다 입니다. 합쳐서 판단하고 하나로 판단하니까 자신 B는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고집을 합니다. 그러나 옆에 보니 D가 C로 바뀌려고 합니다.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데 옆이 바뀌니까 불안한 마음이 잠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상태에는 불안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 B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로 옆이 안바뀐다고 생각하는 방법은 옆에 있는 C를 자신과 같이 합쳐 버리는 것입니다. 합쳐서 판단하면 자기는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고 옆에 있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합니다. 

결국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가화입니다. 정신적인 자기화는 자신의 업이 맞다고 생각하고 계속 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우리의

삶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기화는 자신의 업만큼 육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업대로 자신의 얼굴과 형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뻐지려고 하면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면 순간은 예쁘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업대로 더 망가지게 됩니다. 업이 맑아지고 선해지면 예쁘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受) --- 뒤 바뀌려는 느낌, 감수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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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위)와 A(아래)의 관계,

그리고 D(아래)와 C(위)의 관계에서 D와 C의 위치가 바뀐다면? 

---  B가 볼 때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변한다

----> 불안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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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EFGH는 변한다 

변하는 CEG를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신 

B와 하나가 되게 한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 자기화 

---- 정신적으로 복제 

---- 육체 즉 세포의 복제, 분열  

=== 자신의 업만큼 육신을 만들어 낸다




상(想), samjna

상은 표상작용으로 이미지를 만듭니다. 상이라고 하면서도 뒤바뀌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로 합쳐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C가 D로 바뀌고 D가 C로 바뀌는 데도 바뀌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여 합쳐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안바뀐다고 고집했으니까 합쳐버리면 안 바뀌는 것이 됩니다. 옆에 것을 자신과 합쳐 안 바뀐다고 고집하는 상태로 존속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상이라는 것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즌냐’ 는 합쳐서 판단하다, 하나로 판단한다 입니다. 옆에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상입니다. 색은 아집으로부터 출발해서 뒤바뀌려고 하는 옆의 상태를 보고 불안함이 일어나는 것이 수이고 그 불안한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상은 뒤바뀌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한테 합쳐버립니다. 합쳐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입니다. 

옆에서 뒤바뀌려고 하는 것을 뒤바뀌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과 합쳐 하나로 만들어버리면 뒤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이고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행입니다. 하나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킨 뒤에 ‘실제 행동을 일으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 바로 행입니다.  


행(行), samskara

자신과 합쳐 하나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킨 뒤에 ‘실제 행동을 일으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 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합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상이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행입니다. 옆에 있는 것과 내가 합치면 원래 나와 합쳐진 나는 같지 않습니다. 내게 옆에 있는 것을 붙혀버렸습니다. 원래 나는 B와 C가 떨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이것을 합쳐버리면 떨어져 있던 B와 붙어버린 상태는 분명 다른 상태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식입니다. 상즌냐는 하나로 합치려고 판단하는 뜻으로 하나로 판단하는 것이 상이고 행이라는 것은 상스크리타로 이미 하나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로 합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합쳐버리는 상태를 행이라 합니다. 식은 변화의 전후법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으로 뷔즌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떤 생에서든지 내가 경험해 본 것만이 생각에 떠 올릴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떠 올릴 수 있는지, 어떨까요. 

행의 작용에 의해서 경험 1과 경험 2를 합쳐서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축생은 불가능합니다. 인간만이 행의 능력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생에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도 꿈을 꿀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도 것입니다. 


식(識), Vijnana

뷔는 다르게, 즌야는 알다로, 다르게 아는 것이 식입니다. 변화의 전후법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존재했던 B하고 합쳐버린 상태를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식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로 보더라도 전부 다르게 인식합니다. 색수상행식에 의해서 식은 항상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은 오온입니다. 식에서 행을 합쳐 다르게 인식하여 또 다르게 인식된 나가 존재하고 이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옆에 것에 계속 붙힙니다. 옆에 것을 자기것과 똑같다고 인식하고 계속 자기한테 가져다 붙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만큼 가져다 붙힙니다. 이것이 완성된 상태를 오취온이라 했습니다. 


색수상행식을 끊임없이 되풀이 해서 자신의 업만큼 붙혀 형태를 만드는 것을 오취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온에 대한 본질적인 설명입니다. 거시적인 오온은 이 몸뚱이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해입니다. 6근과 6경인 12처를 인식하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 근본 몸뚱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오온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의 오온은 무엇인가? 색수상행식에서 아집의 덩어리인 이 몸뚱이가 만들어진 상태를 색 즉 물질작용이라 합니다. 


물질작용

인간은 명색이라 할 때 색의 육신과 명의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 색수상행식의 작용만큼 육신이 만들어지고 그 육신 안에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현상적으로 만들어진 육신에 작용하는 것이 물질작용입니다. 


감수작용

몸뚱이는 명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몸뚱이는 색이고, 이 몸뚱이 안에 살고 있는 정신은 명입니다. 색은 육신이고 명은 정신입니다. 부처님 상을 보면 나에게 감수작용이 생깁니다. 부처님 상을 보면서 나에게 어떤 느낌이 오는가? 그 느낌 자체가 감수작용입니다. 어떤 대상을 봄으로써 몸뚱이 내부에 있는 정신이 인식하는 첫 번째 작용이 감수작용입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치면 느낌, 감수작용이 있고 그 감수작용을 통해서 형상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표상작용

내 속에서 형상으로 만들어지면 표상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 결합생성작용인 행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에 사과를 가져다 놓았을 때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 혹은 미소짓는 사람,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 등등 똑같은 사과를 보더라도 그 반응은 모두 틀립니다. 

어떤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을 보고 내가 뭔가를 느낍니다. 느낀 대로 형상이 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사과 하면 머릿속에 사과의 형상이 다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 번 보고, 맛 보고, 인식한 것은 전부 다 형상화 되어 아뢰아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맛이 나는 사과를 먹었던 사람이면 사과를 보는 순간 찡그립니다. 그렇지만 매우 달콤한 사과를 먹었던 사람은 사과를 생각하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이와같이 과거에 경험했던 것은 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이 상으로 축적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과의 형상, 감의 형상, 배의 형상, 부처님의 형상, 친구의 형상 둥둥 내 속에 상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앞에 저장되어 있는 그 사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이 사과하고 결부되어 일어나는 것이 결합생성작용입니다. 


행위작용

결합생성작용이 일어나면 그 다음 판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과를 먹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옛날에 먹었던 달콤한 사과를 생각했는 사람일 것이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은 옛날에 벌레먹은 사과를 봐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해서 이 몸뚱이가 만들어졌는가를 설명하는 것도  오온, 색수상행식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색수상행식이고 정신작용도 색수상행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사과를 본 다음 감수작용과 표상행식을 거침으로써 끊임없이 되풀이됩니다. 어떤 대상이나 경계든지 보면 감수작용이 먼저 생기고 그 감수작용을 통해서 형상화되고 그 다음 행은 앞에 있었던 많은 것과 주위에 있는 많은 것과 결합해서 새로운 판단이 생깁니다. 


분별작용

새로운 인식이 생깁니다. 식에 결부됨으로써 판단이 생깁니다. 먹을까 말까, 안 먹는다 먹는다, 버린다 모은다 하는 마지막 분별력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은 우리 몸뚱이가 생기기 전과 생긴 후까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다 보면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유위법과 무위법입니다. 또 불교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중의 하나가 유위법과 무위법입니다.


유위법과 무위법 

부처님께서는 존재, 이 현상 전체를 유위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유위법이기 때문에 무상했습니다. 무상했기 때문에 고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유위법은 괴롭다. 바로 고라고 했습니다. 고의 원어는 듀카입니다. 듀카의 뜻을 풀이해보면 듀는 좋지 않다, 카는 바퀴통으로, 좋지 않은 바퀴통입니다.  

즉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고입니다. 잘 돌아가는 것, 제대로 되는 것은 고가 아닙니다. 잘못된 바퀴통이 돌아가지 않고 삐걱거리는 것이 고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편한 것이 바로 고입니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는 낙입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내 상태가 편안하지 않은 것, 좋지 않은 것은 고가 되는 것이고, 내마음 상태가 편안하고 좋으면 낙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하고 있는 현상계 전부를 유위법이라고 했습니다. 유위법은 생멸이 있기 때문에 생멸법이고 또 인과가 반드시 따르는 인과법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생하고 멸하는 인연소생법입니다. 무위법은 유위법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서는 현상적으로 유위법이라 했으니까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무위법이 되겠습니다. 유위라는 것은 행함이 있는 법입니다. 만들어진 법, 조작된 법으로 인과는 내가 삶으로써, 그 행위에 의해 다음에 어떤 결과를 과보로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있는 모든 법은 유위법이 됩니다. 그러나 무위법은 행함이 없는 법입니다. 현상계를 유위법이라 한다면 무위법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본질적인 본체계를 무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위법을 설명할 때 현상계의 제법과 같이 인연에 의하여 조작되지 않고 그 자체가 본래 상주하여 불생불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상의 세계, 이상의 세계입니다. 실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라면 부처의 눈, 깨치고 난 다음 이 세상을 보면 전부 무위법이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는 유위법이고 깨친 눈으로 이 세계를 보면 무위법이 됩니다. 여기에서 더 이해해야 할 것은 무위법에서는 무루법이라 하고 유위법은 유루법이라 이야기합니다. 


무루법과 유루법 

유루는 이 세상에 지은 업이 다음생에 과보로 받는 것입니다. 인과가 있는 이 생에서 지은 모든 과보를 다음 생에 받는 유루법은 유위법입니다. 무루법은 무위법으로  부처는 견성하고 나면 전부 무루법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업에 의해 몸을 받습니다. 부처나 보살은 이 세상에 나올 때 업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에 의해서 나오게 됩니다. 차이점은 중생은 이 몸뚱이를 받아 태어나는 것은 업에 의한 것이고 보살과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에 의해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고집멸도에서 일반적으로 집은 고가 생기는 원인이었고 고는 과제의 제시, 나타난 현상입니다. 고제와 집제는 바로 유루법입니다. 그러면 무루법은 멸이 된 상태입니다. 무루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유루무루법과 유위무루법으로 나뉩니다. 고제, 집제, 멸제, 도제에 관계없는 비제가 있습니다. 은밀하게 유위무루법은 비제만이 해당됩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유위법, 무위법, 유루법, 무루법까지 포함하면 불교의 까다로운 용어를 다 배운 것입니다. 


심의식 

불교의 용어 가운데 가장 혼돈되기 쉽고 어려운 것이 심,의,식 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처음 불교를 배울 때는 마음의 종교이기 보다는 의에 대한 작용이었습니다. 불교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의의 작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종교가 의이며 식인 것입니다. 심의식이 어떤 순서로 작용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난 모든 생각의 근거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주어진 현상에 대하여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역으로 모든 잡다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마음에서 일으킬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이라면 의는 무엇이었습니까? 의는 의지로 어느 하나를 택하고 나면 그 방향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능력이 의였습니다. 그 잡다한 생각 속에서 내가 도를 닦아야겠다는 한 생각을 일으켜 그 쪽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의입니다. 우리를 부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에 의해서 부처가 됩니다. 의에 의해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느 하나를 택하고 나면 그 생각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의인데 이 현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무상한 것은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아무리 한 방향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써고 노력해도 결국은 변하게 됩니다. 변하게 되는 것을 아! 변했구나 달라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식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심의식을 되풀이합니다. 일반적인 방향성 없는 내가 있고, 무엇인가를 해야되겠다는 의지의 내가 있고 그 의지를 행하고 나면 생각인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심의식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의 몸뚱이가 생기고 난 다음의 거시적인 현상만 설명하면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감수작용, 표상작용, 결합작용 , 분별작용으로 색수상행식을 설명하면 본질적인 뜻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제대로 알면 본질적인 다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근과 6경이 생기기 전의 나는 업 덩어리가 계속 붙혀져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나라는 아집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색수상행식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겁니다. 색수상행식은 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고 또 나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나를 굴리는 것도 바로 색수상행식입니다. 색수상행식은 나를 만드는 원리이고, 내 삶을 평생 가꾸어가는 원천입니다.  


연기에 대한 원자적 이해 

부처님 당시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는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시간적연기라는 말을 쓰고 공간적연기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이해, 즉 순서가 있는 것으로 앞에 것이 존재하고 난 다음 뒤에 것이 생기는 연기가 하나 있었고, 순서와 상관없이 그냥 같이 존재하는 것. 나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한 게 아니라 공간속에 뭔가 덩어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간속에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온입니다. 지금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시간연기이고 하나는 공간연기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해해야만 12연기를 이해하게 됩니다. 12연기속에는 과거,현재,미래 3세도 존재하고 죄악도 있고 오온연기도 있고 육육법연기도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12연기가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는 존재라는 근본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분별로 다 이해했습니다. 총괄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12연기입니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은 무엇인가?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면서 불안이 생깁니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편안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편해지는 것이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주에 있는 입자들을 쪼개보니 분자가 있고 분자안에 원자가 있고 원자 중심에는 핵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더 쪼개보니 이제 쿼크까지 들어갔습니다. 


원자 중심에 핵이 있고 핵주변에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 주변에 전자는 두 개가 돌 수도 있고, 세 개 돌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산소도 되고 수소도 되고, 어떤 경우엔 금도 되고 납도 되는 물질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우리 몸도 원자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도 전자가 돌고 있고 위의 궤도에도 전자가 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위의 궤도를 돌고 있는 전자가 에너지를 더 많이 가지고 있겠습니까? 더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속성, 안정 

어떤 물체를 어느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일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10Kg 짜리 돌을 들고 1 m를 옮겼다면 10Kg X 1 m 거리를 하면 내가 한 일의 량이 나옵니다.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열 난다 할 때 그 열도 똑같은 것입니다.  일도 에너지도 열도 다 똑같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말할 때 위치에너지도 있고, 어떤 물질이 움직일 때는 운동에너지가 됩니다. 예를 들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위치에너지의 차이에 의해서 떨어질 때의 힘을 전기에너지로 바꾼 것이 수력발전소입니다. 높은 데 있는 것은 낮은 데 있는 것보다 에너지가 더 큽니다. 에너지가 크면 더 불안합니다. 불안한 것은 기본적으로 안정해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주에 있는 기본적인 입자들도 가능하면 안정해지려고 합니다. 안정해지려고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버리면 안정해집니다. 근본적으로 무상과 무아를 인식하고 나면 쓸데없이 내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것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져버리면 나는 평안하고 안정해집니다. 자꾸 내것이라고 가지고 있으니까 에너지가 커져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무엇이 커집니까? 탐욕과 진심과 치심이 커지니까 자꾸자꾸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나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견성이라고 합니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속성은 안전해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안전해지려는 것입니다. 안전해지려면 탐진치를 없애야 합니다. 높은 곳의 물체는 밑에 가져다 놓으면 안전합니다. 탐진치를 버리면 안정해져 바로 부처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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