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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16강 12연기_시공간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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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514회 작성일 21-07-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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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으며, 

에드워드 월슨,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는 < 컨실리언스consilience, 통섭>에서 “나는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습니다. 


연기론은 부처님께서 설명한 존재론입니다. 

12연기는 연기의 시간적 측면과 공간적인 측면을 통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12연기를 배우고 나면 연기에 대한 모든 이해는 끝이 납니다. 그 다음은 본인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연기의 거시적인 현상은 인과응보이며 인과응보에 대한 원리를 자세하게 알아보는 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그래서 연기에 의해 굴러가는 삼라만상이 현상론으로 나타나는 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아난과 12연기 

잡아함경 대연 방편경에 부처님이 어느 때 두류사국 검마사마을에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 아난이 연기에 대해서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너무나 기이하고 특별하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가지 인연법의 이치가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구나. 내가 마음속으로 관찰해 보니 마치 눈앞에 있는 일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깊은 이치가 있다 하는가’

12연기를 보니 별로 어려운 것 같지 않고 쉽게 이해될 것 같은데 부처님께서 왜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예배를 하고 한쪽에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저는 조금 전에 연기법의 위치를 관찰해 보니 마치 눈앞에 있는 것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의 이치가 깊다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합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그런 말 하지마라’ 부처님께서 일반적으로 법을 설하실 때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그런 말 하지마라 이렇게 삼중어로 말씀을 잘 하십니다. 모든 경전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기본 구조가 위와 같습니다.

 ‘스님께서 법을 설한다‘ 할 때 법은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법이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치를 제대로 연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법을 경전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고, 자기가 깨친 바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고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라는 것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연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지 않으면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법문을 하더라도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그런 말 하지마라 했습니다. 우리가 청법할 때 절 세 번 합니다. 절을 세 번 하는 이유를 보면 부처님께서는 한 번 청하면 거절합니다. 또 한 번 청하면 거절합니다. 최소한 세 번은 청해야 비로소 법을 설하십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법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할 때만 법을 설해줍니다.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는 대충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그 법을 꼭 들어야 된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세 번을 청합니다.

세 번 법을 청하면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법을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고 법을 설하십니다. 법을 청할 때 삼 배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 합니다.

묘법연화경에서도 경을 설하시기를 세 번 청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을 청하는 연유입니다. 

12연기 이치는 너무나 깊어 이해가 어렵습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10대 제자로서 부처님 법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까지도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아난아 12연기는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12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적인 관념,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니까 조금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 옛날에는 시간, 공간 개념으로 설명했겠습니까?

2600년 전에는 지금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설명합니다. ‘내 이제 너에게 이야기할 것이니 잘 들어라. 12연기는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를 말하며 사성제의 고집성제로써 고의 원인을 말한다.’


12연기의 구성 

12연기의 구성을 살펴보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입니다.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는 이 몸을 만들어서 죽고 태어나는 과정은 바로 12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얘기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죽어야만 하느냐의 이 문제로 출가했습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는 죽어야만 하느냐의 문제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 몸뚱이가 만들어졌는가의 문제도 포함된 것입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서 제일 첫 번째 단계는 무엇입니까?

모든 법은 생멸합니다. 생멸한다고 하는 것은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하는 것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생했기 때문에 멸한다는 것입니다. 

왜 죽어야만 하느냐의 1차적인 답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색한 기본적인 방법은 원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의 원인을 찾아가는 것은 중요한 공부방법입니다.

우리가 도를 이루고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모든 것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바로 사성제의 고집성제로 고의 원인인 집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12연기를 관찰해 보면 결국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집성제에서 고는 과제의 제시였고 집은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이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왜 그 문제가 일어났는지의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 집성제입니다. 12연기가 바로 집성제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설명하기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늙고 죽음이 있느냐 하고 물으면 생(生),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의 인연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고 말해라.

어떤 인연으로 태어남이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 이 몸을 받아 태어나느냐고 물으면 유(有), 우리가 존재하는 것. 이 유의 인연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말하라.

어떤 인연으로 유, 존재가 있느냐고 물으면 취. 바로 취득하는 것. 취의 인연으로 유가 있다고 대답하라‘

이와 같이 취는 애를 인연으로, 촉은 육입을, 육입은 명색을, 명색은 식을, 식은 행을, 행은 무명을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2연기에서 무명까지 갔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고 생멸하고 있는 근본 원인과 이치를 밝힌 것이 12연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난처럼 뛰어난 제자에게도 12연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아난은 말로 설명해도 알 것 같은데 부처님은 왜 어렵다고 하는가? 이해하고 난 뒤에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체득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차제성과 실상

육육법 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시간의 관점에서 연기를 이해할 것 같으면 항상 앞에 선행하는 것이 있어야 뒤에 따라오는 것이 12연기입니다.

오온 연기는 앞의 것에 상관없이 색수상행식이 그냥 생기는 것입니다. 덩어리와 형상을 이룰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몸뚱이를 이룰 수 있는 근거가 오온 연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육육법 연기는 시간적 흐름에 의해 앞에 것이 있어야 뒤에 것이 만들어지고 오온연기는 앞뒤 상관없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생각해 보면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이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항상 앞에 것이 있어야 뒤에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시간적인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폐합하니까 시간적인 관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오온과 같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시간적 관점과 공간적 관점을 통폐합할 수 있는 것이 12연기입니다. 일반적으로 12연기가 성립하는 근거는 차제성과 실상입니다.

 무상과 무아를 아는 것이 연기이므로 12연기가 성립하는 근거는 명입니다. 명은 비드야(vidya)이며, 실존하는 것이며, 밝히는 것입니다. 밝게 아는 것이 바로 12연기의 성립근거가 됩니다. 결국 안다는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알고 제대로 밝히고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명입니다.

연기는 산스크리트어로 pratityasamutpada 프라티이트야 삼우뜨 파다입니다. 

프라티는 --에 대하여, --을 향하여 이며, 이는 가다는 뜻입니다.  

트야는  --하여, -- 향하여 가서 이며, 쌈은 함께, 우뜨는 위로 일어남을 

뜻하며,  파다는 가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pratityasamutpada는 기대기도 하고 함께 올라가기도 하는 뜻입니다. 

연기의 발생양식, 즉 연기는 어떻게 해서 발생하느냐? 앞에서 육육법 연기는 “연생한다”이며, 오온연기는 “함께 올라온다” 라고 했습니다. 

프라티이트야 삼우뜨 파다를 설명하면 “기대기도 하고 함께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므로 한문으로 번역하면 “연기(緣起)”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12가지의 가지가 있어서 함께 올라가기도 하고 기대기도 합니다.

기댄다는 것은 앞에 것이 있어야 뒤에 것이 생기는 시간적인 관점입니다.

함께 올라온다는 것은 흐름의 개념이 아니라 함께 머물며 형상을 이룰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몸뚱이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오온 연기인 것입니다.

12연기는 육육법 연기와 오온연기를 합하므로 시간적인 관점이 작용하기도 하고 혹은 상황에 따라 공간적인 관점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12연기의 발생 양식은 기대기도 하고 함께 올라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색이라는 것

명색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색수상행식에서 색은 이 몸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명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바로 명색이 됩니다. 명색이 조금더 분화된 것이 육입입니다. 육이라 하면 육근, 육경이 떠오릅니다. 육입이라 하는 것은 육근과 육경과 육식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육육법 연기로 연결되어 촉, 수, 애 그 다음 취가 나오고 유가 나오고, 생, 노사가 나옵니다. 이제까지 공부한 것에 몇 가지만 첨부해 보니까 바로 12연기가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서 터득한 것이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12연기를 끊임없이 반복해 가니까 왜 태어났는가 하는 그 다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몸뚱이가 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거꾸로 생각해 올라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아난이 그냥 말로만 할 때는 쉽다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그런 말 하지마라고 한 것이 태어나고 난 다음에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깊은 명상에 잠겨 본질에 대해서 깊이 관조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내가 느낀 것만큼 내 것이고, 아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산은 멀리서 볼 때 울창하지만 산속에 들어가 보면 그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산을 나와 보면 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산속에 들어갔을 때 다르고 산속을 빠져나와 전체 윤곽을 볼 때 다른 것처럼 진리도 전체 윤곽을 볼 때 진리를 본 듯합니다. 비를 아무리 쳐다봐도 비의 본질을 잘 알 수 없는데 그 비를 흠뻑 맞으면 비의 본질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산속에 깊이 들어가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는 그 자체가 오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양면성으로 내가 알면 알 수록  삶은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불교가 좋은 것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본질을 명쾌하게 밝히기 때문입니다. 명쾌하게 밝힌 것에 종교적인 틀을 씌운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무명이라는 것

생으로부터 시작했을 때 태어나는 것 다음에서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남 다음엔 왜 유인가? 이 존재를 이해하는 것 보다 거꾸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무명으로부터 출발해 봅시다.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무명으로부터 출발해 봅니다. 오온의 색, 수에서 무엇이 나왔습니까? 모르는 것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불안입니다. 그 불안을 극복해가는 방법은 자기화하는 것입니다. 자기화라는 것은 상대방도 주위도 자기라고 인식함으로써 변화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작용의 뿌리가 불안의 근거입니다. 근본적으로 자기화하는 이것이 바로 불안입니다. 불안이라 하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움직임입니다. 불안이라는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을 막아 자기에게로 끌어다 붙이는 행을 만들어냅니다. 명의 속성은 바로 성성적정입니다. 고요함이 잠들어 있고 죽어 있는 고요가 아니라 끝없이 깨어있는 고요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표현할 때 성성적적이라 합니다. 명의 속성은 성성적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은 근본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이 불안과 공포가 결국은 자기화로 만들어갑니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움직임이 있고 행동이 있어 결국은 무명이 행을 만들어 냅니다. 


행이라는 것, 상스카라(samskara) 

무명 다음에 오는 행은 바로 변화를 막으려는 결합작용입니다.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결합행위가 바로 행입니다. 무명이 없으면 행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무명이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만들었듯이 무명 때문에 행이 발생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시고 난 다음 제일 먼저 갈파한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 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 속에는 어마어마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연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연기의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행이 있음으로 무명이 있다. 이것이 없음으로서 저것이 없어지고, 무명이 없음으로 행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외우고 있는 네 줄의 연기 내용이 12연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연기법이 있습니다.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는 것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것의 이것저것은 12연기의 열두 가지를 전부 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12연기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연기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무명이 있음으로써 행이 있는 것을 연기라 하는데 이것은 기대기도 하고 함께 올라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행은 상스카라(samskara)라 하며 ‘존재가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결합행위’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행과 무명이 함께 올라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기면 무명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없어져버리고 행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서 제일 힘든 부분은 처음입니다. 중간 부분은 비교적 쉽습니다. 우리는 처음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불교의 뿌리가 되는 연기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로 이것과 저것을 지칭하는 것은 바로 12연기의 열두 가지의 내용입니다. 12연기만 제대로 알면 이생에서는 잘 사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도 얻어 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식이라는 것, 뷔즌야나(vijnana)

식은 결합된 것(행)과 결합되기 전의 것(무명)을 완전하게 다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온에서는 식으로 끝나버리지만 12연기에서는 식 다음에 

무엇인가(명색) 나타나 식에 의하여 함께 올라갑니다. 

식識(Vinnana)은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 즉 인식작용 또는 인식판단의

주관으로 6식을 말합니다. 

행이 있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결합된 것, 즉 불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인식을 형성해야 되는데 이때 새로운 식이 발생합니다. 이 식은 6근과 6경이 부딪힘으로 생기는 식입니다. 식은 행이 결합된 것입니다. 결합되기 전은 무명으로 행과 무명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식입니다. 

식은 뷔즌야나(vijnana)라 하며 ‘변화의 전후법을 다르게 인식하는 분별작용’입니다. 식의 근본 속성은 모든 것은 항상 다르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똑같이 인식하는 것은 없습니다. 


수백 명 수천 명이 어떤 하나의 현상을 볼 때 그것을 똑같이 인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자기에게 누적되어 있는 업의 형태만큼 식을 인식합니다.  이 식이라는 것은 결합된 것, 행과 결합되기 전의 것, 무명을 완전히 다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온에서는 색, 수, 상, 행, 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이 식이 오기까지는 색, 수, 상, 행이 있어서 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식이 있기까지는 앞에 색부터 시작해서 색, 수, 상, 행, 식 까지 생기는 것이 식입니다. 오온에서의 식이 제일 먼저 시작해서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만약 오온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난 후의 식이라면 식이 저 마큼 일찍 나오지 않습니다. 무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식이 생깁니다. 오온에서의 식은 끊임없이 색, 수, 상, 행, 식으로 식이 행 다음에 와버립니다. 그러니까 오온이라는 것은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식이 오는 것입니다.

좀 더 거시적으로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색, 수, 상, 행, 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의 이 식이 오온을 잘 이해하고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식이 생기고 난 다음 이 식에 의해서 태어나기 전에 어떤 식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와 같은 식이 있어서 이 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모여집니다. 


명색, 名色(nama-rupa)

명색이라 할 때 이 몸뚱이가 색이고 명은 정신입니다. 정신과 육신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식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만큼 명색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명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고 색은 물질적인 것입니다. 모든 색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름은 색이 사라져도 남아있습니다. 모든 색이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형상이 있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선생님은 이름이 홍길동입니다. 홍길동 선생님을 지금 이렇게 알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을 홍길동으로 압니다.홍길동은  어떻게 생겼다 등등 이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홍길동은 없어져도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남습니다. 


그래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그때 홍길동 선생을 떠 올리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이생이 끝나 다음 생에 가더라도 한 번 인식 한 것은 내 속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한 번 본 것은 다 저장되어 있습니다. 

색이 사라져도 인식은 내 안에 남아있습니다. 사과를 보면 침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색은 사라져도 이름은 남아서 그 이름만 들어도 형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색이 식과 함께 떠올려집니다. 식과 명색이 함께 몸뚱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태아가 엄마 몸속에 있을 때 처음에는 형체도 없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체를 만들어갑니다. 형상을 만들어가듯이 명색이 육입을 만듭니다. 정신밖에 없던 것이 이제 구체적인 형상인 육입이 만들어집니다. 


육입이라는 것, 六入(salayatana)

육입은 육근으로 하여금 육경을 느끼게 하는 환경입니다. 

육입은 안이비설신의하고는 다릅니다. 그런데 분명 안이비설신의는 아닌데 안이비설신의가 나타날 수 있는 근거가 육입에서 생깁니다. 

6근인 안이비설신의는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맛을 볼 수 있는 인식기관, 들을 수 있는 인식기관, 볼 수 있는 인식기관,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형성, 이런 것들이 다 명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육입단계입니다. 

육입이 만들어지면 촉을 느낄 수 있는 단계가 됩니다. 육입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육입 중에서 보는 기능이 없는 동물은 형상을 볼 수 없는 동물이 될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없는 동물은 들을 수 없는 동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입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고등동물인 인간과 포유류입니다. 또 동물들의 진화속도에 맞춰 어떤 동물들은 네 가지 혹은 세 가지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 중에 육입을 넘어서는 것은 없습니다. 


촉이라는 것, 觸(phassa)

육입이 만들어지고 나면 주위에 있는 것과 부딪침으로써 촉이 일어납니다. 여섯 가지 인식할 수 있는 기관이 명색으로부터 진화되어 육입이 만들어지고 이 육입을 통해서 부딪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촉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촉은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근본출발이 바로 촉입니다. 그래서 6근과 6경과 6식이 부딪혀서 촉이 만들어집니다.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가 바로 촉입니다. 촉의 단계에 오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깨뜨리고 앞에 선행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합니다. 6경과 6근과 6식이 항상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새롭게 부딪침이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가 촉이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항상 머릿속에 한 번 일어났던 것은 다 기억합니다. 

그러나 세포들도 점차 늙어가고 생각이 많이 축적됨으로 인해 이것이 일어났던 것인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지, 있었던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자동차 문을 닫아놓고도 자동차 문을 내가 닫았는지 안 닫았는지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차문을 닫아놓고 확인합니까? 나이든 사람만큼 누적되지도 않았고 신경세포들이 깨어지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이 분명합니다. 


어렸을 때 한 번 들었던 것은 죽을 때까지 기억을 합니다. 나이가 50줄 넘어서면 집 단속을 해놓고도 가스 밸브를 잠근 것인지 어떤지 불안하여 다시 집에 가서 확인하곤 합니다.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가 촉이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머릿속에 한 번 일어났던 것은 다 기억합니다. 그러나 세포들도 점차 늙어가고 생각이 많이 축적됨으로 인해 이것이 일어났던 것인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지, 있었던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촉은 어떻게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다가 죽는 단계, 하나의 상태가 새롭게 바뀌는 과정이 촉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촉에서 기억들이 깨어지는 것은 살아 있다가 죽는 것이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못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있었던 것을 기억 못하는 것이 바로 촉 때문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생각을 가라앉혀 보세요. 번잡하게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을 가라앉히면 전생도 기억날 수 있고 전전생도 떠오를 수 있습니다. 깨어졌던 것은 다시 재구성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이라 하는 것은 촉이 깨어져서 깨어지기 전의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힘에 의해 얼마든지 내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전생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진 촉은 끝없이 나를 정화시킴으로써 재구성하여 전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라는 것, 受(Vedana)

촉이 있고 난 다음엔 항상 수가 일어납니다. 느낌이 있고 나면 애욕이 생깁니

다. 촉과 수와 애에서 시간연기는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12연기는 여기서도 계속 상황이 이어집니다. 

눈으로 TV 속의 김태희를 본다고 합시다. 근이 경으로 나아가 즉 눈으로 김태희를 보는 순간 촉이 이루어지며 항상 느낌, 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수가 구체화 되면 애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수에서 알아차림으로 느낌을 정제시키고 객관화 시키면 애욕으로 넘어가지 않는 자기화 되지 않은 객관적인 애를 일으키게 됩니다. 예쁜 데, 마음에 드는 데 등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이 어떤 형태로의 형태인 상을 만들어 저장되며 식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애욕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의 단계에서 느낌을 알아차려 애로 넘어가는 회전을 멈추게 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때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의 공부입니다. 먼저 편안하게 합장한 자세로 눈을 지긋이 감고 오른발을 들 놓고 다음 왼발을 들어놓고 교대로 합니다. 이때 생각을 들어나가는 발 끝에 모으며 발을 듬듬듬 나감나감나감 논논놈 하면서 발을 들고나가고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되면 호흡에 생각을 모으고 알아차리고, 다음은 일어나는 모든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알아차림으로 느낌은 연속되지 않고 멈추게 되어 애로 넘어가는 회전이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애라는 것, 愛(Tanha)

애욕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형상에 대한 애욕, 감정에 대한 애욕으로 결국 취를 만들어냅니다. 애욕은 자꾸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합니다.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애욕에 의해 물질도 내것으로 만들고 싶고 감정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취합니다. 애욕이 생김으로써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애愛(tanha)는 느낌과 감정의 결과로 생기는 갈애이며, 느낌에 의해 좋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갈애가 생깁니다. 

애는 욕애, 유애, 비유애가 있습니다. 

욕애는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욕망이며, 유애는 인간의 정의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욕망으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비유애는 그 밖에 일어나는 생명에 대한 욕망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합니다. 이것은 순간의 윤회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처나 아라한이 아닌 모든 생명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끝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을 그대로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좋은 느낌을 원합니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부귀영화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부귀영화가 와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부귀영화를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돈, 사랑, 명예, 미모, 술, 담배, 좋은 집과 화려한 의상, 이러한 것들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알아차림)이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 두 가지가 소멸되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하여 미래에 태어날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또 눈으로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났을 때 미워하거나 싫어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모르고 계속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갈애가 생긴 것입니다. 계속 미워한다는 것은 미워하는 것을 좋아해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좋아서 계속합니다. 싫으면 어떤 것도 계속하지 않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쳤을 때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을 좋아해서 더 좋은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두 번째 갈애는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더 예뻐지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것은 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하고 싶은 욕망을 가리킵니다.


취라는 것, 取(upadana)

취는 산스크리트어로 압어다나(upadana)입니다. 다나dana는 ‘주다’의 뜻입니다. ‘어a’가 붙으면 대부분 부정의 뜻입니다. 주다에 어가 붙었으니까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입니다. 압up은 ‘가까이’ 라는 뜻입니다. 취라는 것은 가까이에서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애욕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애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고 몸에 부딪치고 가까이 있는데서  일어나서 ‘취’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이 애라는 것은 6근을 통해서 인식되어 애욕이 생기고 애욕에 따라 자기에게 좋은 것은 자꾸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취가 생깁니다.


유라는 것, 有(bhava)

취가 생기고 나니까 유가 옵니다. 유는 욕망이 충족되는 행입니다. 결국 존재라 하는 것은 유로 표현됩니다. 취가 이루어짐으로써 가까이 있는 것을 자꾸 자기 것으로 하려는 유가 옵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유가 되는 것이고 살아있음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하고 새로운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유가 됩니다. 

유라는 것은 욕망이 충족되는 행입니다. 존재는 바로 유로 표현됩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유가 되는 것이고 살아있음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하고 새로운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유가 됩니다. 


유에는 생유, 본유, 사유, 중유가 있습니다. 

생유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며, 본유는 생에서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것이며, 사유는 삶에서 상태가 가장 급격하게 바뀌는 죽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중유는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받기까지의 기간 동안의 삶의 형태입니다.   

불교의식에는 49재가 있습니다. 죽고 난 다음 중음신으로 있다가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쳐 다시 몸을 받는데 49일이 걸립니다. 중음신으로 있는 기간이 49일입니다. 머리의 윗부분인 백회혈은 생명기운이 들어오는 문이며, 발바닥은 생명기운이 나가는 문입니다. 숨을 거두고 난 다음 몸에 있는 모든 생명기운이 빠져나가는데 3일이 걸립니다. 

유는 생명이 머무는 것이며, 행을 하며 다시 업을 짓게 됩니다. 명색을 갖고 있는 본유에서만 행을 하게 되고 행에 대한 업이 쌓이게 됩니다. 


생이 라는 것, 生(jati)

유의 업장으로 미래에 받게 될 과보가 생입니다. 즉 죽음 후에 오는 내세의 

출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이 됩니다. 

생이라는 것은 각각의 중생 부류에 있어서, 각각의 중생이 생겨나는 것이며, 

출생하는 것으로 출산, 탄생, 여러 가지 구성 요소가 출현하는 것이며,  모든 

기관이 완비되는 것입니다.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옥은 이기심과 부정적인 마음이 100%인 중생으로 살생을 한 과보로 태어나고 화생으로 태어납니다. 오직 고통만이 있는 세상입니다. 지옥중생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업만큼 과보를 받고 살다가 죽는 곳입니다. 악업이 다하면 과거에 행한 선업의 과보에 따라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축생은 어리석은 마음과 탐욕이 많은 과보로 태어나고 태생과 난생으로 태어납니다. 축생은 언제 다른 동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많은 곳이며 소와 말이나 낙타와 같이 무거운 짐을 평생 날라야 하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수명은 축생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며 과보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축생의 과보가 다하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애견용 개는 집안에서 같이 살게 됩니다. 개를 잘 돌보는 것은 좋지만 간혹 부모님에게 어떻게 하나 한번 떠올려보세요. 주인이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는 것에 매여 본인도 개의 습성과  같이 되어갑니다. 다음 생에 개의 몸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주고 받고 부딪치면서 성숙되며 수상행식의 행의 과정을 거쳐 건전하고 발전적인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귀는 빨리어로 뻬따peta 라고 하는데 행복과는 멀리 떨어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귀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비비면 나오는  지니같이 매우 큰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여 항상 배가 고픕니다. 그들은 숲이나 강, 계곡, 무덤 같은 더럽고 음침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인색하고 집착이 심한 과보로 태어나며 화생으로 태어납니다.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고 과보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육도 윤회에서 네 가지 악처 중의 하나인 아수라는 성냄의 과보로 태어나며 화생의 과보로 태어납니다. 여기에도 행복은 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수라도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자신의 과보만큼 살다가 다른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다섯 번째 태어남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악처와 천상의 중간에 잇습니다. 그래서 사악처의 고통과 천상의 행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계를 지킨 과보로 태어나게 됩니다. 태생으로 태어나며 수명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자신의 과보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죽을 때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에 의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서 다음 생이 결정 됩니다. 공덕을 쌓아 업에 오염되기 전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사악도나 천상에도 과보에 따라 수명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에 공덕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선업의 공덕을 쌓아 부처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노사, 老死(jara-marana)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이루어집니다. 죽음이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생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고뇌가 여기에 속합니다. 살아가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늙음. 즉 변화의 끝이 사, 죽음이며, 죽음 이후에는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서 12연기가 됩니다. 12연기를 인식하게 되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인 인과응보를 알게 됩니다. 인과응보의 기본 개념은 착한 행위를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짓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착한 일 하면 착한 과보 받고 나쁜 일 하면 나쁜 과보를 받을 것인가? 12연기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생의 문제가 아니라 삼세 윤회를 하는 동안에 생긴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2연기가 어떻게 삼세를 윤회하면서 선과 악을 인식하고 어떻게 판단하는 것인지 공부하게 됩니다. 

화두를 들고 견성성불한다는 것은 바로 근본 무명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경전공부를 하거나 염불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봉사를 하는 것은 바로 이 취에 대해서 가까이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계정혜를 터득함으로써 취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취가 절제되려면 거꾸로 애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수, 촉으로 돌아갑니다. 무명까지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직행버스이고 염불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취부터 시작해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완행버스와 같은 것입니다. 완행버스는 정류장마다 섭니다. 그래서 완행버스는 목적지까지 못가도 남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직행은 빨리 가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남는 것이 있지만 목적지에 도달 못하며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선은 잘 하면 엄청난 덕입니다. 잘못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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