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강 12연기의 성립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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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17강 12연기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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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0,695회 작성일 21-07-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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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니아의 마법에는 세계는 질서정연하며 몇몇 자연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도 시간과 공간의 운동에서 중력을 전자기력과 통합하는 통일장이론으로 설명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명이 다 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는 윤회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기를 앎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차제성과 실상 

차제성(次第性)은 차례로 선행하는 것에 의하여 지금의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회상하면서 

“그 날 초저녁에 제 1의 지혜를 얻어 무명을 벗어나 어둠을 깨뜨리고 연기를 깨달았다. 나는 그 하나하나의 상(相) 및 상세한 상황과 더불어 허다한 과거의 생애를 상기하였다. 이것이 내가 초경(初更)에 접어든 밤에 도달한 제1의 명지(明知)이다. 여기에 무명(無明)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긴 것이다. 암흑은 소멸하고 광명이 생겼다.

그 다음 제2의 지혜로 나고 죽는 인연을 명상하고 사람의 생사와 그 업의 흘러가는 상태를 아는 천안통을 얻었고, 나아가 번뇌가 멸진하는 지혜를 얻었고 고의 원인과 결과 고의 멸과 고의 멸에 도달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았다.

그 다음으로 제3의 지혜로 애욕과 무명에서 벗어나 누진통을 얻어 해탈하였다. 해야 할 일을 다 성취하셨다. ”하셨습니다. 

연기를 구성하는 요소는 12가지입니다.  

과거 2인은 무명(無明), 행(行)이며, 현재 5과는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이며, 현재 3인은 애(愛), 취(取), 유(有)이며, 미래 2과는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1. 무명(無明), avijja (그림 대체)

어리석고 무지한 맹목적인 삶이며,  무아와 무상과 연기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근본 번뇌로서 일체의 미혹, 집착, 번뇌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전생의 행위의 결과가 무명입니다.  

즐거운 형상, 좋은 소리, 맛있는 음식 따위의 감각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존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 때문에 생깁니다. 여기서 무명은 말에게 푸른색 안경을

씌워서 마른 풀을 푸른 풀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그것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무명은 커다란 미혹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겁의 윤회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도달한 중생은 다시 생존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윤회의 시작은 무명입니다. 이 때의 시작은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원인이 되는 조건을 말합니다. 언제라고 하는 시간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명은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1.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2.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3. 괴로움의 소멸을 모릅니다.

4.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팔정도, 중도를 모릅니다.

5.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릅니다.

6. 죽음 이후의 미래 생을 모릅니다.

7. 과거 미래를 모릅니다.

8. 12연기의 성품인 원인과 결과를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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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行(sankhara)

행行(sankhara)은 잠재적 형성력. 만들어진 것(유위)을 만들어내는 힘으로 

무지에 의한 행위로(업장) 새로 하게 되는 행동(업)입니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는 것입니다. 12연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연기의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어지고 무명이 없음으로 행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일어납니다. 무명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행위를 하게 합니다. 무명의 상태에 따라서

일어나는 행도 다릅니다. 연기가 회전할 때는 무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시작해서 무명의 상태에 따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때 행은 업의 형성

을 말합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업의 형성력, 마음의 의도, 신구의 삼업을 통틀

어 행이라고 말합니다. 보시나 계율을 지켜 내생에서 보다 나은 지위로 태어나

고자 하는 의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명으로 인하여 선업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으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행위를 하면 

바로 불선업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명으로 인하여 불선업이 일어남을 말합니

다.


3. 식識(Vinnana)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느낌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앞선 마음이 사라지면 뒤에 마음이 새로 일어납니다. 새로 일어난 마음은 있던 마음과 다른 마음입니다. 

무명과 행은 과거의 마음이지만 식은 현생을 시작하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이때의 식은 환생이 아니고 재생연결식입니다. 만약 환생이라고 말한다면 전생의 그 마음이 그대로 계승되어 태어나는 마음이 되겠지만 재생이라고 하면 전생의 마음과 이생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생의 마음은 이미 끝나 없어지고 그 마음에 담긴 과보가 이생에 연결되어서 새로운 마음이 생긴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과보라는 것은 다르게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생에서 돈 천만 원을 박에게 빌려 주었다면 다음 생에 박에게 받는 것은 돈 천만 원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천만 원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4. 명색名色(nama-rupa) 

명색은 정신적인 것의 명과 물질적인 것의 색을 뜻합니다.  

모든 색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름은 색이 사라져도 남아 있습니다. 

명색이 식과 함께 떠오릅니다. 

명색名色(nama-rupa)은 생각을 일으키는 환경으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 인 오온으로 명은 수(감수작용), 상(표상작용), 행(형성작용),

식(식별작용)을 나타내며, 색 은 색(물질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명색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새로운 태어남이란 재생연결식이 생기면 반드시 몸과 마음이 생깁니다. 물론 무색계에 태어나는 천인은 마음만 있지 몸은 없습니다. 하지만 31개의 세계 중에 무색계가 아닌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세계에서는 반드시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고 태어납니다. 


5. 육입六入(salayatana)

육입은 안이비설신의가 나타날 수 있는 근거를 말합니다.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인식기관, 맛을 볼 수 있는 인식기관, 들을 수 있는 인식기관, 볼 수 있는 인식기관, 통합적으로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의 형성기관 등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육입에 의하여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여섯 가지의 법으로서 윤회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즉 연기의 회전 고리를 연장시키고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맞이해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만나서 여섯 영역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윤회를 한다는 것도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가 느낌으로 일어나서 그 느낌을 갈애로 발전시킬 때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결코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몸과 마음이 생기는데, 이때의 생명들은 거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몸과 마음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역시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지극히 희박합니다. 여기서 더 희박한 것은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6. 촉觸(phassa) 

촉은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이며, 육입과 함께 촉이 떠오릅니다. 

촉觸(phassa)은 감각기관의 느낌의 결과로 6근과 6경과

6식의 접촉으로 이루어집니다. 

눈이 형상과 접촉하고, 귀가 소리와 접촉하고, 혀가 맛과 접촉하고, 몸이 감촉과 접촉하고, 마음이 마음의 대상과 접촉합니다. 이때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아는 마음(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눈이 형상과 접촉하여 다시 아는 마음과 접촉합니다. 귀가 소리와 접촉하여 다시 아는 마음과 접촉합니다. 혀가 맛과 접촉하여 다시 아는 마음과 접촉합니다. 몸이 감촉과 접촉하여 다시 아는 마음과 접촉합니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과 접촉하여 다시 아는 마음과 접촉합니다.


7. 수受(vedana) 

수受(vedana)는 접촉의 결과로 발생되는 느낌, 감정, 희노애락 등을

말합니다. 

촉이 있고 난 다음엔 항상 수가 일어납니다. 느낌이 있고 난 다음엔 애욕이 생깁니다. 촉과 수와 애에서 육육법 연기는 끝나버렸습니다.

눈이 형상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눈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귀가 소리와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귀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코가 냄새와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코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혀가 맛과 접촉하여 이는 마음이 일어날 때 혀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몸이 감촉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몸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맛의 감각 접촉 뒤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따라옵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좋아하지만, 나쁜 음식이나 쓴맛은 싫어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느낌은 덤덤합니다. 덤덤한 느낌이지만 그 먹는 기회는 선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운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집착에 이릅니다. 그러나 매 순간 정신과 물질에 주시하여 계발된 집중을 하는 수행자는 모든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해서 알게 됩니다.


8. 애愛(tanha)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합니다. 이것은 순간의 윤회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처나 아라한이 아닌 모든 생명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끝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을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좋은 느낌을 원합니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부귀영화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부귀영화가 와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부귀영화를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갈애입니다. 돈, 사랑, 명예, 미모, 술, 담배, 좋은 집과 화려한 의상 이러한 것들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있는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느낌과 갈애, 두 가지가 소멸되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하여 미래에 태어날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났을 때 미워하거나 싫어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모르고 계속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계속 미워한다는 것은 미워하는 것을 좋아해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좋아야 계속합니다. 어떤 것도 싫으면 계속하지 않습니다.

 

9. 취取(upadana) 

집착을 빨리어로 우빠따나라고 하는데, 강렬하다는 뜻의 ‘우빠’와 움켜쥐다는 뜻의 ‘아다나’의 합성어입니다. 집착은 강력하게 움켜쥐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고기가 석쇠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집착 하지는 않습니다. 앞서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 거듭될 수록 집착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좋아서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갈애라면, 보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로 발전한 것이 집착입니다. 갈애는 갈애로 그치지 않고 집착을 하게 되며, 집착은 집착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인 업을 생성합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은 하나의 발전 단계의 과정으로 보아야합니다.


10. 유有(bhava)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업의 생성을 빨리어로는 깜마바와라고 합니다. 깜마는 업을 말하고 바와는 존재, 유有,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뜻과 생성, 윤회, 다시 태어남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깜마바와를 여기서는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업유業有라고도 합니다.

업은 먼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 행위를 하는 결과로 갑니다. 이것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선업과 불선업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데,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써 연기의 조건입니다. 이 같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은 업의 존재를 받아들여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이 마음의 의도이기 때문에 물질에 속하지 않고 정신에 속합니다. 업이 행이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에 속합니다.


11. 생生(jati)

생은 유의 업장으로 미래에 받게 될 과보입니다. 죽음 후에 오는 내세의

출생을 뜻합니다. 


생生(jati)은 각각의 중생 부류에 있어서, 각각의 중생이 생겨나는 것,

출생하는 것, 출산, 탄생, 여러 가지 구성 요소가 출현하는 것, 모든 기관이

완비되는 것이 생이다라고 상응부경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문으로 생生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래의 태어남을 뜻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후에 태어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2연기에서 업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형성된 업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할 때 행이 바로 업입니다. 다음은 현재에 생성하는 업입니다. 이것이 업의 생성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업이 있는 것처럼 12연기에서 생이라고 하는 태어남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현생의 태어남입니다. 행을 원인으로 한 재생연결식입니다. 이때의 재생연결식은 한 일생을 시작할 때만 있고, 그 다음에는 그냥 식으로 바뀌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태어남입니다. 이것은 현재 업의 생성이 있은 뒤에 이 과보가 미래의 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생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12연기에서의 태어남은 현생의 재생연결식이 있고, 다음에 생이라고 하는 미래의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12. 노사老死(jara-marana) 

노는 삶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고뇌이며, 사는 생에서 출발한 변화의

끝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태어남은 부인할 수 없는 엄숙한 진실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노병사라고 할 때 12연기에서는 생과 노사만 있지 병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노병사라고 말할 때 병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있는 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사실 정신과 물질은 병의 먹이이며, 죽음의 먹이입니다. 나무가 있는 한 벌레가 있듯이, 정신과 물질이 있는 한 병과 죽음이 뒤따릅니다.

  

12연기의 회전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고, 무명을 제거하면 행이 제거되고, 

행으로 인하여 식이 있고, 행을 제거하면 식이 제거되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이 있고, 식을 제거하면 명색이 제거되고,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이 있고, 명색을 제거하면 육입이 제거되고, 

육입으로 인하여 촉이 있고, 육입을 제거하면 촉이 제거되고, 

촉으로 인하여 수가 있고, 촉을 제거하면 수가 제거되고, 

수로 인하여 애가 있고, 수를 제거하면 애가 제거되고, 

애로 인하여 취가 있고, 애를 제거하면 취가 제거되고, 

취로 인하여 유가 있고, 취를 제거하면 유가 제거되고,

유로 인하여 생이 있고, 유를 제거하면 생이 제거되고, 

생으로 인하여 노사가 있고, 생을 제거하면 노사(죽음)가 제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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